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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어우당 유몽인의 지리산 산행길을 따라 걷다 (제1부)

황산에서 바라본 천왕봉

 

남원이라는 도시는 지리산이 있어 행복한 곳입니다.

예전 교통이 불편하던 때.

그러니까 약 37년 전 서울에서 지리산을 갈 때, 밤 열차라면 구례구로, 낮 열차라면 남원을 택해야 했습니다.

그러고는 구례에서는 화엄사로, 남원에서는 뱀사골이나 백무동 혹은 추성동으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지리산에 진입하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걸렸으니.....

남원 터미널 앞에서 팔던 콩나물국밥(그때는 그 맛의 진수를 몰랐었음)은 콩나물국에 밥을 넣고는 그것을 다시 끓여주는 거 같아 흡사 '개밥'이 연상되어 차마 먹기가 힘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이번 추석 연휴에 무엇을 할까?

별로 할 것도 없습니다.

지리산이나 갈까?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랜만에 선인들의 산행기나 읽어볼까?

서재에서 나름 고전으로 여기는  최석기 교수님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꺼냅니다.

그러고는 포스트잇으로 갈피가 체크되어 있는 곳을 엽니다.

남원부사를 지내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어지러운 시기에 선조라는 최악의 임금을 보필한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의 유두류록이 펼쳐집니다.

어우당은 말년에  암행어사로 전국을 다니면서 보고들은 야사와 향담鄕談을 수필의 형식을 빌어 1621년 어우야담이라는 희대의 걸작을 썼죠.

* 이 어우야담에는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로 알고 있는 인물 전우치가 등장합니다.

똑같은 인물 설정은 아니지만 적어도 둔갑술을 벌이고 의적활동을 한 적도 있어 퓨전 드라마를 제작하는데 어느 정도 영감을 주기는 했을 겁니다.

 

그가 유응형의 무고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뒤 170년이 흘러 정조는 '‘김시습이 웅장한 설악산과 같다면 유몽인은 화려한 금강산과 같다’고 극찬하며 유몽인을 복권해 주었죠.

정조의 설악산과 금강산의 비교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어우당의 글이 그만큼 현란했음을 지적하는 대목으로만 이해합니다.

 

오랜만에 선생의 글을 한글과 한문을 비교해가며 어줍잖게 다시 감상을 합니다.

확실히 글이란 한 번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 그 느낌이 색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그 글 속의 현장을 다시금 다녀오고 그 지명이나 시설물의 이름을 또 한 번  되뇌어본다면야.....

오늘부터 어유당 유몽인이 걸어서 천왕봉까지 올라간 그 산행기를 따라 선생의 발걸음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611년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벼슬살이에 종사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겨를 없이 지낸 것이 벌써 23년이나 된다. 스스로 헤아려보건대 외람되게 청현직(淸顯職)에 있으면서 임금 계신 곳에 출입한 것이 또한 오래되었으니, 불초한 나에게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이제 늙은 데다 잔병이 잦아지니 물러나 유유자적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평소 산과 바다를 즐겨 유람하였으며 귤∙유자∙매화∙대 등이 어우러진 시골에서 살기를 꿈꾸었다.

만력(萬曆) 신해년(1611) 봄에 벼슬을 사양하고 식구들을 거느리고서 고흥(高興)의 옛날 집으로 향하려 하였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정의 대부들이 내가 아직 상늙은이가 아닌데도 미리 물러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용성(龍城)의 빈자리에 나를 추천하여 은혜롭게도 그곳의 수령으로 임명을 받았다. 나는 ‘용성은 고흥과 1백 리도 채 안 되니, 돌아가는 길에 잠시 행장을 풀어놓고 쉬어가는 것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하였다.

2월 초에 임지로 부임했다. 용성은 큰 고을인지라 공문을 처리하는 데 정신없이 바빴다. 게으르고 느긋한 나로서는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식(寒食)이 가까울 무렵, 승주(昇州) 수령 유순지(柳詢之)가 용성의 목동(木洞) 선영에 성묘하러 왔다. 유순지는 나보다 선배이다. 나는 ‘불초한 내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왔으니 예모를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목동 수용암(水舂巖) 근처의 수석이 빼어난 경관에 꽤나 마음을 기울였다. 진사 김화가 그곳에 살고 있는데, 집의 이름을 ‘재간당(在澗堂)’이라 하였다. 재간당은 두류산 서쪽 기슭에 있어, 서너 겹으로 둘러 쳐진 구름 서린 봉우리를 누대 난간에서 마주 대할 수 있었다.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구가 있는데, 그 주석에 “방장산은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지금 살펴보건대, 용성의 옛 이름이 ‘대방(帶方)’이다. 그렇다면 두류산은 곧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진시황과 한 무제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하였는데, 우리들은 앉아서 이를 구경할 수 있다.


술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 나는 술잔을 들고 좌중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올봄에 두류산을 마음껏 유람하여 오랜 숙원을 풀고 싶소. 누가 나와 함께 유람하시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순지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 영남 지방의 감사로 나왔을 적에 이 산을 대략 유람했소. 그러나 종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병폐로 여겨 한쪽 방면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소. 내가 승주로 부임해오게 되어 우연히 이 산과 이웃하게 되었소.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어찌 혼자 쓸쓸히 유람을 할 수 있겠소? 이제는 외롭지 않게 되었으니 그대와 함께 유람하겠소”라고 하였다. 드디어 굳게 약속하고 술자리를 파하였다. 그 뒤에 여러 번 서신을 교환하며 재간당에서 만날 날을 기약하였다.

 

-  어우당 유몽인 저 유두류산록 중 1611년 3월 27일 이전의 행적 중에서 

 

어우당은 1559년 11월 한양의 명례방明禮坊(현재 명동 일대를 지칭하는 서울 11방 중 하나, 지금의 이름 명동明洞이 이 명례방에서 비롯되었다 함)에서 태어났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을 하였는데 삼각산과 청계산 등에서 독서를 하였다고 합니다.

 

24세인 158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런저런 벼슬 자리를 지내다 1589년 질정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가기도 했으며 이듬해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응접 하였고 세자 즉 광해군을 따라 남쪽 지방을 순무巡撫하였고 1609년에는 사은사謝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것을 보면 중국어에도 능통하고 외교관 직을 잘 수행했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때 광해군과의 인연을 맺게되었고 이는 훗날 인목대비 폐비 문제와 관련 북인의 정인홍 등과 사이가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인조반정 때에는 오히려 광해군 복위 계획에 참여했다는 서인 유응형의 모함을 받고 사형을 당했으니 아이러니컬하기만 합니다.

 

그런 그가 1611년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의 뿌리인 전라남도 고흥으로 내려가려 할 때 조정에서 주는 용성 즉 남원부사 자리를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필경 두류산 즉 지리산이 그의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그가 글 말미에 '옛날 사람이 일찍이 천하의 큰 강 셋을 논하면서 황하∙양자강∙압록강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살펴보건대, 압록강의 크기는 한양의 한강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직접 보지 않고 범범하게 논한 것이니, 전기에 실려 있는 것도 주밀하지 못한 점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우리나라 바다와 산을 모두 두 발로 밟아보았으니, 천하를 두루 유람한 자장에게 비할지라도 나는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라 하여 자신은 직접 발품을 팔아 직접 보고, 듣고 느꼈으니 사마천에 버금가고도 남음이 있음을 피력한 것만 보고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1611년 2월 초에 부임을 하였는데 부임을 하자마자 업무 파악을 뒷전에 두고 급하게 재간당 김화를 찾고 유순지를 맞는 것을 보면 그동안 그가 갖고 있던 그의 지리산에 대한 흠모 내지는 연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가히 그의 산에 대한 사랑은 천석고황泉石膏肓이라 이를 만합니다.

 

당시 남원은 용성으로 불렸는데 이는 백제 때의 이름인 고룡군 - 196년에는 대방군으로 개칭했으나 220년에 남대방군으로 개칭하였다가 685년 남원경이 된 후, 1310년 다시 대방군으로 환원되었는데 어우당이 부임하던 때에는 용성으로 불렸습니다.

 

이럴즈음 유몽인은 목동(현 남원시 산동면 목동리)에 선영이 있던 승주 수령 유순지가  찾아온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하지만 느닷없는 성묘라기 보다는 오히려 어우당이 유순지의 귀향을 재촉했을 거라는 의심이 강력하게 듭니다. 

 

일단 어우당은 두류산의 다른 이름을 방장산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지리산의 여러 이름들

그 쌍계사로 들어가 보자. 쌍계사의 일주문은 다른 사찰의 그것과는 달리 일주一柱가 아닌 쌍주雙柱로 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일주문의 현판에는 ‘삼신산 쌍계사’로 적혀있다.

그런데 지리산은 방장산일까? 아니면 삼신산일까? 아니면 방장산이면서 삼신산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필자는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을 엮어 삼신산이라고 하는 견해에 반대한다. 오직 방장산만이 지리산이요 삼신산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쌍계사 일주문의 현판이 그걸 얘기해 준다.

 

지리산은 방장산이요 삼신산이다. 생각해보면 삼신산은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산으로 봉래산, 방장산, 연주산 등을 일컫는 말이다. ‘사기史記’에 처음 언급되었는데 이곳에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이 있다 하여 시황제와 한 무제가 이것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으나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사마천이 방장산을 언급한 후, 어딘가에 있을 방장산은 사마천 이후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한 번은 필히 가봐야 할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모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우리나라 사대부에게 그곳이 어찌 그런 대상이 아니었겠는가?

 

다행히 그 방장산은 우리나라에 있었다. 이 방장산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알려준 이가 바로 당나라 사람 두보(712~770)였다. 필경 그 시작은 두보의 시 봉증태상장경기이십운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보는 그 시의 초장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 바다 밖 삼한三韓에 있다 즉 方丈三韓外’라고 읊으면서, ‘방장산은 조선의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는 방장산이 없고 대방군은 남원의 이전 이름이니 방장산이 두류산임에 틀림없다고 한 남계 신명구(1666~1742)의 말이 이해를 돕는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281쪽 이하

 

그런데 목동이라....

어우당은 그가 찾은 재간당을 '두류산 서쪽 기슭에 있어, 서너 겹으로 둘러 쳐진 구름 서린 봉우리를 누대 난간에서 마주 대할 수 있는'곳이라 하였습니다.

 

이 재간당의 뒤가 금남호남정맥의 요천지맥이 흐르는 곳이고 그러니까 천황산909.6m에서 그다지 먼 곳이 아닌데....

그렇다면 2015. 06. 07. 제가 요천지맥을 한답시고 천황산 ~ 남대문치 ~ 구라치 ~ 갈치를 지날 때 걷던 그 줄기가 바로 이 옆이었겠군요.

당시 제가 쉬었던 구라치 부근에서 흘러내린 줄기가 바로  이 부근의 봉들이고 이 물이 구라치와 바로 위 풍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며 결국 이 물이 요천으로 합수되는 것이고....

 

부근에 있는 지맥 외 청룡산도 제가  지리에 들 때 자주 들르는 고남 형님 댁에서 멀지 않은 요천 다리 건너에 있던 곳이니....

청룡집이니 해룡집이니 하는 이름의 매운탕집 부근이 바로 이 목동일진데.....

 

그리고 가만 보소....

진사 김화金樺라.....

 

호남의 남쪽을 왕득인 일가가 수호를 하였다면 호남의 북동쪽 남원에서는 충경공 금릉 김익복(1551~1599) 일가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29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능성(지금의 화순) 현령에 이르렀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박장전, 임계영 등과 혈맹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성주, 개성, 금산 등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는데 이는 임진왜란 최초의 창의倡義 기록이다. 정유재란 시 도원수 권율의 만류에도 “충성이 곧 효도”라며 부친상 시묘 중에도 참전을 하였다가 왜구의 탄환에 맞아 사망을 하였는데 그의 세 아들 류, 화, 연 등이 이때 모두 부를 따라 종군하였다. 장자 류는 영광성 전투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삼자 연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때에도 창의 하였다.

 

- 졸저 ' 전게서 339쪽

 

"형님. 할아버님 중에 익자 복자 쓰시던 분의 세 분의 아드님들이 다 의병활동을 하셨잖아요. 그분들 중 화자 쓰시는 할아버님이 진사를 하셨던 것은 아는데 그 어른이 유몽인 선생이 지리산 산행을 할 때 같이 동행을 했던 그 김화라는 어른 맞나요?"

"맞지. 근데 왜? 아니 그런데 현오 작가님께서 그 걸 이제 아셨나?"

의아스럽다는 듯한 반문을 고남 형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의미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독서백편의자현이라는 말을 실감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목동에 수용암이라는 곳이 있다던데 거기가 그렇게 괜찮은 곳인가요? 그러면 재간당이라는 가호도 아시겠네요? "

물론 집안일인데 모를 리는 없겠지만....

"내려와 같이 가서 다 보여줄게."

우연찮게 머릿속으로 걸으려던 어우당 선생의 발자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2022. 9. 7. 23:59 버스를 타고 백무동으로 내려갑니다.

장터목으로 올라 냄새만 맡고 다시 하산하여 황산 주변을 살피고는 이백면으로 갑니다. 

태풍은 지나가고 하늘은 예전으로 돌아갔습니다.

해밀이란 이런 하늘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저를 기다리고 있던 고남 형님을 만납니다.

형님과 같이 어우당의 산행기 '유두류산록'의 글이 시작되는 재간당으로 갑니다.

 

남원에서 19번 도로를 따라 산동으로 들어가다 요천을 건너는 옛 통영별로인 24번 도로를 버리고 직진을 하면 바로 목동마을입니다.

이 목동마을은 부안김씨의 집성촌이었다고 합니다.

부안김씨는 김해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성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장자 마의태자를 그 시조로 한다고 합니다.

아!

이곳이 유몽인이 언급한 재간당在澗堂이군요.

재간당은 아까 언급한 김화金樺의 호이자 자신의 집을 이르는 이름일 텐데.....

지금은 아예 이 정자를 새로 지은 다음 이 정자 이름을 재간당이라 하였군요.

이 분도 과거에 합격은 하였지만 벼슬로 나아가지는 않으셨군요.

그리고 어우당의 글에는 승주 수령 유순지柳詢之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유영순이라 부르는군요.

용성지에 수록된 재간당의 시 수용암.

결국 출사 하지 않은 이유가 이 글에 담겨 있습니다.

실은 이 풍곡천(제가 그렇게 부름) 건너의 바위에 새겨진 각자를 보면,

水舂亭이라 했음을 볼 때 오히려 예전에 있던 정자 이름이 수용정이고 김화가 기거하던 집 이름을 재간당이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재간당선생장구지소在澗堂先生丈屦之所''라 이름할만하군요.

예전에는 풍치가 상당했을 거 같습니다.

수용정 각자가 있는 층층바위.

그런데 바로 앞 바닥에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군요.

洗耳岩!

아니 여기도 세이암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세이암은 하동 화개면 신흥리 화개천변에 있는 고운 최치원의 세이암인데!

바로 이것이죠.

화개면 범왕리 왕성분교 바로 앞 화개천에 있는 이 각자.

고운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이 지리산을 떠나기 전에 세상에서 들은 모든 얘기를 이 물에 귀를 씻음으로써 모두 잊기로 했다는.....

그런 징표로 손으로 쓴 것이 이 각자라고 하는데......

세상의 어지럽고 혼탁함을 씻어내고자 함이겠죠.

이 반석,

혹은 이 정자에서 술이 얼큰하게 오른 어우당은 지리산 산행을 제안했고 그 말을 받아 그때까지 완주를 하지 못했던 유순지는 이번에는 완주를 목표로 동행을 약속했고 그리고 재간당 김화 등 3명이  취중에서인지 아니면 확실한 신념을 갖고서인지 일단 지리산 산행을 약속하게 됩니다.

시비를 보며 재간당을 나옵니다.

이후 어우당 일행은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날짜를 조율한 다음 3. 27. 유순지가 도착하자 그 다음 날인 3. 28. 어우당, 유순지, 김화 등이 이곳 수용정에 다시 모여 기생들과 악공들을 불러 출정식을 가진 뒤 3. 29. 대기하고 있던 생질 신상연과 신제 등 5명이 8박 9일의 지리산 기행에 나서게 됩니다.

 

1부는 여기서 마치고 2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