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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지리산 둘레길

17구간과 17-1 구간을 교묘하게 섞어 진행하다.

서시천변의 양귀비밭

이제 '지리산 둘레길 이어가기'도 끝물입니다.

19개 구간 중 16구간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구간은 세 구간.

오미마을에서 광의면과 산동면을 지나면 처음 시작했던 남원의 주천면으로 들어서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의 17구간은 주의를 요하는  구간입니다.

운조루 앞 삼거리에 있는 이정목

즉 토지면 오미리에서 광의면 온당리까지의 17구간은 화엄사를 거쳐 방광마을 ~ 온당리를 잇는 구간과 토지면 오미리에서 구례읍 봉동리 ~ 둘레길 지원센터 ~ 온당리를 잇는 구간으로 대별됩니다.

그러니 이 구간을 어떻게 진행하느냐는 것은 온전히 진행자의 주관에 달렸습니다.

저는 2018. 3. 이 구간을 교통상의 편의를 고려하여 17구간과 17-1구간으로 두 번에 나누어 진행했었습니다.

해밀에서는 이 구간을 운영의 묘를 살려 구례읍 섬진강변 공사구간을 고려하여 역사적 가치가 있는 용호정을 들르고는 구례읍내 구간은 점프하여 지리산둘레길 지원센터가 있는 구례읍 동북리에서 시작하여 광의면 온당리에서 다시 17-1구간을 역으로 이어 881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방광마을에서 종료한다고 하는군요.

그러니 산너울 대장님은 구례군에서 시행하는 제방공사 구간인 오미리 ~ 지원센터 구간은 빠뜨리는 대신 17-1구간 중 지난 구간에는 오미리 ~사도리의 하사마을까지 진행을 하였으니 17-1구간도 방광마을 ~ 하사마을 구간만 빼먹은 아주 교묘(?)하게 두 구간을 해치우는 솜씨를 발휘하십니다.

고육지책이라 여겨집니다.

정시에 수지구청을 출발한 버스는 여산 휴게소에 잠시 쉬었다가,

바로 용호정으로 들어갑니다.

예전 용호정의 모습

그러고는 용호정이라는 누각이 나오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달래기 위해 뜻있는 분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지었다고 한다. 나라를 빼앗겼는데 왜 할 일 없이 이런 정자를 지었는지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알고 보니 매천 황현 선생을 기리고자 그 제자들과 뜻있는 이들에 의해 ‘매월음사梅月吟社’를 결성하여 천은사, 화엄사를 돌며 봄, 가을로 시회를 열어 선생을 추모하다가 1916년 이 용호정을 건립하여 운용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유명무실해졌다고 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제  쪽

예전 용호정의 모습은 간곳이 없어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수량이 부쩍 늘어난 섬진강 너머로 오산을 봅니다.

기념 촬영 등을 하시고....

돌아 나오며 마산천을 건너는 다리를 당겨봅니다.

서시지맥과 지리산 능선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둘레길 지원센터에서 나와 지리산을 축소시킨 미니어처 공원으로 들어갑니다.

길상봉의 노고단 정상석을 시작으로,

날나리봉(삼도봉)을 지나,

형제봉,

묘봉,

영신봉,

연하봉을 차례로 지나,

천왕봉까지 진행합니다.

천왕봉까지 오르시느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촬영하시는 분,

모델이 되어주시는 분.

각기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들을 수행하시는 거 같습니다.

이제 다시 둘레길로 들어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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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천.

한자로는 서시천西施川이라고 쓰지만 예전에는 徐市川으로 썼다고 합니다.

제가 제주 올레길을 할 때 썼던 글 하나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서복공원이라.....

서복이라는 이름 대신 서불徐市이라고 써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기서 市는 '불'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즉 시장이라는 음이외에 '슬갑 불'이라는 음이 또 하나 있는데 이 서복이라는 인물의 이름이 사실은 서불이라는 것이죠.

이 서불은 지리산과도 관련이 있는 인물로 중국 진시황과 관련되어 있죠.

제 블로그에서 글을 하나 가져오겠습니다.

지리산 심마니능선을 걸으며 썼던 글입니다.

심마니능선이라고 했으니 약초꾼이 연상됩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중국 진시황제와도 연결을 지을 수 있습니다.

BC 221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삼신산 중 하나인 대방국 남쪽의 '방장산'에서 불로초를 구해올 것을 명합니다.

그때 그 파견대장이 서불徐市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영원령에서는 남원부사로 임명된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이 꿈에도 그리던 '두류산 유람'에 올라 자못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들뜬 마음의 그 일행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산꾼들을 만난 어우당은 "나는 올봄에 용성(남원)부사로 부임한 응문이라는 자를 쓰는 어우당 유몽인이라 하오. 나는 두류산을 유람하는 오랜 숙원을 풀고자 순천 수령 유영순, 진사 김화, 생질인 순창 사람 신상연, 신제 등과 유람 길에 오르게 된 것이오. 본시 두류산은 방장산이라 하잖소? 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구句가 있고, 그 주석에 '방장산'은 대방국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용성이 대방이고 두류산이 곧 삼신산 아니겠소! 일찍이 진시황과 한무제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하였는데 우리들은 이렇게 앉아서 이를 구경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오!"라는 지리산 예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90쪽

노랑.

초록.

서시천.

https://youtu.be/UiwviFDjbDg

징검다리.......

양귀비 밭에서 포즈를 취해주신 고문님과 총무님.

참으로 스마트하신 두 분.

많은 걸 배웁니다.

손에 손잡고.....

예전에 이 길을 걸어갈 때 바로 이곳에서 우연히 저의 은사이신 '신산경표'의 박성태 선생님을 뵈었었는데.....

양귀비와 코스모스, 서시천 그리고 지리산.

양귀비기 살아 있다면 한국의 김지미와 닮았을 거라나 뭐라나.....

배 좀 집어넣고.....

고문님.

비가 오나이다.

12시가 가까워오니....

주민 쉼터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기흥주조 대표이신 강산 형님이 빚어온 특제 막걸리를 마시면서 관매도를 그립니다.

그나저나 나무지게님이 불참으로 아마도  '거문도의 203호 사건'은 없을 거라는 전망이 우세해집니다.

한검선사 님의 역할도 그만큼 줄어들을 것 같고......

혹시 이번에는 독수리 형님이 진면목을 보여주시는 건 아닌가?

막걸리 한 잔 하고 가자고 하시는데 이미 강산표 막걸리를 입에 대었으니 다른 막걸리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세심정을 지나 구만제를 지납니다.

이 구만제는 서시천의 물을 저장하여 약간의 전기도 생산하는 곳입니다.

 

우측 능선의 정상이 까치절산295.7m이고 우측으로 더 진행하면 지초봉601.6m이 나오는데 다음 구간은 그 지초봉 옆으로 둘레길은 이어질 겁니다.

그러고는 간미봉728.4m ~ 시암재로 이어지고는 백두대간의 종석대와 연결이 되겠죠.

구만제를 지난 대원들이 우리밀 연구소를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온당리로......

잠시 후미 그룹을 기다립니다.

오늘은 쑥 뜯기!

독수리 형님.

제가 Eagles의 음악 중 Desperado를 제일 즐겨 부릅니다.

이 온당리 온동마을에서 17구간을 마무리하고 17-1구간은 역逆으로 진행합니다.

비가 조금 더 강해집니다.

예술인 마을 좌측으로 남악사터를 지납니다.

 

난동마을에서 방광마을 가는 길은 예술인 마을이라는 좀 특이한 곳을 지나쳐야 한다. 전통 농촌 마을을 걷다가 만나는 예술인 마을은 전원주택 단지를 넘어 카페촌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고급스러운 주택 마당에 세워놓은 조각상이나 조형물들은 지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우측 마을은 당동堂洞 마을이다. 남악사南嶽祠라는 사당祠堂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남악사라!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라고도 불리는 남악사의 남악南嶽은 지리산의 또 다른 옛 이름으로 신라시대에 붙여졌다. 신라는 그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국가의 제사권 장악을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통치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명산대천에 사당을 세워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기도처를 국토를 수호하는 다섯 개의 산 즉 오악에서 지내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 북악은 태백산, 중악은 팔공산 그리고 남악은 이 지리산으로 정했으니 이는 산악숭배사상 즉 산신신앙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남악 즉 지리산에서의 그 제사 터는 서부 지리를 책임지고 있는 반야봉 바로 아래 있는 봉우리였다. 언제부터인가 길상봉으로 불리던 봉우리이다. 이곳은 선교사 유적지와 이에 따른 부대시설의 설치, 빨치산과 한국전쟁 그리고 무분별한 산림자원 채취 그리고 군부대 주둔 등으로 자연 훼손이 극심한 곳이었다. 최근 관리 공단에서는 나무 데크로 탐방로를 만들어 훼손을 최소화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지금은 이도 모자라 성수기에는 ‘출입 허가제’ 카드까지 들고 나와 하루 출입할 수 인원을 정해 놓고 복원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길상봉의 노고단은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기도처였다

노고단을 본다. 구례읍에 들면서 보이기 시작한 노고단은 이곳 당동마을에서는 간미봉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초봉으로 올라 간미봉 루트를 타면 종석대와 노고단을 보면서 의외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

 

사실 산신신앙은 도교와 연결이 된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산은 우리에게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었고 생산의 원천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 좌정하고 있는 곳. 그곳이 산이었고 그러니 산신이었다. 그래서 산 정상에 제단을 만들고 제를 지내거나 산 입구에 서낭당을 만들어 치성을 지내는 게 이런 문화와 무관치 않다. 이런 산신이 돌아가는 곳도 산이니 하물며 인간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산소다.

이런 일이 개인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지방 단위로 규모가 확대되자 이는 백성들 개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시행이 되게 되었다. 고려 우왕때 왜구가 남해안을 침범하자 이 남악사에서 기도를 하여 산신의 도움을 받아 왜구를 격퇴시켰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그러니 신라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노고단에서 제를 올렸다 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조 2년(1456) 지금의 산동면 좌사리 당동마을로 내려와 제를 지내다가 언제인가 현재 터가 남아 있는 광의면 온당리에서 왕을 대신해 전라도 관찰사가 국행제國行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원읍지인 ‘용성지’ 등 여러 기록에 나온다.

 

그러던 것이 1908년 일제는 자신들의 신사神社와 충돌한다고 생각했는지 국행제를 폐지하면서 결국 폐사되어 현재는 이곳에 그 터만 남아 있는 것을 1969년 12월 전라남도의 지원과 구례군민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화엄사 일주문 오른쪽에 10여평 규모의 남악사를 신축하여 매년 4월 곡우에 남악제례를 지내고 있다. 그러니 현재의 남악사는 예전의 그 남악사가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상 최초로 국가제사를 지냈던 지리산신사의 다른 이름이었다.

한편 ‘두류전지’의 저자 김선신(1775 ~ ? )은 지리산에 산신제를 올리는 곳인 남악사가 남원(엄밀히는 남원부 소의방)에 있는 까닭에 의문을 품었다. 산의 대세가 영남의 우측으로 비스듬히 들어가 남원지역과 서로 등을 지고 떠나는 형상인데 어떻게 남원에서 제사를 주관할 수 있냐는 얘기였다. 허나 “지리산의 흐름이 동쪽으로 흘러가지만 실제로는 지리산의 산세가 남원의 손바닥 안에 쥐어져 있어 동쪽으로 몰아내는 형국”이라고 하면서 지리산의 지세地勢에서 그 답을 찾았다.

 

 - 졸저 전게서 362쪽 이하

 

국제신사인 남악사와 사설신사인 성모사

지리산 신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즉 나라에서 주관하는 국제신사國祭神祠와 민간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설신사私設神祠 등이 그것이다.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는 지리산신이 백성에게 공덕을 베푼 것에 보답하는 일종의 답례 성격의 제사였다. 이는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제사가 주主이기도 했지만 반면 나라에 재앙이 생기면 기우제 · 치병제 · 여제厲祭 등을 부정기적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사설신사에서 무격巫覡을 통하여 성모천왕에게 비손이나 굿과 같은 무속 의례를 올렸다. 성모천왕의 신통한 영험으로 개인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었던 것이다.

이럴 때 그 국제신사가 남악사였으며 사설신사는 성모사, 제석당, 용유당 등이었다. 또한 초기 신라시대의 남악사에서는 박혁거세이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모셨겠지만 신라가 망하고 불교나라인 고려로 넘어가면서 남악사는 ‘智異山之神’을 모시게 됐고 천왕봉으로 간 성모는 위숙황후나 마야부인이 되어 성모사를 지키게 됐을 것이다. 이렇듯 지리산 성모신앙은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을 바탕으로 발전했고 전통신앙과 결합하면서 산악숭배신앙과 밀착하게 된다. 다만 16세기로 들어오면서 당시 중봉이라고도 불리는 제석봉에 제석당이 생기게 되는데 이때 제석당에서 모시는 신은 천신으로 이 천신은 남자 신이었다. 이는 어쩌면 조선사회가 철저한 가부장적 유교 사회임을 시사한다 하겠다.

 

 - 졸저 전게서 426쪽 이하

안내판.

무언가 발굴 작업이 한창입니다.

이제 마을을 벗어나 온전하게 숲으로 듭니다.

무덤.

제가 지날 때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제는 빈 집이 되었군요.

초록과 노랑.

2018. 03. 22. 지나면서 걸어놓은 표지띠가 아직 남아 있군요.

사실을 이야기해 드립니다.

지금은 쓰지 않고 있는 표지띠입니다.

정말 멋진 길.

노랑, 빨강, 파랑.....

공서현장을 지나고.....

천은천을 건너,

참새미마을이라고도 불리는 방광마을로 들어섭니다.

폰을 들이대자 바로 포즈를 취하시는 독수리님.

오늘 둘레길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구간은 온당 마을부터 시작하여 지초봉 고개를 넘어 산수유마을로 들어서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