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님은 화물연대 파업으로 업무 대기를 하여야 한다고 하는군요.
송구스럽게도 저를 성심원까지 데려다주고는 멀리 당진으로 돌아올라 갑니다.
먼 거리를 수고해 주셨습니다.
오늘이 벌써 지리산 둘레길 7구간이군요.
7구간 루트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성심원 안으로 들어가 소나무 숲을 보면서 걷는 길이었는데 성심원 거주 장애우들 때문인지 성심원을 우회하게끔 노선이 변경된 것입니다.
실로 적절한 선택입니다.
중증장애우들을 돌보는 곳을 외부인이 무시로 드나든다는 것도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남강에 아침 햇살이 빛나고 있습니다.
산청에서는 죽어도 이 강을 경호강이라고 우기는 이 남강.....
천변을 따라 걷다가 우틀하니,
둘레길이 갈립니다.
어천 지선支線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즉 여기서 다리를 건너 좌틀하면 어천마을로 돌아가서 아침재에서 합류하게 되는 코스로 정규 노선보다 약 3km 정도를 더 걷게 된다고 하는데......
좌틀할까 하다가 예전 노선과의 합류지점이 보고 싶어 그냥 직진합니다.
이런 산중에서 시멘트 도로를 걷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입니다.
토종벌통......
누가 이 길을 이렇게 깨끗이 청소해 놓았나?
길바닥에는 나뭇잎 하나 없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삼거리에 있는 폐가.
아!
여기서 예전 둘레길을 만나게 되는군요.
기억이 가물가물......
표지석을 보니까 기억이 납니다.
웅석사.
예전에는 웅석사라는 문패가 없었는데 ....
새로 만들었군요.
부드러운 길을 이한검 대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거주하던 컨테이너 박스.
어제도 늑대 형님을 세 번이나 뵈었는데 오늘도 또.....
형님 추모동판이 있는 추성리의 골짜기를 한 번 가봐야 할 텐데.....
개울 건너......
전에는 여기서 물 한 목금 먹었었지.
개울을 건너자마자 고도를 높입니다.
그러면서 산청읍을 벗어나 단성면으로 접어듭니다.
단성은 신성한 마을의 의미이다
단성이라. 예전에는 단성현이었다. 단성면의 옛 지명 단성현은 신라시대에는 적촌현과 궐성현이었다. 결국 ‘赤’이 ‘丹’으로 바뀐 것이다. 무슨 뜻일까? 이 ‘丹’이나 ‘赤은 우리나라의 ‘ᄇᆞᆰ’사상의 산물이라 봐야 한다.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의하면 신라의 개국 당시부터 ‘박朴’이란 제사장을 뜻하는 계급이었다. 남자 무당인 ‘박수’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ᄇᆞᆰ’의 변형이 곧 ‘박’, ‘밭’, ‘불’, ‘발’ 등인 것이다. 그것들이 한자가 들어오면서 ‘光’, ‘明’, ‘赤’, ‘朱’, ‘足’이 되었으며 ‘붉을 赤’의 경우 단순하게 같은 색깔의 한자어인 ‘붉을 丹’으로 바꿔 쓴 것이지 그 뜻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리산을 신성시하였던 신라인이나 가야인들은 ‘赤村’ 즉 지리산 아래의 신성한 마을인 ‘赤村’을 ‘丹村’으로 바꿔 부르게 된 사연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백두대간 상의 소백산을 끼고 있는 충청북도 단양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단양의 옛 이름이 赤山이었으며 ‘陽’은 산이나 고개를 나타내는 말이니 적산=단양이므로 이 단성의 옛 이름이 적성이었음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68쪽
이렇게 고도를 높이며 쉬엄쉬엄 오를 때에는 뒤를 돌아보는 게 상책입니다.
돌아보니 골짜기로 외송마을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둔철산823.4m이 높게 서 있습니다.
주봉 좌측으로 안테나도 가늠이 되고....
그러니 그 좌측이 척지 건너 정수산입니다.
양천지맥 줄기들이죠.
신산경표에서는 정수지맥이라고 부르지만.....
어제 삼봉산에서 이 부근을 조망하면서 지금 이 상황을 내심 그렸었는데.....
조금 더 오르면 황매산1112.8m도 볼 수 있겠지!
새롭게 안전시설도 해놓았군요.
그러고는 웅석봉 하부 헬기장입니다.
없던 정자도 새로 만들어 놓아 예전의 투박했던 헬기장 모습은 찾아볼 수 없군요.
막걸리에 이것저것을 먹다 보니 금방 배는 불러오고.....
오늘 강산 형님의 비장의 무기는 갈근주葛根酒.
감사합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징그러운 임도길을 따릅니다.
멀리 진양호가 보이는군요.
진양호는 이 남강과 더불어 산줄기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교재가 되죠.
여기서는 그런 상세한 얘기는 할 필요가 없고.....
다만 저 진양호에 인공수로가 있는데 낙남정맥을 할 때에는 그 수로를 건너게 된다는 것과 그 수로는 이 풍부한 남강의 물을 진주 지방에 공급을 하기 위함이라는 것.
이는 노고단에서 발원하는 풍부한 수량의 만수천 물을 화엄사 옆의 마산천으로 흘려보내 마산면 일대의 생활용수나 농업용수로 쓰게끔했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청계저수지를 따릅니다.
직진을 하면 달뜨기능선을 만난 다음 웅석봉으로 오르게 되겠지요.
웅석봉은 지리태극종주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봉우리인데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다만 웅석봉이 갖는 의의를 생각해 보면,
존경하는 글쟁이 산악인 박인식은 웅석봉을 이렇게 얘기한다. “지리산은 어디서 보아도 그 산세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워낙 넓은 산자락 탓이다. 그래서 ‘한국의 산’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지리산은 애매모호한 추상화로 인식되기 쉽다.(중략) 웅석봉에서 바라보아야 지리산은 추상화의 이미지를 벗고 ‘한국의 산’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웅석봉은 이런 봉우리이다. 어디서 보아도 지리산 전체를 다 볼 수는 없지만 웅석봉에서 만큼은 다르다는 얘기다. 박인식 선배의 얘기를 들으니 어느 정도 웅석봉이 정리됨을 느낀다.
웅석봉의 어원을 살펴보면,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서 웅석봉이라고?
웅석봉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볼까? 이 웅석봉 정상에 곰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고도 하는데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를 차라리 우리 옛말에서 그 유래를 찾고 싶다. 즉 옛사람들에게 모든 산이 그렇겠지만 특히 지리산은 ‘신성’, ‘신령’ 그 자체였다. 그러니 신神이나 그 정도로 신성하고 높은 존재를 뜻하는 우리말에 ‘ᄀᆞᆷ’이라는 단어가 있다. ‘감’, ‘검’, ‘곰’, ‘고마’, ‘구마’ 등이 거기서 파생된 단어이다. 지금의 ‘고맙다.’라는 말이다 ‘감사하다.’라는 말이 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골이면 ‘가마골’, 그런 신성한 곳 즉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면 산이나 커다란 바위 등과 관련하여 ‘검산’, ‘검암’ 등이었을 것이니 그들의 한자어는 ‘劍山’, ‘劍巖’ 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그런 발음을 가진 동물들 중에 우리 신화와 관련된 동물이 바로 ‘곰’이다. 그 한자어가 ‘熊’이니 다른 곳도 아닌 이 신성한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신성한 산 즉 ᄀᆞᆷ바위 〉 곰바위〉 웅석이 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웅석봉은 그저 ‘신성한 산’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516쪽 이하
그냥 걷기만 하면 되는 곳.
청계저수지.
움푹 파인 곳이 하부 헬기장.
고드름.....
제2 지리태극능선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꾼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지도는 이런 상상을 부채질한다. 지도를 놓고 마루금을 그렸다 지웠다 하는 일은 꾼들의 일상사이기도 하다. 그런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지리동서남북종주 코스가 만들어졌다. 발걸음 빠른 꾼들은 구간을 나누어 종주하다 보니 일시 종주라는 유혹에 빠지게 됐고 또 그것을 해냈다. 이른바 'extreme'이라는 단어가 자극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지리남북종주’와 ‘지리동서종주’였다.
그런데 지도를 만지작거리던 꾼들은 ‘지리동서종주’ 마루금을 그리면서 묘한 모양을 발견하게 된다. 성삼재에서 바래봉 방향으로 끝이 휘어져 올라간 모양이나 천왕봉에서 하봉 쪽으로 휘어 올라가던 마루금이 밤머리재에서 다시 휘어 꺾어지는 모양이 흡사 태극문양 같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서부능선+주릉+동부능선’에서 동부능선의 끝에 조금 변형을 주어 웅석봉에서 성심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어천마을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게 원시原始 지리태극종주 코스인 것이고 이때가 1990년대 말이었다.
그런데 지도를 놓고 마루금을 그리다 보면 아무래도 동쪽 부분이 덜 휘어져 태극이라는 문양에 부족한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성심원 방향을 어천 방향으로 유도하긴 했건만 의도적으로 ‘태극종주코스’를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지리의 서부와 동부를 잇는 기존 코스만 생각한 결과였고 한계였던 것이다. 장거리 산행 클럽인 'J3 클럽'의 방장 배병만은 여기에 주목했다. 그러고는 기존에 있던 틀은 무시하고 지리가 가지고 있는 봉우리를 놓고 제대로 된 태극 문양을 긋는다. 그러다 보니 지리의 동부 쪽이 대폭 수정된다. 기존의 웅석봉 ~ 어천 방향이 웅석봉 삼거리에서 바로 직진을 하여 수양산 방향으로 그 끝을 튼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지리태극종주 코스가 완성된 해가 2001년이었다. 이것이 요즘 장거리 산꾼들에게 '고수高手로의 관문關門(?)'의 필수 코스인 '지리태극종주' 코스 즉 '지태智太'이다. 구인월~덕두산~바래봉에서 성삼재를 잇는 ‘서부(북)능선+지리 주릉+동부 능선’의 동부능선 중 웅석봉+ 마근담봉+수양산을 첨가하여 도상거리 약 90.5km로 지리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을 이어 지리산의 경계를 확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리태극능선 종주코스를 확정하여 산행을 즐기는데 문제가 생겼다. 즉 이 태극종주 코스의 서쪽 끝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는데 동쪽 끝은 좀 어수선해진 것이다. 무슨 문제일까? 좀 살펴볼까? 확인해보면 배병만은 기존의 웅석봉~어천마을 코스를 수정하여 웅석봉~수양산~시무산으로 가는 루트①을 택했는데(다른 루트와 구별하기 위해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수양태극종주Ⓑ’라 함) 최근 이 '지리태극종주' 코스에 아종亞種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즉 마근담봉에서 이방산으로 진행하는 코스 즉②이방태극종주 코스가 생겼고, 또 석대산으로 진행하여 망대산이 있는 남강으로 가는 루트인 소위 ③남강태극종주Ⓒ 코스도 생겼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덕천지맥의 끝을 수정하여 진양호로 가는 루트인 ④진양태극종주Ⓐ도 생겼으니 동쪽 끝만 4개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태극종주루트가 지리의 동부 경계를 확정시키는 모양새가 됐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①②는 덕천강, ③은 남강과 덕천강의 합수점 부근, ④는 남강에서 각 끝나게 되니 이는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산경표를 염두에 뒀다는 얘기도 되겠다. 주의하여야 할 것은 위 4대 '태극종주'에 대한 얘기는 지리의 동부만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좋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산 이름이나 능선 그리고 산줄기 이름들은 고유명사이므로 한 번 굳어지면 이걸 고치기도 상당히 힘이 든다. 그리고 '다양성‘이란 사상이나 생각의 다양성을 얘기하는 것이지 굳이 이런 사실적인 것까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세분시킨다면 이는 다양성보다는 ’난잡‘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지리태극종주 코스는 배병만이 이 개념을 제안한 뒤 산꾼 대부분이 이를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하여 지금은 '지태'하면 '구인월~웅석봉~수양산~사리마을'로 굳어졌다. 여기에 태극모양도 아닌 다른 코스를 굳이 ‘태극’이라는 이름을 빌려 코스를 돌린다면 그것들에 대한 아종亞種이 또 여러 개 생길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그 혼란스러움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산꾼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즉 산꾼들에게는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으로 인한 폐해가 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지리태극종주 코스하면 현재 모든 산꾼들이 동의하여 진행하듯 순수하게 ‘웅석봉 ~ 수양산 ~ 사리마을’을 잇는 코스로 한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것이 후에 지리태극종주를 토대로 통계자료를 만드는 일이 생길 때 꾼들의 자료 하나하나가 귀중한 자료가 되어 수록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 졸저 전게서 533쪽 이하
새로 개설된 임도.
차단기 1.
차단기 2.
우측이 맥가이버 작업실.
아!
드디어 단속사지 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탑동마을이죠.
왜 저렇게 붉은색을 썼을까?
시골 풍경.
두 기의 탑을 봅니다.
운리소류지.
단속사 금륜대.
정당매각.
비각 안에는 두 기의 비석이 있는데 좌측의 ‘통정대부 강선생 수식 정당매비’는 1847년에 후손인 강세주, 강택주가 세웠고, 우측의 비는 1915년 새로 지은 것으로 이 비를 세울 때 비각도 함께 세웠다. 비각 안에는 강회백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를 걸어놓았다. 이 비에서 얘기하는 매화나무는 비각 바로 맞은편에 있다. 비록 시멘트로 덧씌워져 있어 매화나무 본래의 모습은 아니겠으나 6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꽃을 피운다. 이 매화나무의 주인공 강회백의 손자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이 나무는 자신의 할아버지 강회백이 이 단속사에서 과거 공부를 할 때 절의 뒤뜰에 심었던 것이라 한다.
"우리 조부 통정공께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조부께서 정사를 바르게 하여 조화를 이루고 임금을 보필하여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기에 단속사 스님들도 조부의 덕을 생각하고 그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그 매화를 보면 곧 조부를 본 듯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도록 정당매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렇듯 강회백의 손자 용휴가 심은 나무도 세월을 이기지 못해 2013년 이 정당매의 일부를 다른 나무에 접목하여 후계목으로 관리하고 있다. 사람도 자손으로 그 가계를 이어가듯 이 정당매도 이제는 손자를 본 모양새다. 그러니 굵은 모습의 시멘트 옆에 새롭게 올라오고 있는 나무가 바로 후계 정당목이다. 이 정당매는 하즙 선생의 원정매, 남명 선생의 남명매와 함께 ‘산청삼매山淸三梅’라고 불린다.
- 졸저 전게서 172쪽 이하
그런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4년 전 제가 이곳을 지날 때에는 분명 이 우편함이 없었는데.....
이건 1915년 이 비각과 함께 새로 세운 비.
1847년에 후손 강세주, 택주가 세운 비.
강회백이 단속사에서 공부를 할 때 절의 뒤뜰에 심은 것을 그의 증손 강용휴가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되다 보니 2013년 다른 매화나무에 접목을 하여 후계목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잘 좀 관리해 주소.
단속사가 가지고 있는 의의를 살펴보면,
우측 단속사지로 나간다. 단속사의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말일 게다. 금계사였던 원래 이름을 단속사로 바꾸면서까지 용맹정진하려는 수도승의 의지가 자못 결연해 보인다. 이 단속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경덕왕 7년(748년) 대내마 이순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거처했다.”는 ‘이순’설과,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의 763년 신충이 벗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왕의 복을 빌었다고 하는 ‘신충’설 등이 그것이다.
1489년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서 단속사 승려의 말을 인용하여 “신라의 유순(이순의 오기인 듯)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이순’설이 맞는 것 같다.
이 단속사는 한국 불교사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찰이다. 즉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를 통하여 선종이나 교종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찰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8세기 초 신라 승려 신행(704~779)이 등장한다. 그는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워와 신라에 그 불법을 전했는데 그 최초의 선종사찰이 바로 이 단속사이기 때문이다.
- 졸저 전게서 173쪽 이하
도로로 나오려 하다 보니 바로 옆에 귀한 사적비가 하나 있습니다.
남명의 시 증유정산인贈惟政山人
단속사지를 빠져나오려는데 좌측으로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남명 조식(1501~1572)이 사명대사 유정(1544~1610)에게 주었다는 시를 적은 시비詩碑이다. 즉 贈惟政山人증유정산인이다.
평소 의와 경을 중시하며 제자들에게나 본인에게 엄격했던 남명이 누더기 승복을 걸친 총기 넘치는 사명당과 단속사에서 만났다가 그와의 이별의 안타까움을 그린 시라서 더 각별하다.
花落槽淵石 화락조연석 조연의 암반 위에 꽃잎 떨어지고
春深古寺臺 춘심고사대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別詩勤記取 별시근기취 이별시를 부지런히 기록하게
靑子政堂梅 청자정당매 지금 정당매의 푸른 열매 맺은 것을
- 졸저 전게서 178쪽
이제 남명의 고을로 들어섰습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간단히 얘기하면 깃발을 꽂는 나무를 지지하는 기둥이라는 말이겠죠.
유정뿐만 아니라 고운 최치원, 서산대사 휴정, 진각국사, 탄연 등 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 단속사에서 머물면서 공부를 하였다 하니 대가람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1001번 도로를 따라 나올 때 우측 축대 위 무덤 앞에 있는 단속사 당간지주는 놓치기 쉽다. 단속사의 영화는 어디 가고 탑 두 기와 이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놔두고 절의 흔적은 없어졌으니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하다.
- 졸저 전게서 178쪽
당간지주는 법당 앞에 세운 기둥인데 일주문은 여기서 약 2.7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니 이 단속사의 규모에 대해서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그들이 출입하던 예전 단속사 입구는 고운 최치원이 썼다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단속사지에서 약 2.7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으니 “광제암문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다 헤졌다.”라거나 “쌀뜨물이 10리 밖에서도 보였다.”는 말들로 단속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널리 세상을 구하라!’라는 취지의 이 글을 사찰에서는 주로 대문 입구에 새겨 놓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가짐을 다지게끔 해주었다. 그런데 고운 최치원이 새긴 걸로 알려진 이 글에 대해 논의가 있다. 사실 이 글이 고운의 필체라는 근거는 중종25년(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주晉州편 불우조佛宇條에 있었다. 즉 ‘불우 단속사 지리산 동쪽에 있다. 골 입구에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는 글이 그것이다.
남효온은 “진주 여사등촌을 출발하여 단속사로 향하였다. 동구에 ‘廣濟巖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는데, 그 뒤 김일손은 “단성에서 서쪽으로 약 15리쯤 험한 길을 구불구불 다 지나고 나면 널찍한 언덕이 나온다. 거기에서 단애를 따라 북쪽으로 3, 4리쯤 가면 곡구谷口가 나오는데, 그 입구에 바위를 깎아 새긴 ‘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가 있다.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서는 최고운의 친필이라고 전한다.”라고 두류기행록에서 적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19년 발행된 조선금석총람의 단속사동동구석각斷俗寺東洞口石刻에 의하면 이 글은 고려 성종 14년(995)에 석혜? 스님이 쓰고 석효선 스님이 각자한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즉 일본인 학자가 이 글을 탁본하는 과정에서 이끼를 걷어내다 바로 옆에 새겨진 문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統和十三年乙未四月日통화십삼년을미사월일 즉 고려 성종 14년(995) 4월일, 書者釋惠? 刻者釋曉禪서자석혜? 각자석효선, 즉 글을 쓴 자는 승려 석혜?이고, 새긴 자는 승려 석효선’이라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쓸 때 자료를 수집해 온 사람의 성격이 좀 덜렁대는 스타일이었나?
그 정도였던 단속사가 김일손이 방문했을 때인 1489년 4월에는 절이 황폐화되기 시작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었다고 그리고 있다. 억불숭유 정책과 사찰에 대한 과도한 노역, 세금 등으로 쇠락하다가 1568년 이 절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특히 성여신) 불상을 훼손하고 경판을 불태운 사건이 있은 후 그 쇠락의 속도가 더해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의 터만 남아 있다.
- 졸저 전게서 175쪽 이하
대나무 숲......
마가목 사촌.
오늘은 이것으로 7구간을 마칩니다.
뒤풀이는 단성 시내에 있는 목화 추어탕.
이 단성이 문익점의 목화 시배지가 있는 곳이라 목화와 관련된 이름이 많고 또 다음 구간 때 보겠으나 남명 조식 선생의 단성소의 단성도 바로 이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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