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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4구간 예습하기

사실 지리산 둘레길은 그 길 자체보다는 둘레길 주변에 더 많은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저 둘레길 루트를 따라 마냥 걷기만 하는 것보다는 그 주변의 것들을 살펴보면서 지리산이 갖는 참맛을 직접 음미하는 게 더 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선 둘레길 4구간에는 서암정사가 있고 벽송사가 있으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최고로 여긴 유람지이자 지리산 무속신앙의 초보 기도처인 용유당이 있던 용유담을 보면서 화산12곡을 하나하나 찾아보며 걷고 또한 세종대왕의 12번 째 아들인한남군이 수양대군의 등극을 반대하다 위리안치되었던 한남동도 눈여겨 보면서 걸어야겠죠.

 

그러고보면 지리산의 속살을 그것도 아주 진귀한 자료들을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확인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역시 지리산은 어느 곳 하나 만만하지 않을뿐더러 그가 가지고 있는 함의含意는 화수분 같아 계속 공부를 해도 끝이 안 보이는깊이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는 얘기도 됩니다

 

아! 지리산!

지리산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3구간과 4구간의 경계에 있는 임천을 지납니다.

주촌천은 둘레길 1구간 행정리에서, 서부능선 상의 세걸산에서 내려오는 람천에 흡수되어 이후 람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계속하여 람천은 인월을 지나면서 백두대간 봉화산 부근에서 발원하는 풍천을 흡수하고는 성삼재에서 내려오는 만수천을 받고이후 백무동의 덕천천칠선계곡과 국골의 의탄천을 더 받아 임천이 된다덩어리가 커진 임천은 특히 용유담에 이르러 엄천으로 불리며 흐르다 산청군 생초면에 이르러 경호강이 되어 남강으로 흡수된다.

 

채석장에는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고....

마천면 소재지에서 추성동으로 가다보면 임천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다리를 볼 수 있는데 의탄교이다의탄교를 건너면 의평동의중동 등이 있는 의탄마을이 나온다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인데다 경관이 빼어나 500년 전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점필재 김종직은 이곳을 보고는 바로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지리산의 무릉도원하면 불일폭포 부근, 청학동 그리고 세석평전 부근이 꼽히는데 점필재는 특히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했던 것입니다.

 1471년 함양군수로 부임한 점필재는 이듬해인 음력 4월 함양성을 나와 지리산 탐승에 오른다유호인조위한인효 등 그가 아끼던 제자들과 사근역을 지나 휴천계곡 50리를 거쳐 의탄마을에 당도해 그의 심경을 이렇게 남겼다.  "연달아 서너 고개를 지나서 한 너른 곳을 만났는데, 주위가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렸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 개, 소나 송아지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endif]-->  점필재 김종직을 유혹했던 곳이 바로 이 의탄마을이다점필재는 여기서 동행했던 유호인(극기는 유호인의 자字)에게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라는 말로써 의탄마을에서의 강한 인상을 대변하기도 했다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들이 서 있고 칠선계곡에서 흐르는 청정계류와 어우러져 으뜸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1611년 4월 3일 어우당 유몽인도 이곳를 이용하여 지리산 산행에 임하면서, "옛날 점필재가 이 길을 따라 천왕봉을 오른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뜻대로 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가고자 하니 내가 굳이 이 길로 갈 필요는 없으리라....."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1611년 남원부사로 있던 어우당은 인월쪽에서 백장암 ~ 군자사를 거쳐 지금의 송전리 부근에서 벽송사 능선을 넘어 어름터의 두류암에 들렀다가 천왕봉을 가는 도중에 이 의탄촌을 지나면서 점필재를 그렸던 것이다.

 

쉼터를 지나면,

의중마을입니다.

여기서 벽송사 루트와 임천 천변 루트로 갈립니다.

원래 지리산 둘레길은 여기서 직진하여 서암정사 ~ 벽송사 ~ 710.8봉 안부 ~ 송대마을로 진행하는 루트였습니다. 그런데 사유지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몇몇 주민들의 반대로 벽송사 이후는 진행하지 못하고 다시 이길로 돌아와 의중마을 ~ 용유담 구간을 진행하여야 했었는데 다시 잘 타협이 이루어져 뱍송사 루트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직진합니다.

지금의 의탄교와 추성리나 벽송사를 잇는 신작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마을 주민이나 스님들은 이 길로 벽송사를 오갔을 겁니다.

그러고는 서암정사입니다.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보살님께 부탁을 하여 자세한 내력들을 들어보는 게 나을 것입니다.

제가 연락을 드려보겠습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갑자기 무대가 중국으로 바뀐 느낌!

우측으로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일반 절집의 일주문 다음에 나오는 천왕문과는 다르군요.

그러고는 대방광문이라는 석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고.....

그 문을 통과하니,

대웅전이 나오는데 단청 등 칼라가 일반 사찰과는 전혀 다르군요.

톤도 다르고.....

음...

금대산.

좌측 아래로 금대암이 보입니다.

김일손(1464~1498)은 1489. 4. 15. 등구사를 지나 금대암에 도착을 하였죠.

그 금대암에서 수행을 하는 승려들을 보고 "부처가 되기도 고되군요. 학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같이 한다면 어찌 성취함이 없겠는가."라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던 곳입니다.

지리 북부에서 지리의 전모를 가장 확실하게 볼 수 있다는 저 금대암에서 김일손은 이 부근을 어떻게 봤을까 궁금해 집니다.

그리고 이따 보는 벽송사가 강원講院의 역할을 하는 사찰이었고 저 금대암은 그 승려들의 선방禪房이었다고 하죠?

사실 이 추성동은 그 유명한 칠선계곡과 국골 그리고 허공다리골 등 어마무시한 계곡들을 거느린 곳으로 예전에는 신라와 백제의 격전장으로 모든 게 다 역사적 유물입니다.

그러니 이 부근에서는 추성楸城이 중요하고 추성은 성안城內과 연결이 되며 이는 다시 국골 너머에 있는 두류능선을 타고 올라와 영랑대 ~ 하봉 ~ 중봉 ~ 천왕봉 루트로 연결이 됩니다.

추성은 곧 신라의 역사이기도 하고 백제와의 전쟁의 결과물일 겁니다.

신라 화랑이 노고단에서 무슬을 연마했다는 얘기도 들리며 화랑 장교였던 원효가 이 루트를 이용해 화엄사에서 화엄사상을 접했다는 얘기도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얘기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 추성에 대해서 가설 몇 개가 들립니다.

즉 이 추성동은 가락국 최후의 임금인 구형왕의 피난처여서 이 일대가 국골이 되었다는 얘기가 그 중 하나입니다.

또한 그곳에는 옛 성이 있으니 추성이요 또 다른 이름은 박동지朴同址이니 고대에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라 지금도 창고의 유적이 완연히 남아 있고 그 부근에 행궁 같은 유적이 남아 있다는 애기들이 그것들입니다.

지금의 추성동은 등산객이나 피서객들의 편의도모를 위한 민박촌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칠선동, 두지터, 광점동, 얼음터 등과 더불어 화전민들의 터전이기도 했으며 유명한 마천 곶감, 마천 산나물, 마천 한지(문종이) 등의 집산지 역할을 한 곳이었습니다.

살펴볼까요. 

조선시대 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천왕봉의 고성古城인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90번지에 위치한 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명 추성 또는 박회성이라 하며 의탄에서 5, 6리 떨어졌는데 마소가 갈 수 없는 곳이며 안에는 창고터가 있다세상에서는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것이라 전한다."  이는 국골의 산성터를 말하는 것으로 전설처럼 가락국 최후의 왕인 구형왕이 피난해 군마를 훈련시키던 곳인지의 여부는 쉽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추성의 삼국 시대 때의 이름은 마천성馬川城이었다.
이와 함께 이 일대에는 두지터(쌀을 담는 두지를 지칭)와 얼음터(석빙고와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전해짐)가 있는데 이는 고대국가의 식량창고와 여름철 음식물 저장고 역할을 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및 고지도에 등재된 것을 보면 추성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이후부터인 듯하며인근에 호두나무가 많이 자생한 것을 연유로 추성楸城으로 불리어지게 된다그래서 성의 외곽에 위치한 마을 이름도 추성리이며조선시대 때부터 이 마을의 호두는 나라의 진상품이었고 현재도 지역특산품이다.
위의 기록을 근거해 본다면 지금까지 추성을 두고 가야 구형왕의 피난지라고 전해오는 설은 잘못 전해져 오는 역사의 가설임을 알 수 있다고서의 기록에는 추성이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수비성이라고 하나 실제 답사를 해보면 특정한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내성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석성의 둘레는 약 2km가 되며면적은 7만여평에 이른다석성의 통로이었던 동문과 북문의 위치도 뚜렷하다
성의 내부에는 높이 10m 되는 망바위를 비롯하여 군마의 조련길을 비롯하여수비군의 초소 내지는 망루의 건물터로 추정되는 유적지 등이 남아 있다성 안의 특정한 시설물은 바로 말달린평전즉 군사 훈련장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지리산 자락의 운봉지역은 삼국시대 당시에는 신라와 백제의 격전장이었다지리적으로 지금의 지리서부(북)선을 경계로 하여 남원지역은 백제 땅이었고 함양은 신라 땅이었기에 국경지대이었던 운봉은 두 나라 영역 싸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그 역사적인 흔적으로 남아 있는 현장이 지금의 남원시 아영면의 백두대간상에 위치한 아영고원 즉 아막산성(阿莫城城터이다아막산성은 백제가 부르는 이름이었고신라는 이곳을 모산성(母山城)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모산성에서는 AD 189년에서 624년까지 5세기에 걸쳐 신라 백제 사이에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에 이르러서는 무려 다섯 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화랑의 명장들과 함께 수많은 신라의 군사들이 전사를 했다.  당시 최고의 명장인 김서현 장군(김유신의 아버지)까지 전쟁에 출전하였지만 백제 무왕이 출전시킨 8천여 명의 군사들에 의해 모산성이 무너지면서 함양의 마천, 수산청의 생초 등 지리산 동북부지역을 백제에 빼앗기는 지경에까지 이른다수번 치러진 모산성 전투에서 신라가 백제에 패한 원인 중 가장 큰 이유를 추정해 본다면 지리적인 여건이겠다신라에 있어서 당시 모산성이 위치한 운봉은 수도인 경주에서 멀고먼 변방이었다부여에서 운봉까지 출동하는 백제의 지리적인 여건에 비해 경주에서 군사를 출동해야 하는 신라의 여건이 불리했다고 보아진다.
그렇다면 모선성 전투에서 신속히 출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운봉 지근에 어느 정도 규모의 군사훈련소가 필요했을 터이고그 가운데 설치된 신라의 군사훈련장이 추성의 말달린평전이었다고 추정을 할 수 있다.

된비알을 올라 벽송사로 올라갑니다.

 

경암의 벽송암기에 의하면 벽송사는 벽송암이었습니다.

벽송사의 창건주 벽송대사의 도 닦은 얘기 한 토막을 보기로 합니다.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가면 벽송사라고 하는 유명한 절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550여년전 전라북도 부안에서 부안 송씨 가문의 한 집안에서 송지암宋芝岩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총명하여 열 살 이전에 벌써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어느 따뜻한 봄날에 조정에서 과거시험을 본다는 방이 붙었다

지암은 무과에 응시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무사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장원급제를 하여 장군의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그 당시는 나라가 어수선하여 외세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다.

중국의 명나라에서도 자주 트집을 잡아 괴롭혔고 국경의 침범이 심하였다.

조정에서는 또한 북벌 계획을 시도하여 적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장군은 혹한 속에서 국경지대를 수비하다가 장검을 집고 서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번뇌와 씨름하다가 문득 자신의 나아갈 바를 결정짓기 위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방장산 어디에선가 수도를 하고 있다는 법계정심대사法戒正心大師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함양군 마천면에 소재하는 지리산에 들어가 수십 일 동안 헤매던 중에 드디어 지금의 추성리 광점동에서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법계정심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한 다음 지암은 지금까지 번뇌 속에서 방황하던 자신이 걸어 온 그 동안의 경위를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리자 대사는 쾌히 승낙을 하셨다.

지암은 너무나 기뻤다.

그날부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대사의 문하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당시 법계정심대사는 이미 불문을 떠나 속세에서 부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식솔들의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다가 싸리 제품인 광주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그 광주리를 판돈으로 생활을 근근이 해결해 왔다.

대사는 매일 지암을 머슴처럼 부리며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채취해 와서 광주리 만드는 것만 가르치고 다른 문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지암은 세월이 갈수록 안타까웠다.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 필요가 없음을 알고 법계정심대사의 문하에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대사에게 뜻을 전하니 대사는 가고 오는 것은 그대의 자유이니 그대의 마음대로 하라하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지암은 그곳을 떠나 정처 없이 또 다른 스승을 찾아서 길을 나섰다.

마천면 의탄리 속칭 살바탕에 이르자 법계정심대사가 지암아 너는 도를 받아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라 지암은 그길로 다시 강점에 계시는 대사 곁으로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대사는 눈을 감고 한참동안 묵상을 하더니 갑자기 두 손을 높이 하늘로 치켜들더니 지암은 이제 도를 받았느냐?” 하고 물으니 지암은 얼떨결에 자기도 모르게 서슴없이 받았다고 대답을 하였다.

대사는 지암은 이제 도를 받으라.”고 다시 소리치며 손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이 시각부터 지암은 물욕과 정욕이 사라지고 만물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어 벽송대사로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곳에서 대사가 광주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광주리점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면서 변하여 지금의 광점으로 부르게 되었고 의탄리의 속칭 살바탕에서 광주리점으로 되돌아가 도를 받고 벽송대사가 되었다고 하여 이곳을 벽송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암이 대사로부터 깨달음을 받은 지 삼 개월 후에 법계대사가 입적하자 벽송대사는 이곳에 조그마한 절을 짓고 벽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벽송대사는 이곳에서 도를 닦으며 많은 제자를 교육해서 고승들을 배출시켰으며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입적한 대사의 시신을 화장하자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대사의 수제자인 환성대사가 다시 절을 짓고 석탑을 세워 벽송대사의 유품인 염주와 사리 등을 안장하여 오래도록 보존하여 왔으나 6. 25 동란 중 사찰이 소실되고 석탑도 파괴되어 석탑의 사리와 유품도 망실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자처하는 벽송사입니다. 

 

지암이 대사로부터 깨달음을 받은 지 삼 개월 후에 법계대사가 입적하자 지암은 이곳에 조그마한 절을 짓고 벽송암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때가 조선 중종 15년(1520년) 3월이었다. 숙종 30년(170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환성대사가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법당만 남기고 소실되었다. 판소리 ‘변강쇠전’의 무대이기도 한 벽송사는 전쟁 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는데 국군이 야음을 타 불시에 기습, 불을 질러 당시 입원 중이던 인민군 환자가 많이 죽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절터 주변을 일구면 인골이 간혹 발견된다고 한다. 벽송사는 실상사와 더불어 지리산 북부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벽송대사는 이곳에서 수행을 하며 많은 제자를 교육해서 고승들을 배출시켰으며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대사의 유품인 염주와 사리 등을 안장하여 오래도록 보존하여 왔으나 한국전쟁 중 사찰이 소실되고 석탑도 파괴되어 석탑의 사리와 유품도 망실되었다.

 

그런 벽송사 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서산대사(1520~1604) 휴정이다. 이 절집의 청허당은 강원講院으로서 휴정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이름하였다. 벽송대사는 선종 60조로 서산대사 휴정은 그의 법손격인 62조이다. 많은 선사를 배출한 절집이라는 얘기이다. 서산대사하면 빠뜨리기 어려운 게 바로 삼가귀감三家龜鑑이고 단속사며 부사 성여신(1546~1632)이다.

 

삼가귀감三家龜鑑부터 볼까? 삼가三家란 동아시아의 가장 주요한 사유체계인 선가(禪家, 불가), 도가, 유가를 의미하는데 서산대사 휴정은 이들을 토대로 세 권의 귀감을 썼다. 하나가 선가귀감禪家龜鑑이고 둘이 도가귀감道家龜鑑이며 마지막 하나가 유가귀감儒家龜鑑이다.

 

대사는 이 세 개의 귀감을 통하여 삼가를 회통하고자 했던 바, 그 회통의 기준이 이심전심, 견성성불, 즉심시불이라는 선禪의 정신이었다. 그는 이 선의 정신을 근거로 불교경전과 도가의 경전 그리고 유가의 경전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의 마음과 본성이 그대로 부처(선가), 성인(도가), 군자(유가)임을 깨닫게 하고자 저술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삼가귀감과 단속사 그리고 성여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사 성여신이 혈기왕성한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를 할 때 이 삼가귀감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삼가 중 유가儒家의 글이 맨 뒤에 편철되어 있는 것과 사찰에 형상이 괴이한 사천왕 등 불상을 조성한데 격분하여 불경을 간행하는데 쓰이는 목판은 물론 절에 불까지 질렀다는 것이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잠깐 벽송사가 등장한다. 주인공 박태영이 왜놈들을 피해 벽송사로 들어가는 장면에서이다.

지리산에 은거하기 위하여 신선이 되려는 지리산 지리에 밝은 노인을 만나려는 목적이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72쪽

 

삼가귀감을 이야기하면 또 떠오르는 사람이 있죠?

바로 부사浮査 성여신(1546~1632)입니다.

단속사에 불을 지른....

 

단속사라!

불교의 선종과 교종의 만남을 보여주던 단속사!

제7구간에서 지나게 됩니다.

휴정(1520~1604, 서산대사)이 삼가귀감을 저술하면서 유가의 글을 맨 뒤에 둔 것에 분개하여 젊은 혈기에 단속사에 불을 지르기도 했던 부사 성여신(1546~1632)의 분기탱천한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잠깐 단속사를 미리 봅니다.

 

단속사의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말일 게다금계사였던 원래 이름을 단속사로 바꾸면서까지 용맹정진하려는 수도승의 의지가 자못 결연해 보인다지금은 보물 72호와 73호로 지정된 동·서삼충석탑 두 기와 당간지주만이 예전의 화려했던 영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이 보물인 탑 두 기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탑동마을의 단속사로 들어가 볼까?

 

참고 사진 : 단속지의 동서 삼층석탑

 

1487년 9월의 남효온이나 1489년 4월의 김일손은 우리와 같이 산청에서 곧바로 웅석봉을 통하여 점촌을 지나 단속사로 온 게 아니라 당시는 단성현이어서 현내리란 이름으로 불렸을 단성면 소재지를 통하여 들어왔다웅석봉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그들은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를 보고 이곳에 들었다 했다이 단속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경덕왕 7(748대내마 이순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거처했다.”는 이순설과삼국유사 신충괘관조에 의하면 763년 신충이 벗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왕의 복을 빌었다고 하는 신충설 등이 그것이다. 1489년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 위하면 신라의 유순(이순의 오기인 듯)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절을 창건하였다.”는 그 절의 승려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이순설이 맞는 것 같다.

 

참고 사진 : 단속사지의 정당매

 

이 단속사를 얘기하려면 매화나무 자세히는 정당매를 빼놓을 수 없다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조선 전기의 학자 강희안(1417~1464)의 조부 강회백이 이 절에서 공부를 할 때 손수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 매화나무가 정당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김일손의 정당매 시문후에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단속사가 한국 불교사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즉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를 통하여 선종이나 교종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찰이었던 것이다여기에 8세기 초 신라 승려 신행(704~779)이 등장한다그는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워와 신라에 그 불법을 전했는데 그 최초의 사찰이 바로 이 단속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종을 볼까인도의 불교를 중국으로 가지고 온 달마대사가 세운 중국의 선종은 8세기 초 크게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뉜다북종선은 중국 선종 4대 조사 도신의 법맥을 계승한 선종 불교로서 당시 교종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불교사상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신라 왕실이나 귀족사회와 깊게 연결이 되어 있는 이 단속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위 신행과 그의 스승인 법랑에서 비롯되는 바이들의 활동은 김헌정의 단속사 신행선사비에 잘 나타나 있다도신이 입적하자 신행은 중국 선종 6조인 신수의 법손法孫 지공에게 사사師事해서 크게 깨달은 후, 759년 단속사에 머물면서 북종선을 전파하는데 노력했다하지만 교종과 선종을 아우른 북종선은 신라 중대왕실이 무너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의 단속사의 규모는 광제암문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다 헤졌다.”거나 쌀뜨물이 10리 밖에서도 보였다.”는 말들로 알 수 있다김일손은 그가 이 단속사를 방문했을 때에는 절이 황폐화 되지 시작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었다고 그리고 있다그런 절이 억불숭유 정책과 사찰에 대한 과도한 노역과 세금으로 쇠락하다가 1568년 이 절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특히 성여신불상을 훼손하고 경판을 불태운 사건이 있은 후 그 속도가 더해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의 터만 남아 있다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초고 중에서 발췌

 

벽송사의 배치는 풍수지리와도 통합니다.

두류전지에 의하면 수효봉과 귀쌍봉이 오도산을 받치고 있어 그 안을 안락하고 밝게 하며 금대산이 화표가 된다고 합니다.

 - 필자 주 : 화표華表란 무덤 앞의 망부석 같은 것을 얘기하는데 여기서는 풍수적으로 명당 입구에 기아한 봉우리가 우뚝 서 있는 것을 의미함.

또한 수행이 어긋난 자는 반드시 재앙을 당하며 재물을 꾀하는 무리 역시 올 수 없는 곳이라 하는군요.

벽송사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미인송과 보물 제474호 삼층석탑을 보고 벽송사를 빠져나오려는데 좌측으로 누각이 하나 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니 장승 두 기가 서 있다. 예전에는 사찰 밖에 서 있던 것을 청허당 바로 뒤로 옮기고 각閣을 세운 것 같다. 좌측 장승은 금호장군禁護將軍, 우측 장승은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는 명찰을 각 달고 있다. 이는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를 막는 이른바 토속신앙의 비보裨補역할을 수행하는 신장상神將像이다. 

그러니 이는 ‘법우화상’의 설화와 실상사 입구의 상원주장군 등의 석장승과 함께 지리산의 토착적 고유신앙이 불교에 융합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사찰에서 이 목장승이나 실상사의 석장승에게 행하는 의식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한편 이 장승은 우리나라의 산신숭배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이 신앙은 잡신을 거쳐 수목신앙樹木信仰으로 이어지는데 특히 단군의 신단수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마을 어귀의 ①솟대나 ②장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③서낭당으로 발전이 되기도 한다. 특히 솟대는 삼한 시대의 소도蘇塗의 다른 말로서 개인이 가정에서 임시로 세우는 신간神竿이나 과거에 급제한 이들이 세우는 것도 있겠지만 삼한시대에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비록 도망자라 할지라도 체포할 수 없다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는 취지의 기능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신의 역할도 하게 되었고 수살목水殺木도 되었다.

 

또한 수목신앙은 장승으로도 발전하게 되는데 그 기능에 따라 세우는 곳도 다양하여 마을 입구(벽사辟邪장승), 사찰 입구(사원장승), 풍수지리설에 따라 허한 곳(비보장승)에 많이 세웠다. 사실 보통 장승이라면 이정표나 마을의 수호신, 사찰의 경우에는 경계표지의 역할(노표장승) 등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장승들도 지리산으로 오면 그 역할이 달라진다. 즉 불교가 지리산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민속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인데 가령 실상사의 석장승 3기나 벽송사의 목장승 2기 등이 토속신앙과 불교를 이어주는 예이다.

 

한편 남창 손진태(1900 ~ ? )는 선왕당이나 적석단을 누석단 즉 서낭당으로 명명하면서 “(서낭당은) 고대의 산신사 또는 산신제단이며 또 길 가는 이의 부적이기도 했으며, 마을 간의 경계였으며 그 자체로 신神이기도 했다.”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지리산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누석단 즉 서낭당의 신과 산신은 여신이고 성황신이나 칠성신은 남신으로 이해하면서 전자는 우리 고유의 신이며 후자는 중국 전래의 신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좀 주의할 게 있다. 이렇듯 지리산신은 여자이어서 이에 터 잡아 성모신앙이 발전하게 된 것인데 제석봉의 제석당 만큼은 남신인 천신을 섬겼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바와 같이 부계 사회의 산물로 지리산도 고조선 이전 부족사회의 성모를 섬기는 모계사회에서 천신을 섬기는 부계사회로의 변환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니 천왕성모는 그 전환기의 민간신앙으로 보면 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126쪽

한편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벽송사가 잠깐 등장한다. 주인공 박태영이 왜놈들을 피해 벽송사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다. 벽송사에 은거하며 지리산 신선이 되고자 하는 이곳 지리에 밝은 최노인을 만나려는 목적이었다. 그럴 때 추성리며 칠선 계곡 그리고 국골 등의 지명이 나오기도 했다.

벽송사는 講院이었고 금대암은 그 禪房이었다.

 

조계종단에서 보는 우리나라 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선맥禪脈을 살펴볼까?

우리는 이미 2구간 군화동을 지나 60번 도로가 지나는 화수교 목전에서 살펴봤던 원명당 종범대선사부도탑과 그 우측의 '나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비를 떠올려야 한다.

 

1조는 인도의 석가모니의 제자로서 염화시중 미소의 주인공인 마하가섭이고,

28조는 인도인으로서 동쪽으로 가서 중국에서 선종을 창시한 보리달마,

57조는 조선 선종의 초조初祖인 태고보우,

60조가 벽계정심이고61조가 벽송지엄(1464-1534), 62조가 부용영관(1485-1572),

63조가 청허휴정(서산, 1520-1604), 67조가 환성지안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분 중에서 벽송부용서산환성 등 네 분이 이 벽송사에서 수행을 하였다니 벽송사를 가히 조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룬 곳이라 할 만하다.

 

이것은 다른 말로 '벽송사'가 있는 지리산에서 한국 불교 법통을 네 분이나 배출하였으니 지리산이 품어내고 있는 인문적 힘이 얼마나 큰 지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에는 인민군과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던 곳이어서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전소되었던 것을 다시 중창한 것입니다. 

벽송사 우측의 등로를 따라 오르다 부용암 입구를 지납니다.

지리산 둘레길이 용유담으로 빠지는 갈레길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벽송사 능선 ~ 와불산 ~ 새봉으로 가는 길은 직진.

그리고 4구간 지선인 용유담 방향은 좌틀합니다.

드디어 용유담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옵니다.

여기서 용유담을 좀 자세히 살펴보려면 반야정사 법당 우측에 있는 요사채로 옆으로 가도 되고,

용유교를 건너,

길가에 있는 구룡정을 보고....

이 구룡정은 용유담의 아홉 용과 마적도사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후대에 세운 것입니다.

각자刻字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우측 바위 밑으로 내려갑니다.

바위에  빨간 글씨가 보이는군요.

아!

드디어 용유담의 각자를 대합니다. 

 

이런!

글자 하나가 잘렸습니다.

빨간 글씨가 먼저 눈에 띄는군요.

 "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恩賜惠平姜公顯之地" "이곳은 인종임금(재위 1544-1545)이 강현(姜顯 1486-1553)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뜻이겠군요.진양강씨 강지주의 문집에 나오는 얘기로 당나라 때 이태백을 한번 보고 적선인(謫仙人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 한 하지장이 낙향할 때 황제 현종이 경호(鏡湖=鑑湖) 한 굽이를 하사했다는 일화에 견주어, 강씨 문중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혜평은 강현의 시호이고 13세손 순기라는 이름이 각자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1800년 이후에 새긴 것이라 합니다.

그 우측을 보면 희미하지만 반가운 이름이 있군요.

바로 점필재 김종직(1431~1492)입니다.

40세인 1470년에 함양군수로 내려와 근무하였는데 이때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유자광의 글을 불태웠었죠.

1472년 지리산을 산행하면서 쓴 '유두류록'은 훗날 문인들의 산행기에 모범이 됩니다.

점필재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흔적이 왜 이리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좌측으로는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그리고 남명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도 보이는군요.

재미있는 내용이 있군요.

어디 한 번 볼까요?

강씨들 세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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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담龍游潭.

용유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역시 김종직의 유두류록(1472)입니다.

“해공은 군자사로, 법종은 묘정사로 가고, 조태허․유극기․한백원은 용유담(龍遊潭)으로 구경갔다. 나는 등구재를 넘어 곧장 군의 관아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그는 함양군수 시절(1471~1475) 용유담을 언급한 시 11편을 남겼다고 합니다.

물론 그전부터 용유담으로 불렸겠지만, 용유담은 군수를 잘 만나 세상에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이 동국여지승람으로 1481년 발간된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하 '엉겅퀴 님' 글을 인용합니다.

이 책 함양군 형승(形勝)조를 보면,

「용유담(龍遊潭) :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 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중의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국역 : 한국고전번역원)

 

여기서 얘기하는 저연은 돼지령에서 심원마을 가는데 있는 그 저연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석기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오는 용유담 관련 기록을 봅니다.

 

① 1586년,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의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

「용유담 가에 도착해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곳은 가까이서 구경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위대하고나, 조물주가 이 경관을 만들어냄이여. 비록 한창려(韓昌黎)나 이적선(李謫仙)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수수방관하며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들이 어쩌겠소. 차라리 시를 읊기보다는 우선 여기서 술이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오춘간이 못내 재주를 발휘하고 싶어 시 한수를 지었다. 그중에서 “신령들의 천 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흔적이 남아 있네(靈怪千年跡 蒼崖有裂痕)”라는 구절은 옛 사람들일지라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구니, 어찌 잘 형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② 1611년,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杉)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민간인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로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끼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③ 1640년, 허목(許穆 1595-1682)의 지리산기(智異山記)

「그 아래 용유담은 홍수나 가뭄 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용유담의 물은 반야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임계(臨溪)가 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용유담이 된다. 깊은 골짜기에 너럭바위가 있고, 양쪽 벼랑 사이로 물이 흐른다. 바위 위에는 돌 구더이[石坎 석감], 돌 구멍[石竇석두], 돌 웅덩이[石坑석갱]이 있어 마치 교룡(蛟龍)이 꿈틀거리는 듯, 규룡(虯龍)이 서려 있는 듯, 온갖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널려 있다. 물은 깊어 검게 보이는데, 용솟음치거나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빙빙 돌거나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기도 한다.」 

 

④ 1724년, 조구명(趙龜命 1693-1737)의 유용유담기(遊龍游潭記)

「먼저 용유담(龍游潭)을 구경하였다. 용유담은 지세가 깊고 그윽하였으며, 바위들이 모두 개의 송곳니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물길이 굽이굽이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흘러내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용당(龍堂)이 맞은편 언덕에 있었는데, 나무로 엮어 만든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하여 위태롭게 매달린 다리를 건너자니 아찔하고 벌벌 떨려서 건널 수가 없었다. 다리 옆의 바위들을 넘어서 동쪽으로 백여 보를 가니, 큰 바위가 언덕에 붙어 가로 놓여 있었는데, 그 모양이 둥글기도 하고, 타원형이기도 한 것이 패옥 같았고, 움푹 파인 곳은 술잔과 술통 같았다. 그 너머 몇 길이나 되는 바위에는 길 같은 흔적이 굽이굽이 이어졌는데, 마치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하였다. 갈고 다듬은 듯 반질반질하여 그 형상이 지극히 괴이하였다. ‘용유담’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략〉

지리산 북쪽에 펼쳐진 천석(泉石) 가운데 이 용유담이 가장 빼어나다. 나는 그 기세와 장관이 좋아 조우명(趙遇命)에게 바위의 남쪽 벽면에 다섯 사람의 이름을 쓰게 하고, 그 아래에 내가 “바위가 깎이고 냇물이 세차게 흐르니, 용이 노하고 신이 놀란 듯하다[石抉川駛龍怒神驚]”라는 여덟 글자를 적었다. 후에 석공을 시켜 새겨 넣도록 하였다.」 

 

⑤ 1790년,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의 방장유록(方丈遊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커다란 바위들이 시내에 쌓여 있었다. 지붕의 용마루, 평평한 자리, 둥근 북, 큰 항아리, 큰 가마솥, 성난 호랑이, 내달리는 용, 서 있는 것, 엎드려 있는 것, 기대 있는 것, 웅크리고 있는 것 등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계곡에 가득 차 있어 그 기괴한 형상을 이루 다 이름 붙이고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로 하나의 물길이 열려 큰 돌구유에서 수만 갈래의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내리고,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 여울은 요란스럽게 쏟아져 요동쳤다. 아래에는 1만 이랑이나 되는 큰 못을 형성하였는데, 곧장 몇 리나 뻗어 있었다. 두 골짜기가 솟구쳐 있고 솔숲 그늘이 뒤덮여 침침하고 어두웠다. 그 못을 따라 올라갔는데, 정신과 기운이 침침하여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 위 5가지 모두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유람록》에서 인용)

 

경화대庚和臺. 

庚은 나이를 말하고 和는 같다는 말이니 동갑계를 만들고 이를 기념하여 새긴 글입니다.

계원들의 이름이 각자되어 있씁니다.

임천 건너편으로 가면,

무속인이 치성을 드린 흔적이 보이는군요.

샘물은 식용으로는  좀  글쎄요.....

포트 홀.

강 건너에는 무수히도 많은 포트 홀이 있는데 이쪽에는 별로.....

 

악어바위 혹은 용바위.

입에 거품을 물고 있군요.

상당히 강력한 물길.

소리도 아주 시끄럽습니다.

용유교 쪽으로는 조용히 흐르고.....

그러니 이 정도로 깎였고.....

두꺼비 같이 생긴 바위인데 촬영 각도가 잘못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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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까지 왔다면 사실 와불산臥佛山을 봐야하죠.

이 와불산을 제대로 관찰하기 좋은 두 곳이 있죠.

바로 견불동見佛洞과 견불사見佛寺입니다. 

만약 용유담에서 2km떨어져 있는 견불사로 올라간다면, 

견불사 대웅전 뒤에 있는 건물에 조망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름이라도 이 정도의 와불을 볼 수 있습니다.

늦은 가을이나 겨울에 봐야 진면목을 관찰할 수 있다는군요.

하긴 그렇군요.

부처님의 누워 계시는 모습의  두상이 나오긴 하는군요.

법화산 줄기...

그래서 이 용유담과 화산12곡을 연결하여야 하는것이죠?

화산12곡은 화남대, 경화대, 와룡대 등 12개의 명승지를 얘기합니다.

물론 화산은 법화산을 얘기하는 것이고.....

엄천 건너 고정동 마을을 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와불산의 제대로 된 부처님 머리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견불동입니다.

송전마을로 들어갑니다.

와룡대 부근을 지납니다.

이곳 어딘가에 와룡담臥龍潭이라는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을 텐데....

아, 근데 이게 뭡니까?

바로 윗집에 사시는 분이 주차장에 무료로 커피를 마시고 갈 수 있도록 온수와 컵 그리고 커피 등을 내놓으셨습니다.

고마운 분.

문하마을 앞의 송문교 일대는 대단히 멋진 곳입니다.

이곳이 화산 12곡 중 하나인 와룡대인데 바위와 소나무의 조화가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와룡대 거북바위 옆에 비가 세워져 있는데 와룡대라는 시를 지은 강용하(1840~1908) 등 8인이 계契를 조직했다는 내용이 담긴 유적비입니다.

그 앞에도 그 계원들의 이름과 와룡대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는데 육안으로는 잘 구분이 되질 않는군요.

아까부터 화산12곡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화산 12곡은 주자(1130~1200)가 여산 북쪽을 유람하고 쓴 산북기행이라는 12장의 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위 강용하가 주자의 운을 그대로 사용하여 화산12곡을 지은 것입니다.

이 일대의 12개의 명소를 용유담을 시작으로 함허정까지 12장의 시로 읆으면서 화산12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인이죠.

이 와룡대가 그 중 4곡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정여창(1450 ~ 1504)은 김일손(1464~1498)과 이곳을 지나면서 "가히 살만한 곳"이라고 하여 가거동可居洞이라고도 불렀었죠.

"산이 북쪽에서 뻗어내리다 우뚝 솟아 세 봉우리가 괸 곳이 있었다. 구 아래 겨우 10여 호쯤 되는 민가가 있었다. 탄촌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정맥욱이 "이 마을은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문필봉 앞이 더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앞으로 5 ~ 6리 정도 더 가면 오래된 절이있는데 엄천사라 하였다.

뒤의 법화산을 봅니다.

그럼 여기서 강용하가 12곡 중 와룡대를 노래한 시를 들어볼까요?

 

兩賢可居地(양현가거지)  두 현인이 살 만한 땅이라고 하여

 高名此其表(고명차기표)  높이 이름난 곳은 바로 여기를 가리키네.

 門前臥龍石(문전와룡석)  문앞의 와룡석은

 千載知者小(천재지자소)  천년 동안 아는 이 드물었고

 神物擅地靈(신물천지령)  신령한 물건이 땅의 영기를 독차지하여

 林壑自窈窕(임학자요조)  숲과 골짜기는 고요하네.

 三千古道恨(삼천고도한)  삼천 년 옛 道가 한스러워

 夕陽問啼鳥(석양문제조)  저물녘 우는 새에게 물어본다.

여기서 양현은 정여창과  김일손을 얘기하는 것임은 명백합니다.

송문교 건너 우측으로 보이는 삐져 나온 산자락을 지나면 한남동이 나오겠죠.

다리를 건너지 않고 천변을 따릅니다.

멀리 문상마을이 보이고....

 

엄천이 휘돌아가는 곳 좌측 암벽이 양화대楊花臺임을 인식합니다.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으나 육안으로는 보려는 것은 욕심입니다.

 

5곡인 양화대를 노래한 강용하의 글을 봅니다.

東麓復西馳(동록부서치)  동쪽 산기슭에 있던 해가 다시 서쪽으로 달려

蒼壁多夕暉(창벽다석휘)  푸른 절벽 가득 석양이 비치네.

弱柳身全倒(약류신전도)  연약한 버드나무는 물위로 몸통을 뒤집고

奇巖勢欲飛(기암세욕비)  기암은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솟아 있구나.

浮沙占有年(부사점유년)  뜬모래가 한동안 이곳을 차지하고 있으나

去來正無依(거래정무의)  가고 옴에 진실로 의지할 데가 없듯이

幾與薇山子(기여미산자)  미산자와 나는 얼마나 함께 할 수 있을까?

觀魚樂天機(관어낙천기)  고기 노는 모습 구경하며 천명을 즐기리라.

 

강용하는 연약한 버드나무 운운하며  양화대楊花臺라 하였으나 조금 더 후대 사람인 강민영(1859~1925)는 양화대陽和臺라 부르고는 그렇게 각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논의가 좀 있다. 사실 이 양화대에는 버드나무가 보이지도 않고 있을만한 곳도 아니건만 선인들은 버드나무를 노래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우리말의 어원에서 찾아야 한다.

본시 우리나라의 옛말은 단순했다. 산이면 그저 높은 것이고 사람 사는 곳이면 다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바다나 강 그리고 호수 등을 향해 뾰족하게 내민 땅의 끝부분도 눈에 띄었으리라. 그것을 옛 사람들은 ‘곶, 고ㅎ, 꽃’ 등으로 불렀다. 그러니 코가 우리 얼굴에서 뾰족하게 나온 부분이며 송곳이나 곡괭이, 꼬챙이, 곶감, 꼬치 등이 그런 의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 땅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한자로 표기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고 특히 신라 경덕왕은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곶 안에 있는 마을은 ‘곶안’이니 ‘고잔’이 되어 ‘串安’이나 ‘古棧’이 되었고, 꽃은 ‘花’를 썼고 더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華’를 쓰기도 했다. 화개장터의 화개花開가 바로 이런 취지에서 생긴 말이다.

 

그런데 양화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곳이 버드나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곳의 옛 이름이 ‘버들곶’ 정도의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는 추론은 가능하다. 즉 ‘벋延~ +을(어미) + 곶串’이니 바깥쪽으로 벌어졌다는 뜻의 ‘버드러지다’에서 온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지명 중 ‘버드러지’나 이와 유사한 이름을 가진 마을 가령 강화도 화도면의 ‘버드러지 마을이나 청주시 남일면의 ‘버들고지’ 마을 같은 것이 이런 곳이며 서울의 양화대교의 양화진은 ‘벋을곶나루/버들곶나루’에서 ‘버들’을 ‘楊’으로 받아서 생긴 이름인 것이다.

 

어쨌든 강용하는 연약한 버드나무 운운하며 양화대楊花臺라 하였으나 조금 더 후대 사람인 강민영(1859~1925)은 양화대陽和臺라 부르고는 그렇게 각자刻字를 하였다. 楊花 즉 버드나무꽃도 좋지만 양화陽和는 따스한 봄기운을 말하며 때로는 태평성대를 뜻하기도 할 것이니 암울한 시기인 일제강점기를 지내면서 좋은 시절을 꿈꾸며 기다리는 작자의 마음이 실린 창조적 변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 졸저 전게서 176쪽

 

그리고 그 좌측에 퇴적물이 쌓인 곳이 새우섬인데 한자로는 오서鰲嶼라 쓰는군요. 그러면 자라섬일 텐데...생김새가 새우등 같이 휘어져 있어 새우섬鰕島라 불렀을 법도 하건만 오鰲嶼라! 

어떤 심오한 뜻이 있겠죠.

운서쉼터를 지납니다.

멀리 왕산줄기가 보이고....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있는 곳 좌측이 한남동일 텐데....

그 한남동은 세종대왕의 12번째 왕자인 한남군이 수양대군의 등극을 반대하다 유배된 마을입니다.

그후 백두대간의 고치령과 관련이 있는  금성대군복위사건에 연류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1459년 사망하였습니다.

위리안치란 전에 퇴계 이황의 '유소백산록'을 따라 걸으면서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지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이제 동강마을로 내려옵니다.

 

엄천교 건너 운기마을을 보며 동강마을 앞에서 4구간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