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99개의 골짜기를 가졌을 정도로 그 규모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
그중 한신계곡은 폭포로, 뱀사골은 징담澄潭으로 그리고 칠선계곡은 적요한 원시자연경관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물론 도장골은 이들 모두를 갖춘 곳이라고 얘기되기도 하고, 국골은 실폭포의 연속, 반면 허공다리골은 의미를 모르는 곳이라고 얘기되기도 합니다.
그중 칠선계곡.
예전에는 소나기 정도의 비만 와도 칠선계곡을 따라 오르내리는 것을 피해야된다는 것은 지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산악지형의 특성상 이 칠선계곡은 국지적으로 많은 비가 일시에 쏟아지는 곳이고 그에 따라 위험은 늘 상존한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즉 빗물이 계곡을 넘칠 때에는 오도가도 못하다가 조난이 되기도 하고 혹은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 실종 상태가 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급류에 흘러내려오는 돌에 맞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기도 하는 곳이라는 얘기죠.
올라가다보면 알겠지만 지금 계곡에 남아 있는 조금은 흉측한 모습이 이를 반증하고 있죠.
이런 이유로 예전 그러니까 1964년도 이전에는 이 칠선계곡을 통해 천왕봉을 오른다는 것은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지리산의 무서움을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칠선의 장애가 오히려 산꾼들의 모험심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나요?
1964. 11. 28.
부산 대륙산악회를 중심으로 17명의 '지리산 동부 루트 개척 학술조사 등반대'가 꾸려집니다.
이들의 우선 목표는 추성동을 시작으로 이 칠선계곡을 따라 천왕봉을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등반대는 지리산의 전설 김경렬 선생이 대장을 맡았고 대원으로는 성산, 곽수웅, 유효수 등 이름만 들어도 어마무시한 부산 산악계 대부들로 멤버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들에 의해 칠선계곡의 많은 지명이 탄생되기도 했습니다.
마치 지리 주릉의 여러 지명 가령 산희샘, 연하천, 연하봉, 연하굴 등이 1955. 5. 5. 결성된 구례 연하반 산악회에 의해 생겼던 것처럼.....
이들의 이날 등반은 3박4일로 진행이 되었는데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성산 선생은 계곡에서 사향노루와 담비 그리고 1백여 마리의 산물오리떼를 목격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에 앞선 10월의 예비조사대는 백무동으로 넘어가는 능선에서 곰 두 마리를 목격했다고도 하고.....
나아가 그 곰이라는 녀석을 1962년에는 20마리, 1963년에는 16마리, 1964년에는 4마리나 잡았다고 하니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부근에는 아직도 포수 출신의 주민이 여러분 생존해 있으면서 이분들이 이런 사실을 증언해 준다고 하니 우리는 이런 사실을 그저 '뻥'정도로 치부하면 안 된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 부근에 곰의 먹이인 굴참나무와 도토리나무가 많으니 이런 얘기들은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칠선계곡.
저는 감히 이 칠선 계곡이 설악의 천불동이나 한라의 탐라와 비교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지리에 든지 너무 오래됐습니다.
남원과 산청 그리고 구례에 있는 지인들의 소식도 그립고......
백무동에서 내려 장터목 ~ 천왕봉 다시 back하여 세석 ~ 삼각고지 ~ 지리북부능선 ~ 와운카페 ~ 와운마을로 내려올까?
동서울에서 지리산 백무동으로 가는 심야버스는 23:59....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이미 매진,
23:50, 23:55 증차 편도 매진.
23:45 예매가 시작됐습니다.
자리 하나 얻습니다.
마천으로 전화(010-4488-7143)를 해서 개인택시 김 사장님께 토요일 새벽에 내려간다고 얘기를 해둡니다.
칠선계곡으로 루트가 바뀝니다.
23:45 출발한 버스는 중간에 한 번 쉬고는 그대로 달려갑니다.
03:20
마천에 도착합니다.
기다리고 있던 김사장님과 오랜만에 해후를 합니다.
차 안에서 그동안 밀렸던 얘기를 간단하게 나누고,
지도 #1
방장산 제1문을 지나 의탄 마을을 거쳐 추성동 마지막 민가에서 하차합니다.
추성동은 이 부근에 있었던 신라시대 추성 楸城 에서 유래합니다.
추楸를 쓰게된쓰게 된 이유는 이 부근에 호두나무가 많이 나서 쓰게 된 것일 겁니다.
03:41
장비를 갖추고 랜턴도 켜고 그리고 신발끈도 조여맵니다.
추성동에서 두지동까지 1.5km
오늘이 칠선계곡 10번 째 산행은 되나?
본격적으로 칠선계곡 안으로 듭니다.
안내판을 보면 천왕봉까지는 9.7km에 예상 소요시간은 8시간이라고 하는군요.
마폭포까지의 8.1km는 그런대로 순탄한데 이후 1.6km가 어렵다는 설명입니다.
경험칙에 비추어 볼 때 적절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팁 하나.
예전에는 5~6월, 9~10월 매주 월요일 1회 공단 직원 인솔 하에 천왕봉까지 오르거나 아니면 삼층폭포에서 되돌아 내려왔어야 했는데 이제는 수, 목, 토요일이 추가가 됐군요.
아주 바람직스럽습니다.
좌측으로 새벽의 적막을 깨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올라가면 불빛이 보이고 이내 민가가 하나 나옵니다.
두지동 마을입니다.
여기서 우틀하면 백무동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두지는 뒤주의 이곳 사투리이죠.
뒤주는 가을에 타작을 한 후 나락이나 기타 곡식을 저장했던 곳인데 하봉에서 보면 이곳 생김새가 그렇게 생겼다고 하기도 하고 예전 가야시대 때 식량창고로 쓰여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는 구형왕의 국골과 맞물려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후자가 맞는 얘기죠.
지금의 얼음터도 당시 석빙고터였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진합니다.
출렁다리로 의탄천을 건넙니다.
추성동으로 들어오기 초입이 의탄촌인데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재직 시 이곳을 지나면서,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 될 것이 없었다.'는 곳이죠.
마지막 민가인 칠성동 옛 마을에서는 사진전을 열고 있군요.
선녀탕을 지나고.....
수량이 부족해 보입니다.
옥녀탕.
다 1964년에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개중에는 중간에 다른 이름으로 개명한 것도 있을 것이고....
출렁다리를 건넙니다.
04:51
통제소에 도착하니 이제 날은 다 밝았습니다.
랜턴을 끄고....
이제부터는 육안으로 칠선을 감상하며 오를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수량이 너무 부족합니다.
지도 #1
칠선계곡이 이 모양이라니.....
지도 #2의 'A'의 곳.
예약을 하지 않은 일반인이 평일 오를 수 있는 최고지.
여기부터는 비탐구간입니다.
수량이 적다보니 매 머리 같은 바위도 관찰하게 되는군요.
와우!
새로 생긴 다리.
원래는 의탄천 좌측으로 진행을 했었는데 이 다리가 놓임에 따라 등로는 우측으로 진행하게 되고 그러면서 칠선폭포를 우회하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에 동료들과 아침을 먹던 곳.
고남, 이한검, 나무지게, 맹이, 상복, 푸우.......
쉬어 가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물이....
물이 없습니다.
사실 칠선계곡은 이런 맛이죠.
원시림을 걷는 듯한.....
이 정도로는 턱도 없죠!
지도 #2의 'B'의 곳.
여기서 좌측 능선으로 붙으면 백무동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새로 생긴 길을 걸으면서 칠선폭포를 우회하게 되는군요.
좌틀하여 칠선폭포를 보고 올까?
물도 별로 없을 것이니 그냥 패스!
칠선계곡이 이럴 때가 다 있다니!
지도 #3
이게 과연 대륙폭포인가!
1964년 개척대가 이곳을 지나면서 자신의 산악회 이름을 따서 대륙폭포라 명명한 데서 연유합니다.
낙동정맥 길에 있는 부산 금정산의 대륙봉도 이 산악회에서 붙인 거죠.
대륙폭포를 봤으면 다시 되돌아 나와 우측으로 붙어야합니다.
그러면 능선 하나를 넘어 다시,
우측 물줄기를 따라야 하고,
좌측을 따라,
상당한 높이에서 아래를 보게 됩니다.
좌선폭포.
삼천폭포.
어느 분이 수고를 해주셨을까?
굉음을 내고 쏟아질 폭포였는데......
누가 훼손을 했을까?
격자 기술....
우측으로는 삼층폭포,
그리고 좌측으로 마폭포가 관찰된다면 이제부터 가장 험난한 구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천왕봉까지의 직등구간이기 때문이죠.
길도 없던 이곳을 어떻게 올랐을까?
"여기서부터는 전혀 인간의 발길이 지나가지 않는 곳이다. 경사 60˚, 군데군데 산이 빠져 사태를 이루고 있다. 정글 상태의 숲, 한길이 넘는 눈 속을 피하여 때로는 사태진 곳을 올라야 했다. 표고 1,700m쯤 올랐을 때 바람이 일고 사태 난 절벽에서 낙석이 쏟아졌다. 천왕봉 바로 밑인 거 같은데 거기에는 여남은 개의 봉우리들이 쭈뼛쭈뼛 솟아 앞을 막았다. 비와 눈에 산이 침식되어 사태난 곳이 여러 개 생긴 것이다..... 눈과 낙엽과 구상나무 군락지 사이에 얽힌 잡목 떨기를 뚫고 가는 동안 배낭이 걸리고 옷이 찢어졌다. 꽁꽁 얼어 잠깐이나마 멈춰 서면 땅에 붙어버릴 것 같은 신발을 생각해서 부득이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이 가까워진 거 같아 이제 한숨 놓으려 하였지만 그래도 능선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이곳을 개척한 이의 보고서에 나오는 글입니다.
적어도 수령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향나무.
이제 고도가 1467m이니 앞으로 440m는 더 올라가야 한다 하네요.
그것도 직등으로....
우측으로 제석봉이 관찰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크가 나옵니다.
이제 한 시간 정도 더 올라가면 되려나?
계단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봅니다.
우측으로 하봉.
저 멀리 임천 건너 삼봉산이 보이니 우측 오도재 건너가 바로 법화산이겠고.....
좌측 두 번째 봉우리 부근이 통천문.
고도를 더 높였습니다.
1817m이니 100m만 더 올리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고대하던 철계단.
이것만 오르면 되죠?
날파리들이 극성을 부립니다.
우리가 버린 과일 껍데기나 쓰레기 때문.....
중봉이 보이고....
사람 소리가 들립니다.
조심스럽게 목책을 넘어 천왕봉으로 오릅니다.
천왕봉은 하늘을 받치는 기둥입니다.
노산 이은상 같은 이는 이 비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보라! 나는 지금 천왕봉 머리에 올랐노라. 구름과 안개를 모두 다 헤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 되어 하늘 위에 올랐노라.”
08:35
정상석 인증샷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진 안 찍으니 그냥 살짝.
그러고는 주변을 감상합니다.
중봉.
우측으로는 동부능선 새봉에서 이어지는 왕산과 필봉산.
그리고 멀리 황매산까지....
가야산은 희미해서 찾을 수 없고....
음....
반야와 그 좌측의 길상봉.
그리고 왕시루봉까지...
우측의 만복대와 고리봉...
앞의 일출봉과 연하봉 그리고 영신봉....
북부능선과 서북능선을 한 방에.....
바래봉과 임천지맥의 감투봉을 이어 보고....
임천지맥과 바로 앞의 창암능선.
금대봉과 삼봉산을 잇습니다.
성모사터.
드디어 지팡이를 내저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바로 성모사였다. 사당 안에 석상 한 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흰옷을 입힌 여인상이었다. 이 성모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말하기를 “고려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어진 왕을 낳아 길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높여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라고” 한다. 영남과 호남에 사는 사람들 중에 복을 비는 자들이 이곳에 와서 떠받들고 음사淫祠로 삼았다. 그래서 옛날 초나라∙월나라에서 귀신을 숭상하던 풍습이 생겨났다. 원근의 무당들이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산다. 이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내려다보며 살피다가 그들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숲 속에 몸을 숨긴다. 유람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하산하면 다시 모여든다.
봉우리 밑에 벌집 같은 판잣집을 빙 둘러지어 놓았는데,, 이는 기도하러 오는 자들을 맞이하여 묵게 하려는 것이다. 짐승을 잡는 것은 불가에서 금하는 것이라 핑계하여,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소나 가축을 산 밑의 사당에 매어놓고 가는데, 무당들이 그것을 취하여 생계의 밑천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성모사∙백모당∙용유당은 무당들의 3대 소굴이 되었으니, 참으로 분개할 만한 일이다.
- 김종직 유두류록
이 사람들은 제단에 올라가서 음식을 먹고 있군요.
저 뒤로 낙남정맥과 횡천지맥도 가늠하고....
멀리 섬진강 건너 백운산과 도솔산 그리고 수어지맥의 억불봉도 봅니다.
일출봉 ~ 연하봉 ~ 촛대봉 ~ 시루봉
낙남정맥과 호남정맥을 당겨봤습니다.
어디로 내려갈까?
고남선배님은 3시 정도면 아무 데나 오실 수 있다 하시고...
제석봉.
통천문.
통천문이라는 각자刻字 안으로 들어설라치면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말 때문에 옷깃을 여미는 사람도 있으리라. 시인 고은은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 만큼은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음산한 기운 속에 성모사에서 잠을 자던 점필재는 밤에 달이 환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고 “혼돈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휘말리지 말아야 할 것이로다.”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60쪽
제석봉 가는 길.....
삼신봉.....
무슨 나무인가요?
일출봉 뒤로 촛대봉이 보이고....
지도 #4
중산리 계곡.
좌측 황금 능선의 구곡산.
중앙 끝이 주산.
제석봉이라는 이 봉우리의 이름이나 제석천이라는 샘물은 다 이곳에 있던 제석당帝釋堂에서 유래하였다. 중봉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함양이나 산청에서 올라오는 이들이 볼 때에는 천왕봉이 상봉이 되어 지금의 천왕봉~중봉~하봉이겠지만 하동이나 백무동에서 올라오는 이들에게는 이 제석봉이 중봉이고 천왕봉이 상봉이라는 것이다.
- 졸저 전게서 457쪽
지금의 제석봉은 연하봉만큼이나 사진 촬영 작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장소로 손꼽힌다. 쓰러질 듯 비스듬히 서 있고 앙상함마저 주는 고사목 지대는 어쩌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예전에는 주목, 전나무, 구상나무 등으로 빽빽한 밀림 같은 곳이었다고 얘기하면 아무래도 믿을 사람이 별반 없을 것 같다. 10만 여 평의 제석봉 너른 들이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겪고 난 뒤에도 꿋꿋하게 서 있었다. 그러던 것이 단지 주목이 정원의 고급 관상수이며 가구 재료로서는 그만이라는 속설 때문에 자유당 정권의 실세에 의해 마구잡이로 베어지게 된다. 쇠파이프를 레일 삼아 소를 이용하여 반출하고는 요행히 살아남으면 고가로 팔리니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 실체가 드러나자 증거인멸을 위하여 고의로 산불을 놔서 이 지경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면 아연실색할 뿐이다.
- 졸저 전게서 458쪽
좌 : 일출봉, 우 : 연하봉 중앙 : 촛대봉.
정말 아름답습니다.
제석봉의 고사목.
아쉬움에 한 컷 더!
그러고는 장터목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장기항이라고 표기되어 있었죠.
언제 봐도 감격스럽네요.
정말이지 아름다운 지리산.
..........
뿌연 가스가 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이런 날씨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일출봉 입구에서 천왕봉을 봅니다.
일출봉.
예전에는 여기 일출봉 이름표가 붙어 있었는데....
그러고는....
아!
연하봉.
늘 오매불망하는 연하봉......
다음에는 저 꼭대기에 꼭 올라가 봐야지.
연하봉이다. 점필재가 지날 때도 부를 이름이 없던 봉. 그저 조망이 좋았음에도 이름이 없어 불러주지 못한 봉이다.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점필재를 보고 오죽했으면 동행했던 유극기가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했을까? 그날 점필재가 “고요한 이 산수 속에 그윽하게 운무가 피어오르고 연기가 노는 듯하며 저 바위에 걸린 노을이 함께 어우러지니 연하선경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네.”라는 말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점필재는 이런 말없이 그저 “증거가 될 만한 것도 없는데 어찌 이름을 붙이겠는가!”라며 이곳을 지났다.
연하煙霞의 사전적 의미는 안개와 노을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좀 싱겁다. 그 말보다는 ‘고요한 산수의 경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 더 다가온다. 선경仙境 역시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보다는 ‘경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 역시 더 다가온다. 그렇다면 연하선경이라는 말 역시 그저 ‘고요한 산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이라는 뜻으로 읽으면 되겠다. 이곳이 과연 그럴까? 점필재는 그 아름다움을 차마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이해하자. 한자의 단조로움 때문이었으리라.
이곳을 안개가 살짝 피어오르는 날 혹은 촛대봉 너머로 노을이 지는 저녁에 지난다면 연하라는 말을 실감할 수도 있겠으나 어느 때라도 일출봉과 제석봉 그리고 천왕봉을 한 셋트로 볼 수 있을 때가 그래도 으뜸이 아닐까? 남효온은 이 연하봉을 ‘소년대’라 부르기도 했다.
은근한 맛을 느끼게 해주는 지리산. 세련미보다는 후덕한 맛을 느끼게 해주는 지리산 그리고 한없이 바라보게끔 만들어주는 지리산의 참맛이 이 연하봉 부근에 다 녹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와는 달리 공단에서는 1693.6봉과 1723.4봉 중간에 연하봉 표시를 해놓았고 정작 1723.4봉의 연하봉에는 일출봉이라는 표시를 해 놓았었다. 그런데 일출봉은 족보에도 없는 봉우리 아니냐는 민원이 들어왔는지 최근에는 일출봉 팻말을 떼었다.
- 졸저 전게서 433쪽
도장골......
연하봉의 기암괴석들....
그러고는 연하선경.
반대편으로....
제 눈에는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좌측 연하봉 정상과 우측 일출봉을 한 세트로 봅니다.
이번에는 천왕봉까지....
화장봉1693.6m에 오릅니다.
도장골....
멀리 마천.
좌측의 둘레길의 노루목.
곧 장항이죠.
임천지맥....
영신봉과 뒤 우측으로 반야.
북부능선과 서북능선.
가짜삼신봉과 촛대봉.
가짜삼신봉 가는 길에 좌측 화장봉과 우측 연하봉을 세트로 감상합니다.
맨 우측 제석봉.
이번에는 중봉과 천왕봉까지....
가짜삼신봉.
가짜삼신봉까지 넣어 한 세트로 감상합니다.
촛대봉과 시루봉.
영신봉.
정상 우측의 운장바위.
조금 당겨봤습니다.
좌측 아래 한신바위가 보이고....
촛대봉.
마천이나 거림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영신봉보다는 시루봉甑峰1703.1m(촛대봉으로 지금의 시루봉1578m이 아님)을 제1봉으로 부르고, 제석봉을 제2봉인 중봉으로 불렀다.
이 촛대봉은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김종직과 하달홍은 이 촛대봉을 중봉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는데 특히 김종직은 증봉甑峰이라고 불렀으며,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 송병선은 촉봉燭峰 그 외 시루봉, 수리봉, 취봉鷲峰 등 여러 가지 이름들인데 유몽인의 경우 사자봉으로 불렀다.
4월 5일 갑술일. -중략-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는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綿竹〕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사자 한 마리 안 사는 우리나라에 웬 사자봉?"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도솔산인 이영규는 이에 대해 “이 역시 불교식 이름으로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탔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친절한 해설을 덧붙인다. 그런데 촛대봉은 뭐고 증봉, 시루봉은 뭔가? 생긴 게 그렇게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제12구간을 지나면서 살펴봤다.
- 졸저 전게서 447쪽
이 정도는 가려야.....
요즘 산을 오르는 연령충이 상당히 낮아졌습니다.
젊은이들이 산에 오니 산도 밝아지고....
늙다리들은 다 하산하셨나?
음....
정말 해피합니다.
이렇게 혼자 유유자적하고 다니는 게 정말이지 행복합니다.
촛대봉 오르기는 패스.
다만 요렇게 인증샷만....
좌측 창불대와 우측 운장바위
그리고 우측 아래 한신바위가 보입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무속인들과 민중들 사이에서도 석가나 공자 외에 옛날 중국의 지략과 무공이 출중한 영웅들 즉 관우, 장비, 유비, 제갈공명, 한신 등을 섬기는 사례는 빈번했다고 한다. 한국민속종교 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무속세계에서 중국 신령을 모시는 전래풍습은 임진왜란 때부터라고 한다. 명군明軍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崇明사상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관우의 경우는 ‘군신軍神’ 혹은 ‘재물의 신’으로 여겨져 명의 요동에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도시에는 관왕묘關王廟가 있었으며 민가에서조차 관우의 초상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는 일이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명은 1598년 4월 당시 한양 남대문 부근에 주둔 중이던 경리어사 양호(둘레길 제20구간에서 조경남 얘기를 할 때 나오던 원숭이 부대를 이끌었다는 장군)에 의해 관우사당이 지어져 남관왕묘라 불렸으며 같은 해 5월 13일 관우의 생일에는 선조도 참배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1599년에는 두 번째 사당을 건립할 것을 강요하여 1601년 완공된 것이 동대문 밖에 있는 동관왕묘로 지금 동묘로 불리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시기에 명군의 참전과 주둔이 조선에 남긴 문화의 영향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실체라고 보는 시각(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도 있다. 그래서 한양을 비롯하여 여러 곳 특히 지리산과 가까운 남원에 관우 사당이 세워지는 등 이러한 풍조는 민간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임진왜란을 통하여 선조를 비롯하여 유학을 넘어 유교를 신봉하는 지배층은 명나라에 대하여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명이 조선을 구해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는 관념이 형성되었고 이는 명에 대한 모화의식을 깊게 해주었으며 명이 망한 뒤에도 ’대명의리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여 민중에게는 위와 같이 중국은 물론 중국의 영웅들까지 받드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서인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나라를 또 한 번 쑥대밭으로 만든 1627년 1월 정묘호란과 1636년 12월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졸저 전게서 445쪽
한신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촛대봉으로 오르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부드러운 영신봉 라인에 바위가 몇 개 북쪽과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게 눈에 들어온다. 기도꾼들에 의하면 이 영신봉의 바위들은 유달리 기가 세어 기도발이 잘 먹힌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가 외적의 침입이 있거나 인심이 흉흉할 때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고 기를 받기 위해 영신봉 주위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마천이나 거림 특히 마천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중 무속인들은 영험한 기운을 영웅으로부터 찾았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명장 운장雲長 관우를 모시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저 영신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지점에 있는 바위를 '운장바위'라 불렀고 또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성어로 유명한 초한지의 '한신장군'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영신봉 동쪽 바위 아래서 치성을 드리던 그 바위를 '한신바위'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세석평전에서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계곡이 자연스럽게 ‘한신계곡’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 졸저 전게서 444쪽
세석평전.
첫 데크.
폭포라 부르기에도 무색해집니다.
가내소.....
한신계곡.
참 힘듭니다.
아주 큰 가뭄.
이게 한신계곡이라니.
첫나들이.....
기우제를 지내야겠습니다.
아직 고남선배님은 도착하지 않았고....
캔맥주 두 통을 사서 시원하게 달궈진 엔진을 식힙니다.
펜션까지 운영하고 계신 이문한 사장님과 잡담 좀 나눕니다.
아.....
이게 있었습니까?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진 원본은 아니지만 성모상을 이렇게 모셔놨군요.
마야부인이라고도 하고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황후 혹은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라고도 하죠.
이 사장님께서 큰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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