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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지린이와 걸은 지리주릉종주

"화대종주를 하려고 하는데요."

"화대를? 김소장이?"

"예."

우리 사무실 막내 본직인 이제 20대 후반의 김소장이 제게 던진 한마디입니다.

화대를 간다...

겁도 없이....

그것도 지리산에 명함도 내민 적이 없는 사람이 바로 화대를 간다....

 

한때 산꾼들의 로망이었던 코스가 있었다. 장비도 변변치 않던 시절 배낭의 무게 등으로 일시종주가 어려웠던 때 지리의 가장 긴 능선으로 알려진 화엄사와 대원사를 잇는 코스로 이를 줄여서 ‘화대종주’라 불렸다. 44.2km나 되는 그 긴 거리를 당시 꾼들은 1박2일, 2박 3일로 걸었다. 그렇게 난이도 있는 코스로 알려졌다. 아직 ‘extreme'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거리를 일시에 종주한다는 건 아무래도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으리라. 그런데 체력도 좋아졌고 장비도 좋아진 지금 그 ‘화대종주’를 ‘일시종주’라는 이름으로 ‘한방’에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코스가 됐다. 이 화대종주의 44.2km는 공단에서 측정한 숫자이므로 이제 ‘화대종주 44.2km’는 공식 거리로 못 박으면 되겠다.

 

주지하다시피 이 코스는 대원사~치밭목대피소~중봉~천왕봉의 대원사 코스와 지리 주릉 그리고 주릉의 코재~화엄사의 이음이다. 생각해보면 산경표가 알려지기 이전인 1990년 까지는 중거리 산행을 꿈꾸는 이들이 꼭 한 번쯤은 걷고 싶어 하고 동경하던 그런 종주코스였다. 그러나 백두대간이 알려지고 정맥, 지맥 산행이 일반화되면서 예전의 명성은 약간 빛을 바란 느낌은 있다. 하지만 매년 시행되는 ‘화대종주 산악마라톤 대회’와 항상 지리산을 그리거나 예전 시절을 꿈꾸는 올드팬들로 꾸준하게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지리산하면 그래도 ‘화대종주’이기 때문이다.

 

연기조사가 창건한 양대 사찰은 산청군과 구례군을 대표하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화엄사는 544년, 대원사는 548년으로 창건 연대는 각 다르지만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종찰로, 대원사는 선불간경도량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은 비구니 도량으로도 유명한 대원사가 있는 유평계곡은 지리산 중봉과 새봉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은 덕천강이 흐르는 계곡으로 그 길이만 해도 약 12km 정도 되니 그 계곡의 아름다움이란 필설로 다하긴 어려울 것 같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538쪽

 

"그냥 가면 안 되나요?"

"아니 김소장은 아직 지리산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잖아? 그런데 지리산 주릉 종주도 아니고 화대종주를?"

겁을 상실했나?

"정말 가고 싶어?"

"네."

아주 단호한 어조입니다.

"죄송하지만 안내 좀 부탁드립니다."

"나도 요즘은 화대라면 체력이 달리기도 하니 그렇다면 지리 주릉 종주를 하자."

"성중 종주요?"

어디서 용어란 용어는 이미 다 습득을 했더군요.

인터넷으로 많이 훑어보긴 한 모양입니다.

"성중이란 용어는 없었어. 그냥 지리종주로 용어를 정리하자."

날짜를 잡습니다.

10. 16. 지리산 둘레길이 있으니 출장을 다녀온 10. 15.로 D-Day를 잡습니다.

김소장이 간다고 하니 이한검 대장도 달라붙습니다.

김소장은 안내산악회 버스로 예약을 하고 우리는 10. 14. 22:45에 출발하는 동서울 ~ 성삼재 버스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마침 오늘 '에델'님이 안내산악회인 '좋은사람들'의 산행 대장으로 화대를 한다 하고 산수 대장 내외는 동료와 함께 화대에 든다고 하는군요.

무슨 화대를 동네 강아지 이름으로들 아는가?

함양지리산고속 버스 기사님은 정말 베테랑이더군요.

아주 편하게 잠을 자고 성삼재에 내리니 02:30.

김소장이 탄 '다음매일' 버스는 아직 도착 전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라면을 하나 씩 먹고....

이 시간 다른 팀들은?

산수대장은 임걸령을 통과하고 있고 에델님은 화엄사를 02:14분에 출발했다고 하는군요.

그러면 에델의 주력으로 봤을 때 우리와는 노고단 정도에서 만나겠군요.

 

03:00 정각에 김소장을 태운 버스가 도착합니다.

오늘은 그다지 쌀쌀하지 않은 날씨입니다. 

03:07

그래 어디 한번 지리의 참맛을 보시게나.

지리 초년생의 딱지를 떼주는 날이니 제 어깨가 조금은 무겁군요.

천천히 발걸음을 뗍니다.

여기 길 노면이 이렇게 돌인 이유는... 주절주절....

원래는 이 우측의 종석대로 오르는 길이 오리지널 대간길인데..... 주절주절....

이 데크로 오르는 길이 지름길이고 우측으로 우회하면 우번대 ~ 종석대.... 주절주절....

이 물은 무넹기 혹은 무너미라고 하는데 이 물은 이 길상봉의 풍부한 물을 화엄사가 있는 마산면으로 보내기 위해 만든 인공수로......

그러니 산자분수령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고..... 주절주절....

노고단 대피소로 오릅니다.

이때 에델님으로부터 전화가 오는군요.

빠르긴 빠릅니다.

에델님이 우리 뒤를 잡고는 반가운 해후를 합니다.

"제발 가시는 날짜를 미리 알려주세요. 같이 걷게요!"

그래 미안합니다.

10. 28. 에델님이 추천하는 피아골 ~ 뱀사골 무박산행코스가 탐이 나긴 나는데 마침 그날은 친구들과 단풍놀이 하기로 되어 있어서리...

03:56

노고단 고개를 통과합니다.

원래 백두대간은 저 길상봉 정상의 노고단을 통과하여 이리로 내려와야 하는데 ..... 주절주절

이 길이 바로 왕시루봉 가는 길인데 지금은 이렇게 막아놔서 가기가 영 힘든 게 아니지..... 주절주절

왕시루봉은 1962년 외국인 선교사 휴양촌 12동 .... 주절주절...

그러고는 돼지령입니다.

이 뒤로 가면 저연猪淵으로 해서 심원마을.....

여기서 우틀하면 직전마을이 있는 피아골......

지금 단풍이 한창일 거 같다.........

천호샘이라 불렸어야 할 임걸령 샘터에서 물 한 잔 마시고....

05:34

그러고는 노루목입니다.

반야봉은 필히 들러야 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갈길이 바쁘기도 하고 며칠 후 다시 와야 하는 곳이기도 하니 오늘은 생략합니다.

 

걸음을 빨리하여 내려온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만나는 곳에 ‘노루목’이라는 이정목이 붙어 있다. 이는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노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에도 있고,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을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 만한 곳이 아닌 거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이다.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늘’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訓)을 가진 ‘누를 황(黃)’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獐)’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4쪽

여기서 좀 더 진행을 하자. 그러면 이름도 재미있는 ‘날라리봉’(1501m)이다. 어감이 좀 좋지 않은가? 공원관리공단에서는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등 삼 개 도가 만나는 곳이라 하여 1990년대 초 ‘삼도봉’으로 개명을 했다. 실은 이 봉우리가 낫의 날같이 뾰족하다고 하여 ‘낫날봉’이었다. 그게 시간이 흐르면서 음운이 변하여 날라리봉으로 되었던 것인데 애꿎게 이름만 나무란 꼴이다.

- 졸저 전게서 63쪽

 

그러나 최근 발굴한 지리산 연하반 산악회의 기록에 따르면 이 날라리봉에서 불무장등을 거쳐 황장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나라비로 서 있다.'라고 하여 날라리봉으로 명명했다고도 하는군요.

날이 밝아옵니다.

아!

그런데 이게 뭡니까?

촛대봉에서 낙남정맥과 지리남부능선을 따라 붉은색이 구름을 천정으로 삼아 사선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그 예전 반야봉에서 보았던 붉은색의 향연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좌측 지리남부능선과 중앙의 호남정맥의 백운산과 수어지맥의 억불봉.

화개재로 내려옵니다.

뒤를 돌아 반야봉도 보고....

반야봉이 뻘건 색칠을 한 듯.....

화개재에서 묘봉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오르기만 하면 됩니다.

묘봉妙峰입니다.

토끼봉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름이기에 묘봉으로 바꿔 써야......

 

예전의 산행기에서 가져옵니다.

 

그러고는 묘봉妙峰입니다.

예전에는 반야봉에서 정동쪽(卯方)이 있다고 하여 묘봉卯峰 즉 토끼봉이라고 하였는데 최근 연구한 바에 따르면 토끼봉이라는 이름은 그 어원의 근거가 봄 빈약하죠?

 

사실 저도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2쪽이나 ‘현오와 걷는 지리산’ 433쪽에 같은 취지의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토끼봉을 굳이 한자로 쓴다면 卯峰으로 한다고도 했죠.

하지만 한글 순화 차원에서 굳이 묘봉이라 부를 필요 없이 토끼봉으로 부를 것을 고집하고 제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산 이름을 지을 때 그냥 마구잡이로 짓지는 않았습니다.

즉 이 신성하고 고귀하기 까지도 한 산이름을 지을 때는 정성 들여 작명을 한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죠.

 

물론 이 서부 지리의 맹주는 반야봉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묘봉이 반야봉에서 볼 때 정동쪽이라고 우기면 그럴 수도 있는데 한 개그 프로의 대사같이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무식보다는 연구 부족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궁금증이 ‘지리99팀의 엉겅퀴’ 님이나 법사이신 범여 김복환 선배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역시 이 지리산을 얘기하고 지리산의 지명을 얘기할 때 우리는 확실히 불교지명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누차 말씀드렸었죠?

지리산의 까마귀들은 염송도 할 줄 안다고....

그러니 이 토끼봉 아니 이 묘봉妙峰은 반드시 저기 보이는 반야봉과 저 묘향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묘지(妙智)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법(妙法)

 

즉 불가에서는 묘지(妙智)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법(妙法) 등 묘(妙)字가 자주 쓰이는데 이때 妙는 단순히 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 높고 뛰어나다. 완벽하다’에 가까운 뜻이라는 것이죠.

 

구족원만(具足圓滿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

 

妙는 불교의 공(空)사상에 바탕을 둔 말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초월한 불가사의 즉 구족원만(具足圓滿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니 묘지(妙智)는 그냥 지혜가 아니라 말로써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할 수도 없는 지혜 즉 부처의 깨달음을 인간이 말로써 억지로 표현하자니 이름하여 묘지妙智라 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묘지妙智는 불지佛智라 해도 되며, 다른 단어의 妙도 佛로 교체하여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입니다.

 

“향적불(香積佛)이 있는 중향(衆香)세계는 모든 것이 향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나 문자설법이 아닌 묘향(妙香)으로 삼매(三昧)에 든다.”

-유마경 제10품 『향적불품』

 

“묘향(妙香)이란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풍기는 향”

-아함경

 

그래서 묘향은 갑옷 같은 세상의 논리를 뚫고 전해지는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죠.

물론 다른 불교 경전에도 이 妙香은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반야봉般若峰 아래 묘향대가 있으니, 이 묘향을 타고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般若에 이르는 것이 될 것이니 그 그림이 딱 맞아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기는 서쪽으로는 노고단으로 흘러 화엄사로 내려가게 되고, 동쪽으로는 흐르는 그 기는 이 묘봉으로 흘러 한쪽으로는 칠불사로 가고 다른 하나는 연곡사로 간다니 이제야 이 봉우리가 토끼봉이 아닌 묘봉으로 불러야 한다는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칠불사 넘어가는 길.

뒤롤 돌아봅니다.

좌측의 왕시루봉과 우측의 길상봉(노고단)을 보고,

촛대봉과 우측의 시루봉 위의 구름은 여전합니다.

이제는 천왕봉까지.....

명선봉 가는 길......

연하천 대피소는 공사 중.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아주 시끄럽습니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벽소령 가는 숲길은 지리에서 가장 빼어난 구간입니다.

늘 물이 흥건하던 등로는 이제 매트와 데크로 신발을 더럽히는 일은 당분간 없겠군요.

삼각고지 오르기 전 지리북부능선이 갈리는 곳.

우틀하여 삼각고지1484.0m로 오릅니다.

정말 날씨 하나는 끝내주는군요.

가을 날씨가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는 듯.

삼각고지를 지나 부자父子(형제)봉1452.8m으로 오릅니다.

이 어마 무시한 정경.

바로 앞 1399.4봉 너머 벽소령 대피소가 눈에 들어오고, 이어지는 덕평봉1521.0m 뒤로 영신봉과 촛대봉 그리고 그 좌측의 가짜삼신봉과 연하봉이 보이는 제석봉과 천왕봉은 그 웅장함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김소장이 처음에 뭘 알겠냐 마는 동부능선의 흐름도 알려주면서 중봉, 하봉의 소년대와 영랑대도 알려줍니다.

나중에 지리에 대해서 알아갈 무렵 그 이름들이 생각이 나기나 할까요?

좌측 낙남정맥과 중앙의 남부능선의 삼신봉 라인.

그리고 중앙 뒷불의 형제봉 라인과 우측의 섬진강 건너 억불봉까지 조망 가능합니다.

우측으로는 황장산 우측의 왕시루봉과 호남정맥 우측의 섬진강 위로 피어 오르는 운해도 감상하고....

아!

반야般若!

좀 당겨봤습니다.

우측 중앙의 삼도봉에서 내려온 황장산.

부자(형제)봉 우이암右耳巖의 연하굴을 지나고....

부자봉의 우이암.

석문을 통과합니다.

벽소령 대피소로 떨어집니다.

부자(형제)봉을 다시 돌아보고....

대피소에서 잠깐 떡 하나를 먹고....

1023번 도로로 들어섭니다.

"길이 너무 좋네요?"

"느껴져?"

"아까 화개재에서 연동골이라는 곳 얘기했지? 그러면서 이따 관련된 도로가 나올 거라는 얘기도...."

 

그런데 이런 임도 수준의 길은 누가, 왜, 뭐 하러 만들어 놓았을까? 그러고 보니 음정에서 올라오는 임도는 이 벽소령 대피소 코밑까지 아주 넓게 이어져 있음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길의 도로 사정도 아주 좋아 작은 트럭이나 사륜 구동 차들이 오고 가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길은 무엇일까?

 

사실은 1960년대 후반. 누군가가 필요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동에서 함양을 가려하면 너무나 길고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니 반야봉과 천왕봉의 중간을 가르는 도로의 필요성은 능히 짐작이 간다. 여기에 한라산 종단 도로를 개통한 토목업자들의 부추김도 한몫했을 것이다. 물론 핑곗거리도 있었다. 멀리는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을 거론했을 것이고 가까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 잔당 토벌을 1963년에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작전상의 어려움도 한 요인으로 제기됐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도로의 개설 목적을 알게 되면 좀 아이로니컬 해진다. 나아가 이 도로와 천은사~성삼재~달궁을 잇는 지금의 861번 도로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즉 이들 도로가 착공된 때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 당국이 '완전 평정'을 공표한 1955년으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1968년의 일이다. 당시 연동골에 소규모의 무장공비가 출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단다. 신흥에서 화개재를 향해 6㎞를 거슬러 오른 연동마을에 약초꾼을 가장한 이들이 나타나 보리 15말 등을 사려고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무장공비의 존재가 처음 포착이 됐던 것이다. 그들의 출현이 지리산 척추를 파헤치는 군사작전도로 공사를 하게 만들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그렇게 시작한 공사가 1972년 10월에 마쳤으니 그 구간이 신흥 ~ 마천 즉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의 신흥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도로가 된 것이다. 이른바 ‘벽소령 종단도로‘이다. 당시로는 실로 엄청난 대역사大役事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통만 시켜놓고 이용하지를 않아 대성리 방향의 삼정마을 ~ 벽소령 구간은 차는 고사하고 사람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비록 지도에는 도로표시가 되어 있지만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다.

 

그나마 지리 북쪽의 양정, 음정 주민들은 이 도로를 산간지대 경작이나 토봉土蜂 등에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반면 지리 남쪽의 삼정마을 주민들에게는 신흥~삼정 약 7km의 거리 정도만 생활 편익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다. 나아가 삼정삼거리에서 벽소령대피소로 오르는 지름길(4.1km)마저 1995. 9. 5.부터 영구 폐쇄되어 ‘벽소령 종단도로’는 이제는 서서히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 졸저 전게서 437쪽

이 정도 오면 바로 우측으로 안당재와 바깥당재의 굴곡도 확인 가능하고.....

중앙 멀리 화개마을도 가늠이 되고....

데크 공사가 한창입니다.

바른재입니다.

1023번 도로는 여기서 급좌틀.

1432.6봉을 돌아봅니다.

선비샘의 물은 이제 더 이상 샘물로서의 역할을 다한 듯..... 

막걸리 두 통을 비우고 일어납니다.

이제 저 영신봉과 머리만 살짝 보이는 촛대봉이 지척입니다.

1558.3봉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이곳이 칠선봉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엄연한 잘못이죠.

칠선봉이면 적어도 일곱 개 정도의 바위가 있어야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잘못 제작된 이 안내판입니다..

즉 이 안내판에 의하면 촛대봉 좌측의 볼록 솟은 봉우리가 '삼신봉1289m'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상 이 봉우리의 표고 높이는 1690m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1289m라뇨?

이는 낙남정맥이 지나는 삼신봉이 1288.7m라는 것에 비추어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공단에서 이것을 잘못 표기해놓는 바람에 사람들은 철석같이 저 봉우리가 삼신봉으로 오해를 해서 그 뒷골짜기 마저 삼신봉 골이라는 억지 이름까지도 갖게 되었던 것이죠.

2021. 11. 06.

도장골에서 촛대봉으로 오르던 사진입니다.

촛대봉에서 천왕봉을 배경으로 짝은 사진의 첫 봉우리가 조금 전 얘기한 가짜삼신봉이고 그 좌측이 화장봉을 지나 연하봉이고 우측이 일출봉이죠.

지금 이 무명봉이 갑자기 삼신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게 바로 공단에서 실수로 저 봉우리에 삼신봉이라는 표기를 했기 때문이죠.

빨리 제자리를 잡아주기를 기대합니다.

1558.3봉에서 칠성봉 이하 주능선을 감상합니다.

천왕봉.

예전에는 정말 쉽게 종주를 한 곳이었는데.....

영신봉에서 가지를 친 낙남정맥.

작은세개골.....

칠선봉을 지나고.....

영신사터가 있는 곳의 가섭바위를 봅니다.

좌고대가 있는 곳.

영신사지 입구.

공포의 175 계단을 오르면서 쉴 겸 천왕봉 부근을 조망합니다.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지리동부능선.

지리동부능선.

좌고대.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이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중들이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중앙 창암산과 그 뒤 임천 건너 금대봉과 백운산이 읽히면서 임천지맥의 삼봉산과 그 우측의 오도봉과 오도재, 법화산의 흐름을 감상합니다.

내일 둘레길은 저 부근을 걷겠죠.

낙남정맥을 만나고.....

12:51

아직도 팔팔한 우리 김소장.

그런데 중간에 막걸리를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루봉과 세석평전.

 

시루봉을 지나 습한 평원(沮洳原)에 다다랐다. -중략-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쯤 펼쳐져 있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샘물이 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하였다. 물가의 초막 두어 칸을 살펴보니 울타리를 둘러쳤고 흙으로 만든 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바로 내상內廂에서 매를 잡는 초막이었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중략-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에 불과한데, 희완(戱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촛대봉과 세석평전.

추색이 완연한 낙남정맥.

군부대가 주둔하던 헬리포트.

그래도 들르긴 들러야.....

세석을 지납니다.

우리는 장터목으로.....

세석평전의 창불대.

영신봉의 운장바위와 우측 한신계곡 입구의 한신바위를 봅니다.

반야와 길상봉을 한 번에.....

촛대봉.

 

마천이나 거림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영신봉보다는 시루봉甑峰1703.1m(촛대봉으로 지금의 시루봉1578m이 아님)을 제1봉으로 부르고, 제석봉을 제2봉인 중봉으로 불렀다.

이 촛대봉은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김종직과 하달홍은 이 촛대봉을 중봉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는데 특히 김종직은 증봉甑峰이라고 불렀으며,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 송병선은 촉봉燭峰 그 외 시루봉, 수리봉, 취봉鷲峰 등 여러 가지 이름들인데 유몽인의 경우 사자봉으로 불렀다.

 

4월 5일 갑술일. -중략-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는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綿竹〕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사자 한 마리 안 사는 우리나라에 웬 사자봉?"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도솔산인 이영규는 이에 대해 “이 역시 불교식 이름으로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탔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친절한 해설을 덧붙인다. 그런데 촛대봉은 뭐고 증봉, 시루봉은 뭔가? 생긴 게 그렇게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제12구간을 지나면서 살펴봤다.

 

- 졸저 전게서 475쪽

일출봉 너머의 천왕봉.

일출봉 능선과 멀리 중산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좌측이 황금능선.

가짜삼신봉과 화장봉 제석봉.....

천왕봉.

화장봉으로 오릅니다.

좌측 왕시루봉, 길상봉(노고단)과 반야!!!!

그리고 만복대와 정령치 그리고 큰고리봉........

그리고 우측으로 바래와 덕두까지....

마천. 임천지맥과 창암산 등.....

멀리 덕유까지.

연하선경.

 

연하봉이다. 점필재가 지날 때도 부를 이름이 없던 봉. 그저 조망이 좋았음에도 이름이 없어 불러주지 못한 봉이다.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점필재를 보고 오죽했으면 동행했던 유극기가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했을까? 그날 점필재가 “고요한 이 산수 속에 그윽하게 운무가 피어오르고 연기가 노는 듯하며 저 바위에 걸린 노을이 함께 어우러지니 연하선경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네.”라는 말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점필재는 이런 말없이 그저 “증거가 될 만한 것도 없는데 어찌 이름을 붙이겠는가!”라며 이곳을 지났다.

 

연하煙霞의 사전적 의미는 안개와 노을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좀 싱겁다. 그 말보다는 ‘고요한 산수의 경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 더 다가온다. 선경仙境 역시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보다는 ‘경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 역시 더 다가온다. 그렇다면 연하선경이라는 말 역시 그저 ‘고요한 산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이라는 뜻으로 읽으면 되겠다. 이곳이 과연 그럴까? 점필재는 그 아름다움을 차마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이해하자. 한자의 단조로움 때문이었으리라.

 

이곳을 안개가 살짝 피어오르는 날 혹은 촛대봉 너머로 노을이 지는 저녁에 지난다면 연하라는 말을 실감할 수도 있겠으나 어느 때라도 일출봉과 제석봉 그리고 천왕봉을 한 세트로 볼 수 있을 때가 그래도 으뜸이 아닐까? 남효온은 이 연하봉을 ‘소년대’라 부르기도 했다.

 

 - 졸저 전게서 453쪽

일출봉....

일출봉 능선.

좌측으로 가면 곡점으로.....

홀로 오신 분.

70은 되어 보이는데.....

거의 체력도 다 하신 거 같은데 악착같이 천왕봉을 밟으시겠다고....

그냥 하산하시는 게 나을 거 같다고 말씀드립니다.

도장골로 합수되는 골.

아쉬움에.....

드디어 연하봉으로.....

지리에서 제일가는 연하봉.

이제 장터목까지 다 왔군요.

14:48

장터목대피소입니다.

그나저나 김소장이 늦는군요.

음....

쩔뚝쩔뚝......

대피소에서 스프레이를 얻어 응급처치를 하고.....

초행에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네.

미련을 갖지 말고 여기서 하산을 결정합니다.

좌측으로는 황금능선.

저 아래 보이는 마을까지 내려가야 하는군요.

마천과 인월까지 보고....

...........

칼바위골로 우틀합니다.

부상자가 발생하여 119가 출동을 하였습니다.

유암폭포

저 위로 장터목 대피소가 보이고......

가을.

출렁다리.

칼바위.

오늘 하루 마고 할매 덕분에 산행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부처님 세게에서 다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法界橋입니다.

16:56

내려오면서 김소장도 회복이 되었다는군요.

밥과 국을 하나 시켜놓고 내려오자마자 허기진 배를 달래줍니다.

반주로 소맥으로 하산식에 갈음합니다.

"국장님. 어제 국장님이 말아주신 그 소맥이 그렇게 맛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차에 타자마자 바로 잠들었다가 휴게소에서 화장실 한 번 다녀오고 계속 잠만 자다 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