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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목적 없는 산행(성삼재 ~ 연하천 삼거리 ~ 음정마을)

2022. 08. 20. 예정한 묘향암 산행을 위하여 준비할 게 많습니다.

특히 절에 시주할 물건들이 무게가 엄청나게 나가 인력으로 그걸 해결하려 하니 골머리를 좀 굴려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지리산을 좀 다녀와야 하는데 연일 비 소식이니 난감하기만 합니다.

휴가랍시고 설악산 부근을 헤매다 귀가를 했지만 묘향암 건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어쩔 수 없군요.

2022. 08. 14. 23:00 성삼재행 버스를 타기 위해 동서울터미널로 나갑니다.

성삼재까지는 4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

하긴 산내면 대정리에서 올라오는 길이 좀 멉니까?

부운 정도부터는 구절양장이기도 하고.....

02:55

성삼재에 도착합니다.

휴게실에 들어가 장비를 갖추고 어디로 갈까 고민합니다.

오후 2시 버스를 타고 귀가를 하면 될 것이니 서북능선을 타고 운봉이나 인월로 갈까?

아니면 화개재 정도에서 내려가?

오랜만에 서북능선이나 타자.

성삼재 휴게소를 떠나,

서북능선 초입으로 진행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스틱도 안 가지고 오고.....

10분 정도 걸으니 오소리 관할 구역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혼자 온 걸 알고 녀석이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는군요.

이 녀석은 저만 보면 저 난리니..........

찝찝한 마음을 금할 수 없군요.

"알았다. 스틱도 없어 너와 싸울 기본적 조건도 없구나."

되돌아 나옵니다.

그냥 주릉이나 걷자.

국공직원은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순찰을 도는지 몽유병 환자처럼 왔다 갔다 하는군요,

03:25

초소 입구를 통과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남아돌아가니 좀 길게 그리고 천천히 걷습니다.

우회를 하며 코재를 봅니다.

코재라.

코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 그러니까 1988년 천은사와 달궁을 잇는 861번 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 성삼재나 노고단을 오르는 방법은 화엄사 코스가 주였습니다.

대찰大刹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의 9km에 이르는 지리산종주에 나서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밟고 가야 하는 길이었다는 것이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이 루트의 토사의 유실을 방지할 목적으로 부득불 돌계단을 만들어놓게 되었습니다.

예전 종주 산해을 하기 위해 그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그 긴 돌계단을 오르려면 무릎에 통증도 오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걷는라 주변 경관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걷다보니 코가 땅에 닿을 정도가 되어 오르는 마지막 고개.

그 고개가 바로 코재가 된 것이죠.

 

그런데 이정목에 '무넹기'라는 명찰이 붙어 있습니다.

 

무넹기?

그런데 갑자기 장 감독이 큰소리를 친다.

“형, 지금 이 길이 백두대간 능선이잖아! 그런데 왜 이 물은 능선을 따라 흐르다 왜 우측 만수천 쪽으로 안 가고 화엄사 쪽으로 가는 거야! 거긴 섬진강으로 가는 방향이잖아.”

 

그렇다. 다리를 건너 성삼재로 향하다 보면 코재 바로 전에 왼쪽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이 물은 분명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그리고 이 물은 장 감독이 지적하듯 만수천으로 가야지 맞다. 그렇다면 산자분수령의 예외란 말인가?

미리 얘기하자면 이 물은 노고단 물이 맞고 이 수로는 인공 수로이다. 예전 화엄사 부근, 그러니까 구례의 들에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할 때가 있었다. 그때 이 노고단의 풍부한 물을 화엄사 쪽으로 넘겨주기 위해 인공 수로를 하나 만들었다. 그게 바로 이 수로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물을 넘겨주었다.’고 하여 무넹기(지도상 ‘가’의 곳)이다. 그리고 이 물은 낙동강이 아닌 족보에도 없는 섬진강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이는 인공 수로이므로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머쓱해하는 장 감독을 보면서 필자는 속으로 생각한다. ‘산경표의 기본 원리는 알아가는구나. 그래, 산자분수령만 알아도 반은 안 것이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70쪽

코재 바로 위 이 안내문이 붙어 있는 곳.

이곳이죠.

그러니까 아까 그 명찰은 코재로 그리고 이 앞에는 무넹기라는 명찰을 붙여줘야겠습니다.

노고단 대피소에 오르니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구름에 쌓여 있습니다.

바람도 거게군요.

바람이 불면 주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물이 비 오듯 합니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문은 5시에 열린다 하고....

이번 주말에 노고단을 올라야 하니 통과.

조난자 추모목.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옛길이죠.

이 길로 오르다가 좌틀을 하면 왕시루봉으로 갈 수도 있고.....

좁은 산죽밭을 지나,

돼지령을 지납니다.

화대종주를 하는지 많은 젊은이들이 반바지에 스타킹을 신고 멸심히들 지나고 있습니다.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고,

천호샘이라 불려야 했을 임걸령 샘물.

몽화 아우가 갖다 놓은 국자로 한 모금 마시고 지납니다.

반야봉을 올라가 봤자 아무것도 볼 게 없을 것이고.....

그저 이 정도이니......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곳.

올바르게 백두대간을 진행하려면 북진의 경우 이곳으로 올라 노루목으로 내려와야죠.

묘향암 입구.

스님.

주말에 뵙겠습니다.

소금장수묘.....

그리고 바로 옆의 토끼재.

 

1818년 정석구의 두류산기를 봅니다.

 

조선 후기 1818년 남원에 거주한 유학자 정석구가 쓴 ″두류산기〃는 200년 전의 자료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리산의 형세와 지명들을 명확하게 기록을 해서 지리산 지명 탐구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정석구의 두류산기에서 삼도봉이 토끼봉이라는 내용의 기록을 옮겨서 이해와 분석을 해 봅니다.

 

『...만복대에서 뻗은 산줄기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솟아 묘봉(玅峯)이 되니 산동(山洞)의 주봉이다.

곧장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 조금 동쪽에 종봉(鍾峰, 현 종석대)이 있는데, 남악사(南嶽祠) . 천은사(泉隱寺) . 화엄사(華嚴寺)의 주봉이다.

산줄기가 낮아졌다가 동쪽으로 뻗어 노구당(老嫗堂, 현 노고단)이 되는데, 문수동(文殊洞)의 주봉이 된다.

산줄기가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반야봉(般若峰)으로, 묘봉과 마주 서 있으며, 나머지 산줄기(현 심마니 능선)는 반선동(半仙洞)에서 그친다.

산줄기가 북쪽으로 방향을 튼 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뻗어 토현(兎峴)[註 : 이 아래는 문수사(文殊寺)와 연곡사(燕谷寺)가 있는데 두 절 사이의 주능선이다.]을 지나면 중반야(中般若)가 되니, 연곡사 골짜기와 화개동 사이의 주봉이 된다...』

 

위의 문단에서, “반야봉에서 북으로 방향을 튼 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뻗은 토현(兎峴)을 지나면”에서의 토현은 토끼 고개의 한자 표시이며, 토끼봉을 비정해줄 관건으로 보면서 토현의 위치를 짐작해 보면 지금의 '소금장수 무덤' 부근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토끼 고개가 일구어낸 봉우리인 지금의 삼도봉 즉 날라리봉이 당연히 토끼봉이 될 것입니다.

곧 이어지는 문단,

"토현을 지나면 이 아래는 문수사(文殊寺)와 연곡사(燕谷寺)가 있는데 두 절 사이의 주능선이다.”

......

“중반야(中般若)가 되니, 연곡사 골짜기와 화개동 사이의 주봉이 된다.”

 

이 문단에서 설명한 부분은 피아골과 화개골을 가르는 불무장등 능선 즉 도계능선道界稜線이 삼도봉 즉 날라리봉에서 시작되는 사실을 인식해 보면 지금의 삼도봉이 주봉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중반야(中般若)라는 명칭은 삼도봉이 반야봉 지척의 유일한 명승의 봉우리이기에 반야봉권에 묶어서 작은 반야라는 뜻도 함께 내포된 중반야라는 이름을 부친 듯합니다.

 

하나를 더 들어보죠.

우리가 잘 아는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글로 1938년 써진 지리산탐험기입니다.

 

『.....이 직전계곡의 동복(洞腹)을 뚫고 나가는 오늘 우리의 코스는 이번으로써 새 노정(路程)을 짓는 길이라,

전인(前人)에게서 들은 바 없는 모험노정(冒險路程)임을 즐거워하여, 나는 연방 지도를 펴 들고 보며 무한한 흥미로 내려가는 것이다.

직전으로 내리는 길에도 저 ‘토끼봉’ 허리를 타고 오는 길은 쉽기도 하고 원근을 조망할 수도 있다건 마는, 쉬운 길은 탐하고 싶지 아니하고, 조망은 저 최고봉 상의 과목(課目)이라, 오늘 우리는 오히려 이 불견천(不見天)의 깊은 동곡을 바닥으로, 바닥으로만 밟아내려, 지리산 복중별취(腹中別趣)를 맛보자는 것이다....』

 

위 기록은 1936년 일제강점기 조선일보가 주관한 지리산등반에 참가한 노산 이은상의 산행기록 중의 한 부분으로, 돼지령에서 피아골 골짝으로 하산하는 과정을 기록한 문단입니다.

당시 선생의 일행들은 지리산 산행 여정을 지리산 속의 사찰 관람과 연계하여서 화엄사에서 출발해서 노고단을 거쳐 돼지령에서 피아골로 길을 잡아 연곡사, 쌍계사 등을 관람 후 대성골  세석을 지나 천왕봉 코스를 택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불견천(不見天)의 깊은 동곡> 즉 수목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 전인미답의 험난한 피아골 골짝을 내려가면서, "직전으로 내리는 길에도 저 ‘토끼봉’ 허리를 타고 오는 길은 쉽기도 하고 원근을 조망할 수도 있다건 마는."이라고 토끼봉을 언급했습니다.

선생이 언급한 <저 “토끼봉”허리>는 불무장등을 가리킨 것이며, 기록에서의 토끼봉은 현재의 삼도봉이 명확합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 묘봉은 토끼 卯의 묘봉이 아니라 묘할 妙의 묘봉입니다.

그 묘봉妙峰이 와전되어 卯峰으로 되었다가 한글 순화하는 이들 즉 예전의 저같이 한글인 토끼봉으로 풀어쓴 것일 겁니다.

 

  - 졸고 지난 산행기에서.....

그러니 중반야 = 날라리봉 = 삼도봉이 되겠죠.

그 삼도봉을 지납니다.

화개재로 내려가는 길고도 긴 데크.

이 데크 때문에 지리 주릉 산행시간이 상당히 단축됐습니다.

묘봉 정상이 구름에 덮여 있습니다. 

화개재 헬기장.

지금 시간이 05:50

반선으로 내려간다면 고남형과 점심을 먹는 게 아니라 아침을 먹게 되겠군요.

와운마을로 갈까?

아니면 북부능선을 타고 실상사로?

아니지 스틱을 안 가져왔으니 그건 좀 곤란하고....

그렇다면 연하천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음정마을이나 아니면 벽소령에서 음정마을로? 

그래 되는 대로 가자....

연동마을 가는 길을 보고....

천천히 올라가기로 합니다.

그래 봤자 1.2km만 걸으면 묘봉인데......

누차 얘기했죠.

토끼봉이라 부르면 안 된다고.....

예전 산행기를 가져옵니다.

 

그러고는 묘봉妙峰입니다.

예전에는 반야봉에서 정동쪽(卯方)이 있다고 하여 묘봉卯峰 즉 토끼봉이라고 하였는데 최근 연구한 바에 따르면 토끼봉이라는 이름은 그 어원의 근거가 봄 빈약하죠?

 

사실 저도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2쪽이나 ‘현오와 걷는 지리산’ 433쪽에 같은 취지의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토끼봉을 굳이 한자로 쓴다면 卯峰으로 한다고도 했죠.

하지만 한글 순화 차원에서 굳이 묘봉이라 부를 필요 없이 토끼봉으로 부를 것을 고집하고 제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산 이름을 지을 때 그냥 마구잡이로 짓지는 않았습니다.

즉 이 신성하고 고귀하기 까지도 한 산이름을 지을 때는 정성 들여 작명을 한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죠.

 

물론 이 서부 지리의 맹주는 반야봉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묘봉이 반야봉에서 볼 때 정동쪽이라고 우기면 그럴 수도 있는데 한 개그 프로의 대사같이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무식보다는 연구 부족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궁금증이 ‘지리 99팀의 엉겅퀴’ 님이나 법사이신 범여 김복환 선배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역시 이 지리산을 얘기하고 지리산의 지명을 얘기할 때 우리는 확실히 불교지명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누차 말씀드렸었죠?

지리산의 까마귀들은 염송도 할 줄 안다고....

그러니 이 토끼봉 아니 이 묘봉妙峰은 반드시 저기 보이는 반야봉과 저 묘향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묘지(妙智)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법(妙法)

 

즉 불가에서는 묘지(妙智)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법(妙法) 등 묘(妙)字가 자주 쓰이는데 이때 妙는 단순히 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 높고 뛰어나다. 완벽하다’에 가까운 뜻이라는 것이죠.

 

구족원만具足圓滿 : 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

 

妙는 불교의 공(空) 사상에 바탕을 둔 말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초월한 불가사의 즉 구족원만(具足圓滿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니 묘지(妙智)는 그냥 지혜가 아니라 말로써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할 수도 없는 지혜 즉 부처의 깨달음을 인간이 말로써 억지로 표현하자니 이름하여 묘지妙智라 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묘지妙智는 불지佛智라 해도 되며, 다른 단어의 妙도 佛로 교체하여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입니다.

 

“향적불(香積佛)이 있는 중향(衆香)세계는 모든 것이 향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나 문자 설법이 아닌 묘향(妙香)으로 삼매(三昧)에 든다.”

-유마경 제10품 『향적불품』

 

“묘향(妙香)이란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풍기는 향” 아함경

 

그래서 묘향은 갑옷 같은 세상의 논리를 뚫고 전해지는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죠.

물론 다른 불교 경전에도 이 妙香은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반야봉般若峰 아래 묘향대가 있으니, 이 묘향을 타고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般若에 이르는 것이 될 것이니 그 그림이 딱 맞아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기는 서쪽으로는 노고단으로 흘러 화엄사로 내려가게 되고, 동쪽으로는 흐르는 그 기는 이 묘봉으로 흘러 한쪽으로는 칠불사로 가고 다른 하나는 연곡사로 간다니 이제야 이 봉우리가 토끼봉이 아닌 묘봉으로 불러야 한다는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칠불사 가는 길.

저 안내판 뒤로 들어서면 칠불사 가는 멋진 등로가 있습니다,.

해가 납니다.

와운마을 가는 길.

그러고는 연하천 대피소입니다.

아까 저를 추월해 가던 3팀 중 한 팀은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군요.

시원한 물로 한 통을 채우고,

늘 질펀한 길을 이렇게 데크로 덮고 나니 한결 운치가 있군요.

연하천 삼거리입니다.

더 갈까?

그냥 좌틀하여 북부능선 방향으로 진입합니다.

여기도 산죽이 죽고 있습니다.

자연천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좌측으로 들면 실상사로 진행할 수 있는 지리북부능선으로 들겠지만,

지리 주릉도 구름이 걷히고 있습니다.

구조목에 방행 표시가 좀 잘못돼 있습니다.

삼각고지?

삼각고지 쉼터라는 얘깁니까?

주지하다시피 지리주릉에서 지리북부능선이 갈라지는 그 봉우리1484m가 삼각고지인데.....

이 표기 때문에 아까 그 구조목에 방향 표시가 그렇게 되었던 것이로군요.

그러고 보니 임걸령 쉼터라는 곳의 표기도 이런 식으로 되었죠....

샘물.

1023번 도로를 만납니다.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음정마을과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을 잇는 도로죠.

 

그런데 이런 임도 수준의 길은 누가, 왜, 뭐 하러 만들어 놓았을까? 그러고 보니 음정에서 올라오는 임도는 이 벽소령 대피소 코밑까지 아주 넓게 이어져 있음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길의 도로사정도 아주 좋아 작은 트럭이나 사륜 구동 차들이 오고가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길은 무엇일까?

 

사실은 1960년대 후반. 누군가가 필요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동에서 함양을 가려하면 너무나 길고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니 반야봉과 천왕봉의 중간을 가르는 도로의 필요성은 능히 짐작이 간다. 여기에 한라산 종단 도로를 개통한 토목업자들의 부추김도 한몫했을 것이다. 물론 핑곗거리도 있었다. 멀리는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을 거론했을 것이고 가까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 잔당 토벌을 1963년에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작전상의 어려움도 한 요인으로 제기됐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도로의 개설 목적을 알게 되면 좀 아이로니컬 해진다. 나아가 이 도로와 천은사~성삼재~달궁을 잇는 지금의 861번 도로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즉 이들 도로가 착공된 때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 당국이 '완전 평정'을 공표한 1955년으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1968년의 일이다. 당시 연동골에 소규모의 무장공비가 출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단다. 신흥에서 화개재를 향해 6㎞를 거슬러 오른 연동마을에 약초꾼을 가장한 이들이 나타나 보리 15말 등을 사려고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무장공비의 존재가 처음 포착이 됐던 것이다. 그들의 출현이 지리산 척추를 파헤치는 군사작전도로 공사를 하게 만들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그렇게 시작한 공사가 1972년 10월에 마쳤으니 그 구간이 신흥 ~ 마천 즉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의 신흥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도로가 된 것이다. 이른바 ‘벽소령 종단도로‘이다. 당시로는 실로 엄청난 대역사大役事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통만 시켜놓고 이용하지를 않아 대성리 방향의 삼정마을 ~ 벽소령 구간은 차는 고사하고 사람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비록 지도에는 도로표시가 되어 있지만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다.

 

그나마 지리 북쪽의 양정, 음정 주민들은 이 도로를 산간지대 경작이나 토봉土蜂 등에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반면 지리 남쪽의 삼정마을 주민들에게는 신흥~삼정 약 7km의 거리 정도만 생활 편익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다. 나아가 삼정삼거리에서 벽소령대피소로 오르는 지름길(4.1km)마저 1995. 9. 5.부터 영구 폐쇄되어 ‘벽소령 종단도로’는 이제는 서서히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38쪽

이 돌길을 야자나무 매트로 덮을 생각이군요.

좋죠.

우측으로 조망이 터지는군요.

임천지맥입니다.

좌측으로 삼봉산1186.7m이 우측으로 흘러 오도재를 지나 우측의 법화산992.9m까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음정마을 ~ 벽소령대피소까지의 거리는 6.7km.

상당한 거리죠.

가끔 스피커에서 낙석주의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표지판 바로 왼쪽이 도솔암으로 오르는 입구가 되죠.

7암자 산행(도솔암~영원사 ~ 삼불암 ~ 문수암 ~ 삼불사 ~ 약수암 ~ 실상사)을 할 때 제일 처음 들르는 곳이라는 얘기죠.

바로 이 길.....

이제 다 왔습니다.

고남형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군요.

천천히 걸어내려 갑니다.

좌측으로 창암산924.9m.

우측으로 천왕봉까지 보이는군요.

여기서 보는 창암산 우측의 와불산1164.9m.

제대로 된 모습을 관찰하기 어렵군요.

영신봉은 구름에 가려 있고.....

음정마을에 도착하니 고남 형이 오시는군요.

같이 인월로 가서 점심을 먹고 저는 서울행 버스를 타고 귀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