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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마고 할매! 고맙습니다.

지리산은 여산신女山神이 지배하는 산입니다.

 

보통은 남자여야 할 것이나 이 지리산만큼은 예외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 여산신은 신라에서는 선도성모가 되고, 고려시대에는 위숙황후, 그리고 불가에서는  마야부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 모두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마고할매 만한 이름도 없습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지리산에 들때마다 경배를 드리는 그 대상은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바로 마고할매입니다.

들 때에는 안전한 산행을 위해서, 나올 때는 탐방시간 내내 저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다는 그 고마운 마음을  전해드리자는 것이죠.

 

이번 주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지리산으로 듭니다.

이한검 대장은 노모께서 다치셔서 그 수발을 위해서 빠지니 일행은 7명으로 줄어듭니다.

2022. 07. 15. 23:50에 지리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동서울터미널로 나갑니다.

시간이 가까워오자 홀가분, 나무지게, 푸우 등 3명이 도착하는군요.

서울에서는 저 포함 이렇게 4인이 출발합니다.

오늘 운전기사는 진정한 best driver입니다.

코너링이 환상적입니다.

마천까지 가는 동안 잠에서 단 한 번도 깨지 않을 정도이니.....

마천에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김기사님의 택시에 오릅니다.

오늘 구간은 벽송사로 올라 와불산 ~ 새봉 ~ 두류봉 ~ 국골 ~ 추성동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국골을 오르는 구간으로 잡았어야 했는데 여러분의 의견을 청취하느라 골치기를 하여야 할 국골을 날머리로 잡은 것이 영 마음에 걸립니다.

벽송사에 오르니 산수 대장 내외와 고남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반갑게들 인사를 나누고 오랜만에 방문한 벽송사를 어둠 속에서 둘러봅니다.

이 벽송사는 '지리산 둘레길' 4구간에 속한 곳이기도 합니다.

벽송사에서는 아무래도 청허당입니다.

창건주인 벽송대사의 법손法孫 격인 서산대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강원講院이죠.

둘레길과 관련하여 서산대사에 대해서는 삼가귀감이 중요합니다.

이 삼가귀감을 집필한 곳은 비록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든 지리 어느 곳의 내은적암이니 서산대사 휴정의 주무대는 지리산에서는 그래도 이 벽송사죠.

 

삼가귀감三家龜鑑부터 볼까? 삼가三家란 동아시아의 가장 주요한 사유체계인 선가(禪家, 불가), 도가, 유가를 의미하는데 서산대사 휴정은 이들을 토대로 세 권의 귀감을 썼다. 하나가 선가귀감禪家龜鑑이고 둘이 도가귀감道家龜鑑이며 마지막 하나가 유가귀감儒家龜鑑이다.

 

서산대사는 이 세 개의 귀감을 통하여 삼가를 회통하고자 했던 바, 그 회통의 기준이 이심전심, 견성성불, 즉심시불이라는 선禪의 정신이었다. 그는 이 선의 정신을 근거로 불교경전과 도가의 경전 그리고 유가의 경전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의 마음과 본성이 그대로 부처(선가), 성인(도가), 군자(유가)임을 깨닫게 하고자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 삼가귀감과 단속사 그리고 성여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사 성여신이 혈기왕성한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를 할 때 이 삼가귀감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삼가 중 유가儒家의 글이 맨 뒤에 편철되어 있는 것과 사찰에 형상이 괴이한 사천왕 등 불상을 조성한데 격분하여 불경을 간행하는데 쓰이는 목판은 물론 절까지 불 질렀다는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24쪽

 

성여신과 단속사는 들레길 7구간에서 만나게 됩니다.

목장승을 봅니다.

 

미인송과 보물 제474호 삼층석탑을 보 고 벽송사를 빠져나오려는데 좌측으로 누각이 하나 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니 장승 두 기가 서 있다. 예전에는 사찰밖에 서 있던 것을 청허당 바로 뒤로 옮 기면서 각閣을 세웠다. 좌측 장승은 금호장군禁護將軍, 우측 장승은 호법대신護 法大神이라는 명찰을 각각 달고 있다. 이는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를 막 는 이른바 토속신앙의 비보裨補역할을 수행하는 신장상神將像이다. 
그러니 이는 ‘법우화상’의 설화와 실상사 입구의 상원주장군 등의 석장승과 함께 지리산의 토착적 고유 신앙이 불교에 융합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 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 전게서 126쪽

710.8봉으로 오르는 길에 늑대형님을 뵙니다.

지리에 들고 싶으셔서 도대체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합니다.

710.8봉 우측 사면에서 우틀합니다.

오늘은 달이 참 밝습니다.

05:00가 넘어가자 이제 날이 밝았습니다.

정면으로 덕천(웅석)지맥의 새봉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두류봉이 보입니다.

잠시 조망터에서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가기로 합니다.

막걸리 몇 잔 나누고.....

그러고는 다시 올라가야죠.

누군가가 와불臥佛이라 써놨습니다.

함양군의 특유 컬러 적색!

와불산1164.9m이라는 얘기죠.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1213.9봉을 와불산이라 표기하여 놓았는데 이는 와불산의 지명 유래를 모르고 붙인 이름입니다.

살펴보죠.

임천 건너 법화산992.9m 라인이 보입니다.

좌측 라인의 최고봉이 삼봉산1186.7m으로 임천지맥의 주봉이죠.

이 임천지맥은 바로 우측의 오도봉1038.5m 뒤로 넘어가 지안재로 이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오도재를 넘어 법화산으로 오는 줄기는 그저 단맥에 불과한 것이죠.

저 법화산 좌측 아래에 있는 동네가 바로 견불동見佛洞이라는 마을로 그 동네에서 보면 이 와불이 제일 잘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측 뒤 함양읍 뒤로 대봉산이 보이니 좌측이 덕유산 라인입니다.

한편 독녀암 뒷 라인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지도를 보면 와불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와불산은 말 그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의 누워 있는 형상을 한 산이라는 것인데 그 참모습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송전리의 견불사이다. 마을로는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는 동네가 바로 휴천면 문정리의 견불동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보기에는 견불사見佛寺를 따라오기는 어렵다. 어쨌든 견불사니 견불동이니 하는 이름이 괜히 생긴 게 아니고 저 와불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표기된 와불산에 대해서 논의가 있다. 와불산의 위치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심지어 와불산을 상내봉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또 국제신문이나 부산일보 산행 안내 개념도에는 1164.9봉에 상내봉이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하며 2003년도 제작한 ‘사람과 산’ 지도에는 삼거리 부근을 상내봉으로 표기하고 있는 등 제각각이다. 어찌 된 일일까?

 

먼저 옛 선인들은 이 부근의 지형을 어떻게 봤을까? 선조들이 부른 이름 그대로 불러주면 될 것이니 꼼꼼하게 산행 기록을 챙긴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산록’을 보는 게 아무래도 믿음이 간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문제의 대목이다. 의론대 삼반석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향로봉과 미타봉이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들 봉우리가 다리 밑에 있었다.”는 말은 점필재가 산행기를 작성할 때 착각 내지는 착오로 인한 표현 같다. 실제 현장에 임해보면 의론대 앞의 능선은 벽송사능선이 펼쳐져 있는데 그 능선에는 문제의 석봉 이외에는 이렇다 할 봉우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좌측 사진의 A는 1164.9봉이며, B는 덕천(웅석)지맥의 새봉에서 가지를 치는 벽송단맥에서 독녀암 능선을 가지 치는 삼거리 좌측의 1213.9봉으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와불산으로 표기된 봉우리, C는 1193.3봉 그리고 D는 독녀암1117.5m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부처님이 입적할 때의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봉우리는 명백하게 ‘A'의 곳이다. 굳이 와불산이라고 한다면 A'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함양군에서도 이 1164.9봉에 ‘臥佛山1161m’라는 정상석을 세워놓기도 하였었고 그 들머리에는 누군가가 ‘와불’이라고 바위에 표기까지 해 놓았으며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부처바위’라고 부르고 있으니 ‘1164.9봉=와불산=와불’이라는 데 별 의심이 들지 않는다.

 

한편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편에 보면 “옛말에 이르기를 ‘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는 까닭에 무릇 이 열두 곳의 명산을 사찰이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고 적었을 만큼 우리나라의 산 이름은 불교식 이름이 많다(불교지명설). 산에 사찰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모습같이 생긴 봉우리도 승려들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으리라.

일반적으로 부처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통상 부처님이라고 하면 과거불인 비로자나불과 현생불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서방극락세계를 주재하는 미래불인 아미타불로 구분되는데 이 아미타불을 그냥 미타불 즉 미륵불로도 부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승려들 특히 점필재 김종직의 산행에 지로승 역할을 하고 있는 해공과 법종은 당연히 미타봉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1164.9봉=와불산=와불=부처바위=미타봉’으로 보면 될 것이다.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미타봉은 해결되었다. 문제는 의론대에서 본 두 개의 봉우리 중 이제 남은 향로봉이다. 그리고 이 향로봉은 점필재가 한꺼번에 거론한 만큼 두 봉우리는 인접한 봉우리에 있어야 한다. 실제 산행에 임하면 위 참고도의 1213.9봉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오뚝이같이 생긴 바위가 뚜렷하게 조망처 역할을 하고 있다. 혹시나 그 위로 안개구름이 피어오르거나 사람이 올라서서 두 손을 뻗는 모습을 한다면 영락없이 향로와 같은 모양새이다. 그러면 산 이름으로서의 향로봉과 상내봉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 문제는 이곳이 경상남도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그 힌트는 지리남부능선 상에 있는 악양의 진산 형제봉이 주었다. 즉 형제봉을 성제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경상도 사투리가 '형>성' 같이 ‘ㅎ’이 ‘ㅅ’으로 음운변화를 일으킨단다. 그러니 향로봉도 향로봉>상로봉>상내봉’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 쉽게 수긍을 할 수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와불산 주변.

 

정리를 하자면 ‘A’는 와불산=와봉=미타봉=1164.9m, ‘B'는 지금 부르는 대로 향로봉=상내봉=1213.9m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C'는 1193.3봉 그리고 'D'는 그대로 독녀암으로 보면 될 것이다.

와불산에서 조망을 합니다.

저 임천지맥 좌측으로 지리 서부능선의 바래봉과 덕두산이 보이고....

비가 온다고 하였는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측으로 볼록 튀어나온 것...

함양독바위죠.

저 바위로 가면 독녀암이라고 각자가 되어 있죠.

지리에는 독바위가 세 개가 있습니다.

저 함양독바위와 조금 이따 볼 산청(진주)독바위.

그리고 남부능선에 있는 하동독바위 등이 그것입니다.

삼거리에서 잠깐 좌틀하여 향로봉을 다녀옵니다.

아까 얘기한 그 향로봉입니다.

향로같이 보이나요?

도토리봉 뒤로 덕천지맥의 맹주 웅석봉이 보이니 그 우측 라인이 달뜨기능선.

저 멀리 중앙에 남강지맥의 황매산.

좌측 가운데 줄이 좌측 왕산과 우측 필봉산.

좌측 멀리 황강지맥에서 조금 벗어난 있는 가야산.

조금 당겨봅니다.

노래가 안 나온다면 이상하겠죠.

https://youtu.be/T1ElqpyaiMo

삼거리로 다시 되돌아 나와 새봉을 사면치기로 지나고 마당바위로 갑니다.

푸우님이 포즈를 취했습니다.

우리 팀 막내가 이번에 아주 큰일을 했습니다.

정말 수고 많았고 고생했다.

앞 중앙이 비둘기봉.

그 너머에 치밭목 대피소가 있죠.

그러니 그 우측이 중봉에서 내려오는 써래봉이고 좌측 라인이 바로 황금능선.

우측 중앙에 멀리 금오산이 보이는데 사진으로는......

새봉을 지나, 

로프로 봉우리 하나 오르고....

그러고는 바로 산청독바위로 오릅니다.

예전에는 진주독바위라고 불렸었죠.

좌로부터 중봉, 두류봉, 우측 중앙이 영룡봉.

우측 사태가 난 곳이 안타깝게 지리 10대에는 들지 못하는 향운대.

우리는 중앙 영룡봉 부근으로 덕천지맥 능선을 타고 좌틀하여 좌측 중앙의 두류봉으로 올라 국골로 진행할 것입니다.

지나온 와불산을 봅니다.

좌측이 미타봉 우측이 향로봉이죠.

그러니 전체가 다 와불산이고.....

아무래도 겨울에 봐야 제 맛입니다.

조금 전 본 새봉과 마당바위.

조개골을 당겨봤습니다.

덕천강의 원류죠.

기념 촬영을 하고 독바위에서 내려갑니다.

이 사진을 보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내려갑시다.

독바위를 내려와 가던 길을 진행합니다.

조금 전 올랐던 독바위.

지나면서 그 독바위를 봤습니다.

중앙 좌측이 삼봉산으로 이어지는 금대봉과 백운봉 그리고 등구재.

중앙 좌측 뒷줄이 고남산 우측 뾰족한 게 요천지맥의 맹주 천황봉.

그리고 갈라진 곳의 작은 봉우리가 바로 황산.

둘레길 2구간을 할 때 오를 봉우리입니다.

자연천이가 벌어지고 있는 곳.

산죽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그러고는 청이당 터입니다.

바로 옆 능선은 쑥밭재라고도 부릅니다.

청이당은 제석당과 마찬가지로 당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죠.

 

쑥밭재는 사거리이다. 쑥밭재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즉 이 루트가 함양과 산청을 이어주는 지름길이었고 고개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추성리~광점동~어름터~쑥밭재~유평리~덕산을 잇는 루트는 곧 벽송사와 대원사를 이어주고, 주능선인 쑥밭재에 청이당이라는 당집마저 자리하고 있었으니 더없이 좋은 산길이었으리라.

 

한편 이 쑥밭재의 어원에 관하여 논의가 있다. 즉 혹자들은 이곳이 예전부터 약쑥이 많은 곳이라 그렇게 불러온다고 글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말은 여전히 믿을 바 못된다. 오히려 지리산 전설 중 한 분인 ‘성산’ 선생께서는 이곳이 옛날 마천사람들이 진주장에 갔다가 돌아오며 하루를 묵었던 곳이라 하여 ‘숙박재>쑥박재>쑥밭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곳이 마천과 시천면 덕산(지금은 산청군이지만 예전에는 진주 관할이었음)을 잇는 고개였으니 마천 사람이 진주 장에 가서 소금을 지고 올라오면 밤이 되어서야 고개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하루 자고 갈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이유에 수긍이 간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암자나 당집이 이런 숙박을 치기도 하였으니 조선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들을 상대로 숙박업소가 있었음도 능히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니 ‘성산’ 설에 한 표를 던진다.

 

- 전게서 524쪽 이하

국골사거리로 오릅니다.

바로 뒤가 영룡봉이죠.

직진하면 국골로 떨어지는데 길 상태가 불량합니다.

진입금지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우리는 이 골을 안 타죠.

동부능선 즉 덕천지맥의 하봉 오르는 길은 그나마 이렇게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하봉의 영랑대가 보이는 두류봉의 자경대에 오릅니다.

바로 앞이 초암산.

그러니 그 뒷라인이 창암능선이고 그 사이는 칠선계곡입니다.

그 뒤로 영신봉이 보이니 그 사이가 한신계곡.

중앙 우측으로 반야가 보이고 그 우측이 만복대.

앞줄이 초암능선.

그 뒷줄 우측이 창암산.

북부능선과 맨 뒷 줄이 서부능선.

그 우측 끝이 바래봉과 덕두산.

서부능선 우측으로 임천지맥의 삼봉산까지.....

대단합니다.

두류봉의 이 전망대를 자경대紫景臺라 부르기로 합니다.

오나라 노숙 자경 아닙니다.

오케이?

그러고는 국골진입로 입니다.

아주 거칩니다.

좌측으로 물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날끝산막골의 끝 천상폭포天上瀑布입니다.

혹자는 국골좌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고유의 지명이 있으니 여기는 날끝산막골 그리고 우측의 것은 선골로 부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수량이 부족합니다.

재작년보다 못한 수량......

나무지게님.

정말 고맙고......

정말 대단한 원팀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늦은 시간까지 너무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중간 사진은 실수로 다 없어졌고 별로 기억에 남을 만한 것도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