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이 끝난 뒤 뒤풀이 좌석은 늘 그날 산행의 뒷맛에 대한 강평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같은 날이면 나뭇잎에 쌓인 먼지를 털고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잔가지의 탄력으로 눈이 찔릴 뻔 햇던 아슬아슬함도 이 시간이면 다 아쉬운 추억으로 바뀝니다.
노고단 님의 명언.
"뒤풀이 없는 산행은 노가다다!"
뒤플이도 산행의 연장이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힘듦이 보람이라는 성과로 승화하는 순간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어제 있었던 고성, 속초 지방의 산불로 아나운서의 멘트가 입방아에 오릅니다.
"태백산맥을 넘어온 건조해진 바람이 강풍으로 변해...."
'양간지풍(襄杆之風)' 또는 '양강지풍(襄江之風)이라는 말입니다.
봄철 강원도 양양과 간성 지역에서 자주 나타나는 국지적 강풍을 일컫는 말입니다.
영동 중ㆍ북부 지방에서는 4월에 강하게 바람이 분다는 것이죠.
양양과 고성, ·간성, 그리고 양양과 강릉 구간 사이에서 국지적으로 남쪽애는 고기압, 북쪽에는 저기압이 놓인 상태에서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고도가 높은 백두대간을 넘는 순간 압력이 높아져 고온 건조한 강풍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태백산맥'으로 얘기한 겁니다.
식민지 교육의 잔재가 언제나 끝나게 될런지...
아니나 다를까 좀 심심했을 장감독이다. “고토와 택리지 얘기 계속해줘야지?” “지난 번 어디까지 얘기했지?” “고토가 택리지를 보고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는 개념으로 붙이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잖아.” “그래. 고토는 택리지 그러니까 그 일역본(日譯本)인 ‘조선팔역지’를 보고 조선의 화려했던 문화를 떠올리게 됐지. 그때 고토는 이미 산경표도 파악을 했던 거야. 우리만 몰랐지.” 산맥이 고토의 작품이라고? “형. 근데 지질구조선이 산맥이라며? 우리가 배운 태백산맥이니 뭐니 하는 산맥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거야? 원래 산맥이라는 말이 우리가 쓰던 말이었다면서!” 장감독은 제법 언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으니 말이다. “장감독, 아베 노부유키라고 알지?” “응 . 요새 인터넷을 달구고 있잖아. 지금 수상인 아베신조의 할아버지.” 하긴 그 똑똑한 장감독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있나. “그가 한 소위 ‘마지막 총독 아베의 소름끼치는 예언’이라는 것도 알지?” “알지.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는...” “바로 그거야. 일본은 우리를 침략하고서는 역사와 지리교육에 각별하게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하잖아.” 고토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 전 예습을 한 것은 조선의 역사뿐이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책은 ‘조선팔역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를 일본어로 번역한 인쇄물이었다. ‘택리지’는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지리소지(朝鮮地理小志)’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도 간행된 인문지리서이다. 1881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조선지리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풍수지리라는 동양 고유의 철학이자 자연관을 신봉했다. 그것은 길흉화복을 담은 어쩌면 과학이라기보다는 미신적인 요소도 있었다. 즉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세계와의 조화를 공생으로 보는 이 풍수사상은 서양의 실증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선의 지리학 역시 자연과 조화된 균형 있는 개발을 모토로 인간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는 학문이었다. 이에 반해 서양 지리학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가? “그렇다! 택리지에 서양지리학을 가미하자.” 그는 1884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접한 택리지 아니 조선팔역지 중 산수(山水)편을 본 첫 감상은 신세계를 본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 작고 미개한 나라에서 이렇듯 과학적인 산줄기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까? 과학이 그렇게 발달한 서양에서도 접하지 못한 산줄기 체계. 그것을 이미 1000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걸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 받고 있었다니! 고조선 시대에는 만주벌판을 호령했고 고구려 시대에 와서는 한반도 대부분 지역과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동북삼성이 다 그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어떠한가! 금속활자나 측우기 같은 것은 세계 최초로 만들었고 그들의 도자기 굽는 기술이나 화약을 최초로 실용화하고 나침반도 신라시대부터....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의 글자까지 가지고 있으니... 좋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는 단군과 백두산이렸다! 조선산맥? 백두산부터 흘러내린 조선의 기둥이 조선산맥이라고? ‘곤륜산의 한 가지가 큰 사막의 남쪽으로 오다가 동쪽에 이르러 의무려산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지어 요동 평야가 된다. 평야를 건너 다시 일어나서 백두산이 되는데, 곧 산해경에서 말하는 불함산(不咸山)이 이것이다.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뻗치고 두 강을 끼고 남쪽으로 향한 것이 영고탑이 되었다. 등 뒤로 뻗어 나간 한 가지는 조선산맥의 머리가 된다.’ 그래! 택리지 아니 조선팔역지의 팔도총론 도입부에 나온 이 조선산맥! 산맥으로 가자!” 택리지를 본 고토는 자신이 조선에 들어가 해야 할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짐을 느꼈다. 대일본제국을 위한 일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위한 일이었다. 산경표(山經表) 1. 고토는 이미 해동도리보 중의 산경표도 필사본(筆寫本)으로 익히 보았다. 과연 백두대간이니 정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산맥과 지맥(支脈)은 일본에서는 구경도 못하던 산지체계였다. 아니 일본은 물론 자신이 신줏단지로 떠받들고 있던 독일을 비롯한 서양지리학에서도 구경조차 못하던 개념이었다. 고토는 조선의 화려한 과거 문화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실제로 인문지리학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다. 신기했다. 신비감까지 느껴졌다. 백두대간이라는 산맥에서 산줄기뿐만 아니라 강줄기들도 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선의 모든 산줄기와 산의 원천은 백두산이었고 그 백두산의 혼은 백두대간이라는 산맥을 따라 조선의 온누리를 다 적시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산과 강을 둘로 보지 않고 그것들을 하나로 보고 거기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하나의 산줄기가 다른 산줄기로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물이 흐르고 그 산줄기들은 그 물들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반드시 잠기게 됨도 그 산줄기들은 말해 주고 있었다. 이른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산자분수령’이 무엇인가? 실제 이 뜻은 ‘自’를 “스스로”가 아닌 “~으로 부터”라고 해석을 하여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독해법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산자분수령이 산경표 안으로 들어오면 해석을 달리한다. 이른바 관용구로 쓴다는 말이다. 즉 하나는 문법에 맞춰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고 하여 분수령을 고유명사로 파악하는 것 이외에 ‘自’를 “스스로”라는 부사로 해석하여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라는 보통 명사로 분수령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은 산줄기와 관련하여 후자를 산자분수령의 참뜻으로 새기고 있었다. 즉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대자연의 진리. 그 말은 곧 두 산줄기 사이에는 반드시 물줄기가 나오게끔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산줄기는 이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한다는 말이 되고, 그것은 역으로 산줄기는 물줄기를 감싸는 울타리가 된다는 말과도 같다. 고토는 산경표를 제대로 이해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산줄기 산행을 하다보면 삼면봉(三面峰)을 무던히도 많이 만난다. 세 개의 읍 · 면이 만나는 봉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우리가 편의상 붙여 부르는 이름이다. 분수령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어디나 분수령은 널려 있다. 보통명사라는 얘기다. 우리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얘기할 때 쓸데없이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산자분수령은 산자분수령이다.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되므로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줄기는 산줄기를 구획한다는 말이다. 산경표에는 백두대간과 정간, 정맥이 나온다. 산경표는 산줄기에 계급을 주었다는 얘기다. 그렇다. 간(幹)은 줄기이고 맥(脈)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갈래다. 맥이라는 게 무엇인가? 혈관 즉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산맥이란 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즉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산줄기들이 가지를 친다. 그 가지 줄기들은 강을 둘러싼 줄기와 그렇지 않은 줄기로 나누었다. 그러니까 강을 둘러싼 줄기를 주맥(主脈)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줄기를 지맥(支脈)으로 보았다. 주맥은 정간과 정맥이었고 여타 줄기들은 다 지맥이었다. 곧 조선산맥을 중심으로 각 지맥이 작은 산맥으로 나뉘어져 간 것이었다. 고토는 이해했다. 조선인들은 물줄기를 따라 촌락을 형성하며 살았고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지방의 풍습과 언어도 달라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곧 조선인들은 이미 산과 강을 다 꿰차고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백두산을 숭배하며 백두산신이 천왕이고, 천왕이 국사대천, 천황이라 불리는 단군 아니던가! 두 가지만 없애면 가능할 것이었다. 단군과 백두산이었다. 단군은 역사를 조작하여 신화로 몰아버리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그건 역사학자들 몫이니 자신과는 우선 무관하다. 그리고 백두산은 철저히 무시하면 될 것이다. 백두산의 의미 있는 봉우리에 일본 이름을 갖다 붙여놓으면 될 것인데 문제는 백두대간이었다.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 ‘산은 한 줄기로 이어져 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인데 이걸 지워야 했다. 즉 산맥을 지워야 했다. 아니 지우는 것보다 그걸 토막 내어 잘라 없애고 그 토막에 조선인들이 쓰는 산맥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자. 그냥 갖다 붙이면 다시 이으면 그뿐이니 그걸 구조선의 다른 이름으로 만들어 발표하자. 그래야 조선인들은 당파 싸움 하듯 산맥이 옳으냐 산줄기가 옳으냐 서로 헐뜯고 싸우겠지. 나머지는 일본 정부에서 알아서 하겠고....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157쪽 이하
이렇듯 산맥이라는 말은 우리 고유의 산줄기를 보는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지질구조선을 산줄기에 대입하면서 산맥이라는 개념을 동원하는 바람에 지금 우리는 '산맥 + 산줄기'라는 식으로 배우고 있는 것이죠.
횡천지맥은 낙남정맥에서 가지를 친 지맥枝脈 지난 구간 낙남정맥이라는 산줄기 이름도 나왔었고 횡천지맥이라는 이름도 잠깐 나왔었다. 낙남정맥이라는 이름이나 횡천지맥이라는 산줄기가 궁금해진다. 낙남정맥의 ‘낙’은 낙동강이라는 강에서 온 것이고, 덕천지맥의 덕천은 역시 덕천강이라는 고유명사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명사인 듯한 정맥이나 지맥은 무엇일까? 사실 지맥을 자세히 살피기에는 초보자에게는 조금 어렵다. 상세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잠깐 맛보기하는 수준으로 보기로 한다. 부언하거니와 지맥支脈은 큰 산줄기에서 다른 작은 줄기가 가지 쳐 나갈 때 즉 주맥主脈에서 좌우로 뻗어나간 가지 줄기를 支脈이라 부르는 것이니 이는 보통명사이다. 주맥이라 부르니 우선 떠오르는 게 산맥山脈이다. 그런데 이 산맥이라는 개념은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붙인 그것이다. 우리 땅 이름을 일본인이 만들어 주었다니 별로 달갑지 않다. 어쨌든 ‘산맥山脈’에도 지맥이라는 개념은 존재한다. 반면 우리가 산줄기에서 이야기하는 지맥은 ‘枝脈’이라는 한자를 쓴다. 그리고 이 枝脈은 ‘산맥’이라는 지질학적 개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이다. 산줄기 개념이기 때문이다. 산줄기와 산맥은 다른가? 다르다. 간단히 얘기해서 산줄기는 우리들 눈에 보이는 산의 이음이다. 반면 산맥은 땅 속에 있는 것을 추측해서 땅 위로 끌어올려 그린 그림이다. 가령 땅속의 지질구조선이 생성 년대나 생성 방법이 같으면 같은 산맥이라 했다. 그러다 보니 산줄기는 곡선인 반면 산맥은 무조건 직선이다. 다시 말해서 산줄기는 자연의 선인 반면 산맥은 인공의 선인 것이다. 우리가 산줄기 즉 산경보다 산맥에 익숙한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1910년대부터 일제에 의해 교과서에 오른 산맥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는 있으나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완전한 학설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학자들의 편의상 무리 없이 사용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질구조선을 반영하면서도 산지의 지리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보다 나은 산맥체계가 연구되고 제시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러한 산맥과 산줄기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좀 억지를 부려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산맥이 아기라면 산줄기는 현재의 우리라고 보면 어떨까? 즉 태초에 지구가 생긴 다음 융기, 습곡, 단층, 화산 운동 등으로 지구 표면에 어떤 변화(구조적tectonic요인)가 생긴 다음 그것의 높은 부분의 이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풍화와 침식(기후climatic요인)으로 지금과 같은 산들의 이음이 되었을 때 전자는 산맥으로 보고 후자는 산줄기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맥도 현재 움직임이 있으므로 생물이긴 하지만 외형 즉 분수계로 돌출되어 있는 산줄기에 비해서 그 움직임은 크지 않을 것이다. 산경표의 대간, 정맥 그리고 하위 개념인 지맥 등이 궁금하긴 하지만 너무 어려우므로 뒤로 미룬다. 산경표에 나온 산줄기는 1대간 1정간 13정맥이 된다. 여기서 간幹은 줄기이고, 맥脈은 줄기에서 뻗어나간 갈래를 말한다. 위와 같은 산지 분류 체계는 강의 수계水系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점, 국토 전체가 산줄기의 맥으로 연결되어 있는 점, 백두산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점 등 조선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선조들의 자연에 대한 인식 체계를 보여주고, 지금과 다른 과거의 산줄기 이름 등을 알려주는 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226쪽 이하 그러니 산꾼만이라도 산맥이라는 단어를 거론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예정했던 대로 대간팀에 합류합니다.
임천지맥을 역으로 이어 대간에 접속하기 위함입니다.
자연히 오늘의 들머리는 지난 구간의 날머리인 남원시 인월면 유곡리 도장마을입니다.
유곡리는 두락리와 더불어 가야시대의 고분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복성이재에 도착하여 대원들이 산행준비를 하는 동안 예약한 택시가 도착하고....
들머리로 이동합니다.
지도 #1
10:10
개쉬키는 열심히 짖어대고....
아직 무사하니 다행이로고!
하지만 여름이 다가온단다.
저렇게 열심히 집을 지키고 있는 녀석들을 굳이 식용으로 하는 것은 좀...
지맥을 이어주는 임도.
아주 널찍하고 시원하게 나 있군요.
10:15
감나무 단지가 나오고 이내 지맥에 접속합니다.
감나무는 나무가 단단해서 떡판을 만드는데 많이 사용된다고요?
지맥길 연비산 방면.
지맥길에 접속하면서 이제부터는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과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의 도계를 따라 걷게 됩니다.
10:18
작은 고개를 하나 지나고
10:27
559.6봉에 오릅니다.
우선은 이렇듯 편안한 등로입니다.
이렇게 낙관적으로 지맥을 보는 어리석음은 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게끔 만듭니다.
자연을 그것도 지맥枝脈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면 안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시작하는 등로는 잠시 저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좌측으로 봉화산919.7m을 봅니다.
봉화산에 오르면서 오늘 대간하는 대원들에게는 1, 2 구간에서 보지 못했던 장쾌한 능선을 걷는 즐거움을 주는 곳입니다.
10년 전 홀로 이른 아침에 저곳을 오르면서 "아! 백두대간이라는 곳이 이런 곳이구나!"하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던 곳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곳.
대원들은 치재 정도나 지나고 있을까?
아직은 조망도 없는 곳을 오르면서 서서히 엔진을 데우고 있겠죠.
10:33
개나리에 이름 모를 나무의 가지에 물이 오르고 있습니다.
제대로 휘는 게 제법 탄력도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10:36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오천리에서는 아주 오지에 있는 집이겠군요.
10:40
김해김공 음택을 지나며....
1888년 돌아가셨군요.오랫동안 누워계시는군요.
10:44
지도 #1의 '나'에 이르러 우측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갑자기 길이 희미해지고 잡목의 저항이 거세집니다.
아주 힘겨운 구간입니다.
물오른 나뭇가지는 눈까지 찌르고...
할 수 없이 고글을 꺼내 착용합니다
진행이 더뎌집니다.
11:04
643.4봉으로 오릅니다.
잡목이나 나무 덩굴은 집중력을 무디게 만듭니다.
분명 이 봉에서 급좌틀하여 내려가야 하는 것으로 독도를 했음에도 나뭇가지를 헤치고 가느라 만연히 직진을 합니다.
이런 곳은 직진하는 길이 더 좋은 게 보통입니다.
지맥꾼이 아니고 동네 주민들이 이용하던 길이기 때문이죠.
하긴 뭐 길이라고 보기도 민망한 것이 나뭇가지가 옷을 잡고 발목을 붙드니....
참고도 #1
이런 곳은 직진을 하기 십상입니다.
상대평으로 향하는 줄기가 완만하고 줄기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땅위에서 벌어지는 침식작용이라는 것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질학적 요인인 산맥과는 다르기 때문이죠.
직선이 아니고 늘 곡선.
단단한 부위와 약한 부위가 다르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된비알을 함들게 내려옵니다.
11:27
지도 #1의 '다'의 곳입니다.
의지리 밤골마을을 옥잠봉703.5m이 에워싸고 있고 그 좌측 뒤로 멀리 백두대간이 보입니다.
직선으로 가면 얼마되지 않는 거리를 꼬불꼬불 걷다 보니 상당한 거리가 됩니다.
매치마을의 민가가 가까우니 길이 갑자기 좋아집니다.
개나리를 보니 '지리산'님이 생각나는군요.
왜 산행을 안 오셨는지...
지맥길은 우측 매치마을을 지나 중앙의 88고속도로를 건너게 됩니다.
앞의 숲이 지맥길을 암시해 줍니다.
그 뒷불 저 뒤로 중앙에 봉화산 다리재를 지나 좌측으로 대간길은 이어지고....
혹시나 대원들이 보일까 쌍라이트를 켜보지만 이미 지나갔는지....
지맥길이 좌측에서 88고속도로를 지나 우측 674.2봉으로 오르는게 보입니다.
여기서는 그 전위봉만 보이고...
지맥길이나 정맥길, 대간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그 맥의 흐름을 읽고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진행해야 한다는.....
좌측을 봅니다.
지리서부능선의 덕두산.
그 우측 아래 낮은 봉이 이성계의 황산698n, 그 우측이 고남산846.8m.
사실 왜구의 침공은 신라시대부터 꾸준했었다. 그런데 1223년~1392년 조선이 개국을 할 때까지가 가장 심했던 바, 연구에 의하면 특히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부터 조선 개국년도인 1392년까지의 출몰 횟수는 무려 400여 회에 달했다고 한다. 진포대첩의 원인이 된 노략질이 그 사건 중 하나였고, 육지로 상륙한 진포대첩의 잔당을 격파한 사건이 바로 황산대첩이었고 그 전투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저 황산과 우측의 지리산 서부능선이 내려오는 그 사이의 맞닿은 듯한 좁은 곳으로 우측의 이 람천이 흘러간다. 그러니 함양 땅에 들어온 왜구들이 남원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저 병목 같은 곳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그걸 노렸다.
운봉지雲峰誌를 볼까?
신우辛禑때 왜구가 함양을 도륙하고 다시 남원산성을 공격했다. 왜구는 물러나 운봉현을 불사른 후 인월역에 주둔하면서 북상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나라의 안팎이 크게 진동하자 태조가 변안렬과 함께 남원에 이르렀다. 아침에 사람들을 경계시킨 뒤 동쪽으로 운봉을 넘어가니 적과의 거리가 수십 리 밖에 되지 않았다. 황산의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에 올랐는데 길 오른편 험한 지름길이 있었다. 험한 길로 들어서자 왜구의 기예부대가 갑자기 뛰어나왔다. 태조가 50여발의 화살을 쏘아 그들의 얼굴을 맞히자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거꾸러지지 않는 놈이 없었다.
왜구가 산에 근거해 방어를 굳건하게 했는데 태조가 군사들을 지휘해서 요해처를 분담하고 다시 소라를 불어 병사를 정돈한 후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올라가니 적이 몇 겹으로 포위했다. 태조가 즉시 여덟 명을 죽이자 왜구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겨우 열대여섯 살 정도 되는 아기발도라는 적장을 태조가 그의 용기와 기예를 아깝게 여겨 생포하려 하였으나 이두란이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아기발도가 구리 가면과 철갑을 입고 있어 화살을 쏘아도 들어가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화살을 쏘아 그의 투구를 떨어뜨리자 이두란이 뒤이어 화살을 쏘아 죽였다. 그리하여 왜구의 기가 꺾였다. 마침내 분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시냇물이 온통 붉은 빛이었다. 처음에는 왜구가 우리보다 열 배나 많았지만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가 성모상과 가섭석상을 벤 뒤에 떠났다.
하여간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은 나라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왜구들은 화개재에 올라 백두대간 길을 타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영신봉 아래에 있는 영신사로 들어간다.
영신사는 영신봉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던 암자였다. 그 암자 바로 뒤에 가섭존자의 형태를 하고 있는 바위가 있는데 그걸 해하였다는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유두류록과 김일손(1464 ~ 1498)의 '두류기행록'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진 4〉 황산대첩 사적지. 우측이 파비각破碑閣
그러다 보니 이제 비전마을도 거의 다 왔다. 좌측으로 어휘각이 보이고 그리고 연이어 황산대첩비가 모셔져 있는 비각도 보인다. 대첩교를 건너 먼저 어휘각을 본다. 이 어휘각은 태조 이성계가 1381년 황산대첩의 공이 자기 자신만의 것이 아닌 휘하 장수와 병사들의 공이라 하여 8원수 4종사의 명단을 바위에 새긴 후 그 위에 각을 세워 후손들에게 그 뜻을 기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 뜻은 565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 탈 없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1월 17일 새벽 저 잔인한 왜적은 이런 귀한 뜻이 새긴 바위의 글자를 정으로 쪼아 그 흔적을 없앴고, 그것도 모자라 그 옆에 있던 황산대첩비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각난 황산대첩비를 보관하고 있는 각閣의 이름이 대첩비각大捷碑閣에서 파비각破碑閣이 되었고 이런 연유로 어휘각의 바위는 지금 그 흔적만 볼 수 있게 됐다.
1901년 겨울 이곳을 지나던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分次郞는 ‘조선기행록’에도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서 이곳을 이렇게 그렸다. 그런데 이 고토 분지로는 누구인가?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산줄기를 하는 산꾼들에게는 신경준이나 김정호 못지않은 유명한 인사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여기서 고토분지로를 등장 시킨 이유는 그가 기존 우리나라의 산줄기 인식 체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즉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는 우리나라 지리교육의 근간을 완전히 바꾸게 된 근거를 제공했다. 애초 우리 민족은 백두대간 이하 1정간 13정맥이라는 산줄기와 그 주위를 에워싼 한강, 대동강, 낙동강 등의 물줄기들을 둘이 아닌 하나로 보며 거기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백두대간이니 낙동정맥이니 하는 산줄기를 우리 산맥 체계로 알고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런 우리 민족의 산줄기 인식 체계를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통하여 지질학적 개념 가령 태백산맥이니 낭림산맥이니 하는 산맥 체계로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우리나라 산줄기의 중심 백두대간은 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대륙의 관문인 민족의 성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최고봉이자 문수 신앙의 성지 지리산까지 간단없이 이어지는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산줄기이다. 고토 분지로는 그 백두대간이라는 나라의 큰 산줄기를 다섯 조각으로 토막을 냈다. 그러면서 그것도 모자라 그 토막에서 백두산은 완전히 빼버렸다. 그러고는 그 토막에 우리나라 고유의 지리 인식 개념인 산줄기를 한자화한 ’산맥山脈‘ 개념을 도용하여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낭림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이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76쪽 이하
그 덕두산 좌측 뒤로 반야봉1731.8m을 조망하니 그 좌측이 날라리봉1501.0m을 건너 뾰족한 게 토끼봉1535.3m입니다.
11:35
37번 도로를 건너,
좌측이 도계.
그런데 상대적으로 저 위에 있는 육교가 높아 보이는군요.
그쪽이 지맥길이라 보고 그쪽으로 움직입니다.
정류장 좌측으로 88고속도로를 건넙니다.
그런데 이 부근의 지형은 사진 좌측이 더 높아보입니다.
그러니 일응 붉은색 라인으로 올라가는 게 맞아 보입니다.
그런데 현지에 임해보면 그 붉은색 라인을 타기 위해서는 마을로 들어서야 하고 또 논을 지나야 합니다.
그 논을 지나다보면 어쩔 수없이 수로를 지나야 하는데 여기서 산자분수령이 적용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득불 우측 노란선을 이용하여야 하니 결국 낮은 곳이긴 하지만 '사면치기'가 여기서 적용이 됩니다.
우측 노란선으로 부드럽게 올라 진행합니다.
춘향의 본관이 창녕인가?
지도 #2
지리서부능선과 황산 그리고 우측 대간의 사치재를 보면서 가지고 온 김밥을 먹고 가기로 합니다.
15분 정도 앉아 있다 일어납니다.
지도 #2의 '라'의 곳부터는 아예 길이 없습니다.
가시나무와 덩굴만 있을 뿐...
가끔 멧선생 침대가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블루투스를 연결합니다.
Paul McCartney & Wings를 켭니다.
예전에 정말 즐겨 듣던 Wings over America의 트리플 앨범에서 녹음한 곡들입니다.
녀석들은 음악을 듣고 제 옆에 나타나지 않겠죠.
12:14
경주김씨 음택을 지납니다.
무덤을 지나면 계속 이런 길.....
12:36
지도 #2의 '마'의 곳에서 크게 좌틀합니다.
길만 어지간하면 677.3봉에 가서 삼각점을 확인하고 오련만 200m 정도를 갔다오다 무슨 변고가 생길지....
좌측 뒤로 봉화산이 보입니다.
지금 이곳의 뾰족한 골에서 나오는 물이 풍천을 만들어 임천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비조재가 가까워지는데....
이게 뭡니까?
소가 죽은 시체인데 뼈와 머리의 가죽 부분이 여기저기 널려 있습니다.
사람이 그럴 리는 없고 그렇다고 범이 나타났다는 얘기?
들개?
지맥길은 비조제에 근접하여 진행합니다.
12:55
지맥길에 충실한다는 게 고생을 자초합니다.
선생님의 산패를 확인합니다.
여기서 진행은 민가 안으로 들어가는 게 편하고 올바른 길이긴 한데 남의 집 앞을 지난다는 게....
우측으로 우회하는 길을 택하니 또 개고생입니다.
13:05
경주김씨 묘를 지납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빠듯합니다.
13:07
지도 #2의 '마'의 곳입니다.
이곳도 가운데 논을 두고 크게 우회하는 지형.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시간은 지체되고....
13:15
잠시 밤나무 단지를 지나면서 한숨을 놓숩니다.
잠시 우측으로 조망이 트입니다.
좌측으로 월경산981.8m이 보이고 중앙에 백운산1278.9이 우뚝합니다.
그 우측으로 서랴봉105.7m과 감투봉1.36.7m으로 이어지고....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99쪽
그러고는 옥잠봉703.5m입니다.
그러나 이곳도 조망은 꽝.
13:54
715.8봉에 오릅니다.
길도 길 같지 않은 곳.
지맥꾼들의 숙명이라 받아들입니다.
좌틀하고....
14:14
밋밋하게 오르막이 계속되더 평지같은 곳이 나오기도 하고....
이제 8km 정도 왔는데 시간은 4시간이나 지났으니 시족 2km 정도 밖에 나오질 않는군요.
지도 #3
14:35
여기서 우틀하면서 고도를 높입니다.
지도 #2의'바'입니다.
길은 여전히 안 좋고....
14:39
봉화산이 올려다 보입니다.
15:40
작은 무명봉으로 오르고,
지나온 길을 돌아다 봅니다.
우측이 바로 전에 올라온 무명봉.
나뭇가지에 가린 연비산과 흰점으로 보이는 오봉산 그리고 그 뒤의 삼봉산과 중앙의 투구봉.
그리고 삼봉산 뒤의 중봉과 천왕봉 그리고 제석봉.
14:58
806.1봉입니다.
이제 바로 앞이 대간길인데....
총대장님께 전화를 겁니다.
대간 팀은 산행을 시작한 지 이미 5시간이 지났으니 중재는 이미 지나갔겠고....
바쁘신가?
홀대장님께 전화를 넣으니 역시 제 생각이 맞군요.
중재를 지나 중고개재를 향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30분 내에 산행은 완료될 것이니....
잘못하면 저 때문에 대원들이 기다려야 할 판!
15:14
대간길에 접속합니다.
선생님의 산패를 확인하고.....
아무리 바빠도 볼 건 봐야죠.
삼봉산 좌측 뒤로는 웅석봉이 보이고 그러니 그 앞으로는 왕산인데 사진으로는 너무 희미하군요.
'A'의 곳의 작은숲이 두락리가야고분이 발견된 곳.
우측 아래 일대저수지에서 88고속도로 방향으로 풍천이 흐르고....
멋진 억새풀 숲 사이로 뛰듯 걷습니다.
15:21
임도를 만나고,
15:30
여기서 복장을 다듬고 능선을 치고 내려갈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좌측의 속금산907.4과 우측의 대간길에 있는 936.9봉이 완만하니 그 사이의 784.2봉으로 가서 원지지로 내려가는 길이 가장 무난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 뒤로 보이는 금남호남정맥의 장안산1237.4볼을 보면서 지도 #3의 '사'의 곳에서 길도 없는 능선을 겨냥합니다.
목과 머리는 머티프로 감싸고 장갑을 끼고 눈은....
아차 고글이 없어졌습니다.
대간을 오르기 바로 전에 떨어지는 걸 못 느꼈군요.
다시 되돌아 가서 찾으려면....
어떤 지맥꾼이 발견하겠군요.
잡목을 헤집고 치고 내려갑니다.
된비알입니다.
가끔 산죽도 나타나고...
바위는 돌아서 나뭇가지를 골라 잡으며 내려갑니다.
멧선생 침대를 몇 곳 지나니 안되겠습니다.
혹시나...
다시 블루투스를 연결하여 이번에는 Queen을 찾습니다.
웅장한 교향곡 같은 Bohemian Rhapsody를 시작으로 Love of my life로 이어지더니 그 바톤을 Lynard Skynard가 이어 받습니다.
멀리 임도가 보입니다.
일단 보인다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
16:00
코뿔소 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드디어 올 게 왔군요.
"여차저차 이차저차...."
드디어 요천의 상류인 백운천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백운천의 물로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고 시원한 물을 목넘김 합니다.
16:14
임도로 기어올라 이부장님께 전화를 합니다.
마침 대원들이다 하산해서 기다리고 있다며 지지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러면 저는 나름 이 부근에서 씻고 하동마을 삼거리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하며 통화를 끊습니다.
16:18
좌측이 제가 지금 막 만나 내려온 임도와 우측은 봉화산에서 내려오는 임도로 백운천을 건너 이 임도와 합류합니다.
이 백운천은 금남호남정맥이 백두대간으로부터 분기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로 사실은 섬진강보다 위에 있어야 하는 물줄기입니다.
즉 정맥의 물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이'를 우선시하는 강의 요건으로 섬진강에게 그 자리를 내줬으니 억울하기만 합니다.
나아가 요천에게마저도 2인자 자리를 내줬으니 여간 찬밥 신세가 아닙니다.
이 부근은 정맥과 지맥이 분기하고 그것이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와 관련하여 여러가지 의미있는 공붓거리가 되는데 기회가 있을 때 말씀들기로 하죠.
즉 천황지맥이며 성수지맥 그리고 요천지맥에 오수지맥까지가 설명되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16:30
여유있게 하동마을 삼거리로 내려와 대원들을 기다리며 슈퍼에서 캔맥주 한 통을 따고 발까지 씻으며 여유를 부립니다.
뒤풀이는 아주 맛있는 맛집에서 두부전골로 소주와 맥주를 곁들이고....
오늘 지맥길 11.26km,
대간길 0.52km
그리고 하산길 3.99km였으니 총 15.77km를 걸었군요.
능선 하산길이 1km밖에 되지 않았는데 길이 없는 곳을 마구잡이도 뚫고 내려오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아주 힘든 지맥길이었지만 그만큼 여운이 많이 남는 지맥길이었습니다.
임천지맥 3구간 마무리 산행도 고된 산행이 될 것이지만 어차피 마무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다음 주 주중 산행으로 낙점 받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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