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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백두대간의 지맥

임천지맥 2구간(지안재~오도봉~삼도봉 ~투구봉~팔량재~오봉산~연비산~도장마을)17.65km

 

지리산이 산방기간에 묶여 비집고 들어갈만한 틈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고...

이번 주말 해밀 대간팀이 복성이재 ~ 중고개재로 진행을 한다고 합니다.

해밀 대간팀과는 지맥을 만나는 구간에서는 꼭 참석하여 함산하기로 했으니 이번 주말엔 필히 대간에 들어야겠습니다.

봉화산 부근에서 임천지맥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대저 지맥枝脈이라 함은 ①대간, ②정맥 그리고 ③자신보다 상위등급의 지맥에서 분기하는 산줄기로서 도상거리 30km 이상의 그것을 말합니다.

이 지맥의 유형으로는 합수점형과 울타리형 그리고 산줄기 형 등 세 가지 유형에 해당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발간한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 관련 내용을 인용해 보기로 합니다.

 

3. 지리산의 지맥枝脈

 

지맥은 대간과 정맥의 하위개념이다. 즉 대간大幹정맥正脈지맥枝脈이니 지맥은 산줄기 계급 체계의 제일 하위에 있는 개념이다. 물론 기맥, 분맥, 단맥, 여맥도 상정할 수 있지만 너무 세분시키는 것이기도 하며 논란만 부추기는 격이니 여기서는 언급을 피한다.

 

지맥이라는 계급이 붙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산줄기 요건으로 백두대간이나 정맥 그리고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지맥에서 가지를 친 줄기여야 한다. 그리고 물줄기 요건으로 그 줄기가 가지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와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합수점형)여야 하며, 마지막으로 산줄기의 길이 요건으로 그 도상거리가 30km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들이다.

다만 요건의 경우 산줄기를 조금 더 유용하게 쓰기 위하여 특별한 경우에는 예외를 두는 바, 가령 관련된 물줄기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울타리형)이나 반도의 모양새를 가진 땅에서 호수나 강 혹은 바다 등으로 진행하는 산줄기(산줄기형)의 경우 등이 그것이다.

즉 정리하자면 합수점형, 울타리형, 산줄기형 등 세 가지가 유형에 해당되어야 한다. 좀 어려운 내용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산줄기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니 차근차근 살펴보자.

 

합수점合水點형의 예 

 

 

위 개념도는 백두대간 지리산 입구인 여원재에서 고리봉을 지나 만복대 ~ 반야봉으로 진행하는 대간능선과 대간길의 만복대 바로 앞에서 가지를 쳐 밤재 ~ 견두산 ~ 형제봉을 지나 서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33.2km의 가지줄기 개념도이다.

이를 위 지맥의 3요건에 대입시켜본다.

보다시피 이 가지 줄기는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줄기이니 요건에 합당하다. 그리고 이 줄기가 백두대간 만복대 부근에서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 서시천이라는 물줄기가 발원을 하는데, 이 서시천이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물줄기인 섬진강과 합류되는 합수점인 개념도 ‘A'의 곳에서 이 줄기의 맥이 잠기게 되니 이 역시 요건에 합당! 그리고 이 가지줄기의 도상거리는 33.2km가 되므로 기본 요건인 30km를 넘으므로 이 역시 요건 에 합당하다. 그러므로 이 가지줄기는 枝脈이라는 계급을 얻게 되고 그 이름은 강 이름인 서시천을 따서 서시지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이는 고유명사가 된다.

 

울타리형의 예

합수점형에 비해 설명이 조금 복잡해진다. 산줄기가 여러 개 나오긴 하지만 원리는 같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 

 

 

좌측 개념도의 주줄기는 역시 백두대간이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백두대간에서 큰 줄기인 한남금북정맥이 가지를 쳐 나가는 모습이다. 그 가운데에서 보청천이 발원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정맥 이름이 암시하듯 이 산줄기는 금강의 북쪽을 진행한다. 그러므로 이 보청천이 10대 강 중 하나인 금강과 만나는 합수점을 보면 된다.

그런데 이 보청천과 금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두 개의 산줄기가 잠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산경표 상으로는 팔음지맥과 금적지맥이 그것이며 대한산경표 상으로는 보청지맥과 보청북지맥이 그것이다.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필자가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대한산경표의 이름으로 얘기를 이어가겠다.

 

똑같은 물줄기로 들어가는 두 산줄기의 우선권은 그 산줄기가 속한 주산줄기의 계급이나 세력에 따른다. 이 경우 백두대간정맥이므로 이 물줄기는 백두대간 몫이다. 따라서 보청천과 금강의 합수점으로 잠기는 줄기는 대간에서 분기한 줄기이므로 의 요건을 충족하고 합수점으로 갔으니 이 역시 의 요건을 충족한다. 마지막으로 이 가지 줄기의 도상거리가 57.7km가 되니 지맥이라는 계급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이 지맥의 이름은 물줄기 보청천의 이름을 따 보청지맥이라 명명한다.

 

이렇듯 합수점형인 이 보청지맥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보청천으로 들어온 다른 줄기가 문제이다. 즉 이 줄기 역시 한남금북정맥이라는 정맥에서 분기 되었으므로 요건은 충족하며 이 산줄기의 도상거리가 약 49.6km가 되므로 이 역시 요건을 충족한다.

다만 합수점은 합수점인데 주산줄기가 아닌 부산줄기이기 때문에 위 보청천에 밀리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보청천의 북서쪽 울타리 역할을 하므로 이런 경우는 지맥의 유형 울타리형으로 보아 지맥에 편입시키기로 한다. 엄격한 해석보다는 산줄기를 유용하게 사용하자는 취지이다. 따라서 보청천의 북쪽으로 잠기는 산줄기이므로 이름은 보청북지맥으로 명명한다.

 

산줄기형의 예

위에서 반도의 모양새를 가진 땅에서 호수나 강 혹은 바다 등으로 진행하는 산줄기의 유형을 산줄기형이라고 분류한다고 했다. 이는 혹시나 합수점형이나 울타리형으로 분류될 경우 모두 잔가지 가령 여맥이나 단맥 등으로 처리되어 지맥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게 됨에 따라 선조들이 물려주신 이 소중한 산하를 유용하게 선용하지 못하는 불합리함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라 이해하면 된다.

산자분수령의 대원칙인 합수점으로 가지 않는 특수한 경우니 이를 산자분수령의 예외 유형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이나 하천을 동원할 수도 없으니 물줄기 이름을 붙이기가 곤란하다. 따라서 그 산줄기가 마무리되는 지역의 행정구역 이름을 따서 명명하기로 한다. 

 

 

물론 이 경우도 의 합수점 요건에만 예외가 되기 때문에 , 조건은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위 참고도의 경우 금북정맥의 구수산에서 3.2km 진행한 곳에서 가지를 쳐 태안군 이원면 내리의 후망산 부근에서 잠기는 산줄기는 이원면의 이름을 따서 이원지맥이라 하고 같은 방법으로 금북정맥의 솔개재에서 1.2km 진행한 곳에서 가지를 쳐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 부근에서 잠기는 산줄기는 대산읍의 이름을 따 대산지맥이라 명명하기로 한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05쪽 이하

 

이 정도 자세히 설명해 주는 책은 절대 없죠?

하긴 이 원리를 제대로 아는 분들도 우리나라에 송가락으로 꼽을 정도니까....

지맥을 이해하면 산줄기 산행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별론 나라 안의 산이 제대로 보입니다.

앞사람 궁둥이만 보고 다니던 산행이 갑자기 옆에 흐르고 있는 산줄기며 앞뒤로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산줄기가 보인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산줄기들은 다 한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지맥은 지맥이나 정맥 그리고 대간으로 모이고, 정맥은 다 대간으로 모인 다음 그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은 모두 백두산을 향해 올라간다는 겁니다.

이런 아주 간단한 얘기 한 마디가 우리나라 산의 모든 걸 한 줄로 얘기해 줍니다.

 

오늘 진행할 지맥을 봅니다.

 

참고도 #1 임천지맥 (박성태 선생님의 시산경표 산경도에서 가져왔음)

 

우리나라의 모든 산줄기는 크던 작던 물줄기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정맥이든 지맥이든 그 산줄기가 분기를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사이에서 하나의 물줄기가 발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산줄기는 그 물줄기와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반드시 맥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체득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표로 만든 다음 책으로 만든 것이 산경표입니다.

그러니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일목요연하게 나타낸 표이기도 하고 이를 집대성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대한산경표니 신산경표를 얘기할 때 이런 내용들은 다 이 산경표에서 영감을 얻어 나름대로 표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신산경표의 박성태선생님의 위대함은 필설로 다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나아가 나름 이 산경표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만든 박흥섭의 대한산경표도 대단한 것입니다.

이 둘을 다 해설하는 저는?

 

오늘 걸을 임천지맥 공부를 합니다.

대한산경표에서는 임천지맥 신산경표에서는 연비지맥이라 부르는 산줄기입니다.

 

그 백두대간을 이어서 걷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쪽 백두대간이 시작하는 진부령부터 걸어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방법 즉 남진(南進).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지리산 천왕봉을 출발하여 진부령으로 진행하는 방법 즉 북진(北進) 등이 그것들이다.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되는 날 북쪽의 나머지 백두대간 구간을 이어가기 위해 두 번째 방법을 택한다. 즉 북진(北進)이다.

 

  -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9쪽 프롤로그

원칙은 남진이라는 것이죠.

간幹은 줄기요 맥脈은 거기서 분기한 가지 줄기입니다.

그러니 백두대간이 백두산을 떠나 남진을 하면서 숱한 가지 줄기를 내놓습니다.

대간이 남진을 하는 도중 설악산, 속리산을 지나 남덕유에 이르러 남동쪽으로 가지 줄기를 하나 내놓을 때 백두대간과 그 가지 줄기 사이에 물줄기 하나가 발원합니다.

그 물줄기가 바로  물줄기를 하나 함양과 산청, 진주 땅을 적시며 흐르다 낙동강에 합류되는 남강입니다.

논개의 의절이 깃들여져 있는 남강.

그런데 그 대간이 더 남진을 하다 봉화산을 지척에 두고 다시 남동쪽으로 작은 산줄기 하나를 내놓습니다.

그때 그 사이에서는 또 물줄기 하나가 발원하게 됨은 자연의 진리!

그 이름 모를 실개천은 풍천이라는 이름이 되어 아영벌을 적십니다.

물이 많으니 땅은 비옥하여 이 아영벌은 고대 가야국의 모태가 됩니다.

이 흔적이 지금 발굴되고 있는 두락리 고분입니다.

그러니 이 부근은 가야사람들이 살다가 한때에는 신라사람이 되고 다시 어느 한 때에는 백제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운봉과 인월 그리고 아영이 호남과 영남이 혼재하고 있는 인문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풍천은 산줄기를 울타리로 남쪽으로 흘러 인월에 이르러 람천에 합류됩니다.

 

람천이다. 산청군 동강마을을 지날 때까지 계속 같이 갈 람천이다. 물론 이 람천은 운봉벌을 적시다 둘레길 제2구간이 끝나는 인월에서 풍천을 만나 광천이 되고 산내에서 만수천을 만난 다음 마천에서 덕전천을 만나 임천이 된다.

 

람천은 지리산의 중심 물줄기이다

두류전지를 보면 "동천은 정령 아래에서 흘러나와 운봉읍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 광천에 합류한다. 광천은 운봉의 적산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황산을 지나 풍천에 합류한다. 풍천은 비조치에서 흘러나와 운봉현을 지나 인월역에 이르러 광천과 합류하여 남쪽의 산내동으로 흘러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이 람천의 옛 이름은 동천이었다. 두류전지는 지리산의 물줄기를 세 개로 본다. 이 동천 그러니까 람천을 첫 번째 물로 보고, 두 번째 물줄기는 수분재에서 발원하는 섬진강 그리고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청천이 되었다가 남강에 합류하는 물줄기를 세 번째 물줄기로 보는 게 그것들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63쪽

 

인월로 내려오다 보면 멀리 남덕유산에서 가지를 쳐 내려오고 있는 남강지맥과 그 앞으로 백두대간 봉화산에서 가지를 쳐 내려오는 임천지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아영벌을 적시면서 흐르는 물줄기인 풍천을 중심으로 대가야 형제 소국들이 자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아영 시가지 우측의 유곡리와 두락리에서 가야 고분군들이 여러 개 발굴된 이유도 이해할 수 있겠다. 저 풍천이 인월에 이르러 람천을 흡수하면서 임천이 되어 함양~산청으로 흐르게 됨은 지난 구간 때 살펴봤다. 즉 풍천람천임천엄천남강이 된다는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86쪽

 

이 람천이 임천이 되니 이 임천은 함양 유림면과 산청군 생초면의 경계가 되는 곳에서 남강에 흡수되는데 이 지점을 합수점合水點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산줄기는 물줄기를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조금 전 봉화산 부근에서 가지를 친 줄기와 관련 있는 풍천은 종국에는 임천이 되었으므로 이 임천이 남강과 합수되는 곳에서 이 산줄기는 맥을 다하게 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러 무명의 산줄기가 무명의 물줄기와 합수되는 곳에서 맥을 다하는 경우도 수없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30km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임천이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강인 남강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되므로 이 산줄기 또한 여기서 그 맥을 다하게 됩니다.

이 산줄기의 도상거리가 38.2km가 되므로 위에서 설시한 지맥의 조건에 맞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지맥이라는 계급을 부여해 주고 그 이름은 이 물줄기의 이름을 따 임천지맥이라 명명합니다.

이게 대한산경표의 이론입니다.

 

그런데 대한산경표의 원조격인 신산경표에서는 이를 연비산의 이름을 따 연비지맥이라 이름했습니다.

대한산경표와 신산경표의 차이점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관련되는 곳에서 다시 얘기하기로 하죠.

 

사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어쨌든 이번 주말 진행하는 해밀대간팀과 행보를 같이 하기로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봉화산 부근의 임천지맥 갈림길에서 합류하면 될 것이니 자연스럽게 제 걸음은 임천지맥을 역으로 진행하는 방향이 될 것입니다.

즉 대원들은 복성이재 ~ 꼬부랑재 ~ 봉화산으로 진행이 예정되어 있군요.

그러니 저는 복성이재에서 비조재로 이동하여 거기서 거꾸로 비조재 ~ 옥잠봉 ~ 대간으로 접속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 주 주중 산행은 답이 나왔습니다.

비조재까지 진행하는 임천지맥입니다.

지도를 보니 지안재 ~ 오도봉 ~ 삼봉산 ~ 투구봉 ~ 팔량재 ~ 오봉산 ~ 연비산 ~ 비조재가 만만합니다.

그런데 거리가 19.6km가 나오는군요.

저의 경우 귀가 시간이 있으니 원거리 산행이어서 당일치기 산행으로는 조금 무리가 되는 거리이긴 합니다.

고남님께 연락을 합니다.

OK.

이제 봄이 되었으니 고남님의 산행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니 하나라도 더 하고 싶은 욕심이 일었을 겁니다.

05:25

첫차를 타고 남원으로 갑니다.

07:08

남원에 내려 기다리고 있던 고남님 차를 타고 인월로 이동합ㅣ다.

김밥 세 줄을 사서 가방에 넣고 지안재로 갑니다.

이하 사진은 지난 번 낙동정맥을 걷을 때 타이틀을 '낙동정맥'으로 맞춰놓고 이를 정정하지 않아 잘못 표기되었습니다. 

 

지도 #1

24번 도로에서 1023번 도로로 들어오는 입구에 지안마을이 있어 지안재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보통은 오도재로 올라가는 도로의 작은 고개에 불과하여 그저 오도재로 인식되기 십상인 곳입니다.

오도悟道란 이름도 개암 강익 선생으로 인하여 얻어졌다 한다. 이 오도재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설화 하나가 전해온다. 즉 변강쇠 얘기가 그것인데 그가 땔감을 구하지 못하자 오도재에 세워진 함양을 지키는 장승을 뽑아 태우니 전국의 장승들이 변강쇠에게 병을 준다. 변강쇠는 온갖 병을 앓다 결국 죽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변강쇠의 생활 터전이 마침 팔량재 부근이기도 하니 그와 연관된 얘기겠다.

하지만 24번 도로에서 은선을 주의 깊게 보면 이 지맥능선과 오도봉에서 오도재를 지나 법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구별이 확실합니다.

지맥능선이 살아 있는 게 확실히 보인다는 것이죠.

이따 오봉산 부근에 가서 다시 보겠습니다.

 

이 길이 아주 유명하고 멋진 드라이브 코스입니다.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이따 지맥에서 가지를 친 옥녀봉801.5m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겠고....

08:13

신발끈을 다시 묶고 스틱을 펴고 자켓을 벗는 등 산행준비를 합니다.

이 지맥길이 함양군 함양읍과 휴천면의 면계가 됩니다.

고로 우틀하여 지맥길을 따르면서 함양읍과 휴천면의 면계를 따라 걷게 됩니다.

이 나무 계단은 지맥꾼을 위한 계단이 아니고,

바로 옆 조망처를 위한 계단입니다.

옥녀봉을 다시 보고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봄입니다.

북쪽 사면으로는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지맥길이지만 그래도 봄입니다.

08:23

오늘의 첫봉우리에 오르고,

08:33

그러고는 10분 뒤,

4등급삼각점(운봉415)이 있는 511.4봉에 오릅니다.

선생님의 산패가 여전하고....

 

준희 최남준

금산 정상에는 준희선생의 산패(안내판)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산줄기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준희선생이다. 대간에 부착한 이 산패는 많이 훼손되어 제대로 찾아보긴 어렵지만 정맥이나 지맥을 가면 주요 산이나 봉우리 그리고 고개에는 여지없이 준희선생의 이 산패를 볼 수 있다. 산패란 말이 낯선가? 필자는 집 대문 앞에 거는 문패에 착안하여 이를 산패(山牌)’라고 부르고 있다.

 

대간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좀 낯선 인물이긴 하다. 하지만 정맥꾼이나 지맥꾼들에게는 거의 신화적인 분으로 각인되어 있다. 부산의 유명한 산악회인 건건산악회를 이끌면서 부산 국제신문에 산행 코스를 안내했던 선생은 우리나라 산줄기 능선 곳곳에 샘을 만들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비록 뜻을 같이한 동지의 이른 죽음으로 현재는 손을 놓고 있지만 선생의 바람은 한결같다. 노익장으로 히말라야 트레킹도 마다하지 않은 선생은 성하지 않은 무릎으로 해파랑길과 지맥(枝脈) 산행에 전념하고 있다.

 

정맥이나 지맥을 진행하는 산꾼들은 준희’, ‘희준’, ‘산지킴이등의 이름으로 길을 안내해주는 산패를 봤다면 한 번쯤은 고마움을 표할 일이다. 물론 같은 형식의 다른 이름의 그것을 봤더라도 선생이 제작하여 붙인 산패라 보면 된다. 선생에 관하여는 이미 육십령을 내려오면서 샘터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84쪽

08:34

반가운 산친구를 만납니다.

작년에 175지맥을 다 마치고 대한산경표와 신산경표의 차이 나는 부분을 확인하고자 매월 한 번씩 저와 수헌님 그리고 범여님 등과 산행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여분의 말뚝?

합천 이공 묘를 지나,

09:12

지도 #1의 '가'에서 임도를 만납니다.

이 임도는 이따 팔량재를 내려서기 전 '유아숲 체험원'과 이어지게 됩니다.

우측으로는 조금 전 올라온 지맥길이 보이고 좌측 길 건너 오봉산에서 옥녀봉으로의 흐름이 보입니다.

옥녀봉 우측 뒤로는 함양의 명산 천령봉558.5m이 보이고....

우측으로 움직이니 지나온 길이 더 잘보이는군요.

우측이 지안재 건너 555.4봉인데 등로 상태가 아주 안 좋다고 하는데....

어쨌든 맥의 흐름이 잡힙니다.

09:34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며....

잡목 사이로 억지로 법화산992.9m을 봅니다.

소류지 하나를 지나면 정면 좌측으로 오도재가 보이고, 그 우측으로 법화산 갈림 삼거리봉992.9m이 보인다. 오도재에는 지리산 제1관문이라는 멋진 시설물과 산신각이 있다. 법화산은 오도재 좌측의 임천지맥에서 벗어나 있는 봉우리로 용유담의 엄천과 어울려 화산12곡으로 유명한 봉우리이지만 사실 봉우리 자체는 별 볼품은 없다.

 

저 법화산은 '묘법연화경'에서 가지고 온 말로 화산12곡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10:06

드디어 오도봉으로 올라섭니다.

이제 좀 능선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일반 등로로 지맥꾼이 아닌 이들도 많이 찾는 등로로 함양군에서 정ql를 잘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오도봉에서 마천면을 만나 이제부터는 마천면과 함양읍의 면계를 따라 진행합니다.

좌측으로 등구재에서,

삼봉산으로 올라오는 능선입니다.

삼봉산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봉우리라고 하는데....

우틀합니다.

좌로....

앞으로는 삼봉산에서 흘러내리는 줄기가 등구재를 넘어 우측 백운산904.1m에서 좌측 금대봉851.5m으로 흐르고 있고 임천 건너 창암산924.9m과 그 뒤로 지리의 주릉입니다.

아!

나는 왜 저 지리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일까!

이제 지리 좀 그만 다녀도 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들어야만 할까?

우측 중앙이 천왕봉.

그 좌측으로 덕천지맥은 물론 그 좌측으로 새봉에서 갈라진 와불산도 명백합니다.

고남님과 직년에 걸었던 그 길을 추억합니다.

등로는 이른 봄이라 그런지 푹신푹신한 게 발에 닿는 감촉이 좋습니다.

이걸 어떻게 들고왔는지...

멀리 견불사도 보고 와불산의 형태도 그립니다.

함양독바위라고도 불리는 독녀암의 흔적은 여기서는 제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이곳이 높아서 그런 거 같습니다.

천왕봉을 당겨보고.....

칠선계곡가 백무동동 찾아보고...

장터목이니 촛대봉과 영신봉도 보고....

10:46

묵은 헬기장을 지나면서,

이제 오도재 건너 법화산도 확실하게 보이고...

그 뒤 중앙 멀리 왕산을 봅니다.

그 조측이 황매산 우측 뒤가 정수산이니 왕산 우측으로 기산을 지나 웅석봉으로 오르는 능선이 뚜렷합니다. 

참 멋집니다.

지리동부의 멋진 모습. 

지도 #2

우측 계단으로 내려가면 되는데 ....

일반등로로 착각하여 위험하게 바위 옆으로 내려옵니다.

10:58

그러고는 삼봉산입니다.

이 삼봉산에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을 만나게 됩니다. 

앞은 등구재로 내려가는 줄기.

천왕봉 등 주릉과 동부능선을 다 볼 수 있고,

비록 잡목에 가려 있지만 이따 진행할 오봉산과 함양의 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삼각점에는 운봉303이라고 점의 번호가 박혀 있지만 정작 국토지리정보원 기준점 조서에는 나오지 않는 번호로 아마 폐지된 것 같습니다.

팔령재를 따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팔량재로 나온 고개죠.

10분 정도 머물다 떠납니다.

이제부터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과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의 도계를 따라 진행합니다.

11:13

투구봉을 따르고....

11:41

 1069.2봉.

삼봉산을 돌아보고....

11:14

최근 제대로 정비된 이정표.

11:56

지도 #2의 '가'의 곳에서 간이 헬기장을 지나,

이제 제대로 된 오봉산의 모습이 들어오는군요.

저 오봉산에서 우측으로 ㅈ니행하면 아까 보았던 옥녀봉이겠고 지맥은 그 뒤로 넘어가 연비산으로 가겠죠.

오봉산의 골격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12:03

지맥길은 우측

유아숲 체험원'으로 진행하지만 잠깐 투구봉은 다녀와야겠지요.

좌측으로 진행하면,

잠시 비알을 올라 산불감시카메라와,

정상석이 있는 투구봉1032.5m입니다.

지나온 삼봉산.

그리고 그 우측으로 등구재 가는 길.

그 뒤로 지리동부능선의 와불산과 두류산 방향.

가운데 등구재와 우측의 백운산과 금대봉.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에는 4구간이 시작되는 금계동이나 의탄에서는 지금과 같이 임천 물길을 따라 가는 길은 없었다고 한다. 인월장을 가려면 창원마을을 거쳐 등구재를 넘어야 했고 함양장을 가려면 오도재를 넘어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60번 도로는 생긴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기 같다. 그래서 경상도에서 전라도를 가려는 신라군이나 왜적들은 부득이 팔량재를 거쳐 인월로 진입을 해야 했다는 것인가? 등구재와 오도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18쪽

 

등구사 소고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함양군수로 있던 1472814일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지리산 산행에 나선다. 예전 말로는 유람이었지만 그 유람이 지금의 산으로 오면 현대어로는 등산 아니겠는가? 그들은 천왕봉~영신봉 등을 들르고는 백무동으로 하산하였다. 점필재가 훌륭하게 45일 일정의 산행을 마치고 귀가를 할 때 지났던 루트가 바로 이 길이다.

점필재는 일행들과 헤어져 등구재를 넘어 오도재를 거쳐 함양으로 돌아갔다. 점필재는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부 김숙자에게 수학하여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절의節義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김굉필, 정여창, 유호인, 김일손, 남효온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에게 학통이 계승되면서 점필재는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러나 147012월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함양 학사루에 있던 유자광의 현판을 불태우게 되는데 이게 후에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어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여러 가지로 유명한 인사이지만 이쯤 되면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으로 35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탁영 김일손(1464~1498)이 생각날 법도 하다. 탁영 김일손은 1489414일 정여창, 김형종 등과 함께 산행을 나섰다. 천령天嶺 그러니까 지금의 함양을 출발한 세 사람은 등구사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는다.

 

그러고는 등구사 터 아래로 양진재養眞齋가 있고 이는 옛날에 개암介菴 강익 선생이 살던 곳이다. 나는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등구사에 도착했다, 불룩하게 솟은 산의 형상이 거북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우뚝한데 그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가 북쪽에서 그 속으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위에 두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우리는 동쪽 사찰에 묵었다."고 등구사를 회고했다.

등구재로 오르는 길 우측으로 펼쳐지는 다랭이 논에서는 농부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다락논, 하늘네미, 청상네미, 공중네미라고도 부르는 계단식 논인 다랭이논은 고단한 옛 지리산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04쪽

 

그 뒤로 창암산이 머리만 보이고 그 우측이 백무동이고 뒤에 길게 늘어선 줄이 지리 주릉의 천왕봉 등....

좌측의 칠선계곡과 정면의 창암산.

다시 우측으로 돌아나갑니다.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된비알을 냉려가면 낙엽송 숲이 나오고...

12:34

이내 유아슾 체험원입니다.

우틀하여 이 임도를 따라가면 아까 만났던 임도와 연결이 되고.... 

팔량재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12:50

그러면 흥부가족이 있고,

여러가지 조형물이 있는 팔량재입니다.

이 팔량재가 실은 490고지 정도에 위치한 고개이지만 운봉 방향이 워낙 고지대인 고원이기 때문에 인월방향은 그다지 높게 보이지 않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드니 우측 아래로 흥부자연휴양림이 펼쳐지고 좌측으로는 멀리 임천지맥의 흐름이 보인다. 우측 투구봉으로 오르는 능선 바로 좌측의 고개가 바로 팔량재(). 그 고개를 넘으면 함양군 함양읍이니 저 팔량재가 곧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가 되는 셈이다. 저 팔량재가 왜 중요할까? 저 팔량재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던 곳이다. 곧 백제로서는 아막성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성이 있던 곳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더라도 최소한 3차에 걸친 대공방전이 있었다고 하니 저 팔량재는 백제는 신라를, 신라는 백제를 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 팔량재가 고려시대로 들어오면 왜구가 등장한다. 진포대첩에서 패배한 잔류군이 김천, 상주를 거쳐 팔량재를 넘었고, 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로 들어온 왜구는 남원성을 치기 위하여 이 팔량재를 넘어야 했다. 연전연승을 거두던 왜구들에게 나라의 정규군들은 다 도망을 가게 되자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장정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 의병에 가담하여 싸움터로 나아가기도 했다. 이때 주천면 은송리의 젊은 유생 조경남 장군은 백전백승의 명의병장이었다. 산청, 함양, 곡성, 구례, 순창 할 것 없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로 왜적들을 무찌르고 다녔다. 때마침 조장군은 전라도 출신 8명의 장사와 어울려 이 곳 고개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들은 힘을 합해 팔량재에 성을 쌓아 왜적과 대항하여 크게 이겼다. 이와 같이 8명의 어진 장사가 이 고개에서 왜적을 대파 하였다는 유래로 그 후 고개 이름을 八良岾팔량재라 일컫게 되었다.

 

  -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86쪽

4. 19.의 원인이 된 부마사건의 시초인 김주열 열사가 바로  이 남원사람이군요.

그 기념비와 장승이 있는 팔량재입니다.

 

앞서 얘기한 바 있다. ·호남을 잇는 3대 관문은 안음(함양)의 황석산성, 운봉의 팔량재 그리고 이 구례의 석주관이었다. 이들 관문은 동서 즉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황석산성은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에 대항하기 위하여 쌓은 석성이고, 팔량재는 임진왜란 때 조경남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왜구를 지키던 곳이며, 고려 말에는 진포대첩 시 운봉을 넘어온 왜구의 잔당들이 황산전투에서 이성계에게 대패를 한 곳이다. 이 석주관은 왜군이 영남으로 들어와 호남의 곡창지대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이었다.

 

이런 지형적인 특성이 임진왜란 때 안타까운 사건을 유발하였고 이는 구한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왜구를 막기 위하여 쌓은 성이 바로 석주관성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남의 부호 왕득인이 922일 이곳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고 118일에는 그의 아들 왕의성과 선비 5인이 의병을 이끌고 화엄사의 승병과 함께 전투를 벌이다 3,500여 명이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일대가 칠의사 및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옥쇄 전투를 펼친 피의 전장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이 곡수를 피내 즉 혈천血川이라고도 부른다. 이때 순절한 의병장들을 석주관칠의사라고 하여 묘소와 추념비를 세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338쪽

호남의 남쪽을 왕득인 일가가 수호를 하였다면 호남의 북동쪽 남원에서는 충경공 금릉 김익복(1551~1599) 일가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29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능성(지금의 화순) 현령에 이르렀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박장전, 임계영 등과 혈맹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성주, 개성, 금산 등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는데 이는 임진왜란 최초의 창의倡義 기록이다. 정유재란 시 도원수 권율의 만류에도 충성이 곧 효도라며 부친상 시묘 중에도 참전을 하였다가 왜구의 탄환에 맞아 사망을 하였는데 그의 세 아들 류, , 연 등이 이때 모두 부를 따라 종군하였다. 장자 류는 영광성 전투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삼자 연은 이괄의 난병자호란때에도 창의하였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339쪽 각주3)

 

사실 위 사료 중 남원의 김익복 님 자료는 제가 직접 발굴한 그것입니다.

작년 이맘 때 고남님과 함산을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던 중 고남님으로부터 들은 문중 얘기를 듣고 메모했던 것을 집안 족보 중에서 찾아 책에 옮기게 된 것입니다.

대단한조상을 둔 고남님이십니다.

 

한편 이 팔량재에서 함양쪽으로는 구룡천이 발원합니다.

그 구룡천은 함양읍내에서 백운산에서 내려오는 위천에 합수되고 ...

이 위천은 유림면에서 남강에 합류됩니다.

팔량재 너머 조금 전 내여온 줄기를 봅니다.

맹 좌측이 삼봉산 그리고 송전탑 좌측이 투구봉.

그런데 이 부근이 팔령산성이 있는 곳?

이 팔량재는 조경남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죠.

남원군 주천면 운송리 출생의 의병장 조경남은 13세인 1582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임진, 정유란에 자신이 의병으로 유격활동을 한 내용과 당시 국내외 정세, 남원성 싸움 등을 그대로 기술하고 또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주요 전란과 그 밖의 역사적 주요 변화 내용, 당시의 풍속, 조정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낱낱이 적었다. 그 문체가 수려하고 간결하여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 순 한문체로 썼다. 전후에도 집필을 계속하여 병자호란 2년 후(1638)까지 장장 57년간이나 써온 일기체 역사서로써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버금간다. 20구간 밤재에서 또 만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50쪽 각주 16)

 

그렇다면 8명의 어진 장사가 이 고개에서 왜적을 대파 하였다는 유래로 그 후 고개 이름을 八良岾팔량재라 일컫게 되었다는 이 팔량재는 원래 이 팔령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팔양으로 부렸던 것은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이곳이 전라도와 경상도가 자주 자리바꿈하던 곳이기에 드런 의심은 더 가는군요.

좌측으로 성산마을을 보며 올라갑니다.

성산지라는 작은 소류지가 있습니다.

이곳이군요,

팔령산성의 흔적입니다.

그 위에 있는 성.

13:30

햇빛이 따뜻한 진주강씨 묘 앞에서 싸가지고 온 김밥을 먹고 가기로 합니다.

간단한 담금주로 입가심을 하고 30분 정도 있다 일어납니다. 

지도 #3

정말 멋진 줄기입니다.

오봉산으로 오르는 루트도 기왕에 팔량재로 떨어졌다가  다시 800고지 이상을 회복해야 하는 고로 상당한 된비알을 각오해야 합니다.

14:05

지도 #3의 '나'에서 크게 우틀합니다.

14:12

849.9봉에서 반가운 분을 만납니다.

잘 계시죠?

21일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봉우리 정상에는 안내이정표가 잘 만들어져 있고...

오봉산을 따릅니다.

이래서 오봉산인가요?

 

24번 도로 건너 우측으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지안재로 오르는 1023번 도로가 보이는군요.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438.1봉과 555.4봉.

지맥의 마무리 구간입니다.

좌측으로 보이는 저수지가 구룡저수지이겠고...

그러니 그 뒤로 벽을 쌓고 있는 산이 황매산.

우측으로 왕산.

좌측 진행방향으로는 축사 좌측의 연비산843.1m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런데 자 연비산이 843.1m에 불과한 반면 오봉산이나 삼봉산 등이 제 이름도 갖고 있고 높이도 더 높은데 박성태 선생님은 왜 연비지맥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군요.

이름이 너무 흔해서 그런가요?

산으로서의 위용은 오봉산이나 삼봉산이 더 특출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이 오봉산도 그렇거니와,

좌측에 볼록 솟은 삼봉산도 볼품 없는 연비산에 비해 훨씬 나은데....

중앙이 조금 전 매려온 능선으로 투구봉에서 내려왔습니다.

이제 우측 뒤 왕산 좌측으로 정수산 줄기인 양천지맥이 보이고....

왕산, 법화산 그리고 임천지맥의 삼봉산....

연비산 뒤로 백두대간의 중고개재와 백운산1278.9m이 자리하고 있고....

그 우측으로 서래봉이니 감투봉이 이어지고....

아!

아영벌 우측으로 간단없이 임천지맥이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군요.

좌측의 봉화산까지도....

14:28

지도 #3의 '다'를 지나고....

14:42

조망이 터지는 지도 #3의 '라'의 곳입니다.

건너편 오봉 정상을 감상합니다.

정상석이 보이는군요.

14:47

비알을 치고 올라가,

14:53

오봉산 정상에 오릅니다.

조망이 터지는 정상에서 주변을 감상합니다.

삼봉산 능선.

지리서부능선의 덕두산.

그리고 중앙 뒤로 반야봉.

옥녀봉 방향.

예전에는 상산이라 불렀다고요?

이제 연비산으로 향합니다.

내려오자마자 3거리입니다.

웅곡을 따릅니다.

옥녀봉 방향.

등로가 아주 편할 것 같습니다.

 

지도 #4

그런데 이 연비산 방향은?

함양 산림과에서 지맥을 모르니 등로 상태는 엉방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일단 가보죠.

15:17

지도 #4의 '마'의 곳입니다.

지난 사람의 흔적만 있지 길은 찾기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여름에는 진행하기 상당히 힘들 것 같습니다.

좀 너른 곳으로 빠져나와....

15:48

지도 #4의 '바'의 곳인 788.6봉 삼거리에서 좌틀하면서 오랫동안 같이 진행한 함양읍을 버리고 백전면을 만납니다.

그러고는 인월면과의 도계를 걷습니다.

오봉산과 삼봉산이 일렬로 섰습니다.

16:01

그러고는 연비산입니다.

정상석이 없는 연비산에는 2등급삼각점(운봉23)과,

선생님의 산패와 아는 이들의 표지띠만 날리고 있습니다.

중앙으로 백두대간의 흐름이 힘차게 느껴집니다.

지맥은 중앙으로 이어지고 그 좌측의 봉화산이 명백합니다.

아영벌이 아주 너르군요.

그런데 오늘의 날머리로 잡은 비조재까지는 4km정도가 더 남았는데 예약해 놓은 기차를 타기가 애매해집니다.

지도를 보니 가장 가까운 마을이 유곡리 도장마을이군요.

인월로 내려오다 보면 멀리 남덕유산에서 가지를 쳐 내려오고 있는 남강지맥과 그 앞으로 백두대간 봉화산에서 가지를 쳐 내려오는 임천지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아영벌을 적시면서 흐르는 물줄기인 풍천을 중심으로 대가야 형제 소국들이 자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아영 시가지 우측의 유곡리와 두락리에서 가야 고분군들이 여러 개 발굴된 이유도 이해할 수 있겠다. 저 풍천이 인월에 이르러 람천을 흡수하면서 임천이 되어 함양~산청으로 흐르게 됨은 지난 구간 때 살펴봤다. 즉 풍천람천임천엄천남강이 된다는 것이다.

 

  - 현오와 걷는 지리산 86쪽

16:33

하는 수없이 탈출을 합니다.

민가를 만나 도장마을로 내려오다 보니,

우측으로 멋진 길이 보이는군요.

다음 구간 들머리로 삼아야 하겠군요.

16:44

도장마을에 도착하여 인월 택시를 불러 아영벌을 거쳐 인월로 나갑니다.

고남님의 차로 남원으로 나가 아는 분의 식당에서 삼겹살로 간단하게 뒷풀이를 하고 18:58 기차로 귀가를 합니다.

오늘 함께 하신 고남님.

든든한 원군이셨습니다.

 

오늘 구간 17.65km를 8시간 35분 걸렸으니 순수한 운행시간은 8시간 정도 되었군요.

상당히 힘든 구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