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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6구간 (수철리 ~ 성심원)

벌써 6구간입니까?

참 빠르군요.

오늘 구간은 수철마을 ~ 성심원이라고 하는데.....

곧 중간에 산청읍내를 통과하는 구간입니다.

 

예습 거리에서 어느 정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번 구간의 포인트는 지막마을을 지나면서 덕계 오건 선생을 뵙는 일과 예전 산청 초교 자리에 있었던 환아정換鵝亭 그리고 내리저수지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일들로 집약이 되는군요.

환아정과 관련해서는 매번 '건립중'이라는 안내 소식만 접했던 저였는데 3년 만에 다시 들르는 산청군은 이제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계룡산에서 하루를 보내고는 오늘 새벽까지 뒤풀이를 하다 몇 시간 자지 않고 일어나니 머리가 멍한 게 정신이 없습니다.

대전 IC 부근 원두막이라는 곳에서 수지에서 내려오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8시 정도 되니까 최신형 버스가 도착하고.....

1시간 반 정도를 더 달려 수철리마을에 도착을 해서는 오늘 구간을 시작합니다.

꼼지락거리다.....

산청은 정자의 마을입니다.

어제는 박정자를 오늘은 오정자를 보는군요.

6구간의 대장은 아무래도 필봉산858.2m입니다.

좌측의 왕산925.6m에 비해 높이도 낮고 삼각점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산청 읍내에서는 이 필봉산에 가려 왕산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산청에서는 자신들 마을의 진산을 왕산이 아닌 이 필봉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의 756.6봉에 가려 꼭대기만 간신히 보이지만 그래도 저 덕천지맥의 왕등재봉993.6m도 상당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덕천지맥이; 지나는 저 왕둥재봉에서 고동재 ~ 쌍재 ~ 왕산 ~ 필봉산으로 진행하는 산행도 가능합니다.

좌측이 고동재, 우측이 쌍재죠.

중앙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641.4봉이고....

너무 놀다갑니다.

지막교에서 잠깐 좌틀하여 덕계 선생을 만나러 갑니다.

 

남명 조식 선생에게는 남명 5현이라는 제자 5명이 있습니다. 덕계(德溪) 오건(吳健‧1521~1574),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 1620) 등이 그들인데 이중 덕계는 산청의 이 지막마을 사람으로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독학을 한 소위 자기 주도 학습법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책도 구할 수 없어 몇 권이 안 되는 책을 수 천 번 읽어 혼자서 그 뜻을 깨우쳤다 하고 30이 넘은 나이에 남명 제자로 들어 갈 때는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있던 터라 남명도 늘 그를 "오선생'이라 부르며 대우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급제를 하여 43세에 출사를 하게 되자 덕계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한 64세의 남명 선생은 지리산 산천재에서 송별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 밤머리재로 향하는 43세의 덕계를 십리 밖까지 배웅하며 덕교에 있던 나무 그늘에서 술자리를 다시 베풀었는데 이때 덕계는 말 위에서 내려오다 떨어져 이마를 찧었다고 합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그 나무를 송객정(送客亭)이라 하고 마을을 면상촌(面傷村)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사제지간의 정겨운 풍경을 떠올려지는 대목입니다.

 

북천(北川)을 건너 십리를 간 뒤 송객정(送客亭)에서 쉬었다. 옛날 노선생[남명(南冥) 조식(曺植)을 가리킨다.]이 덕계(德溪 : 오건(吳健))를 보낼 때에 반드시 멀리 이 정자까지 같이 왔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도 늙은 나무가 정정하고 위에는 낙마파(落馬坡)와 면상촌(面傷村)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덕계가 선생께 하직하고 물러나와 동문의 여러 선비들과 실컷 마시고 헤어져서 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져 얼굴을 다쳤는데, 이 때문에 땅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 1877년 허유의 두류록 중

 

덕계 오건은 제자들의 명단을 적은 ‘덕천사우연원록’에 가정 먼저 나오며  1572년 남명 장례식에 덕계는 제자 대표로 동쪽에 먼저 서고 수우당 등이 차례대로 섰다고 합니다. 덕계는 남명 생존 시 가장 먼저 이름을 떨치면서 후학을 양성한 사람으로 남명 문인의 좌장 격인 인물로 처사로 일관한 이가 수우당이고, 의병장으로 실천가인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  그리고 스승의 뜻을 언제나 놓지 않고 의리로 일관한 이가 내암 정인홍이라면 학행 일치의 삶을 살아온 이는 바로 이 덕계 오건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막교에서 좌측으로 개울을 따라 100m 정도 들어가니 작은 절벽에 각자들이 보입니다.

덕계오선생장구지소德溪吳先生杖屨之所라....

오건 선생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덕산에서 德을 가져왔고 뒤에 금서천이 되는 이 향양천에서 溪를 가져와 덕계德溪라 호를 지었을 거 같습니다.

장구지소杖屨之所란 '이곳에 지팡이를 놓고 신발을 벗고 쉬어갔다'는 취지의 글이니 이곳이 충분한 쉼터 내지는 유원지 역할을 할 정도로 맑은 계류가 흐르는 곳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덕계 선생의 고향이 바로 이 지막마을인데 덕계로 인해 춘럐대春來臺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며 그 위에  춘래정이라는 정자도 그것 때문에 가 세워진 것입니다.

춘래春來란 덕계가 스승인 남명을 만나면 '봄과 같이 따스함을 느껴 스승이 오는 것이 마치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거 같다'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 위에는 자연동천紫煙洞天이라고 각자가 되어 있는데....

예로부터 선비들이 높은 산에 싸여 그윽하고 운치 있는 계곡을 洞天이라 불렀는데 자연紫煙이라....

자연紫煙하니까 락그룹 Deep Purple이 생각나는군요.

Deep Purple은 자신의 그룹 이름을 지을 때 상당히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5명이 밀실 안에 틀어박혀 고민에 고민을 하던 중, 그들이 태우고 있는 담배연기가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빛 속에서 짙은 보라색이 되는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치며 진보라색 즉 Deep purple이라고 지었다고 하더군요...

덕계 선생도 겨울이 지나 봄이 올 때 아지랑이의 기운 속에서 그런 보랏빛을 본 건은 아닐까요?

https://youtu.be/dArllMPLPLE

 

덕계 선생의 그 기운이나 아직 오지도 않은 봄기운을 미리 느껴보기 위해 춘래정으로 올라갑니다.

예전에는 그저 이렇게 관리가 되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웬걸!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함양 오씨 여러분들 이래도 되는 겁니까!

풀에 숨겨진 춘래정의 모습에 놀라서 최대한 근접한 곳으로 가봅니다.

육시랄.......

어쨌든 덕계 선생은 자연동천紫煙洞天 즉,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선계仙界라 불렀겠지만 이런 상태에서 자연동천이니 선계니 하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저 이 정도에서 예전의 향취만 맡으려 합니다.

실망만 가득 안은 체 계곡을 빠져나옵니다.

산은 그대로인데 어쩌면 인간들이 하는 행태란.....

웅석봉 자락을 보고.....

멀리 남강지맥의 황매산도 보면서 조금 전 느꼈던 그 실망감을 애써 지웁니다.

평촌교에서 하천길을 따르고.....

이 정도만 돼도 예전에는 참 멋진 계곡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좋아하는 감나무.....

짙은 브라운 톤.......

이건 deep brown 이 아니고 dark brown이지.....

그 색깔의 낙엽이 골을 이루고 있고.....

그 뒤에 정자 하나!

수초도 됐다 육초도 되는 식물?

산청 일반산단 옆으로 들어갑니다.

대장마을에서 기산616.1m으로 올라 밤머리재 삼거리를 거쳐 웅석봉1099.9m으로 가는 길.

좌측으로는 정수산829.1m 우측으로는 꽃봉산 237.5m 너머 둔철봉823.4m.

이한검 대장과 둘이서 아주 즐겁게 걸었던 기억이 있는 곳.

대장마을로 들어서서는 금서천을 건너면서 금서천이 남강에 합류되는 곳을 봅니다.

이 남강은 백두대간 봉황산(남덕유산)에서 가지를 칠 때 발원하는 남강이 생초면과 휴천면이 만나는 곳에서 임천을 흡수하여 지금 이곳까지 흘러온 것입니다.

 

드디어 저 멀리 좌측으로 십자봉이 보이고 그 우측의 뾰족한 웅석봉을 봅니다.

 

남강을 이 산청에서는 특히 경호강이라 부릅니다.

 

마침 저와 같이 이 얘기 저 얘기하고 걷던 '산이조아' 고문님 曰,

"현오님 그런데 소흥시는 어떻게 아셨어요. 나도 우연찮게 소흥시 관광을 하게 되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물의 도시더군요.

동양의 베니스는 거길 두고 얘기하는 거 같아요."

 

남강이 산청에 들어오면 경호강이 된다

이 산청의 예전 이름은 산음이었다. 중국을 사대事大하다 못해 모화慕華까지 한 경덕왕( ? ~ 765)은 지품천현이었던 이 산청을 산음으로 바꿨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산양이라고도 불리다가 영조43년 그러니까 1767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산청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지명은 대부분 신라 경덕왕 때 정비된 이름이다. 경덕왕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는 작업에 몰두한 인물이다.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국 절강성 소흥현 산음(상해 바로 아래의 소흥시紹興市)의 빼어난 산수와 비견比肩된다고 하여 거기서 따온 이름이란다. 그래서 중국 산음에 경호강이 있으니 이 남강도 산청으로 들어서면 특히 경호강이라 부르는 것이다. 단성의 끄트머리까지는 그렇게 부른다.

 

그러니 경호강의 본 이름은 남강이다. 이 남강이 하는 역할 중 하나는 지리산의 동쪽 영역을 한정한다는 것이다. 즉 남강을 만나면서 지리산의 모든 맥들은 다 끝나게 된다. 그러니 덕천지맥이나 지리태극종주, 남강태극종주, 하다못해 진양태극종주는 물론 지리동부능선까지도 모두 그 맥의 끝은 이 남강까지 인 것이다. 남강과 지리산과의 관계는 이것만 이해해도 된다.

 

- 졸저 전게서 159쪽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는 머릿속으로 이 그림을 그리며 "도대체 재건축 하는거야 마는 거야!" 하며 푸념을 할 찰나!

산청초등학교 자리에 안 보이던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못 보던 건물입니다.

누가 봐도 새로 지은 건물.

경호1교를 건너면서 좌측을 보면 경호교 앞 우측으로 산청초등학교가 보이는데 그 초교 본관 자리에 예전에 ‘환아정換鵝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밀양의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영남 3대 누각으로 알려진 큰 정자였다. ‘환아換鵝’ 하니까 중국 산음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학가이자 서예가인 왕희지(307~365)가 떠오른다. 환아정과 관련한 얘기를 들어볼까?

환아정이라는 정자

김선신의 두류전지는 “산청지에는 객관 서쪽에 있으며 강가(경호강)에 임해 굽어보고 있다. 현감 심린이 건립할 때 당시 저명한 선비였던 화산花山 권반權攀(1419∼1472)이 우군 왕희지의 고사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 우암 송시열과 백헌 이경석의 기문이 있다.”고 적었다.

권반이 ‘백아환자白鵝換字’ 즉 ‘유난히 거위를 좋아했던 왕희지가 흰 거위白鵝를 얻기 위해 ’도덕경‘을 자신의 필체字로 써서 그 둘을 바꿨다換.'는 유명한 고사에서 따와 ‘환아정換鵝亭’이라 이름 지었고, 그 현판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1543~1605)이 썼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다시 복원된 것이 1950년 3월 1일 01:00 원인 불상의 화재로 또 소실되었으나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1489년 4월 봄이 무르익는 계절에 탁영 김일손도 지리산 유람을 떠나면서 이곳을 지났다. 그는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고는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 규모에 대해서 정유재란 뒤 복원한 환아정을 본 김회석(1856~1934)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그렸는데 이런 환아정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남주헌(1769~1821)은 함양군수 재직 중이던 1803. 3. 산청현감 정유순鄭有淳, 진주 목사 이낙수 등과 함께 지리산을 올랐다. 산행 도중 산음에 들러서는 이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주변을 이렇게 그렸다. “정자 아래로 강물이 흘렀고, 강가에 절벽이 임해 있었으며, 예쁜 꽃과 길쭉한 대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산음山陰이다. 그래서 산은 회계산會稽山이라 일컫고 물은 경호강鏡湖江이라 이름하며, 왕일소王逸少(필자 주 왕희지)의 고사를 본떠 환아정을 지은 것이다. 여기는 내가 여러 차례 본 곳이다.” 그렇게 둘러보고는 산음을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는다.

 

稽山鏡水繞空臺 계산경수요공대       회계산과 경호강이 빈 누대를 감싼 자리

癸丑春年上巳會 계축춘년상사회      계축년(353년)의 봄날이 상기일과 겸해 돌아왔네

그러면서,

籠鵝已去沙鷗至 농아이거사구지      거위 안고 떠나가니 갈매기만 날아오고

道士難逢洞客來 도사난봉동객래      도사 상봉 어려우니 동객만 찾아오네.

 

그런데 그 경호강과 어우러진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회계산이 어디인가? 대동여지도와 조선지도에도 나와 있는 이 회계산이 현대 지도에는 위치가 불분명하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회계산은 ‘동산’의 북동쪽 정곡 마을 좌측에 있다고 하고, ‘비변사인방안지도’와 ‘광여도’에 의하면 ‘관문으로부터 5리 거리’라고 되어있다. 그럴 경우 ‘동산’이 현재 산청의 진산인 꽃봉산237.5m이라고 하니 회계산은 지금의 산청군 하수 종말 처리장 옆에 있는 231.7봉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 정도의 조망의 봉우리에 그 수려한 이름을 갖다 붙였을까?

 

 - 졸저 전게서 159쪽 이하

올해 6. 27. 준공된 환아정의 모습.

감개기 무량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꽃봉산의 전망대를 봅니다.

경호강은 남강!

점심을 먹는데......

아차! 나무지게 님은 혼자서 뭐하고 계신가?

그럴즈음 카톡 메시지가 하나 날아옵니다.

강산 형님의 홍어와 막걸리 그리고 담금주에 눈이 멀어 그냥 먹이 찾는 강아지가 되어 깜빡하고 나무지게 님을 놓친 것입니다.

사정을 고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혼자서 외롭게 내리저수지에서 막걸리 한 통에 온갖 시름을 다 잊고 있을 나무지게님.

걸음을 빨리합니다.

우측으로는 남강.

좌측의 산청고등학교의 면학정을 지나고,

중앙의 웅석봉도 보면서 .....

남강.

다리를 건너,

멀리 양천지맥.

꽃봉산을 남쪽에서도 바라보고....

대나무 숲.

저수지의 물은 거의 흐르지 않고,

그러고는 내리저수지입니다.

이게 무슨 나무인가?

삼나무?

완전히 데칼코마니 기법이 따로 없군만!

예전 사대부들의 회합이나 강연을 할 때 이 지곡사를 많이 이용했다고 하던데....

절이 수행 장소만이 아니고 연회를 베푸는데도 이만한 데가 없다고 판단했었나 봅니다.

나무지게 님과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서너 순배 돌아가는데 대원들이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촬영 장소.....

BS님.

하이킹님....

정닉님....

중간에 웅석봉 등로가 보이고.....

물이 산을 잠기게 하고,

나무도 잠기게 하네.....

정말 아름답군요.....

그만 갑시다.

지곡사를 들르고.....

이한검 대장.....

낙엽으로 덮인 둘레길.

선녀탕?

선녀의 파트너로 나무꾼은 되고 나무지게는 안 되는가?

심적사....

우측은 웅석봉 가는 길......

꽃봉산.

스탬프 찍는 곳.

감 다섯 개.

까치밥.

다 왔습니다.

전에는 성심원 안으로 들어가 웅석봉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는데.....

이 정도만 돼도 다행입니다.

남강.

성심원을 보고 오늘 둘레길을 마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뒤풀이 장소가 환아정 바로 앞.

덕분에 환아정 구경을 눈이 아프도록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