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한 내용은 지난번 올린 예습거리를 참조해 주시고....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송정마을에서 오늘 구간을 시작합니다.
이정목은 오미마을까지의 거리가 9.7km라고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기념촬영을 마치고 숲으로 듭니다.
예전보다 둘레길이 더 부드러워진 느낌.
왕시루봉 능선에 접속합니다.
전에는 없던 이정목.
의승재라고 이름도 지어졌습니다.
義勝岾라는 뜻인가?
어쨌든 여기서 우틀하면 554.3봉을 거쳐 832.4봉 ~ 1213.1봉 ~ 왕시루봉1240.2m으로 진행을 하게 되죠.
좌틀하면 석주관칠의사묘로 가게 되고....
어떻게......
숲향...
숲이 주는 향기가 너무 좋아 말도 안 되는 단어를 하나 만들어냅니다.
한검 선사님이 오늘은 아주 예쁜 모자를 쓰고 오셨습니다.
석주곡수도 건너고.....
그리고 여기서 우리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는 둘레길을 안내하고, 다른 하나의 이정목은 '백의종군길'을 안내합니다.
잠시 햇볕 속으로....
부드러운 길이 꼬불꼬불 나 있고....
기억에도 없는 안전시설물들......
고사리에 취나물.....
멀리 호남정맥을 가늠해 봅니다.
여기서 이른 점심을 먹습니다.
곧 막걸리 타임이라는 말씀.
참외 안주에 지평 막걸리로 배를 채우고....
하지만 아름다운 분들과의 자리에 비해 너무 짧은 점심시간.
막걸리를 세 통을 준비했건만 우리 조의 주량에는 턱도 안 되는 양입니다.
다음에는 뒤풀이로 확실하게 분위기를 맞춰보죠.
보무도 당당한 강산 형님.
"현오! 자네 다음 구간에도 나오는 건가? 자네가 온다면 막걸리를 담아서 가지고 오려고 그러네."
그 한 마디에 다음 구간은 무조건 "참석"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
섬진강.
그리고 끝의 오산과 그 앞줄의 삼태산과 오봉산이 오늘 산행의 줄거리를 다 설명해 줍니다.
정말로 멋진 분들.
천천히 걸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눕니다.
좌측으로 계족산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계족산이요?
대전에 있는 계족산이요?
송정마을 출발 후 약 2.9km 정도 걸으면 기둥하나로 세워진 오두막과 통나무 벤치시설을 만난다. 섬진강 건너 유명관광사찰 사성암을 품고 있는 오산과 주변 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송정리를 빠져나와 파도리로 들어선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왕시루봉으로 이어져 663.6봉에서 뚝 떨어진 곳이 이 파도마을이다. 강 건너에는 백운산과 계족산을 바라보며 동서 양쪽으로 능선이 있어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이다.
가까이 섬진강을 건너는 간전교가 보이고 강 건너 간문천이 섬진강으로 합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좌측이 광양시 간전면이고 우측이 문척면이며 그 면계에 쫑긋 튀어나온 산. 계족산702.8m이다. 지금의 구례군지에 해당하는 봉성읍지를 보면 “계족산은 문척면과 간천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라고 하면서 “석벽의 모습이 닭의 벼슬을 닮았다. 좌우로 나뉜 줄기가 닭의 발과 같은 고로 이름이 생겨났다.”라고 적고 있다.
<사진 3> 계족산. 남진하여 호남정맥으로 이어진다.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에 계족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몇 있다. 아무래도 계족산이라고 하면 갑천(식장)지맥을 하면서 지나는 대전의 계족산424m이 대표적이다. 이 계족산의 유래를 보면 “대전광역시 동쪽에 있으며,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 나갔다.”하여 계족산이라는 말도 있고, “지네가 많아 이를 퇴치하고자 닭을 풀어놨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들린다. 이렇게 설이 난무하다는 것은 어느 것도 맞는 얘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 꺼림칙하다.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리니까 말이다.
계족산 소고
이 계족산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미 제14구간에서 도솔산인 이영규의 얘기를 빌어 자세히 알아봤었다. 그러니 계족산이 닭발 모양을 닮은 것이라는 뜻은 원래의 말과 무관하다고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위와 같은 뜻을 알고는 사용하여야 할 것 같다. 즉 우리나라의 계족산은 이런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지 반드시 산의 생김새와는 상관이 없을 거라는 얘기다. 참고로 범어梵語로 우리말의 '산'이 giri 즉 '지리'로 발음되는 것이나 가야국 시절 칠불사의 허황후의 설화나 범왕리라는 지명이 불교남방전래설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도 벌써 알아봤다.
저 문척면의 지세는 계족산 뒤로 갈미봉656.4m과 달뜨기재봉 즉 월출산766.2m과 어울려 사뭇 의미 있는 산세가 된다, 즉 갈미봉이 할애비산이 되고 삽재봉597.3m이 주산이 되어 오산鰲山530.8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좌청룡이 되고 삽재봉에서 우측으로 늘어진 능선이 우백호가 되는 형국이다.
계족산이 나오고 달뜨기봉 즉 월출산이 나왔으니 이쯤 되면 이들의 어원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국어학적으로 ‘ᄃᆞᆯ’은 ‘높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지금은 쓰이지 않고 있다. 굳이 지금 쓰고 있는 용례를 보자면 ‘매달다’나 ‘키다리’ 같은 말들을 들 수 있겠다. 이 ‘ᄃᆞᆯ, 달’이 지명에 쓰이면서 ‘높다, 크다’라는 말 이외에 ‘고을, 성城’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그러니 ‘달동네’라고 하면 지대가 높은 ‘산동네’를 뜻하는 말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달천, 달내‘ 등도 높은 산에 있는 물줄기로 이해하면 되겠다.
문제는 이 ‘달達’이 하늘에 떠 있는 달로 보아 ‘月’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그 예가 월출산이나 월악산이 되며 월봉산도 같은 이유로 생기게 된 산 이름인 것이다. 그러니 ‘달나뫼’나 ‘달래뫼’가 월출산이 된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딸뜨기봉’은 오히려 월출산이었던 이름을 우리말로 좀 부드럽게 순화시킨 모양새다.
<사진 4> 뒷줄 우측 끝의 오산과 그 앞줄의 삼태봉과 오봉산.
그런데 여기서 ‘달’이 발음이 비슷한 닭鷄‘으로 쓴 경우다. 풍수지리학에서는 ’산山‘을 ’용龍‘이라 하기 때문에 계룡산鷄龍山의 경우도 그저 ’높은 산‘ 정도의 의미였지 결코 ’금계포란형‘이니 ’비룡승천형‘이니 하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즉 이 산 이름을 보고 지어낸 이름일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鷄'는 우리말 '달'을 나타낸 글자로 국어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계족산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여 ‘닭발’ 혹은 ‘닭다리’ 모양을 한 산 나아가 ‘닭 벼슬’ 모양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원송마을 임도에 내려서서 31-1 이정목의 지시를 받는다. 석주관 삼거리부터 계속해서 이정표는 두 개다.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와 겹치기 때문이다. 한층 넓어진 숲속이 소로를 지나면 전원주택 택지 공사가 요란한 파도리로 들어선다. 이제 구례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좌측으로는 오산541.7m과 그리고 서시지맥이 구례시가지를 에워싸고 있으며 지맥 아래 구례의 진산 봉성산165.6m이 뚜렷하고 그 사이로 섬진강의 흐름이 힘차다.
파도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수량이 풍부한 개울을 나무다리로 지나노라니 왕시루봉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이 보인다. 조망이 터진 좌측으로는 계족산으로 올라가는 능선과 우측의 오산이 보일 때 그 앞에 누에처럼 누운 낮은 한 줄의 능선이 보인다. 바로 오미리의 운조루와 관련 있는 오봉산174.8m과 삼태봉207.6m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340쪽 이하
계족산 좌측으로 간문천이 섬진강에 합수되는 모습을 볼 수 있군요.
계족산 맨 우측 봉우리가 사성암이 있는 오산.
그 오산 앞의 낮은 줄기가 운조루와 관계가 있는 삼태산과 오봉산입니다.
아카시아 향내를 맡으며 노래도 한 곡 뽑아들 보시고....
아카시아로 마술을 부리시나.....
가을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죠?
어느덧 파도리.....
무슨 꽃일고?
구산리의 문수저수지.
토지천 상류의 문수리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일부는 인공수로를 통해 오미리로 나눠주게 됩니다.
이 문수리는 지리산을 처음 연 문수보살과 연결시켜야 하고....
멀리 구간 도착지인 오미리 일대와 문수저수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여수지라고도 부르는 문수저수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산모퉁이 끝에 문수사가 나온다. 문수사로 오르는 길은 토지천과 함께 한다. 이 문수사도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사찰이다. 연곡사와 함께 의병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던 곳이라 하여 몇 번의 폐사와 중창을 거듭했다.
547년(백제 성왕25년)에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하는데 이 사찰은 만수사리 즉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한다. 이 문수사는 반야봉과 나누어 얘기할 수 없다. 즉 차와 함께 살았기에 다송자茶松子라고도 불리는 금명 보정(錦溟 寶鼎, 1861-1930)의 지리산문수암모연문智異山文殊菴募緣文을 보면 “암자는 제일봉의 불묘佛廟 아래에 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면 반야의 현묘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것이며, 중생들을 오랫동안 먹여 살릴 복전이로다.”고 하였다.
여기서 불묘란 지리 서쪽의 제1봉이니 제4부 지리종주 중 반야봉을 지나면서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어쨌든 문수보살이 반야봉에서 설법을 행하면 그 법문이 왕시루봉에 부딪쳐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이는 곳이 바로 이 문수사 터여서 여기에 문수사를 건립한 것이다. 연기조사가 후에 반야봉에 들어 묘향대에 토굴을 짓고 수행을 하였다는 것이 다 이런 뜻이 있었던 것이다.
- 졸저 전게서 344쪽 이하
아....
지리산이란......
우측 천황재.
문수저수지와 삼태산 그리고 오봉산.
내죽교를 건너면서,
내죽마을로 들어서고....
아!
슈퍼가 있었지.....
그때 캔맥주 하나를 마셨었지.
후미 몇 명이 캔맥주를 따서 과자와 함께 입가심을 합니다.
문수저수지의 물을 오미리로 보내는 인공수로.
백두대간과 하죽을 연결시키다니...
대단한 발상의 전환입니다.
예전에 지날 때 도로공사 중이었는데....
운조루 앞 연당.
운조루 대문 앞마당 건너편에 연당蓮塘이 있는데 원래는 약 200평 규모였으나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있다. 강 건너 오봉산174.8m과 삼태봉207.6m이 화산火山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해 만든 것이고 또한 풍수지리와도 관련이 있다고 하니 그 내용이 궁금해진다.
풍수지리라! 산세나 지세 그리고 수세 같은 자연을 판단하여 이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학문이 바로 풍수지리 아닌가? 우리의 전통 지리학이다. 이 풍수지리에서 땅을 해석하는 방법 중 금환락지형이라는 게 있다. 한자로 쓰면 ‘金環落地’일 것이니 곧 이 일대의 땅들이 여인들이 쓰는 가락지 그중에서도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이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가락지는 여인네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정표로서 아기를 낳을 때나 성행위를 할 때만 빼놓는 것이니 곧 '출산', '생산'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그러니 결국 이 일대가 풍요와 부귀가 마를 날이 없다는 곳인 천혜의 길지吉地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당자리가 바로 이 운조루가 있는 곳인데 다만 맞은편 섬진강 건너에 있는 오봉산과 삼태봉이 화산火山이어서 이 화기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이 연당을 만들게 된 것이란다.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다.
- 졸저 전게서 344쪽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공사 중'이라 운조루의 참맛은 구경도 하지 못합니다.
대문 앞의 이것도 그저 모조품.
원래는 부엌에 이런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죠.
되돌아 나와 내죽마을을 지난다. 대나무竹와 토지천川의 시내가 있는 곳이라 하여 내죽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측 수로를 따라 걸어 하죽마을을 지난다. 이 수로는 토지천의 풍부한 물을 오미리의 너른 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만든 인공수로이다. 노고단에서 성삼재로 갈 때 노고단의 풍부한 물을 화엄벌로 돌리기 위한 무넹기와 같은 원리이다. 너른 오미벌을 보고 걷다 보면 우측으로 전통 한옥집이 보인다. 운조루다. 1776년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안동 출신 류이주가 지은 99칸 목조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다.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이 운조루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곳이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즉 시쳇말로 ‘가진 자의 의무’를 보여준 곳이라는 것이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타인도 열게 하여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 하라’는 이 글귀는 이 운조루의 쌀독에 적힌 글이다. 류이주 선생은 쌀독 아래에 구멍을 내고 마개에다 이런 글귀를 써 놓았던 것이다. 가난한 이웃들이 와서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가 먹을거리를 해결하라는 뜻이다. 이는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과 궤를 같이하는 나눔의 삶 곧 베풂의 정신을 알려주는 예다.
- 졸저 전게서 343쪽 이하
다시 한번 연당을 보고,
오미리의 너른 논밭도 봅니다.
오미제와 오산.
그리고 앞줄 좌측의 삼태산207.5m과 우측의 오봉산174.8m을 당겨봅니다.
뒤를 돌아보니.....
왕시루봉입니다.
가고 싶다.
바람이셉니다.
왕시루봉을 배경으로....
진짜 멋집니다.
한 보따리 들고....
좌측 능선은 월령봉 ~ 형제봉 ~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능선.
고남 형님이 남원으로 내려온 기념으로 걸었던 곳이죠.
하이킹님.
기념촬영 하나 하시고....
아쉬워서.....
우틀하면 노고단으로.....
그 능선의 날머리.
무슨 나무인가?
사도리.
沙圖里라는 한자어에 착안하여 모래그림 마을이라고요?
사도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그러고 보니 이 동네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군인 계급 같은 마을 이름의 근원은 이 동네 이름이 사도리沙圖里라는 데 있다. 안내판에서 마을 유래를 들어보니 사도리는 모래그림 마을이라고 써 놨다. 참으로 성의 없는 글이다. 그저 한자를 그대로 풀어놓은 것이다. 또 다른 얘기는 도선국사가 어떤 기인에게 풍수지리를 배울 때 모래를 이용하여 산세도를 만들어 익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럴듯하다. 다른 이도 아닌 도선국사까지 끌어들였고 국사國師의 주특기인 풍수지리까지 동원했는데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다. 모래를 이용했다고 하니 근처 섬진강의 모래일 것이라고 먼저 지레짐작을 해버리면 이도 수긍할 노릇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진 6> 수정을 요하는 하사마을 안내판.
생각건대 이 하사마을이나 윗마을인 상사마을 모두 뒤에 있는 지리산 자락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그러니 그런 형태의 옛말이 바로 '몰'이었다. 그 '몰'이 몰>모리>모이>'뫼'로 변하게 되어 지금의 뫼=산이 된 것이다. 그러니 그 '몰'의 '안'에 있는 마을은 ‘몰+안'이니 이것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발음이 바뀌어 '모래'가 된 것이고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억지로 沙 혹은 砂로 바꾸어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예가 ‘모래내’ 혹은 ‘모래재’, ‘모란시장’ 같은 지명이다. 서울 홍제동이나 인천 남동구 간석동의 ‘모래내 시장’ 그리고 평창의 ‘모래재’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모래재의 경우는 ’몰 + 애 + 재‘ 즉 ’산에 있는 고개‘ 정도의 의미이며, ’모래내‘의 경우는 그저 ’산마을‘이라는 뜻에서 ’몰안‘으로 불리던 것이 발음의 편의상 ’몰안 〉 몰안애 〉 모라내 〉 모래내‘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또한 산을 다니면서 많이 볼 수 있는 ‘사치재’, ‘사치’ 등도 다 이런 형식의 의미를 억지로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이렇게 무리하게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곳의 지명이 ‘모래마을’인 것은 사실 이전의 ‘몰애마을’의 변형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것이 ‘사촌沙村’이 된 것이고 윗마을이니 ‘上沙村, 아랫마을이니 ’下沙村‘이 된 것이다. 고려 때의 이곳 지명이 사봉촌沙峰村이었다는 사실이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유래비에도 이곳의 옛 지명이 사봉촌이었다고 표기되어 있다. 또한 도선국사는 연기조사煙起祖師로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순천 동리산과 광양 백운산 자락에 있는 백계산의 옥룡사 등이 떠오르는데 갑자기 이곳이 풍수지리의 발상지라고 하니 당황하게 된다. 지명에 관한 한 관공서의 횡포가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 졸저 전게서 377쪽 이하
그림 같은 쉼터.
이제 거의 마무리를 할 시간이군요.
효자들이 유난히 많은 이곳.
하사 마을에서 마무리를 하고,
화엄사 사하촌으로 자리를 옮겨 오늘 산행의 마무리를 합니다.
다음 구간 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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