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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제9구간 (덕산~위태) 예습하기

 

 

덕산~천평교(0.4km)~중태안내소(3.1km)~유점마을(3.1km)~중태재((1.3km)~위태(상촌)(1.8km): 9.7km

 

덕천서원

삼장천과 살천은 양당촌에서 합류하여 덕천이 된다고 했다. 덕산에 있는 남명 조식 유적지를 보고 원리교를 건너 덕천서원으로 들어선다.

 

정인홍 등이 세운 덕천서원

서원 앞에는 수령이 400년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서원은 남명 사후 4년 뒤인 1576년 제자인 정인홍, 최영경, 하응도 등이 세웠다. 서원 앞에 있는 세심정과 제자 덕계 오건과의 아름다운 일화가 전해지는 송객정, 면상촌도 놓쳐서는 안 될 곳이다. 후세 문인들에게 있어 덕산은 남명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남명을 만나기 위해 덕산을 찾았고, 그곳에서 남명을 그리는 글들을 읊었다. 특히 구한말을 전후한 시기 지리산 권역 글쟁이들은 지역의 선현인 남명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난세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졌음은 당연하였을 터,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이 덕산에 와서 남명이 생전에 찾았던 지리산의 여러 유적을 탐방하고 작품을 남겼다. 그런 면에서 덕산은 남명 문학 및 지리산권 한문학의 보금자리였다.

덕천서원의 경의당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찾는 이도 없어 적막하였던 이곳이 1870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0년에야 겨우 복원되었다. 하지만 서원의 존폐 여부에 상관없이 이곳을 찾는 후학들은 여전히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책임의식과 처세를 남명에게서 찾고자 했고, 이를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돌이켜보면 이 서원은 1609년 사액서원이 됐으며 1614년에는 남명에게 영의정 추증과 문정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졌는데 이는 순전히 수제자 내암 정인홍(1535~1623)의 노력 결과이다. 강성强性의 정인홍이 정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내용은 지난 구간 살펴봤다. 국가지정문화 사적 제305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된 덕천서원 안으로 잠깐 들어가 볼까?

경의당 편액

서원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으로 경의당敬義堂이 보인다.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덕천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그 뒤로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 집으로 처음엔 남명 선생의 위패만 모셨으나, 그 뒤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을 추가 배향했다.

 

그 좌측에는 서원에서 찍어낸 각종 목판을 보관하는 전각인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예전에는 웬만한 서원이나 사찰에는 나무로 책판을 만들어 서적을 만들고 이 책판은 장판각에 보관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해인사에 있는 장경각이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18일에는 남명선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세심정

머리가 깨끗해짐을 느낀다. 서원 앞에는 세심정이 있다. 선생의 높은 학문과 고매한 정신을 이어가는 후학들이 선생을 경배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세웠을 것 같다.

구곡산 정상

그런데 이 덕산은 지리산 천왕봉의 들머리이다.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곳. 그러기 때문에 천왕봉을 오르려면 이곳을 지나야 한다. 덕산초등학교 옆을 지나 구곡산의 황금능선 코스를 이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삼장면으로 들어가 그 길고도 긴 유평계곡을 통하여 ‘한판골’ 혹은 ‘윗새재’로, 대원사 코스는 화대종주 코스와 맞물려 있고 말도 많은 치밭목 대피소를 거쳐야 하며 그것도 아니면 아예 중산리로 들어가 가장 빠르게 천왕봉으로 오를 수도 있는 그야말로 지리산의 관문인 것이다.

 

 

이 중 중산리 코스는 천왕봉으로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루트이다. 관리동에서 법계교를 건너면 속세에서 법의 세계 즉 부처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굳이 부처님 세계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속세는 떠난다는 얘기다. 그러면 영원히 지리산의 신선이고자 했던 우천 허만수 선생의 추모비에 묵념을 한 번 올리고 갈 일이다. 우리가 산 그것도 지리산에 드니 그렇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을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이 중산리의 직등코스로 오르다보면 우선 만나는 곳이 법계사이다. 연곡사, 화엄사, 대원사 등과 함께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집이다. 법계사가 1380년 고려 우왕 때 이성계의 황산대첩의 왜구 잔당에 의해 불태워졌을 때 일시 무속인들이 들어와 ‘법계당’이라는 이름으로 가건물을 운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는 제석당과 같은 당집의 형태였다.

신문창대에서 바라본 문창대

한편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문창대이다. 고운 최치원이 법계사에 머물 때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며 명상에 잠겼던 고대高臺로 장터목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하며 기도발이 받는다는 지리 10대 중 하나이다. 문창이란 고려 헌종이 고운 최치원을 ‘문창후’라 시호한데서 유래하며 신라 말기 혼란스러운 정국을 보고는 ‘신라는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松岳 즉 개성을 얘기함)은 푸른 소나무다.’라고 하여 왕씨의 고려 창업을 예언했다는 데서 이런 예우를 받은 것이다.

 

신문창대

문창대 논란

그런데 이 문창대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1373.9봉이 아닌 망바위 바로 위로 표기되어 관심 있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1978년 10월 26일 로타리 산장(지금의 로타리 대피소) 기공식에 앞서 이 산장을 건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남명의 13대손 조재영은 진주산악회와 함께 기존 문창대에 대해 다른 곳을 문창대(기존 문창대에 대하여 ‘신문창대’라 함)라고 제시한다. 즉 ‘진양지 2권’의 내용 즉 ‘門西數十步許 有文昌臺 崔孤雲所遊地 해석해 보면 (법계사)절 서쪽 수십 보 거리에 최고운이 놀던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문창대이다.’를 첫째 근거로 든다. 이는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방향으로 나무계단을 오르자마자 나오는 좌측의 너럭바위를 얘기한다. 그러고는 두 번째의 근거로 그 바위 아래 ‘고운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를이 신문창대는 제시한다.

 

그런데 이 문창대를 처음 알린 이는 바로 진양지를 발간한 부사 성여신이다. 그의 칠언고시 형태로 쓴 ‘유두류산시’를 보면, ‘황혼 무렵 겨우 법계사에 이르렀네. (중략...)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고 문창대를 그렸다.

 

유석이 축융봉 아래에는 옛부터 상봉사(上封寺)가 있었으니, 천왕봉 앞에 어찌 벽계암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일찍이 서로 왕래하던 승려 선응(禪應)과 함께 도모하여 세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붕을 나무기와로 얹고, 판자로 벽을 막아 창을 내놓으니, 방이 한 몸 누이기에는 충분하였다. 다만 가진 것 없는 승려들이라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오는 사람이 반드시 식량과 반찬을 가지고 와야만 하였다.

 

암자의 맞은편에는 이른바 문창대(文昌臺)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석굴 속으로 기어서 몇 십 길을 올라간 뒤에야 비로소 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이렇듯 문창대는 법계사 동쪽에 있는 봉우리 즉 세존봉에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우뚝 솟아 있다고 하였으니 법계사에서 바라본 문창대의 모습과 같다. 반면 신문창대는 사실 ①위와 같이 성여신의 표현대로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②대臺의 외형을 갖추지 못한 점 가령 내려다보았을 때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거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바위 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반석盤石도 아니며. ③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 주변에는 日出峰. 혹은 陸象山 등 조잡한 각자들이 많이 새겨 있어 이 각자 역시 이들 중 하나로 여겨지며, ④이 각자의 제작 연대 또한 그리 오래 된 것 같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신문창대는 그저 각자가 되어 있는 바위 정도로만 인식되어도 무난할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인들의 산행기에 원 문창대가 지금의 장소와 너무 똑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구 문창대’를 ‘원 문창대’로 보게 하는 이유이다.

 

덕산 사람은 이데올로기 투쟁의 희생자

이런 곳이 덕산이니 아무래도 덕산 주민들에게 지리산에 대한 사랑이나 외경심은 대단할 것이다. 면면이 ‘지리산 정신’이 흐른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다른 어느 곳보다 일찍 ‘두류산악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지리산을 바라보며 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매년 이어지는 천왕제가 그걸 반증한다. 반면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빨치산이 지리산으로 쫓기듯이 몰려들어왔을 때 지리산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덕산도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들도 수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지리산이 베풀어주는 것에 비하면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애써 자위한다. 그래서 지리산을 떠나지 못한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이 수많은 희생자들 중 세인들의 기억에 떠나지 않는 인물이 정순덕이라고 하면 좀 지나칠까? 제5구간 점필재 루트를 걸을 때 의론대 바로 아래에 있던 선녀굴이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1933~2004)의 은신처라고 할 때 잠깐 얘기했던 그 정순덕이 바로 이곳 사람이다.

 

정순덕은 누구인가?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도 더 깊숙이 들어가면 안내원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이 정순덕의 고향이다.1949년 그녀의 나이 16살 때 반란군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온다.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를 그 시골구석에 그들이 들어옴으로서 그녀의 평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토벌군의 소개령疏開令에 따라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을 떠나게 된다. 살림이 어려워지자 입이라도 하나 덜기 위해서 1950 5월 그녀 나이 17살에 3명의 동생을 돌보며 살고 있던 까막눈의 18살 성석조와 혼인을 한다. 얼마 뒤 한국전쟁은 발발했고 인민군이 삼장면에도 들어왔다.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은 부역을 해야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인민군들은 떠났고 국군이 들어오자 부역자들 색출 작업이 시작됐고 빨갱이로 몰린 남편 성석조는 지리산으로 떠났다. 그 다음 얘기는 뻔하다. 빨갱이 가족이 된 정순덕은 경찰과 국군으로부터 모진 구타와 위협을 받게 되고 이를 견디다 못한 그녀는 남편을 찾겠다며 무조건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이후 상상도 못한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는.... 문제는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인 1954 6명의 빨치산이 남게 되었고 이후 1963 11 12일 함께 있던 남자 빨치산 이홍이는 사살됐고 정순덕은 그녀의 고향인 내원리에서 체포됨으로써 그 긴 빨치산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전향서를 쓰지 않아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 전향서를 작성하여 23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하였다가 2004년 인천에서 사망한 게 마지막 빨치산이라는 정순덕 여인의 일생이다. 이념이 무엇인지 사상이 무엇인지 철학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 여자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휘말려 망친 그녀의 인생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서원을 나서 천평교로 시천천을 건넌다. 좌측으로 덕천강 건너에 있는 덕산을 보면서 도로를 따라 걷는다. 20번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질주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이제 덕산을 빠져나왔다.

수양산

덕천강 건너 수양산이 보이고 진행 방향 좌측으로 예전에는 검음산이라고 불렸던 비룡산554.6m을 본다. 경사가 급한 두 봉우리 사이에 교묘하게 산천재가 들어서 있다. 남명 선생은 이 두 산을 사이에 두고 천왕봉을 볼 수 있는 길지로 그 자리를 택했다고 한다.

남명은 이렇게 수양산과 검암산 사이로 천왕봉을 볼 수 있는 곳에 산천재를 지었다.

 

선생은 그렇게 산천재를 지은 다음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다음과 같은 시를 적는다(題德山溪亭柱).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원컨대 천석들이 큰 종을 보고 싶었네

非大扣無聲 비대고무성 큰 공이로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

萬古天王峰 만고천왕봉 만고불변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은 울리어도 오히려 울리지 않는다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보는 천왕봉이 큰 종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그렇게 큰 종을 울리려면 거기에 걸맞은 큰 공이 혹은 북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는 저 천왕봉. 세상의 모든 근심과 바람을 다 받아주는 천왕봉. 저 천왕봉보다 더 큰 정신세계를 이루겠다는 남명의 결연한 의지에서 지리산과 같은 너그러움과 자애로움을 배우고 싶다.

중태안내

그 강 건너 시무산402.7m을 뒤로 하고 조례산324.1m을 끼고 돌아 중태천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들어가 중태마을로 들어선다. 우선 마을 안내소에 들러 둘레길 조성에 협조를 아끼지 않은 주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확인하고 둘레꾼 스스로 안전 답사를 다짐하는 글을 하나 쓰고 가도록 하자.

비룡산의 옛이름이 검음산이 아닐까?

좌측으로 검음산인 비룡산554.6m을 두고 걷다보면 온통 감나무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 중태마을이나 유점마을 전부가 감나무 골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감을 특히 고동시라 부르는데 일반 감보다 달고 크기는 작은 게 특징이다. 이른바 토종감이다. 그러니 일본에서 들어온 곶감용 감과는 생태적으로 틀린 감인 것이다. 산청감은 단성감이 유명해서 그런지 단성시라고 불린다고 한다. 산청군의 남쪽 끝에 시천면이 있고 그 면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이 중태리 유점마을이다.

중태천의 좁은 계곡을 따라 길이 나 있고 민가들은 그 좌, 우측에 한두 채씩 자리하고 있지만 꽉 막혀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다. 유점마을을 지나면 당산나무와 정자가 있는 놋점마을이다. 이내 시멘트도로는 끝나고 차단기를 지나자마자 바로 산길로 접어든다. 포장길을 걸었던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흙길을 걷는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하지만 임도를 너무 오래 걸었나? 이내 고개라고 보기에는 좀 너르고 평평한 평지 같은 곳이 나온다. 좌우측으로 오르내리는 길도 선명하다. 위태마을(상촌)로 가는 길에 넘어야 하는 이 갈치재가 산청군과 하동군의 군계가 되는 곳이다.

갈치재 정경.

그런데 사실 지금이야 이 중태리가 시천면 소속이 되어 산청땅이 됐지만 1983년까지만 해도 이 중태리는 하동땅이었다. 그러니 예전 중태리 사람들이 이 갈치재를 넘어 하동으로 나가기가 어디 쉬웠겠나? 주민들의 편의를 생각하면 백번 타당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반면 하동 사람들이 덕산장을 보려면 이 갈치재를 넘어야 덕산으로 올 수 있었다니 상당히 중요한 고개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한편 갈치재는 사실 이곳이 아니라 위태마을과 산청의 내공리를 잇는 고개가 맞다. 적당하게 갖다 붙인 꼴이다. 산꾼들 소행일 것이다. 아니면 이 둘레길을 만들면서 이 중요한 고개가 이름이 없어 좀 난감했었을까?

 

이 갈치재는 둘레길꾼들 뿐만이 아니라 산꾼 특히 지맥꾼들에게 주는 의의는 사뭇 각별하다. 이 줄기 가까이 낙남정맥이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맥에서 가지를 친 줄기가 주산~갈치재를 지나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 줄기는 오대주산을 거쳐 시천천과 삼장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다른 한 줄기는 두방산 ~ 비룡산을 지나 중태천과 덕천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진행하게 된다. 지맥꾼이 아니더라도 오지산행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군침 넘어가는 곳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고개 이름이 왜 갈치재인가? 한자로 쓰면 葛峙岾일 것인데 이 ‘갈’의 유래에 대해서는 제1구간 노치마을에서 자세히 봤다.

대나무 숲

그러니 이 갈치재는 낙남정맥 같은 주줄기에서 가지를 쳐 내려오는 가지 줄기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갈치재를 넘어서자마자 빽빽한 대나무 숲 안으로 들어간다. 축대까지 정성스럽게 쌓아 대나무 밭으로 조성해 놓은 곳을 빠져나가니 평범한 소로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을 맞는다.

중택지
위태 버스정류

작은 소류지인 중택지를 지나면 59번 도로가 나오고 이 구간은 조금 싱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위태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제9구간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