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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5구간 예습하기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둘레길 5구간의 시작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함께 합니다.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 성종2) 봄에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 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 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선생은 이렇게 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드디어 지리산 산행을 결행하게 됩니다.

그 들머리가 바로 이 동강마을입니다.

선생의 행적을 뒤쫓으려면 아무래도 지명이 그 중심이 될 거 같습니다.

엄천과 화암이라는 두 개의 지명이 보이는군요.

 

1530년에 탈고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엄천과 임천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임천(臨川) :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엄천(嚴川) :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그렇다면 엄천을 건너 화암이라는 곳에서 쉬었다고 했으니,

솔레이님 같은 분은 엄천 건너 당산처로 추정을 하기도 하고,

도솔산인 같은 분은 저 꽃봉산739.9m을 화암花巖이라 주장하며 그 근거를 巖에는 峰이라는 뜻도 있음을 강조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동강마을을 들머리로 '지리산 가는 길'의 이정표를 따라 꽃봉산 ~ 공개바위 ~ 와불산을 거쳐 새봉으로 올라 청이당 ~ 영랑대 ~ 하봉 ~ 중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를 수 있죠.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물론 선생이 얘기한 독녀암을 확인하기 위하여는 함양 쪽으로 돔 내려가야 하기는 하지만,

그러기 위해 산에 오는 것이니까....

 

어쨌든 오늘 둘레길의 들머리는 동강마을입니다.

 

桐이라면 오동 나무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지역에 오동나무가 많이 나서 특별하게 이 구 간만 동강이라고 하는 건가? 그런데 이 지역에는 오동나무가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더욱이 이렇게 작은 마을에 강江이라는 글자로 마을 이름을 만드는 경우도 없어 이도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또 중국에서 가져온 얘긴가? 화산12곡 전문가 ‘지리99팀’의 얘기를 들어보자. 
동강桐江의 지명이 중국 고사에 비롯되었음은 마을 주변에 동강桐江과 유관 한 엄뢰嚴瀨가 있기 때문이란다. 1170년 무렵 중국 남송시대 평생 벼슬을 하 지 않고 강호를 떠돌면서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대복고戴復古(1167~?)의 낚시터 釣臺 라는 시 한 편을 살펴보자.     
萬事無心一釣竿(만사무심일조간)    세상일에 무심한데 오직 하나 낚싯대라    

三公不換此江山(삼공불환차강산)    삼공 벼슬 준다 해도 이 강산과 안 바꾸네. 

平生誤識劉文叔(평생오식유문숙)    평생에 유문숙을 잘못 안 까닭에 

惹起虛名滿世間(야기허명만세간)    헛된 명성만 세상 가득 드러냈네.   

이 시는 후한後漢 때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BC37년~AD43년)을 위한 헌사獻詞 다. 그러니 엄광의 입장이 되어 쓴 시라는 얘기다. 엄광은 후한을 세운 광무 제光武帝 유수劉秀(BC6년~AD57년)와 친구였다. 광무제(자字가 문숙文叔)는 황제가 되자 믿을 만한 사람을 곁에 두고자 어린 시절의 친구 엄광을 불렀다. 
절친한 친구가 황제가 됐음에도 오히려 엄광은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광무제 유문숙이 사람을 보내 찾았으나 엄광은 양가 죽 옷을 걸치고 냇가에 앉아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끝내 조정에 나아가 지 않고 그렇게 촌부로 살다 죽었다. 
권력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 간 엄광의 모습은 ‘동강수조桐江 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혹은 ‘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시와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엄광이 낚시질하던 곳이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의 엄뢰嚴瀨였기 때문이다. 남송南宋의 시인 대복고가 ‘낚시터釣臺’를 쓴 이유도 그의 절개를 찬 탄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이 시는 엄뢰嚴瀨와 관련된 고사임을 알 수 있는데, 아름답고 운 둔하기 좋은 곳을 지칭하는 지명이기에 엄천변의 마을 이름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면 엄뢰는 어디 있는가? 감수재 박여량은 1610년 9월 2일부터 8일까 지 7일간의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쑥밭재를 거쳐 지리동부능선을 타고 진행 하다 방곡으로 하산을 해서는 마지막 날을 손곡(엄뢰 바로 옆 마을)에 있는 최함 씨의 계당溪堂에서 보내고 다음과 같이 그날을 기록했다.
좌수 최응회가 우리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였다. 최군은 어려서부터 나 와 친한 사이였다. 중풍으로 걷기가 어려웠지만 우리들을 위하여 엄뢰대 嚴瀨臺까지 찾아왔다. 엄뢰대 아래에는 큰 내가 있었는데 이 내는 두류산에 서 흘러 내려온 물이다. 이곳에 이르러 몇 리나 되는 맑은 못을 이루었는 데, 물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맑고 배를 타고 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깊었다. 시험 삼아 대추를 던져보았더니 돌아다니던 물고기가 많이 모 여들었다. 물결 위로 유유히 헤엄치는 비단 물고기도 많았다
그러니 엄뢰는 이 엄천이 동강마을을 지나 베리산(373.6m)의 적벽에 부딪히며 휘돌아 가는 곳이란다. 지금은 60번 도로가 지나가면서 옛 정취를 많이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그 위에서 바라보는 엄뢰대는 선인들이 벼슬에 대한 욕 망을 버리고 은둔해 살면서 세월을 낚는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무위 자연을 좇는 노장사상이 저변에 깔린 분위기이다.

 

* 베리산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산 이름이다. 엄천사가 있던 절터 뒷산으로 엄천 쪽으로는 상당히 급경사이다. 이런 ‘벼랑’을 뜻하는 말을 우리 중세국어에는 ‘별ㅎ’ 또는 ‘벼로’라고 썼다. 지금의 ‘빗’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같은 뜻의 단어가 지방마다 다르게 변화하는 과정을 겪는데 ‘벼루’, ‘베르’, ‘베리’, ‘비리’, ’비랭이‘, 벼락’, ‘베틀’, ‘비락’ 등이 이 예에 속한다. 그러니 베리산은 상당히 경사가 급한 산이라는 말일 것이니 산의 지세와 이름이 꼭 같다. 제18구간의 ‘베틀재’나 위 꽃봉산~상내봉 코스의 베틀재도 다 같은 의미의 고개이고 경기도 가평의 조종(명지)지맥의 빗고개도 결국 같은 내력을 가진 고개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42쪽 이하

 

동강마을을 빠져나오면서 이제는 함양군 휴천면을 벗어나 산청군 금서면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산청은 본래 지품천현이었다. 신라 초기까지 그렇게 불렀다가 경덕왕( ? ~ 765) 때 산음으로 고쳤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산양이라고도 불렀는데 영조43년 그러니까 1767년에 산청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지명은 대부분 신라 경덕왕 때 정비된 이름이다. 경덕왕은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는 작업에 몰두한 인물이다.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불교 중흥을 위해서도 힘썼던 인물로 이 시기에 석굴암과 성덕대왕 신종이 만들어졌다.

그러고는 산청, 함양 사건 추모 공원에 이르게 됩니다.

 

산청·함양 학살사건-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
우측으로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1.2km’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야겠다. 제주 4·3사건이 국가에 의한 과도한 진압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던 것처럼 이 산청·함양사건 역시 이에 못지않은 민간인에 대한 극악무도한 국군의 학살 현장이다. 이 사건은 거창양민사건과 더불어 한국전 쟁 기간 중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대표적 사건들 중 하나이다.
때는 중공군 개입 뒤 1·4후퇴 시기인 1951년 2월 7일이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었던 이날 지리산 동쪽 큰 산들 사이, 해 뜨고 지는 것으로 시 간을 아는 두메산골인 가현·병곡·점촌(산청군 금서면)과 서주리(함양군 휴천면) 등 네 마을 양민 705명(어린이, 여성, 노인 85%)이 남원·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중령)의 ‘보11사 작명5호 견벽 청야堅壁淸野6’ 명령을 3대대(대대장 한동석 대위)에 의해 2월 7일 아침부터 11 일 사이에 수행한 양민 학살 작전 닷새 만에 느닷없이 떼죽음을 당하고 세 마을 133가구가 잿더미가 된다.
학살 작전을 벌인 이유가 최덕신 11사단장의 민간인에 대한 ‘견벽청야’ 전술, 4·3사태 진압군이었던 9연대의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여기에 지휘관과 전쟁 자체의 부도덕성이 얽혔고 거기에 더하여 양민을 통비분자로 몰아 죽여야 할 만큼 전세가 다급하고 전과가 부실했던 탓도 있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 졸저 전게서 147쪽 이하

 

오봉천을 건너면 왕산 등로와 겹치게 됩니다.

오르는 도중 상사폭포도 구경하고....

예쁜 다리도 건너게 됩니다.

이내 쌍재라는 안내판을 만나게 되는데,

재岾 즉 고개는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곳 중 가장 낮은 곳이면서 그 봉우리를 오르기 위한 곳 중 가장 높은 곳임을 생각해 볼 때 이곳이 쌍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좌틀하면 왕산으로 오르는 길인데....

여기서 왕산 오르는 길은 필봉산으로 연결이 되는 그야말로 산청의 진산입니다.

하지만 이 루트야말로 정말이지 된비알에 사람 녹초 만드는 곳입니다. 

말이 1.5km이지 실제 15km도 넘게 체감되는 곳입니다.

다행히 둘레길은 우측이니 여유를 갖고 우틀합니다.

그러면 이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641.4봉인데 오늘 구간 최고의 조망터입니다.

뒤로는 덕천지맥의 왕등재가 보입니다.

그러니 이 봉우리나 왕산은 산경山經으로 볼 때 덕천(웅석)지맥의 왕등재에서 가지를 쳐 온 줄기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예전에는 지리동부능선이라 불리던 줄기였습니다.

왕등재 즉 왕등습지 뒤로 천왕봉과 중봉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진주 독바위와 함양독바위도 보이니 그 중간에 있는 봉우리가 와불산입니다.

바로 아래는 오봉리 우측은 방곡리......

왕산과,

필봉산

여기까지도 감상이 가능한 곳입니다.

그러고는 고동재로 떨어집니다.

 

구형왕이 지나던 길


어쨌든 이 고동재는 왕등재봉과 왕산을 이어주는 고개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다. 이 고개가 있음으로써 왕산과 필봉산은 간신히 지리산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왕’이라는 접두사가 눈에 들어온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왕등재의 ‘왕’이나 왕산의 ‘왕’ 모두 가락국 금관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나라를 고스란히 신라에 넘겨 ‘양왕讓王’이라고까지 불리는 구형왕은 이 왕등재 아래에 토성을 쌓고 끝까지 저항했다는 얘기가 이곳 주민들에게는 구전으로 전해온다고 한다. 실제 왕등재 너머 외곡 방향으로 그 성의 흔적도 볼 수 있고 나아가 이 성에는 성문도 볼 수 있으며 부근에 도장골(식량 창고)이라 든가 망생이골(말을 키우던 곳), 국골國谷 등의 이름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 다. 그런 구형왕이 더 쫓겨 가 왕산에 이르러 결국 최후를 마친 것이라고 하 는데 학계에서는 사료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것 같다.

 

 - 졸저 전게서 151쪽 이하

 

이 고개는 고동같이 생긴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비교할 게 없어서 고동까지 동원했다니....

어쨌든 이 고개는 금서면 수철리와 오봉리 그리고 동부지리의 왕등습지를 왕산과 연결시켜 주는 아주 의미 있는 그것입니다.

이런 게 고개죠.

봉우리와 봉우리를 이어주는 그리고 양쪽의 낮은 저지에서 봤을 때 그나마 가장 낮은 곳.

그러고 보니 이 부근에는 유별나게 '왕王'자가 붙은 지명들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 王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라 전해지는 구형왕과 연결됩니다.

국망봉을 악착같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그리고 그의 아들 마의태자와 연결시키는 것처럼 이 부근의 王을 굳이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차피 가락국이라는 나라는 삼국사기 같은 정사正史에도 좀 야리꾸리하게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선 김부식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42년에 나라를 열고 158년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단군 다음으로 장수를 한 인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현대인이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락국이 가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수로왕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은 왕'으로 주변 국가에 소문이 났고 심지어는 서라벌에서도 이런 내용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김부식은 쓰고 있습니다.

가야에서 철을 생산하고 있었다는 예는 수로왕이 금빛 알에서 나온 것이나 성을 金으로 삼은 것만 봐도 거의 확실하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니 야사보다는 정사에 가깝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편 수로왕은 허황후와 연결이 되고 이는 곧 불교의 남방 전래설과 이어지며 우리는 지리산 칠불사를 보고 불일폭포를 얘기하며 무릉도원을 얘기할 때 이를 기억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황후가 온 곳이 서역의 아유타국이고 이는 인도이므로 수로왕의 무덤이 있는 양산(영축)지맥의 만어사와 연결하여 태양무늬와 물고기 양식이 인도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는 점도 유념하면 될 것입니다.

허황후가 서역에서 왔다니 승려들도 불교의 포교활동을 위해서 왔을터 이를 연기조사-참고로 3인의 연기조사가 있었다는 얘기를 염두에 두어야 재미있어집니다- 와 연결하여 화엄사와 쌍계사 그리고 법계사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관련되는 데서 또 얘기하죠.

어쨌든 532년 구형왕이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써 법흥왕에게 투항을 하여 520년 만에 멸망을 하였는데 그의 무덤이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때는 신라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만큼 힘 있고 찬란한 문화가 있는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왕권을 넘기게 되는 비운의 왕이 된 것이며 그 의미를 아는지 하늘도 음침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주변을 더욱 숙연하게 만든다."는 내용으로 분위기를 띄웁니다.

이런 내용은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에 나오는 얘기와 거의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 옛 산행기 중에서

 

그렇게 고개를 내려오면 수철마을입니다.

 

지리산 자락에 수철리가 두 군데 있습니다.

세동치에서 운봉으로 내려가면 만나는 마을이 수철리이고 동부능선 왕등재와 깃대봉에서 산청 쪽으로 내려가면 수철리가 있습니다.

모두 산자락의 물가 마을입니다.

 

‘물’의 고대어는 ‘믇’ 혹은 ‘묻’이었으며 따라서 물 옆의 골짜기나 마을의 경 우 ‘뭀울’ 혹은 ‘뭇막’이라 하였다. ‘뭇+울>무싀울>무시울’, ‘뭇+막>무수막> 무쇠막’ 등으로 변하여 오늘날에도 무싀울, 무시울, 무쇠막 등의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짐작하다시피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무水+쇠鐵=수철리水鐵里가 된 것에 불과하다. 지리산 자락의 두 군데 이외에도 ‘수철리’라는 지명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은데 모두 하천가에 있는 마을이 다. 비슷한 예로 필자의 고향이기도 한 서울의 한강 가에 있는 금호동金湖洞도 원래 이름이 ‘무수막’이었고 도봉동의 한 골짜기 마을도 무시울이었다. 물의 마을이란 뜻으로 물막>무수막>무쇠막이라 불리다가 훗날 사람들이 무쇠솥 운운하며 말을 지어내어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쇠 ‘금金’을 따와서 금호동이라 한 것이다. 
초기 철기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제철산업은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관리해야 가능한 일이다. 현재 제철산업이 항구 도시에서 발달하듯이 그 당시에도 대부분 큰 강가에서 주로 발달하였다. 중국에서는 이 기술을 외국에 반출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철저하게 금지시킬 정도였다. 국가 권력과 지원이 미치 지 않는 지리산 골짝 마을에서 제철製鐵을 할 수도 없었으며 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수철리’는 무쇠 솥과는 전혀 무관하게 무쇠막이라는 옛 지명대로 ‘물 옆에 있는 마을’ 정도의 뜻이다.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섬강 주변 마을 이름인 ‘문막’도 동일한 어원에 속한다.  

 

- 졸저 전게서 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