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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백두대간의 지맥

신산경표의 두위지맥을 옥동지맥이라는 이름으로 걷다(수라리재~영장산~망경대산~노니골~고씨동굴 휴양지)

 ‘칼 같은 산들은 얽히고설키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에 달이 비추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한데 풀과 나무에는 연기가 잠겼다.

  주인이 학창의鶴氅衣를 헤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풍류가 그림으로 그려서 전할 만하다’

 

청렴도로 따진다면 조선에서 이원익을 내보낸다면 고려에서는 정추(1333~1382)를 내세울 만합니다. 

학문적으로 이제현과 닿아 있는 정추는 많은 시를 썼는데 특히 엉월땅을 지나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영월땅의 산 높고 골 깊은 심심산골을 정선땅 못지 않은 수려한 경관으로 본 것이죠.

 

백두대간과 거기에서 분기한 한강지맥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와 산줄기.

한강이 큰 골을 이루고 오대천, 평창강, 주천강, 섬강, 지장천, 옥동천, 달천 등이 작은 골을 이뤄 큰 물 한강에 합수됩니다.

그러니 그 강이나 천들을 만든 산줄기 또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여 심심산골을 흘러내리면서 기암절벽을 만들거나 혹은 부드럽게 흘러내려 사람들이  더불어 살게끔 그 터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쪽의 지형은 석회암이 주를 이루다 보니 심하게 풍화, 침식(기후climatic요인)되어 그 산줄기와 물줄기의 생김새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찌보면 천연의 요새와도 같은 곳이었을 이곳이 삼국시대네는 세 나라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곳이었기도 하고 어린 단종이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이라는 자리를 빼았긴 뒤 위리안치된 곳이 이곳이었음도 이 지형과 무관치 않은 것입니다.

 

마구령은 마군령이었다!

 

옛 이름은 마군령馬軍嶺이었다. 대동여지도에는 마아령馬兒嶺으로 표기되어 있고 산경표에는 마아산으로 기재되어 있다. 택리지에 "이라는 것은 산세가 낮아지면서 평평한 곳(嶺者仍嶺脊稍底平處)"라고 하여 산의 일부로 보았으니 마아산 = 마아령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어떤 이들은 이 마구령을 "보부상들이 말을 타고 지났다고 하여 마구령이라 불렀다."고도 하지만 그리 간단하게 볼 것만은 아닌 곳이다.

 

고치령이 금성대군, 단종복위운동과 관련이 있으며 양백지간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면 이 마구령은 삼국시대 때 중요한 격전장이었던 곳이다. 가까운 곳에 온달성이 있어 고구려의 영역이 이곳까지 확대되었던 것도 이곳이 마군령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과 무관치 않다. 삼국사기의 소지왕 11년의 기록에 보면 "고구려가 침공을 하여 호산성을 함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곧 고구려 장수왕 때 이미 이 고개 넘어 순흥지방을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고개 넘어 임곡리의 임곡성이나 풍기의 토성이 다 고구려 성이었다는 게 이 마구령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고개가 마군령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게 쉽게 이해된다.

 

한편 온달이 이 마군령 전투에서 패배를 하여 후퇴를 해서는 결국 이 마군령 아래에 있는 아단성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하기야 막강했던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영월이나 영춘 같은 곳에서 신라를 넘보기 가장 가까운 고개가 바로 이 고개 아니었겠는가? 그때부터 말을 탄 군인들이 많이 다니던 고개였다고 하여 마군령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324쪽 이하

 

영월은 강원도 땅에서도 가장 남쪽에 오이처럼 누워 있는 곳입니다.

그 영월에는 서쪽에서 흘러들어 온다고 하여 서강이라고도 불리는 평창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평창강은 한강이  동쪽에서 내려와 이곳에서 만큼은 특히 동강이라 불리는 주물줄기와 바로 이 영월읍내에서 합수됩니다.

그러고는 다시 흘러내리다가 함백산 아래 만항재에서 내려오는 옥동천 하나를 더 받은 후 단양으로 흘려보내니 영월의 산자수려함은 이 지세만 보고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중 옥동천과 관련한 산줄기를 신산경표에서는 두위지맥이라 부릅니다.

 

- 신산경표를 편제할 때 지맥 이름은 짓는데 일정한 기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그 산줄기 상에 있는 산이름 중 가장 유명한 봉우리나 가장 높은 봉우리 중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상에 나오는 그것의 이름을 따른다고 하였던 것이죠.

    그런데 현재 위 기관에서 발행하는 지도에는 두위봉이라는 봉우리 이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살펴보면 박선생님께서 신산경표를 편찬하실 때는 두위봉斗圍峰으로 표기되어 있어 두위봉→두리봉이 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므로 차제에 두위지맥은 두리지맥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이것만 봐도 지맥은 아니 산줄기는 생물生物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즉 두류는 옛 우리말 두르였다. ‘병풍처럼 크게 둘렀다라는 의미이다. 큰 산줄기라는 말로 두름/ 의 형태였던 것이다. 두르두류로 변천된 것에 적당하고 그럴싸한 한자 頭流를 갖다 붙인 것이다. 또한 지리두르드르드리디리지리의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 지리에 적당한 한자인 智異를 갖다 붙여 오늘날의 한자어 지리산(智異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지루한 산’, ‘지혜로워 지는 산이라는 말은 삼가자.

 

  - 졸저 전게서 32쪽 

 

고리봉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아예 정리하고 지나가자. 예전 국립공원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실려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 고어古語에서는 고리봉의 고와 두리봉의 두모두 높은 정상의 봉우리를 뜻하는 공통점이 있어 이에 착안하여 두 봉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고리봉이 산행 이정의 중심이 되고 두리봉이 인구의 회자에서 밀려짐에 따라 그 둘을 구분하고자 ''자와 '작은'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어를 놓고 보자면 높을보다는 머리가 더 높고 '대장'의 의미로 자주 채택되었음은 백두산을 통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던 터,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고리봉=고리봉’, ‘큰 고리봉=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86쪽

 

예전에는 백두대간의 대간도 정간이라 불리는 등 용어의 혼란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18세기 초 산경표라는 책이 만들어 지고 그 책에서 백두대간으로 용어가 정립이 된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대간 - 정간 - 정맥이라는 체계를 가진 산줄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볼 수 없는 산줄기 체계를 인문지리에 도입하여 이를 공식화한 유일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 산줄기 인식을 가진 현명한 우리 선조들은 정맥의 하위 개념은 우리 후손들에게 위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한은 그런 산줄기 인식을 처음 제기한  분들 가령 박기성 님이나 조석필 님 등에 의하여 계승 · 발전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던 중 이를 나름 체계화시켜 우리나라 산줄기에 기맥, 지맥 등의 용어를 정립하신 분이 바로 신산경표의 박성태 선생님이신 것이죠.

선생님은 물의 세력과 산줄기의 세력 등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어느 정도 규모나 특징 지을 이유 등을 감안하여 기맥岐脈이라는 개념을 수용하였고 그 하위 개념으로 지맥枝脈이라는 개념도 도출해 내셨습니다.

이 신산경표는 가히 우리나라 산경학 연구의 효시라할 만한 대단한 역작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조석필 선생 같은 분은 쌀 한 톨에 반야심경을 적은 것과 같다고 표현했을까요?

 

당시 산줄기 산행에 목말라 있던 산꾼들은 백두대간을 마친 뒤 들불처럼 정맥 - 기맥 - 지맥 산행에 뛰어들었으니 산줄기에 관한한 박선생님은 거의 신神이었습니다.

아니 편안하게 반신반인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분이 제게는 사부님이셨고 미련한 저는 당신께서 주창하신  7정맥도 해설하는 영광까지 안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위대한 업적을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저는 단 한 치도 용인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신산경표학파'의 대변인 노릇까지도 톡톡히 하였다고 자부합니다.

골수분자였던 것이죠.

 

선생님의 이 이론의 근저에 흐르는 '정신精神'은 물론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입니다.

즉 산줄기가 맥을 다하는 곳 즉 끝은 당연히 물이어야만 하였고 그 물 중에서도 물과 물이 만나는 곳인 합수점 더 자세히는 이 산줄기와  관련한 물과 이 산줄기보다 한 등급 위의 물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만나는 산줄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박성태 선생님은 역저 '신산경표'에서 과감하게 대간과 정맥까지도 손을 대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메스를 댓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실제와 맞지 않은 부분 즉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을 하였다는 것이죠.

즉 백두대간은 영신봉에서 하동의 노량까지 연장시켜 신백두대간이라 하였고 남한의 9정맥을 7정맥으로 만들면서 이름도 다시 지었는데 이 역시 선생님 정도의 연구와 '산자분수령'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누구든 뒤에서 꿍시렁 거릴 수는 있어도 감히 앞에서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존에 대한 도전은 그만큼 나름 연구나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께 필적한 이론을 제시할 그럴 만한 인물이 당시는 없었던 것이죠.

그 결과 저는 자신있게 남한의 산줄기는 1대간 7정맥 6기맥 162지맥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순전한 선생님의 연구결과물이라고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좀 달랐습니다.

살펴보면 기맥이나 지맥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산경표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개념이기 때문이었던 같았습니다.

하지만 정맥 만큼은 예전 원산경표인 9정맥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신산경표의 원취지를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극성스런 신산경표의 추종자들 조차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신산경표의 이름이 아닌 원산경표의 이름으로 9정맥을 마쳤으니 결과적으로 신산경표의 정신을 훼손하는 장본인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어찌보면 박선생님의 매니아이면서도 선생님의 정신을 조롱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던 것이죠.

이런 걸 두고 모순矛盾이라고 하던가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는 어느 정도 의도적인 일이라고도 보였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후학으로서 선생님을 연구하고 그 뜻을 펼치는데 노력을 게을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어쨌든 저 나름대로 신산경표의 전도사 역할을 하면서 그들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를 뜯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들의 지론도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이론에 모순점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즉 선생님의 신산경표가 원산경표의 큰 원리 곧 대원칙이라 할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합당치 않은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있다'는 단정이 아니라 '있을 수 있다'는 추정 정도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산자분수령이라는 용어는 대동여지도 발문에 나오는 말이긴 합니다. 

즉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는 말인데 우리는 이를 관용구로 해석하여 산 곧 산줄기는 분수령, 분수계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니 산줄기가 분수계이므로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니 곧 물줄기는 산줄기의 울타리가 되므로 곧 모든 산줄기와 물줄기는 '1산줄기=1물줄기'라는 법칙이 적용되게 됩니다.

이는 만고의 진리로서 1개의 산줄기가 가지를 칠 때 그 가지줄기와 원줄기(상위등급의 산줄기) 사이에서는 단 하나의 물줄기가 발원한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이를 근거로 선조들이 산경표를 만들었으니 우리 후손들은 이에 터잡아 그 하위 개념의 산줄기를 만들면서 이 원칙을 당연히 적용하여야 했습니다.

박선생님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고 특히 선생님께서는 과감하게 9정맥을 7정맥으로 만들었던 것 아닙니까?

매니아 분들!

이런 사실을 알고나 계십니까?

 

그럼 이쯤에서 공부거리 하나를 제시합니다.

오늘 산행과도 관련이 있으니 복잡한 것은 집어 치우고 오늘 진행할 산줄기를 선생님께서 직접 만드신 신산경표의 산경도로 공부해보죠.

후학이라고 자처하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 선생님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대로 알고 다닙시다!

극좌 혹은 극우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처럼 산에 정치색까지 동원하여 남을 폄훼한다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참고도 #1

 

신산경표의 그림입니다.

백두대간이 백두산을 출발하여 지리산으로 가는 도중 함백산 만항재 부근에 이르러 가지 줄기를 하나 내놓습니다.

그러고는 그 사이로 물줄기를 하나 내놓는데 이게 바로 옥동천입니다.

그런데 이 옥동천과 두위지맥이라고 불리는 가지줄기 그리고 죽렴지맥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가지줄기와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석항천과의 관계가 궁금해 집니다.

이 줄기에는 겹침줄기가 있어서 더 문제입니다.

"난 그냥 그어준 대로 따라가니 궁금해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면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긴 합니다.

하지만 제 반론 좀 들어보소!

 

선생님의 신산경표를 봅니다.

선생님의 신산경표는 산줄기를 우선으로 합니다. 

합수점 이외에 산줄기의 길이도 본다는 것이죠.

즉 신산경표에서는 뚜렷한 논거 없이 -물론 선생님께서는 유역도 보고 세력도 보십니다. 나아가 물줄기 건너편의 산줄기와 물줄기의 세력도 감안하십니다.-  합수점을 끝으로 보는 산자분수령의 원리를 지양止揚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저 지맥이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원칙(?)과는 무관한 산줄기도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이해를 돕고자 이 두위지맥의 바로 위에 있는 지맥을 그 예로 보도록 합니다. 

참고도 #2

 

위 개념도에서 보다시피 백두대간 상의 금대봉에서 좌측으로 가지 줄기를 하나 치게 됩니다.

태백산맥 국토대종주라는 타이틀로 백두대간의 일부 구간을 진행하던 남난희가 1984. 2. 11. 대형 알바를 하던 금대봉 바로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지장천과 어천이 발원하건만 신산경표에서는 그저 산줄기가 긴 쪽인 곳을 중시하여 겹침줄기 '가'의 0.9km를 긴 쪽인 '나'쪽에 붙여 56.9km로 확정하고 그 이름을 가장 유명한 봉우리인 금대봉에서 가져와 금대지맥으로 명명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다'줄기는 자체 줄기인 40.5km로 지맥의 요건을 갖췄는 바, 이는 그 줄기의 최고봉의 이름을 가져와서 노목지맥이라 이름됩니다.

 

간단하게 이게 신산경표의 지맥이고 겹침줄기가 있을 때 도상 거리를 확정하는 원리이자 규칙입니다.

아닙니까?

예.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그런데 대한산경표는 시각을 달리합니다.

즉 '1물줄기 1산줄기'의 원칙을 따르면서 산줄기의 대원칙인 산자분수령 그중에서도 합수점에 충실합니다.

그러니 이 금대지맥이나 노목지맥이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먼저 봅니다.

위 개념도에서 명백하듯 그 물줄기는 지장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장천과 그 상위등급의 물줄기인 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이 산줄기의 주줄기가 그 맥을 다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럴 경우 위 겹침줄기는 오히려 노목줄기의 몫이 되면서 그 끝은 그 합수점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고 난 후의 줄기 모양새도 금대지맥이 남산 ~ 오음봉으로 가는 게 아니라 상정바위 부근에서 어천과 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는 것이죠. 

참고도 #3 대한산경표에서 보는 지맥

 

미묘한 차이가 납니다.

아니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 줄기의 길이도 틀려지거니와 이름 또한 물줄기 이름을 따 지장지맥과 어천지맥이 되어 신산경표와는 달리 주종主從이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는 오늘 진행한 두위지맥(아까 얘기한 바와 같이 곧'두리지맥'으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과 죽렴지맥을 봅니다.

참고도 #4

 

이 지맥들도 위의 금대지맥이나 노목지맥의 경우와 함께 보자면 내용이 더 복잡해집니다.

즉 겹침 줄기 A 이외의 줄기 B와 C중 그 길이가 더 긴 C로 이 겸침줄기가 붙어야 하므로 그럴 경우 죽렴지맥이 아닌 두위지맥은 오히려 A + C가 되어 54.5km의 긴 줄기가 됩니다.

반면 B는 자체적으로 하나의 줄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30.3km가 되어 지맥의 요건인 30.km가 넘으므로 가장 최고봉의 이름인 질운산의 이름을 따 '질운지맥' 정도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이 A줄기를 B에 붙여 48.4km로 지맥을 확정지으면서 이름 또한 두위지맥이라 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셨을까요?

선생님 마음대로?

천만의 말씀!

 

매니아 분들!

왜 그러셨을까요?

선생님께서는 분명 마구잡이로 그리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신산경표 매니아 정도되면 이런 의문을 갖고 연구를 해봤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 하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시는 분들은 없습니다.

그냥 가기만 하면 됩니다.

순종順從에 길들여졌나요?

선생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곧 법이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

중이 절이 싫으면 절을 떠나야지 뭔 잔소리를 그렇게 하면서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하느냐?

무슨 빨갱이 나라 같은 분위기입니다.

혹은 무조건 좌파로 몰아버리는 분위기!

 

선생님의 심중을 헤아리는 아니 헤아릴 수 있는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는 그런 자세는 오히려 선생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래도 박선생님은 '신산경표'라는 책까지 쓰신 분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란 산줄기는 다 꿰뚫고 계신 분입니다.

많은 연구를 하셨다는 얘기죠.

선생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 봅니다.

 

선생님은 물의 흐름을 보신 것 같습니다.

이 부근의 산줄기나 물줄기의 중심을 영월과 동강, 서강을 보신 것이죠. 

그러니 이 동강의 좌측 울타리를 점하고 있는 것을 주왕지맥으로 설정을 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에 대응하는우측 울타리를 보실 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그 울타리가 바로 두위(리)지맥입니다.

그러니 그 울타리가 되는 산줄기는 위 금대지맥이나 노목지맥에서 본 산줄기의 길이와는 또 다른 기준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 선생님께서 보시는 산줄기의 관점은 지세를 크게 보고 거기서 유역을 살피는 그런 포인트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산을 보는 관점을 나름대로 추측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대한산경표를 만든 '산으로' 박흥섭 님도 같은 견해입니다.

 

남의 것을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 논리의 근거를 살펴보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배척할 것은 배척하는 그런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이렇듯 신산경표에서 지향하는 산줄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분들도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새롭게 산줄기를 그었다면 신산경표를 모태로 하여 물줄기와 산줄기만을 고려해 그었을 것입니다.

 

대한산경표.

이런 저의 생각과 일치하면서 새롭고 간단하게 만든 독창적인 산줄기 표입니다.

대한산경표는 그저 단순하게 물줄기와 산줄기를 기초로 지맥을 그리되 그 우선은 합수점이고 그 다음이 울타리이며 그 마지막 조건이 산줄기입니다.

거기에 이들 줄기를 대입해 비교해 볼까요? 

참고도 #5

 

이런 그림이 됩니다.

즉 이 두 산줄기의 주물줄기는 백두대간에서 직접 발원하는 옥동천이 되므로 산줄기 역시 옥동천과의 함수점으로 가는 주主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여기서 분기한 산줄기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인 석항천은 그가 한강으로 합수할 때 소멸하는 산줄기가  곧 종從줄기가 되면서 그 이름은 석항지맥이 된다는 그런 애기입니다.

어렵습니까?

간단하잖습니까?

산줄기를 다녀보고 산행기를 쓰면서 연구를 해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한 번 깨달으면 절대 잊어먹지 않는 이론.

바로 대한산경표의 산줄기를 보는 원리입니다.

 

복잡한 얘기는 이 정도하고 이제 산행이나 즐기죠.

07:05분 열차로 오늘 옥동지맥 들머리인 수라리재로 가기로 합니다.

무궁화호 열차는 이제 완전하게 비둘기호가 된 느낌입니다.

역이라는 역은 죄다 서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제천을 지나 영월로 가며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면서 예전 추억도 즐깁니다.

원주를 지나면서는 루프식 철도인 똬리굴도 보고 그 교각 밑의 금대리도 봅니다.

금대리를 통하여 치악산도 참 많이 다녔습니다.

신림역을 지나더니 봉양에서는 충북선 고속화 작업 현장도 봅니다.

그러더니 영월 지나 예미입니다.

 

10:22

열 사람 정도 내립니다.

예미 부근 주민들에게는 이 열차가 가장 편한 교통 수단일 듯 싶습니다.

조용한 역사이지만 들어가보니 모두 현대식 시설입니다.

나무 의자에 칠판 같은 낡은 열차시간표와 운임이 써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흔적도 보이질 않습니다.

열차표를 받으러 개찰구 앞에 서 있던 역무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역을 나서면 광주리에 참외나 옥수수를 쪄서 들고 온 아낙과 그 옆의 코흘리개 녀석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빛바랜 '예미금방'의 간판과 여인숙 수준에도 못 미칠 장급여관 간판을 보고는 가벼운 웃음을 띌 수 밖에 없어집니다.

슈퍼와 같이 영업을 하는 다방의 미스 김은 도시로 나갔는지 배 나온 마담의 흥얼거리는 목소리만 들려오고 가겟집은 파리만 날리고 있습니다.

한창 석탄으로 재미보던 시절은 다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10분이면 도착한다던 택시기사는 아직도 오지 않고.....

10시 40분이나 되어서야 도착하는군요.

그 택시를 타고 수라리재로 올라갑니다.

 

지도 #1

수라리재는 영월군 중동면 화원리와 이목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입니다.

지리산의 황산전투에서 대승을 하여 힘을 얻게된 이성계에 의하여 폐위된 공양왕이 강릉 부근으로 귀양을 가는 도중 이곳에서 수라상을 받았다고 하여 수라리재라고 한답니다.

하고 많은 곳 중 하필이면 이 고개에서 수라상을 받았을까요?

믿어지지 않는 대목.

도착하자마자 산으로님은 메모에 열중하고 수헌님은 주변을 돌며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답습니다.

바로 아래로는 이목리로 내려가는 길로 내려가는 길은 구절양장折羊입니다.

우측으로는 김삿갓면의 외룡리로 내려가는 길인데 아주 잘 나 있습니다.

11:00

자, 이제 그만 올라가죠.

들머리 앞에 있는 묘같이 생긴 것은 위장용이고 그 안은 호입니다.

아주 교묘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11:08

들머리에서 조금 치고 올라가면 이내 고개를 숙여 예전 이목리와 화원리를 오가던 작은 고개를 지나,

임도로 달라 붙습니다.

이렇게 길이 좋으려나?

아!

밤도깨비님.

잘 계시려나?

임도 수준의 길은 이내 끊어지고 지맥스럽게 마구잡이로 맥의 흔적을 찾아갑니다.

가끔 길잡이를 해주는 선답자의 표지띠가 진행을 도와줍니다.

11:49

가뿐 숨을 몰아쉽니다.

영광산입니다.

제가 열심히 다니던 백두사랑산악회에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제 지맥을 120개 정도 하셨을라나?

열심히 하는 팀들입니다.

 

부근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합니다.

거의 한 시간을 보냅니다.

올라왔으니 또 내려가야죠?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지도의 등고선에서 명백하듯 직진을 하게 되면 망전리 계곡으로 떨어지는 길입니다.

지도 #1의 '나'의 곳 안부를 지나 임도로 붙어 망경대산으로 오르는 맥길에 충실하려면 미리 이 지도를 보고 그어온 트랙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나침반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 시대이니....

트랭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꼼짝할 수 없는 곳이 이 지맥길이기도 합니다.

트랙을 올려준 지맥꾼들이 없으니...

우틀합니다.

좌측으로 망경대산이 가깝게 보이는 것 같은데....

없는 길도 귀신같이 길을 찾아내는 독도의 마술사 '산으로'님.

신산경표에서 제시한 162지맥을 모두 졸업하였으니.....

괜히 꾼이 아닙니다.

홀로산행을 하면서 얻어지는 경험이라 여겨집니다.

13:00

우측으로 임도가 보이더니,

제법 잘 지은 민가입니다.

개는 열심히 짖어대고....

우측 임도를 따릅니다.

하지만 지도에서 명백하듯 마냥 임도만 따를 수도 없습니다.

이 임도는 현재 MTB용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미원 1.5km 지점에서 우측으로 치고 올라갑니다.

물론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임도만 따를 수는 없는 노릇!

그 입구에 제 표지띠 하나 달고 갑니다.

뒤에 오는 후답자여!

제가 앞서 길을 내고 가듯 그대도 후답자를 위하여 길의 흔적을 내고 지르밟고 오소서!

지도에서 보듯 임도는 구곡양장이므로 어디를 어떻게 치고 올라갈까 지도와 현장을 잘 대비하여야 합니다.

산으로님이 이곳을 지날 때와 지금은 시기적으로 차이가 많이 납니다.

이제 녹음이 짙어지는 계절에는 함부로 숲으로 든다는 것이 무섭습니다.

빠져나갈 틈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죠.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이것저것을 뜯으며 내려오면서 조언을 한 마디 하십니다.

"그냥 임도 따라 오르는 게 가장 빠른 길이외다!"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우린 그렇게 못 합니다.

13:22

밀려가다시피하여 지도 #1의 '다'의 곳까지 임도를 따릅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곳입니다.

2011년도 새로 만들어진 임도로 급좌틀합니다.

지나온 영장산.

왼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제 망경대산도 많이 낮아졌습니다.

매봉산?

그 뒤가 제대로 보인다면 대간의 태백산과 함백산이 보여야 할 텐데....

임도를 따르는 방법 이외에는 달리 뚜렷한 방법이 없고....

별 도움이 안 되는 이정목.

그래도 여기서 직진하는 루트는 능선을 따르는 가지 줄기이므로 이따 또 언급이 됩니다.

13:33

더 이상 임도를 따랐다가는 우회하는 모습이니 이 정도에서 치고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정상과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왼쪽에 표지띠 한 장을 붙여놓고 망경대산으로 향합니다. 

당연히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맥꾼들은 사륜구통 엔진을 장착했으니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오르다 힘이 들면 잠시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조망을 합니다.

아까 무용無用한 이정목에서 직진을 하는 능선입니다.

898.2봉을 지나 드룹산901.6m으로 이어지는 능선입니다. 

오르는 길 막바지에는 바위도 타야하고....

13:50

정상석에 무인산불감시카메라,

그리고 3등급삼각점(예미311)이 있는 망경대산입니다.

이 망경대산에 오름으로써 영월군 김삿갓면을 만납니다.

삼국의 격전지였다가 고려에 이르러 편안히 넘어갈 수 있는 곳이라 하여 寧越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영월.

예전에는 하동면이었죠?

아주 적절한 처사입니다.

착한 '백두사랑산악회'.

아쉬운 것은 옥동지맥이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팀들은 합수점으로 가지 않고 신산경표에서 제시한 길로 갔으니 사실 두위지맥이 맞습니다.

팀장인 '본듯한' 대장님은 상당히 공부하는 자세가 진지한 분입니다.

요즘은 조금 그 열정이 조금은 식어지신 듯한 느낌이 들고....

정상 정경입니다.

조금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김삿갓면과 중동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합니다.

진동재로 내려가는 길도 역시 없습니다.

이정목은 망경산사와 휴양림을 알려주고는 있으나 지맥길과는 무관합니다.

14:01

그러고는 만나는 임도.

그리고 이정목.

자전거꾼을 위한 그것입니다.

직진합니다.

 

지도 #2

14:09

임도를 따르는 도중 우측으로 능선을 탈 수 있는 길이 보이지만 조금 더 느긋한 길로 걸으려는 욕심으로 그 루트를 버리고 진행하다 보니 길은 자꾸 좌측으로 쳐집니다.

하는 수없이 지도 #2의 '마'의 곳에서 우측으로 틀어 능선으로 붙습니다.

다시 맥길에 진입합니다.

길은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습니다.

14:16

996.6봉을 지나고,

14:23

917.5봉에서는 석탄의 맥도 봅니다.

여기서 노천 탄광이라도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

14:35

자영재로 떨어집니다.

자전거가 다니는 길이니 이 정도가 되는데.....

좌틀합니다.

가야할 봉우리.....

저 좌측이 태화산.

14:59

4등급 삼각점(예미435)이 있는 964.2봉입니다.

서울 마운틴 클럽에서 자령치봉이라 작명을 했는데 누군가 훼손하였군요.

아마 가지치기 작업을 하면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우측이 드룹산이던가?

정신없이 가다보니 조망할 시간도 없습니다.

조망도 없다보니 흐름도 놓치고....

좌측으로 석항지맥의 완택산908.6m과 그 우측이 고고산852.9m?

890.2봉.....

무덤을 지나니,

앞으로도 조망이 트입니다.

바로 이 앞봉우리에서 우리는 좌틀할 겁니다.

그게 합수점으로 가는 루트일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신산경표의 두위지맥은 직진하여 저 앞 응봉산1013.3m을 넘어 계속 직진하여 계족산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겠죠?

합수점으로 가느냐!

아니면 그냥 긴 줄기를 따라 가느냐!

대한산경표와 신산경표의 차이점입니다.

삼각점봉을 빠져나와 석봉산에서 내려오는 영월읍 면게와 만납니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영월읍과 김삿갓면의 면계를 따라 걷습니다.

지도 #3

15:13

잡목이 많이 성가시지만 그런대로 걸을 만합니다.

지도 #3의 '바'의 곳을 오릅니다.

좌측으로 도락개마을을 보고....

15:19

그러고는 987.5봉 갈림길 입니다.

두위지맥으로 진행하는 사람들은 직진을 하면 될 것이고 산자분수령에 충실하려는 꾼들은 여기서 좌틀하여야 합니다.

누군가 진입금지 표시를 하여 놓았군요.

이제부터는 온전하게 김삿갓면 안에서 옥동지맥을 진행합니다.

15:30

958.1봉을 넘어,

계속 직진하면서 좌측으로 망경대산을 봅니다.

15:52

밋밋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르막이 힘들군요.

일반 산행하시는 분들이 많이 찾는 832.8봉.

영월군에서는 덕가산이라는 정상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왜 덕가산이죠?

그 덕가산이라는 곳에서 오늘의 마지막 삼각점(예미437)을 봅니다.

근데 여기는 웬 개미가 그렇게 많은지....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내려가죠. 

 

지도 #4

좌측 김삿갓면의 예밀리.

맨끝이 태화지맥의 태화산 부근.

그런데 앞으로 진행할 능선이 울퉁불퉁한 게 여간 어려워 보이질 않습니다.

16:15

내려가는 길은 완전히 잡목이 막혀 있어 상당히 어렵게 진행을 합니다.

완전히 칼등을 지나는데 그나마 좌측으로 트이는 조망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옥동천이 보이고...

그리고 예밀교와 옥동리입니다.

좌측으로 어래산과 선달산은 보이지 않고....

우측으로 보이는 응봉산에서 이어지는 능선.

저 끝이 845.4봉 정도가 되려나?

16:26

지도 #4의 '사'의 곳도 완전히 칼등.

조심스럽게 진행하여야 할 곳입니다.

저 뒷봉우리가 맞대산에서 수리봉으로 이어지는 줄기인데 그렇다면 조금만 더 가면 그 우측으로 태화산으로 이어지는 줄기가  볼만할 것 같습니다.

16:29

지도 #4의 '아'의 곳에 있는 송전탑을 지나고,

16:33

좌측으로는 에밀리로 내려가는 길.

직진하여 진행합니다.

662.9봉은 봉우리라는 인식도 하지 못하고.....

16:48

지도 #4 '자'의 곳에서 좌틀하고는 ,

17:09

안부를 지나 611.6봉을 오르지만 진도가 나가질 않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가 7시 반 정도에 있으니 6시까지는 내려가야 하산식을 하고 영월로 나갈 수 있을 텐데.....

17:19

탈출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17:30

688.7봉에서 좌틀하고...

맥길은 여전히 사람을 괴롭힙니다.

아주 가파른 등로를 내려가,

17:47

대야리 부근으로 접근을 하고는,

마지막으로 옥동리를 보고.... 

지도 #5

17:50

아주 절벽입니다.

원래 핑크색 방향으로 진행을 하여 약 1.5km 정도를 더 가야 하는데 시간 상 뒤로 미루기로 합니다.

우측으로 노니골로 내려가,

시멘트 소로를 만나,

아프리카 미술 박물관을 지나 좌틀하여,

18:31

고씨동굴 매표소 및 주차장에 도착하여 화장실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 음식 주문하고 잽싸게 씻습니다.

시간이 짧은 게 좀 안타깝습니다.

영월로나가 저는 19:30 버스로 안양으로 이동을 하고 두 분은 영월역으로 가서 19:47 열차로 올라갑니다.

영월에서 안양까지 2시간 이 조금 더 걸리는군요.

집에 들어가니 10시가 조금 넘는군요.

영월이 그다지 먼 곳이 아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