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만 비가 오는 게 아니라 전국적으로 비가 오니 오랜만에 장마라는 단어를 듣습니다.
도대체 장마가 얼마 동안 없었던 거야?
기후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원래 주중에 악착같이 시간을 내서 동서울터미널에서 23:00에 출발하는 성삼재행 버스를 타서는 노고단 대피소에서 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길상봉 노고단에 올라가서 아침 일출을 보고는 반야봉에 오른 다음 묘향암으로 내려가 호림 스님을 친견한 후, 이끼폭포로 하산길을 잡고는 뱀사골을 거쳐 반선으로 내려가 고남 형님, 고우석 대장과 이른 저녁을 먹고는 상경하려 했는데.....
그런데 주중에 계속 비가 옵니다.
하는 수없이 주말 지리산에 듭니다.
어느 산악회나 만차.
함양고속도 마찬가지....
다행히 반더룽에서 자리 둘을 내주는군요.
02:40
반더룽의 버스는 화엄사를 거쳐 성삼재로 오릅니다.
1988년 이전만 해도 언감생심.
성삼재는 상상도 못 했던 지리산 산행의 들머리였죠.
당시 지리산 노고단으로 오르는 일반적인 루트는 화엄사 ~ 코재 ~ 노고단이었습니다.
화엄사 경내를 통과하는 제1루트와 우측 계곡 즉 일주문을 지나 해우소 아래로 지나는 루트 등 2개였습니다.
그러니 화엄사 ~ 노고단 코스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루트classic route라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 루트의 명소가 바로 '코재'죠.
나라에는 '깔딱고개'니 '환장고개'니 하는 이름은 여러 군데 있지만 하도 가팔라서 코가 닿을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코재'는 이곳 한 군데밖에 없을 겁니다.
한때 산꾼들의 로망이었던 코스가 있었다. 장비도 변변치 않던 시절 배낭의 무게 등으로 일시종주가 어려웠던 때 지리의 가장 긴 능선으로 알려진 화엄사와 대원사를 잇는 코스로 이를 줄여서 ‘화대종주’라 불렸다. 44.2km나 되는 그 긴 거리를 당시 꾼들은 1박2일, 2박 3일로 걸었다. 그렇게 난이도 있는 코스로 알려졌다. 아직 ‘extreme'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거리를 일시에 종주한다는 건 아무래도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으리라. 그런데 체력도 좋아졌고 장비도 좋아진 지금 그 ‘화대종주’를 ‘일시종주’라는 이름으로 ‘한방’에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코스가 됐다. 이 화대종주의 44.2km는 공단에서 측정한 숫자이므로 이제 ‘화대종주 44.2km’는 공식 거리로 못 박으면 되겠다.
주지하다시피 이 코스는 대원사~치밭목대피소~중봉~천왕봉의 대원사 코스와 지리 주릉 그리고 주릉의 코재~화엄사의 이음이다. 생각해보면 산경표가 알려지기 이전인 1990년까지는 중거리 산행을 꿈꾸는 이들이 꼭 한 번쯤은 걷고 싶어 하고 동경하던 그런 종주코스였다. 그러나 백두대간이 알려지고 정맥, 지맥 산행이 일반화되면서 예전의 명성은 약간 빛을 바란 느낌은 있다. 하지만 매년 시행되는 ‘화대종주 산악마라톤 대회’와 항상 지리산을 그리거나 예전 시절을 꿈꾸는 올드팬들로 꾸준하게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지리산 하면 그래도 ‘화대종주’이기 때문이다.
연기조사가 창건한 양대 사찰은 산청군과 구례군을 대표하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화엄사는 544년, 대원사는 548년으로 창건 연대는 각 다르지만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종찰로, 대원사는 선불간경도량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은 비구니 도량으로도 유명한 대원사가 있는 유평계곡은 지리산 중봉과 새봉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은 덕천강이 흐르는 계곡으로 그 길이만 해도 약 12km 정도 되니 그 계곡의 아름다움이란 필설로 다하긴 어려울 것 같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536쪽
요즘 부쩍 화대종주를 하여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안내 산악회에서는 서울 출발 시간을 조금 앞당기고 대신 화엄사를 경유하여 화대를 하는 분들을 내려주고는 성삼재 ~ 백무동 구간을 운영하는군요.
화엄사에서 4명이 내립니다.
그중 여성동지가 한 명 내리는데 .....
마라토너인가?
03:00
산행 준비를 하고 ...
이한검 대장이 게이트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군요.
시간이 되자 닫혔던 차단기가 올라갑니다.
그러자 공기가 달라집니다.
https://youtu.be/ED6z9He07ks
나무 계단을 올라 우측의 코재를 바라보고는,
백두대간을 뚫고 만수천의 물을 일부 마산천으로 넘기는 무너미재를 봅니다.
구례 마산면의 부족한 물을 보충하기 위해 노고단에서 발원하는 만수천의 물을 빌려주기 위해 만든 인공수로죠.
바로 좌측이 대간길.
무심한 대간꾼들은 그저 오리지널 대간길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노고단 대피소 방향으로 발을 옮기기 마련입니다.
그러고는 노고단 대피소로 오릅니다.
이곳에 오면 늘 함태식 선생님이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선생님도 가셨고 최화수 선생, 성낙건 선생도 가셨고 작년에는 늑대 형님도 가셨으니....
예전에는 '노고산장'이었죠.
물론 그 이전에는 '노고단 산장'이었고....
함태식 선생님이 운영하던 구 시설을 공단이 접수하면서 새롭게 지은 다음 노고단대피소가 되었죠.
한때 텐트는 물론 버너에 코펠까지 대여해주던 공단의 '무장비 등산'의 그 호기(?)는 어디로 갔는지......
한라산의 용진각, 남성대, 설악산의 장수대, 백담, 양폭이 이 노고산장보다 조금 이전에 생긴 것이죠.
추억의 산행길 산장山莊이었습니다.
노고단 고개로 오릅니다.
우측 길상봉 정상으로 올라 노고단에 참배도 드려야 하지만 예약제에 5시 개방이니 우리는 천천히 걷기로 합니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면서.....
이한검 대장의 오른쪽 발 상태도 좋지 않고 저도 왼쪽 무릎이 안 좋은 상태이니 무리할 필요가 전혀 없죠.
그러니 오늘의 모토motto는 '땀 내기 없기!"입니다.
반야 우측의 유별나게 빛나는 별.
샛별 즉 금성인가요?
출입문 안으로 들어섭니다.
어둠 속에서도 볼 거는 다 보면서 갑니다.
길상봉 정상에서 내려오는 루트도 보고, 바로 우측으로 왕시루봉 가는 길을 보면서 '노고단'님을 소환합니다.
오래전부터 약속했던 노고단님과의 왕시루봉 야영 날짜를 조율해 봅니다.
9월 둘째 주가 추석이니 첫째 주가 적당할 거 같군요.
왕시루봉이라....
봉우리 두 개를 넘어 도착하는 만월봉(1280.4m)에서 삼각점(연곡434)을 확인하고 큰 등산안내도도 본다. 인상적인 주목 한 그루를 보고 안전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계단을 오르면 1등급 대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응복산(1360.0m)이다. 우리나라에 설치된 174개의 1등급삼각점 중 이게 그 하나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중에는 鷹伏山의 응이 매(鷹)자여서 매복산으로 표기된 것도 있다. 매가 웅크린 형상이란 말인가?
이미 ‘수리’는 ‘높은 곳’ 또는 ‘맨 꼭대기’를 나타내는 순우리말이고 여기서 파생된 말이 ‘사라’, ‘사리’, ‘설’, ‘솔’, ‘시루’, ‘수’, ‘싸리’, ‘수락’ 등 여러 가지 형태라는 걸 봤다. 당연히 높은 곳을 나는 새(鳥) ‘수리’나 ‘독수리’도 여기서 나온 이름임은 자명하다. 그러니 이 수리를 한자로 표현하면서 취(鷲)자를 쓰는 건 사실 시간문제였다. 영취산(靈鷲山), 취성산(鷲城山)이 가장 비근한 예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매이다. 그리고 그 매의 한자인 응(鷹)이 응봉(鷹峰)이 된다거나 매봉이 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니 이런 이름의 산을 볼 때에는 주위 산보다 높은 곳을 일컬음이니 비약하여 ‘수리 모양’, ‘매가 많이 사는 곳’ 등의 얼토당토않은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따라서 응복산도 응봉산의 잘못된 표기이리라. 같은 취지로 위의 매복산도 매봉산 혹은 매봉의 오기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465쪽
시루가 이런 뜻이니 적어도 지리에 있는 이 봉우리가 '왕시루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현재 노고단에는 호텔시설이었던 석조건물 한 동만이 그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서 있다. 그 후, 1960년 경부터 지리남부의 왕시루봉에도 위 남장로회에서 1차 때와 같은 이유로 장소만 바꿔 휴양지가 조성되었다. 1962년 휴 린튼(한국명 인휴, 1926∼1984) 선교사에 의해 건립된 이 단지는 현재 집 10채와 교회 1채, 창고 1채 등 총 12채가 남아 있다. 이 건물들은 미국·영국·호주·노르웨이 등에서 온 선교사들이 자국의 건축 양식에 온돌과 아궁이를 가미해 지은 집들이어서 건축학적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실제 지금도 철제 변기, 세면기, 침대나 벽난로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휴양촌의 설립자 휴 린튼은 현재 세브란스 병원에서 외국인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인요한 박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1895년 호남 지역에 파견된 유진 벨 선교사의 사위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이 공로로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인요한은 1959년 태어났는데 1993년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했고, 26차례 방북해 북한 결핵 퇴치 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여 2005년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다. 그는 위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하여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의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1984년부터 지금까지 자비를 들여 수양관을 관리해왔다.
그는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선교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겨 노고단 예배당 유적과 왕시루봉 선교사 수양관 등 두 곳을 등록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사실 이곳 왕시루봉 일대는 1300m 정상부에 넓은 초원이 형성되어 있으며, 정상에서 전망하는 수려한 경관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2017년 3월부터 2027년 2월까지 출입금지구간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리산 반달곰의 중요 서식지로 확인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여러 희귀 생물들이 분포되어 있는 지리산의 핵심 보존지역이기 때문에 이런 사업은 환경 관련 단체로부터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312쪽
철쭉밭 천지인 돼지령 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길상봉 정상의 노고단 돌탑도 보이고 우측 노고단 고개 초소에서의 랜턴 불빛이 이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구례 시내.
"여기 이름 좀 바꿔야 하지 않나?"
"무슨 얘기. 이 바로 뒤가 예전 그 심원마을과 연결되는 루트고 거기에는 저연猪淵이라는 멧선생 목욕탕이 있고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야. 그냥 집돼지의 豚이나 亥가 아니라는 말씀"
붉은 기운이 올라옵니다.
피아골 삼거리를 지납니다.
"피아골 가본 지도 오래됐다. 재작년인가 해밀에서 단풍놀이 왔을 때 내려가 보고는......"
이 샘물은 사실 1969. 8. 10. 중산리를 출발하여 화엄사로 진행하는 이른바 중화中華종주산행을 하던 광주일고(?) 천호산악회 인솔교사였던 초당 정영기 선생님이 이 샘을 발견하여 '천호샘'이라 명명하고는 나무를 깎아 이 이름을 새겨두었으니 이 샘의 이름을 천호샘이라 불러야 하지 않았을까요?
마치 1955. 5. 5. 연하반 산악회에 의해 연하천이나 산희샘이 그 이름을 갖게 되었던 것처럼......
아름다운 후배 '몽화'님이 갖다 놓은 국자로 물 한 모금 마시며 자리를 뜹니다.
긴 데크를 오르고 임걸령 쉼터를 지나면,
노루목이 나옵니다.
노루목에 관해서는 둘레길 제3구간에서 운봉을 떠나 산내면으로 들어오면서 장항동을 내려올 때 자세히 살펴봤다. 즉 노루목은 장항獐項이라는 한자로 쓰나 ‘늘어진 땅’ 곧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을 보고 붙인 이름이어서 노루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명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28쪽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에도 있고,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을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 만한 곳이 아닌 거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이다.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늘’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訓)을 가진 ‘누를 황(黃)’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獐)’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4쪽
이곳이 백두대간을 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즉 보통은 시간을 핑계로 반야봉을 오르지 않고 그냥 직진을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조금 이따 보는 바와 같이 물줄기를 건너게 되므로 온전하게 대간길에 충실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여기서는 반야봉 방향으로 약 200m 더 올라가 반야봉 삼거리에서 우틀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반야봉은 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죠.
여기서 잠시 우측의 바위로 올라갑니다.
노고운해.
좀 당겨봅니다.
노고단에서 보면 구례읍 부근이 섬진강으로 인해 운해가 자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여기서도 훌륭합니다.
중앙 왕시루봉 좌측으로 호남정맥의 도솔봉과 백운산 그리고 수어지맥의 억불봉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고개를 조금 좌측으로 돌리니 화개단맥 혹은 도계(경상남도와 전라남도)능선의 불무장등이 멋지게 눈에 들어옵니다.
길상봉.....
노고단의 돌탑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아무리 '땀 내기 없기!'로서니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
역시 지리는 그냥 앉아만 있어도 좋은 곳입니다.
반야봉을 버리고 직진합니다.
그러면 바로 골을 하나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물줄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백두대간을 하는 사람들이 그냥 이곳을 지난다면 '산자분수령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까 노루목에서 좌틀하여 반야봉 방향으로 진행하다 반야삼거리에서 우틀하여 이리로 내려와야 하는 것이죠.
묘향암 들머리를 지나고,
소금장수묘가 있는 토끼재를 지납니다.
1818년 정석구의 두류산기를 봅니다.
조선 후기 1818년 남원에 거주한 유학자 정석구가 쓴 ″두류산기〃는 200년 전의 자료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리산의 형세와 지명들을 명확하게 기록을 해서 지리산 지명 탐구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정석구의 두류산기에서 삼도봉이 토끼봉이라는 내용의 기록을 옮겨서 이해와 분석을 해 봅니다.
『...만복대에서 뻗은 산줄기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솟아 묘봉(玅峯)이 되니 산동(山洞)의 주봉이다.
곧장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 조금 동쪽에 종봉(鍾峰, 현 종석대)이 있는데, 남악사(南嶽祠) . 천은사(泉隱寺) . 화엄사(華嚴寺)의 주봉이다.
산줄기가 낮아졌다가 동쪽으로 뻗어 노구당(老嫗堂, 현 노고단)이 되는데, 문수동(文殊洞)의 주봉이 된다.
산줄기가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반야봉(般若峰)으로, 묘봉과 마주 서 있으며, 나머지 산줄기(현 심마니 능성)는 반선동(半仙洞)에서 그친다.
산줄기가 북쪽으로 방향을 튼 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뻗어 토현(兎峴)[註 : 이 아래는 문수사(文殊寺)와 연곡사(燕谷寺)가 있는데 두 절 사이의 주능선이다.]을 지나면 중반야(中般若)가 되니, 연곡사 골짜기와 화개동 사이의 주봉이 된다...』
위의 문단에서, “반야봉에서 북으로 방향을 튼 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뻗은 토현(兎峴)을 지나면”에서의 토현은 토끼 고개의 한자 표시이며, 토끼봉을 비정해줄 관건으로 보면서 토현의 위치를 짐작해 보면 지금의 '소금장수 무덤' 부근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토끼 고개가 일구어낸 봉우리인 지금의 삼도봉 즉 날라리봉이 당연히 토끼봉이 될 것입니다.
곧 이어지는 문단,
"토현을 지나면 이 아래는 문수사(文殊寺)와 연곡사(燕谷寺)가 있는데 두 절 사이의 주능선이다.”
......
“중반야(中般若)가 되니, 연곡사 골짜기와 화개동 사이의 주봉이 된다.”
이 문단에서 설명한 부분은 피아골과 화개골을 가르는 불무장등 능선 즉 도계능선道界稜線이 삼도봉 즉 날라리봉에서 시작되는 사실을 인식해 보면 지금의 삼도봉이 주봉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중반야(中般若)라는 명칭은 삼도봉이 반야봉 지척의 유일한 명승의 봉우리이기에 반야봉권에 묶어서 작은 반야라는 뜻도 함께 내포된 중반야라는 이름을 부친 듯합니다.
하나를 더 들어보죠.
우리가 잘 아는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글로 1938년 써진 지리산탐험기입니다.
『.....이 직전계곡의 동복(洞腹)을 뚫고 나가는 오늘 우리의 코스는 이번으로써 새 노정(路程)을 짓는 길이라,
전인(前人)에게서 들은 바 없는 모험노정(冒險路程)임을 즐거워하여, 나는 연방 지도를 펴 들고 보며 무한한 흥미로 내려가는 것이다.
직전으로 내리는 길에도 저 ‘토끼봉’ 허리를 타고 오는 길은 쉽기도 하고 원근을 조망할 수도 있다 건 마는, 쉬운 길은 탐하고 싶지 아니하고, 조망은 저 최고봉 상의 과목(課目)이라, 오늘 우리는 오히려 이 불견천(不見天)의 깊은 동곡을 바닥으로, 바닥으로만 밟아내려, 지리산 복중별취(腹中別趣)를 맛보자는 것이다....』
위 기록은 1936년 일제강점기 조선일보가 주관한 지리산등반에 참가한 노산 이은상의 산행기록 중의 한 부분으로, 돼지령에서 피아골 골짝으로 하산하는 과정을 기록한 문단입니다.
당시 선생의 일행들은 지리산 산행 여정을 지리산 속의 사찰 관람과 연계하여서 화엄사에서 출발해서 노고단을 거쳐 돼지령에서 피아골로 길을 잡아 연곡사, 쌍계사 등을 관람 후 대성골 세석을 지나 천왕봉 코스를 택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불견천(不見天)의 깊은 동곡> 즉 수목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 전인미답의 험난한 피아골 골짝을 내려가면서, "직전으로 내리는 길에도 저 ‘토끼봉’ 허리를 타고 오는 길은 쉽기도 하고 원근을 조망할 수도 있다 건 마는."이라고 토끼봉을 언급했습니다.
선생이 언급한 <저 “토끼봉”허리>는 불무장등을 가리킨 것이며, 기록에서의 토끼봉은 현재의 삼도봉이 명확합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 묘봉은 토끼 卯의 묘봉이 아니라 묘할 妙의 묘봉입니다.
그 묘봉妙峰이 와전되어 卯峰으로 되었다가 한글 순화하는 이들 즉 예전의 저같이 한글인 토끼봉으로 풀어쓴 것일 겁니다.
- 졸고 지난 산행기에서.....
날라리봉 즉 삼도봉으로 오릅니다.
왜 이렇게 인상을 쓰시는가!
화개단맥 즉 도계능선의 불무장등.
불무장등이라는 지명은...
어떤 이들은 산의 모양 가지고 이름과 연결시켜 대장간의 화로인 '불무(풀무)와 같은 형상이라고 단정 짓기도 한다. 그래서 불무장등이라는 거다. 또 다른 이들은 보통은 不無長嶝이라고 써서 '우두머리 봉' 혹은 '높은 산' 정도로 보기도 하는데 그 의미도 선뜻 와닿지 않는다.
산 이름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막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 즉 지명이 있다. 사람은 이름이 있어 이를 통해 그 사람의 행적을 알 수 있듯이 지명은 그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온 이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따라서 지명은 지역의 역사, 형상, 풍속, 의식, 도덕, 종교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지명을 파악하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흐르면 처음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진 이름으로 변해 있어 엉뚱한 의미로 불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우리 고유 글이 없다가 한자가 들어오면서 한자식으로 발음을 하다가 다시 한글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걸 일제강점기 때 그들의 편의대로 일본식 한자로 바꾼 경우도 많아 정확한 뜻을 알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살펴보자. 사실 지리산 자체가 승도僧都 혹은 불도佛都라고 하였으니 불교 용어와 관련지어 본다. '불무'라는 발음에 주의한다. 지리의 서쪽을 책임지는 제1봉이 반야봉이다. 이 반야봉이 지리산에서 갖는 지위를 느껴보기 위해 반야봉으로 올라보면 더 확실해진다. 대저 반야는 지혜요 문수를 일컫는다 했다. 화엄사와 연곡사 등을 개창하였다는 연기조사鷰起祖師는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았다. 그래서 이 화엄사가 있는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따서 智利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문수보살은 보살 중에서 상수에 있는 보살이어서 특히 그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부르니 이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청량산이라는 것도 둘레길 제14구간에서 이미 살펴봤다.
어쨌든 이 반야般若라는 말은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참모습을 아는 최고의 지혜을 뜻하니 이 반야봉이 불모佛母 혹은 절집을 뜻하는 불묘佛廟였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 반야봉의 기氣를 받아서 내려가는 줄기 즉 이 긴 능선의 이름은 '반야장' 그리고 그 능선 중의 첫 봉우리이니만큼 '반야장등'이라고 써야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반야봉'과 '반야장등'의 '반야'가 중복이 되는데 지명에서는 가급적 이런 중복 현상을 피해야 한다. 그래서 반야의 다른 이름인 '불모'를 썼고 '불모장등'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불모장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음운변화를 일으켜 '불무장등'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 '불모'란 발음이 '불무'가 된 것이다. 이럴 경우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기氣가 날라리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와 불무장등 ~ 황장산을 지나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뻗치는 길고 큰 줄기(長嶝)가 된다는 ‘지리 99팀’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시 지리산 하면 ‘지리 99’팀의 연구가 돋보인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31쪽
이 불무장등은 좌측 뒤로 보이는 황장산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중앙 멀리 삼신봉이 보이니 좌측 뒤로 낙남정맥이 흐르겠고 우측 능선이 횡천지맥입니다.
그 우측의 높게 솟은 봉우리가 횡천지맥에서 벗어난 지리남부능선의 형제봉이겠고....
좌측으로 악착같이 고개를 내미니 촛대봉 뒤로 천왕봉이 보입니다.
길상봉의 노고단.
여기서 막걸리 한 잔 하고 가죠.
참고로 지리산이 국립공원이므로 전역에서 음주가 금지된 게 아니고 대피소 부근만 금지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한 잔하고 간다고 하여 흉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한참이나 앉아 있다가 일어납니다.
화개천의 발원지인 이 날라리봉.
계곡이 아주 깊습니다.
데크를 내려가면,
화개재.
좌측으로 가면 뱀사골이고 우측으로 가면 연동골입니다.
예전에 좌측 뱀사골로 조금 내려가면 뱀사골대피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뱀사골대피소의 물건들을 실어 나르려면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반선 쪽에서 물건을 지고 올라온 게 아니라 바로 우측의 연동골에서 가지고 왔다고 하죠.
그런데 이 칠불사 바로 옆에 있는 연동골이 주는 의미가 남다릅니다.
사실은 1960년대 후반. 누군가가 필요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동에서 함양을 가려하면 너무나 길고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니 반야봉과 천왕봉의 중간을 가르는 도로의 필요성은 능히 짐작이 간다. 여기에 한라산 종단 도로를 개통한 토목업자들의 부추김도 한몫 했을 것이다. 물론 핑곗거리도 있었다. 멀리는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을 거론했을 것이고 가까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 잔당 토벌을 1963년에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작전상의 어려움도 한 요인으로 제기됐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도로의 개설 목적을 알게 되면 좀 아이로니컬해진다. 나아가 이 도로와 천은사~성삼재~달궁을 잇는 지금의 861번 도로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즉 이들 도로가 착공된 때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 당국이 '완전 평정'을 공표한 1955년으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1968년의 일이다. 당시 연동골에 소규모의 무장공비가 출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단다. 신흥에서 화개재를 향해 6㎞를 거슬러 오른 연동마을에 약초꾼을 가장한 이들이 나타나 보리 15말 등을 사려고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무장공비의 존재가 처음 포착이 됐던 것이다. 그들의 출현이 지리산 척추를 파헤치는 군사작전도로 공사를 하게 만들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그렇게 시작한 공사가 1972년 10월에 마쳤으니 그 구간이 신흥 ~ 마천 즉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의 신흥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도로가 된 것이다. 이른바 ‘벽소령 종단도로‘이다. 당시로는 실로 엄청난 대역사大役事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통만 시켜놓고 이용하지를 않아 대성리 방향의 삼정마을 ~ 벽소령 구간은 차는 고사하고 사람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비록 지도에는 도로표시가 되어 있지만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38쪽
화개재에서 멀리 호남정맥의 백운산을 봅니다.
연동골 입구.....
그러고는 묵묵히 오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묘봉妙峰입니다.
토끼봉이라 부르면 안 됩니다.
예전 산행기를 가져옵니다.
그러고는 묘봉妙峰입니다.
예전에는 반야봉에서 정동쪽(卯方)이 있다고 하여 묘봉卯峰 즉 토끼봉이라고 하였는데 최근 연구한 바에 따르면 토끼봉이라는 이름은 그 어원의 근거가 봄 빈약하죠?
사실 저도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2쪽이나 ‘현오와 걷는 지리산’ 433쪽에 같은 취지의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토끼봉을 굳이 한자로 쓴다면 卯峰으로 한다고도 했죠.
하지만 한글 순화 차원에서 굳이 묘봉이라 부를 필요 없이 토끼봉으로 부를 것을 고집하고 제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산 이름을 지을 때 그냥 마구잡이로 짓지는 않았습니다.
즉 이 신성하고 고귀하기 까지도 한 산이름을 지을 때는 정성 들여 작명을 한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죠.
물론 이 서부 지리의 맹주는 반야봉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묘봉이 반야봉에서 볼 때 정동쪽이라고 우기면 그럴 수도 있는데 한 개그 프로의 대사같이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무식보다는 연구 부족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궁금증이 ‘지리99팀의 엉겅퀴’ 님이나 법사이신 범여 김복환 선배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역시 이 지리산을 얘기하고 지리산의 지명을 얘기할 때 우리는 확실히 불교지명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누차 말씀드렸었죠?
지리산의 까마귀들은 염송도 할 줄 안다고....
그러니 이 토끼봉 아니 이 묘봉妙峰은 반드시 저기 보이는 반야봉과 저 묘향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묘지(妙智)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법(妙法)
즉 불가에서는 묘지(妙智)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법(妙法) 등 묘(妙)字가 자주 쓰이는데 이때 妙는 단순히 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 높고 뛰어나다. 완벽하다’에 가까운 뜻이라는 것이죠.
구족원만(具足圓滿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
妙는 불교의 공(空)사상에 바탕을 둔 말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초월한 불가사의 즉 구족원만(具足圓滿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니 묘지(妙智)는 그냥 지혜가 아니라 말로써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할 수도 없는 지혜 즉 부처의 깨달음을 인간이 말로써 억지로 표현하자니 이름하여 묘지妙智라 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묘지妙智는 불지佛智라 해도 되며, 다른 단어의 妙도 佛로 교체하여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입니다.
“향적불(香積佛)이 있는 중향(衆香)세계는 모든 것이 향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나 문자설법이 아닌 묘향(妙香)으로 삼매(三昧)에 든다.”
-유마경 제10품 『향적불품』
“묘향(妙香)이란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풍기는 향”
-아함경
그래서 묘향은 갑옷 같은 세상의 논리를 뚫고 전해지는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죠.
물론 다른 불교 경전에도 이 妙香은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반야봉般若峰 아래 묘향대가 있으니, 이 묘향을 타고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般若에 이르는 것이 될 것이니 그 그림이 딱 맞아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기는 서쪽으로는 노고단으로 흘러 화엄사로 내려가게 되고, 동쪽으로는 흐르는 그 기는 이 묘봉으로 흘러 한쪽으로는 칠불사로 가고 다른 하나는 연곡사로 간다니 이제야 이 봉우리가 토끼봉이 아닌 묘봉으로 불러야 한다는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끼봉으로 잘못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전 말씀드렸죠.
칠불사 가는 길.
묘봉의 헬기방에서,
반야봉을 봅니다.
숲이 우거져서 묘향암은 보이지 않습니다.
연하천 가는 길에 부자봉父子峰(여기서는 형제봉)을 봅니다.
조금 더 진행하니 명선봉이 보이고 멀리 천왕봉까지 관측이 됩니다.
연하천 가는 길에 있는 명선봉 데크.
여기서 묘향암이 보이는군요.
黃瓦臺.
명선봉 정상은 비탐구간.
이렇게 막아놨습니다.
그 긴 데크를 따라 내려오면,
연하천대피소입니다.
묘봉에서 한숨 자고 있는 이한검 대장을 놔두고 혼자 먼저 왔는데 이제 출발했다고 하는군요.
"그럼 음정삼거리 지나 삼각고지 바로 전에 있는 쉼터로 오세요."
언제나 젖어 있는 곳.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기 때문이죠.
음정삼거리를 지납니다.
좌측이 지리북부능선의 시발점이죠.
중요한 시설물.
쉼터에서 막걸리 한 잔을 가지고 온 떡을 안주로 먹습니다.
삼각고지를 지나고,
석문이 몇 개 있는 부자봉(형제봉) 권역으로 들어섭니다.
석문 #3 통과.
조망처에서 남쪽 방향을 봅니다.
앞줄이 도계능선(화계단맥).
가운데 푹 꺼진 곳이 뒷당재.
그 뒤가 왕시루봉.
그 너머가 섬진강 밖에 있는 호남정맥.
또 여유.....
부자(형제)봉 정상을 오릅니다.
벽소령 대피소도 보이고.....
지리 주릉은 물론 영신봉에서 가지 치는 낙남정맥을 보고, 천왕봉 좌측으로 중봉이니 하봉도 다 볼 수 있습니다.
제석봉에서 흘러내린 창암산.
임천 너머로 법화산과 삼봉산의 임천지맥까지.....
이 앞바위가 멀리서 이 부자봉을 봤을 때 귀 모양으로 보이는 바위입니다.
화개천......
지나온 묘봉은 나무에 가렸고.....
그나마 반야는 볼 수 있네요.
왕시루봉....
멀리 형제봉.....
지리산 둘레길을 할 때 저 형제봉 뒤로 이어지는 남부능선의 윗재 부근이 상당한 난코스입니다.
원부춘 마을로 이어지는 코스죠.
그다음 이어지는 곳이 둘레꾼들의 쉼터인 카페 '하늘, 호수 차밭'....
낙남정맥의 삼신봉1288.7m과 거기서 분기하는 횡천지맥을 당겨서 봅니다.
연하굴을 지납니다.
석문 #2
.......
석문 #1
그러고는 벽소령 대피소입니다.
정말이지 날씨가 뜨겁습니다.
그나저나 무릎 통증이 심해집니다.
대피소 매점에서 스프레이를 구입하려 하는데 파는 것은 없다고 하면서 스프레이 한 통을 건네주는군요.
그러면서 가지고 내려가면서 필요할 때마다 쓰라고 하시는군요.
아마도 산객용 비상물품 용으로 비치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한검 대장과 나누어 골고루 뿌리고는 그늘에 앉아 요기를 합니다.
출발 전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그런데 한검 선사님께서 웬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군요.
오늘 새벽에 화엄사에서 내렸던 여성대원이라고 합니다.
무슨 영화의 한 장면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럴 때 출연하다니.....
그 아가씨는 연신 초주검이 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어서 남자 대원 한 명도 더 등장을 합니다.
그 여성대원은 오늘 지리산이 처음인데 겁도 없이 화대를 하기 위해 나선 것이고, 남자 대원은 자신이 모시는 교수님을 따라 무작정 나선 강사.
어디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는데 어쨌든 목표지점은 중산리.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지금 시간이 11:10.
여기서 세석대피소까지 6.3km.
그렇다면 지금 날씨와 이런 조건 하에서 최소 2시간 반 정도 걸릴 것이며 거기서 장터목 까지는 난이도가 없다고 해도 3.4km이니 또 1시간 20분.
그러면 장터목에 도착하는 시간이 15:30분 정도.
거기서 죽자 사자 내려가면 17:30.
아무것도 못하고 차에는 오를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거림에서 하산을 해야지."
"저희 좀 데리고 가주세요."
졸지에 혹이 둘 더 달렸습니다.
그래 갑시다.
쭉 내려가면 삼정마을 거쳐 의신마을이 나오겠고....
중간에 푹 꺼진 곳이 앞당재.
앞으로 세석까지 5.2km.
벽소령대피소에서 여기까지는 1023번 비상도로의 흔적을 따라 편하게 걸었습니다.
저 펼침막 뒤로 이어지는 길은 음정마을로 이어져 마천까지 가게 되는 것이죠.
아까 얘기한 그 비상도로입니다.
선비샘에서 몽화 아우를 만나고.....
어쩌다가 이렇게 수량이 줄었을고!
영신봉과 낙남정맥.
삼신봉과 횡천지맥.
호남정맥.
조망터로는 그만인 가짜칠선봉으로 오릅니다.
예전에는 저 칠선봉을 두고 이곳에 칠선봉 명찰을 달아주었던 적이 있었죠.
어쨌든 이곳이 조망처로는 그만입니다.
영신봉 뒤 우측으로 촛대봉 머리도 살짝 볼 수 있고
좌측으로는 가짜 삼신봉에 연하봉 그리고 천왕봉과 중봉까지도 한눈에 들어오니.....
저 뒷줄이 삼신봉 라인으로 좌측 끝이 외삼신봉1286.7m 그리고 중앙이 삼신봉1288.7m 그리고 우측이 내삼신봉1355.1m입니다.
육안으로도 외삼신봉이 가장 우뚝합니다.
조금 당겨보면 장터목대피소까지 보이고...
그런데 조금 전 가짜삼신봉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공단에서 설치한 이 안내판이 가짜 삼신봉의 빌미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영신봉 좌측으로 삼신봉1289m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한 장 가져옵니다.
2021. 11. 06.
도장골에서 촛대봉으로 오르던 사진입니다.
촛대봉에서 천왕봉을 배경으로 짝은 사진의 첫 봉우리가 조금 전 얘기한 가짜삼신봉이고 그 좌측이 화장봉을 지나 연하봉이고 우측이 일출봉이죠.
지금 이 무명봉이 갑자기 삼신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게 바로 공단에서 실수로 저 봉우리에 삼신봉이라는 표기를 했기 때문이죠.
즉 화장봉이 1693.6m, 촛대봉이 1703.1m의 중간에 있는 저 석봉은 1680m+∝임에 비추어 저 안내판의 표기는 1289m라는 점만 봐도 공단의 실수가 명백합니다.
저 표기 때문에 혹자들은 저 뒤에서 도장골로 흐르는 골을 삼신봉골이라 이름 지어 부르고 다니고 있으니......
칠선봉을 지납니다.
좌고대 부근을 보고....
영신사 입구.
172계단을 오르고는,
좌고대를 봅니다.
아!
반야.....
...........
바로 아래가 영신사....
낙남정맥의 시작점인 영신봉....
취령과 관련한 얘기만 해도 A4용지 50장 정도는 나와야 하니......
그러니 어렵기도 한 그 얘기는 통과!
좌측 가짜삼신봉과 우측 촛대봉을 봅니다.
언제 봐도 정감이 가는 세석평전.
천왕봉도 보고....
세석대피소입니다.
메인 대피소답게 새론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풍부한 세석의 물.
거림으로 하산합니다.
세석교.....
삼신봉.....
산죽길을 따라 하산합니다.
거림마을....
오늘 산행은 이리로 내려와도 27km나 되는군요.
마침 오늘 덕산의 지인들이 중산리에서 저희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마음만 바쁩니다.
덕산 개인택시 김기사님께 전화를 하니 5,000원을 깎아주신다 하고.....
거북 식당에서 샤워를 하고 바쁜 마음애 소맥 몇 잔 나누고 17:30 정각에 버스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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