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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명산

친구들과 떠난 두타행.....

이제 가을도 끝물인가요?

하긴 상강霜降인 오늘 그 절기에 맞게 며칠 전 서울에도 서리가 내렸다고 하니 그도 그럴 법합니다.

단풍이 한창인 설악에 갑자기 불어닥친 한파로 단풍은 제대로 구경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보다 남쪽에 있는 산들은 어떨까요?

 

이미 두 달 전 예약된 친구들과의 모임을 따라가 봅니다.소위 두타산의 베틀바위 루트로 예전에는 가파른 경사와 곳곳에 산재해 있는 바위들로 인해 위험한 코스 인식되어 출입을 통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부분적으로 데크와 로프 등 안전시설을 설치하여  일반인들의 탐방을 허용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없던 루트를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기존 두타산으로 오르는 루트의 사이사이를 연결한 것인데 거기에 그럴싸한 이름 몇 개를 붙여 산객들로 하여금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연출도 하였으니 어느 정도 상업성이 가미된 훌륭한 작품인 듯싶습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산객들이 몰리다 보니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자연파괴는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백두대간을 하면서 이 두타산은 댓재 ~ 두타산 ~ 청옥산 ~ 이기령 ~ 백복령으로 이어지는 31km의 종주길로 최근에도 여러 차례 진행했지만 두타산만 오르내리는 단산 산행이나 두타산 ~ 청옥산을 잇는 능선 산행은 거의 35년 만이군요.

그만큼 감회가 깊은 산행입니다.

그것도 출범한 지 얼마 되지않은 5760트래킹 팀과의 산행이니 그 의미는 더 깊다 할 것입니다.

오늘은 두타산을 다녀와서 23:00 동서울 ~ 성삼재 심야버스를 타고 지리산에서 동료들을 만나 지리서부능선 산행을 하여야 하는데 이래저래 마음만 바쁩니다.

 

06:40

군자역 1번 출구로 나갑니다.

 

안락한 금강고속관광 버스가 기다리고 있군요.

오래간만에 최 회장 님을 만나고 2년 전 청계산 산행을 함께 했던 영숙 씨도 만납니다. 

정시에 군자역을 출발한 버스는 사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을 태우고 바로 두타산으로 향합니다.

이런저런 행사를 치르면서 상품도 하나하나 나눠주고...

저는 운좋게 아이젠을 받습니다.

사이즈가 작은 것이군요.

임자가 갑자기 바뀝니다.

영동고속도로를 질주한 버스는 옥계해수욕장을 지나면서 오랜만에 동해의 파란 물을 보여주고....

그러고는 두타산의 입구 무릉계곡 주차장으로 들어섭니다.

벌써 주차장은 만원사례.

다행히 기사님의 노련한 수완으로 안으로 밀고 들어가 차를 턴할만한 곳을 찾아 대원들을 내려놓습니다.

신선교로 물을 건넙니다.

이 물은 두타산 박달골과 청옥산 바른골애서 흘러내린 물이 쌍폭에서 하나로 만나 흘러내려오는 물입니다.

조금 이따 전천이라는 이름으로 동해로 흘러들어 가게 되겠고....

이런 단산 산행에서는 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저같이 주로 산줄기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물줄기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니 각설하고.....

그 물줄기 우측으로 삼화사를 품고 있는 철산467.5m이 그 위용을 드러내는군요.

이제 오늘 우리가 걸을 베틀바위 산성길로 들어섭니다.

산성은 두타산성을 이름이겠고 이는 임진왜란 때 우리 의병들의 항거한 호국산성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두타산성은 국민관광지 무릉계곡 내에 있는 석성으로 동석산성이라고도 불린다. 102년(신라 파사왕 23년)에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1414년(조선 태종 14년)에 삼척부사로 왔던 김맹윤이 높이 1.5m, 둘레 2.5km의 산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 쳐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산성으로 피난하였다. 당시 아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남북 15리 절벽에 도열시켜 적에게 위세를 보이자, 왜군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백복령 방면으로 퇴각했다. 빨래하던 노파가 이 산성의 사정을 제보하듯이 이방의 계략대로 알려주었더니 왜군은 이기령을 넘어 우회 침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치밀한 계략. 왜군들은 성중에서 전멸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 고장 청년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격침했다는 항쟁지로, 현재 성터가 남아 있고 호국의 얼이 담겨 있는 곳이다.

 

여기서 이기령이니 백복령이니 하는 지명들이 나오는데 백두대간을 하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죠?

그런데 베틀이란?

바위 모양이 베틀을 닮아서 베틀바위라 하고 하늘나라 질서를 위반한 선녀가 벌을 받아 하강하여 이곳 무릉도원 명승지 소금강골에서 삼베 세필을 짜고 개과한 후 승천했다 전해진다 하여 그렇게 이름했다고 합니다.

다 짜여진 가짜 전설이고 각색된 이야기임은 굳이 깊게 살펴보지 않아도 명백합니다.

 

우리나라에 베틀봉이라는 산 이름이 몇 개 됩니다.

낙동정맥에서 분기한 금호지맥이나 덕유산 부근에도 있고....

그런데 이곳에도 다 이 베틀봉과 관련한 전설로 늙은 홀어머니가 나오거나 선녀가 나오기 마련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이 베나 명주 등을 짜는 틀의 베틀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 일본놈들과 관련이 있기 마련이죠.

즉 이 베틀봉은 원래 기산機山이었습니다.

물론 이 '機'자가 '베틀 기'자이니 그걸 풀어써서 베틀봉이라고 붙였다면 사실 할 말은 없어집니다.

여하튼 예전 일본 지도에는  'ペテル베테루'라고 하여 가타가나로 이 봉우리를 표기하였다는 것만 알고 지나도 되겠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이 베틀바위 루트는 각 지방에서 온 살람들로 인산인해입니다.

너덧 개 산악회가 엉겨서 걷다 보니 새치기하는 얌체족도 눈에 띕니다.

누군 빨리 걷지 못해서 못걷냐!

이런 길에서 서로 몸이 살짝 부딪치기라도 하나 밀리는 날이면?

누구의 음택인고?

'등산로 아님'은 좀 위험하긴 하여도 예전에는 등로였다는 간접적인 사실을 보여주고...

물론 낭떠러지는 예외긴 해도....

우측 베틀바위를 따릅니다.

속도가 날 리 만무.....

새치기하지 맙시다!

조망이 없는 오름길....

그러다 우측으로 뭔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질 급한 놈은 조금이라도 먼저 보기 위하여......

무릉이란 말은 당연히 도교에서 온 말이겠고.....

이 무릉계곡은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지었다고 하는 설과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金孝元)이 명명했다는 설이 갈리고 있으나 이 두타산이 임진왜란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가친 후 도탄에 빠진 조선의 백성들이나 유토피아를 갈망하던 선비들의 심정에서 이곳을 무릉계곡이라고 했다는 후설에 한 표를 던집니다.

이는 지리산의 한신바위나 운장 바위 그리고 서울의 동묘 등도 이런 설을 뒷받침하기 때문이죠.

 

그 무릉계곡의 한 지곡支谷 바른골 좌측으로 청옥산1403.7m이 삼각형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는 선이 바로 백두대간길이라는 것이죠.

삼화사 뒤쪽의 이 지능선은 백두대간의 1145.8봉에서 가지를 친 줄기로서 중앙 우측의 643.5봉을 거쳐,

이 철산을 지나 백두대간의 이기령에서 내려온 물과 무릉계곡의 물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단맥이 됩니다.

이기령.

대간을 하는 이들이 청옥산, 고적대를 지나면서 물 부족으로 거의 초주검이 되어갈 때 풍부한 양질의 물을 제공해주는 그야말로 대간꾼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죠. 

물만 있다면?

비록 건폭이지만 그림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림 폭포인가요?

저게 베틀바위인가?

빨리 가봅시다.

두 갈래 길.

가끔 길 건너로 눈길을 줘보기도 하고....

그런데 유별나게 오늘 삼화사에서 염불소리가 크게 들리며 법고에 징소리까지 들리는 것을 보니까 무슨 큰 행사가 있는 거 같습니다.

눈썹바위?

이건?

중지中指바위?

영어로 얘기하면 Eat yeot rock?

한 번 새치기파는 영원한 새치기 파!

우선 맛보기로.....

하도 "아저씨, 사장님"을 찾는 대구 아줌마들 때문에 촬영에 지장을 많이 받습니다.

혼자 독차지 하려면 평일날 오실 것이지...

다 그러려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고는 다음 코스로!

아!

이게 미륵바위...

내세에 다시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륵불의 모습이라는데 나같이 불심이 약한 사람의 눈에는....

무릉계곡 초입.

쌍용양회 공장과 부수시설이 보이고 전천箭川이 된 이 무릉계곡의 물은 장취산290.9m 좌측의 동해항으로 흘러들어 가는군요. 

마천루가 있다는 곳으로 가보죠.

너덜겅 지역도 지나고....

빙하시대의 산물이죠?

빙하시대를 거치면서 커다란 암석이 녹는 과정에서 지질에 따라 자잘하게 나뉘기도 했고 그러면서 풍화작용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는...

그러니 이곳은 태백산맥이 아닌 백두대간의 한 자락이라는 것이죠.

산을 다니는 사람이 산맥이름을 거론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도골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쓰지 않던 명칭인데.....

오히려 대간길의 박달령에서 차용한 이름인 박달골이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생각 같아서는 대열에서 이탈하여 좀 일찍 진행하여 두타산성까지라도 갔다 올 것을 너무 신사적(?)으로 걷는 바람에 제대로 된 산행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군요.

베틀봉788.8m 오름길을 버리고 마천루로!

안행雁行.

기러기가 나는 것 같이 일렬로 서서 걷기.

숯가마터.

여기서는 좌틀하고,

산성12폭포를 건너고.....

이곳을 조금 이따 바라보면 말 그대로 장관이었죠.

무릉계곡 건너편의 643.5봉을 보면서 산성폭포 중단부를 지납니다.

다시 두타산성 갈림길을 지나고.....

친구 선영으로부터 메시지가 옵니다.

"사진을 보았지만 예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친구는 옛 친구지만 20대의 청년이 아닌 60대 중반의 할아버지이니......

"이따 쌍폭에 가서 예전에 네가 그 위에서 사진을 찍다가 떨어질 뻔했던 기억을 되살려 줄게."

마천루.....

저는 티베트의 레 왕궁이 연상이 되는군요.

아까 지났던 산성폭포.

12단이라고요?

대단한 폭포입니다.

큰눈썹바위?

석간수.

먹을 만하던데......

기도터에서는,

다람쥐의 야성을 잃게 하려는 인간들의 만행이 계속되고......

대간길....

다음에는 저 길을 걸으면서 오늘의 이 길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용추폭포가 될 바른골.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가보고 싶고 또 걷고 싶은 곳이 많은 걸까?

박달골.....

그리고 두타산.

그래.

오늘은 그저 마음을 비우고 두타행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조용히 오늘 주어진 길을 걷자.

이 정도만 해도 어디인가.

아직 다리가 성하니 다음에 다시 날 잡아서 주중에 오면 되겠지.

데크를 내려오면서 바른골을 봅니다.

이게 마천루.

아니면 병풍바위?

아니 울산이라 하자.

설악산 울산바위의 원래 이름은 이산籬山이었습니다.

속초시내를 에워싸고 있는 울타리라는 얘기죠.

그러던 것이 울산이 되었고...

그래서 울산蔚山때문에 엉터리 얘기도 많이 탄생하게 된 것이고.....

이것도 그런 울타리 같습니다.

두타산으로 오를 수 있는 오리지널 옛 코스 삼거리.

우틀합니다.

친구 선영이 같이 나도 이 두타산 오름길 즉 박달골은 기억에도 없고.....

너무 대간길만 다녔었나?

동규도 기억에 없다니....

그러고는 쌍폭입니다.

좌측 박달골의 물과 우측 바른골의 물이 합쳐지는 폭포라 해서 쌍폭인 것이죠.

저 위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던 녀석.

덕분에 팬탁스 카메라도 아작 날 뻔했었죠.

기억에 없답니다.

김웅인가?

쌍폭을 뒤로하고 그 우측의 바른골 용추폭포로.....

물의 무게로 인해 폭포 아래 깊은 웅덩이 즉 소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龍湫폭포입니다.

그 아래에는 온갖 각자가 새겨져 있고....

지리산에 가면 저런 각자가 한두 개가 아니죠.

 

바쁜가? 좀 바쁘더라도 여기까지 왔으니 20분 정도만 더 시간을 내서 백운동 아래로 내려가자. 그러면 ‘남명선생 장구지소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둘레꾼을 반겨 준다. 남명 선생은 지리산으로 오르기 위해 이곳을 한 번 찾았다고 유두류록에 적고 있다. 선생이 유두류록을 쓴 해가 1558년으로 선생의 나이 57세일 때이고 4년 후 산천재에 뿌리를 내렸으니 굳이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아니더라도 그 후 10년 간 지척인 거리에 있는 백운동의 답사 횟수는 헤아리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가 바로 이 각자이다. 선생이 여기 와서는 지팡이를 놓고 신발을 벗고 쉬어갔다는 ‘南冥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刻字이다.

 

사실 남명 선생은 “바위에 이름을 새겨 자신을 만고에 알리려는 선비의 정신”을 비판했다. 지난 구간 자세히 본 부사 성여신 역시 스승인 남명의 제명題名에 대한 비판을 언급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피력했다. 반면 점필재 김종직은 쑥밭재를 지나면서 바위에 이름을 새기게 했으며 감수재 박여량은 상류암 암자의 벽에 일행들의 이름을 썼으니 남명과는 생각이 좀 달랐던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이 별로 내키지 않아 했던 각자 행위는 누가 했을까? 살펴보니 백운동칠현이라는 선비들의 이름이 나온다. 1893년 단성 법물에 거주하던 백운동칠현 중 1인인 물천 김진호(1845~1908)는 스승의 문집인 선재집 장판각을 마치고 백운동에 들어와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남명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러고는 기억 속의 문창대 같이 ‘南冥先生杖屨之所’라고 그 각자를 흉내 냈다. 이게 그 각자인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87쪽

이래서 소금강이라고 했나?

학소대.

위에 있는 굴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템플스테이 숙소 뒤로 그림폭포.....

아!

그 행사라는 게 바로 수륙재라는 것이군요.

읽어보고....

저 암반을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놨습니다.

선계仙界를 떠나 다시 속계로......

신선교를 건너면서 신선에서 속인으로 거듭납니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두타산 입구의 전경.

시대도 흘렀으니 그렇게 돼야겠지요.

오늘 행사를 주관하시느라 최성룡 회장님, 김종열 대장님 그리고 총무님.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모두 안전하게 무사히 산행을 마쳤고 뒤풀이까지 성대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대원들의 성숙한 산행 태도 때문이었던 거 같습니다.

이제 이번 산행으로 예전의 혼탁했던 생각을 두타행으로 다 떨구고 온 만큼 이어지는 사회생활은 더 활기차고 실속 있는 그것이 될 거 같습니다.

아무쪼록 5760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저도 시간 되는 대로 친구들 만나러 열심히 나가겠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차량이 밀리는 바람에 20여 분 상관으로 지리산행 버스를 놓쳐 지금 이 시간 지리서부능선을 걷지 못하고 있는 게 못내 아쉽긴 하지만 모든 게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건 아닐 터.

그러니 지리산 도장골 ~ 청학연못 ~ 촛대봉 ~ 벽소령 ~ 바른재 ~ 오공능선 산행은 다음 주로 미룹니다.

 

참.

아이젠 너무 고맙고 잘 쓰겠습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