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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11

백두대간 2. intro....

백두대간! 나를 찾아가는 뜨거운 걸음

 

, 근데 조선 산맥이라니? 형은 산맥이라면 질색하잖아? 그리고 산맥이라는 개념은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만든 이름 아니야?”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장 감독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많다. 직업 탓이라고 한다. 항상 야외로 촬영을 많이 나가야 하는 까닭에 건강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다. 평소 마라톤을 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동행의 서(): 쉰의 문턱, 백두대간에 몸을 던지다.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여정, 그 거대한 백두대간의 능선 위에 장 감독이 동행의 첫발을 내딛겠다는 것이다. 쉰을 넘긴 나이,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보다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앞섰던 게 사실이란다. 하지만 베테랑인 필자가 곁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함께 가보자.”라는 그 담백한 한마디가 장 감독의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자존심에 불을 지폈던 것 같다. 그는 이번 산행을 단순한 종주가 아닌, 네 가지 간절한 이유가 담긴 자기 구원의 길이라 말한다.

살아있는 지도를 따라 걷는 자의 시선

 

첫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아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그 나이가 되도록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숨 가쁘게 살아왔다. 이제는 거대한 자연의 품 안에서, 능선 위를 거칠게 내몰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고 싶어 한다. 지도 위에 그어진 무미건조한 선이 아닌, 살아 꿈틀거리는 유기체로서의 백두대간을 온몸으로 걸으며 자신의 원형을 되찾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둘째는 자기 안의 야성을 다시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의지로 한계를 돌파하고 완수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폭우와 눈보라, 때로는 숨 막히는 된더위를 마주하며 거친 산길을 오르내리는 과정은, 그가 아직 뜨거운 열정을 품은 현역임을 확인하는 치열한 시험대로 삼겠다는 것이다.

셋째는 신뢰하는 이와 성취를 공유하는 기쁨이란다. 장 감독에게 필자의 등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만 보의 발걸음이 정직하게 새겨진, 살아있는 지도였다. 혼자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길이지만, 필자가 먼저 목격했던 대간의 경쾌한 흐름과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이제는 곁에서 함께 나누고 싶다는 갈망이 그를 산으로 이끌었다.

마지막은 지혜를 구하고 그것을 삶에 투영하는 배움이라고 한다. 그는 필자가 평생 쌓아온 산줄기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곁에서 겸허히 배우고자 한다. 산행 중에 얻은 그 값진 가르침들을 야금야금 제 것으로 만들어, 본인의 작업 세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대입시키겠다는 포부다그렇게 장 감독은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꾸며, 인생의 후반전을 향한 가장 뜨거운 첫걸음을 내딛으려 한다는 것이다.

 

산맥(山脈)을 지우고 산줄기(山線)를 새기는 걸음

 

왜 '산맥'이 아닌 '산줄기'여야 하는가? 또 왜 남진(南進)이 아닌 북진(北進)인가!

 

장 감독이 굳이 필자와의 동행을 고집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그동안의 산행은 ‘얻는 것 없는 소모’에 가까웠다. 산악회를 따라 들머리로 들어가 기계적으로 걷다 날머리로 빠져나오는 방식으로는 백두대간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는 갈증이 컸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기회에 대간과 정맥, 지맥으로 이어지는 우리 땅의 뼈대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왜 ‘산맥’이 아닌 ‘산줄기’여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에 답을 찾고 싶어 했다.

장 감독이 묻는다.

형은 왜 백두대간을 걷는 거야? 그리고 왜 남진이 아니고 북진을 고집하는 거지?”

필자는 그에게 백두대간 북진 종주가 갖는 네 가지 철학적 의미를 건넸다.

첫째, ‘산맥이라는 박제된 개념을 넘어 인문·지리적 뿌리를 찾는 과정이야. 우리는 우리의 줄기를 학창 시절 일본식 지질 체계인 태백산맥, 노령산맥 등 산맥을 배웠지. 하지만 나는 이를 직접 걸으며 산줄기라는 올바른 개념으로 회복하고자 해.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대명제 아래, 백두산을 뿌리로 하여 지리산에 이를 때까지 나뭇가지처럼 퍼져 있는 나라 안의 모든 산줄기와 물줄기를 품는 이 백두대간이라는 거대한 산줄기가 양옆으로 갈라놓은 언어와 풍속, 기후를 어떻게 갈라놓았는지 몸소 체득하는 것이 이번 여정의 첫 번째 목적이야.

둘째, 우리 국토만이 가진 연속성의 미학을 발견하는 일이야.

단순히 봉우리 하나를 정복하고 내려오는 일회성 산행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에서 시작해 설악산의 날카로운 바위 능선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고산준령을 하나의 선으로 잇는 점 잇기(Connecting the Dots)’의 과정이지. 끊어지지 않는 이 발걸음으로 국토의 생명력을 증명하고 싶어.

셋째, 복잡한 일상을 벗어난 자아 성찰의 시간이야.

실거리 700km를 묵묵히 걷는 고통의 시간은, 결국 나 자신과 깊게 대화하는 시간으로 치환되지.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은 곧 대간이 주는 선물이기도 해.

마지막으로, 북진으로 그것을 행한다는 것은 분단의 단절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통일을 꿈꾸는 예행연습이야. 내가 북진을 고집하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아픈 이유이기도 해. 지리산에서 출발해 북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결국 진부령이나 향로봉의 철책선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어. 그 막막한 단절의 현장에서 분단의 아픔을 실감하고, 언젠가 백두산까지 이어질 완전한 백두대간을 염원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오늘 북으로 향하는 진정한 이유야.

장 감독! 우리가 오늘 딛는 이 한 걸음은 아름다운 이 나라를 온전히 이해하고, 언젠가 다시 이어질 그 길을 미리 준비하는 예행연습이라네.”

이렇게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산맥은 땅 아래의 기록이지만, 산줄기는 땅 위의 역사다. 우리는 오늘 그 역사의 끊어진 마디를 잇기 위해 북(北)으로 향한다."

 

연하(烟霞), 안개 노을 속에 피어난 국토의 뼈대

 

백두대간의 끝은 어디인가? 산자분수령과 천왕봉의 위상

 

산행에 앞서 장 감독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을 만나야 멈추는 법인데, 왜 '산경표'백두대간이 강이 아닌 지리산에서 끝난다.’라고 기록했느냐는 의문이었다. 지리산의 어느 봉우리가 진짜 끝점이냐는 그의 물음은 백두대간의 정체성을 묻는 묵직한 화두였다.

아주 어려운 질문이고 문제의 핵심이기도 해. 논점을 나누어 비교해 보기로 하자!“

 

먼저 과학적 원칙에 충실한, 이른바 '지리 확장론(地理 擴張論)‘을 보자. 조선 후기 실학자 김선신은 그의 저서 '두류전지'에서 지리산을 백두산의 맥이 바다를 만나 멈춘 산이라 정의했다. 현대에 이르러 박성태 역시 그의 명저 '신산경표'를 통해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대간의 맥은 지리의 영신봉에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남해의 금오산을 거쳐 노량 바다 앞에서 갈무리되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라는 원칙에 가장 충실한 해석이다.

이에 대해 왜 천왕봉인가!’라는 인문학적 실체를 가지고 지리산이 우리 민족에게 갖는 상징성에 접근하는, 이른바 전통론(傳統論)이 있다. 즉 첫째, 지정학적 위상으로 지리산은 영·호남을 아우르는 거대한 산군(山群)이자 섬진강과 낙동강 수계를 가르는 분수령이라는 점, 둘째, 문화·종교적 성지로서의 지리산은 예나 지금이나 불교의 방장산, 도교의 삼신산, 그리고 수많은 토속신앙이 깃든 어머니의 산으로 인식됐고 사실상 또 그러한 점, 셋째, 선비 정신의 상징으로서의 지리산은 남명 조식이 천왕봉을 보며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라는 절개를 배웠듯, 지리산은 단순한 산이 아닌 우리 민족사의 축소판이라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러한 장엄한 위상을 갖춘 천왕봉을 배제한 채 바다를 찾아가는 산줄기는, 우리 정서 속에서 마치 이빨 빠진 동그라미처럼 공허할 뿐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팽팽한 주장에 필자는 전통과 원칙의 조화를 중시하는 '전통론'에 한 표를 던진다. 비록 '지리 확장론이 지리적 원칙에는 더 부합할지 모르나, 여러 문헌적 근거와 민족적인 정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산꾼이 추호의 의심 없이 천왕봉을 대간의 시작과 끝으로 삼아온 것은 이미 하나의 관습법이 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 천왕봉에서 마침표를 찍는다.”라고!

 

백두대간의 끝점은 지리산 천왕봉이다!

 

사실 이 해석은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대한 목적론적 예외이다. 나라의 모든 산줄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근본이 대간(大幹)인 만큼, 민족의 영산인 천왕봉에서 그 기운을 응집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산인 북쪽의 최고봉 백두산에서 시작해, 어머니 산인 남쪽의 최고봉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대간의 긴 여정을 마치는 것. 이것은 단순한 지리적 연결을 넘어선 신의 조화이자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조석필백두산이 시작점에 그리고 지리산이 끝점에 뽑힌 것은 그것들이 최고봉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산자분수령'의 정의와 '지리 확장론' vs '전통론'의 차이점

 

구 분 원산경표 (전통론) 신산경표 (노량 끝점론)
주장자 조선시대 : 실학자, 지리학자
현대 : 지리학계, 시민단체, 일반대중
김선식, 박성태
핵심 주장 백두대간의 끝은 지리산 천왕봉이다. 대간의 맥은 남해 노량 바다에서 멈춘다.
근거 산경표의 기록 "백두대간은 지리산에서 끝남 (白頭大幹止於智異) 산자분수령의 원칙
(산줄기는 물을 만나야 끝남)
경로 (분기) 영신봉 제석봉 천왕봉 영신봉 삼신봉 금오산 노량
상징성 민족의 영산, 남한 최고봉의 위상 중시 과학적·지형학적 원칙의 일관성 중시
현황 대부분의 산꾼이 따르는 '관습적 루트' 일부 동호인들이 탐구하는 '학술적 루트

 

옥룡사지의 동백나무숲

 

백두대간 인식의 시원(始源), 도선국사

 

장 감독은 백두대간이라는 산줄기 체계가 과연 언제부터 우리 역사에 등장했는지 묻는다. 이에 필자는 우리나라 산줄기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신라의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를 소환했다.

신라 왕족 출신으로 알려진 도선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전국의 산천을 떠돌며 만행(卍行)을 이어갔다. 이후 전남 광양의 옥룡사에서 수행하며 남긴 그의 지혜는 훗날 고려 창건의 사상적 기반이 된 도선비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백두대간의 관점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기록은 바로 그의 저술로 알려진 '옥룡기(玉龍記)'에 담겨 있다.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이다.”

'고려사'에도 인용된 이 짧은 문장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비록 백두대간이라는 구체적인 명칭이 정립되기 전이었지만, 이미 신라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단절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산줄기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첫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인식은 고려시대의 우필흥을 거쳐 조선 후기 이유원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필자는 이러한 산줄기 인식이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태백산)과 시조 단군의 결합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인 1903년 이후 도입된 서구식 산맥체계에 가려지기 전까지, 우리 선조들은 이 땅의 뼈대를 조선산맥혹은 백두유맥이라 부르며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통로로 여겨왔다.

 

우리나라 산줄기 인식의 변천사

 

시 대 주요 인물 문헌 인식의 핵심 내용
신라 도선 국사 옥룡기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에서 끝나는 산줄기 인식의 시초
고려 우필홍 도선의 이론을 계승하여 국토의 형세를 파악
조선 후기 이유원, 신경준 산경표백두대간 체계의 정립 및 '산자분수령' 원칙의 확립
근대 고토 분지로 지질학 중심의 '산맥(Mountain Range)' 체계 도입(1903)
현대 박성태 산경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정맥 이하 기맥, 지맥 이론 완성

 

지리의 주릉, 곧 백두대간 길이다..

 

지리산, 그 거대한 품이 품어낸 수만 가지 이름

 

지리산은 그 압도적인 규모만큼이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이는 지리산이 단순한 산을 넘어 우리 민족의 삶과 고통, 그리고 이상향을 투영하는 거울이었음을 방증한다.

먼저 성정과 위상에 따른 별칭을 본다. 때로는 자애로운 어머니, 때로는 치열한 전장으로 우리 곁에 있는 지리산은 전쟁과 흉년 속에서도 백성들을 조건 없이 품어 살려낸 '어머니의 산'이자 '덕이 있는 산'이라 하여 덕산(德山)이라 불렸으며, 신선이 사는 이상향이자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승려가 머무는 신성한 산이라 하여 삼신산(三神山)과 방장산(方丈山), 백두산의 맥이 흘러내려 빚어진 산이라는 의미로, 백두대간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두류산(頭流山), 동학혁명부터 빨치산에 이르기까지, 기득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준 역사의 현장을 반영하는 불복산(不服山)과 반역산(反逆山), 모화사상에 찌든 이들에 의해 소형산(小衡山), 불교적 세계관에 의해 청량산(淸涼山), 판소리에서는 망당산이나 화악(華嶽)으로도 불렸다.

 

한편, 흔히들 이 지리산(智異山)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얘기할 때 '지혜로운() 사람의 머무름이 다른() '이라 풀이하지만, 이는 우리말을 억지로 한자에 맞추어 쓴 '가차(假借)'에 가깝다. 국어학적 관점에서 본 이름의 뿌리를 보면, 지리산의 옛 이름인 '두류'의 어원이 '백두산에서 흘러왔다(頭流)'라는 한자 풀이 이전에, 병풍처럼 크게 둘러쳐졌다는 의미의 옛말 '두르'에서 기원한다. (두르 두름/두류) 마찬가지로 '두르'라는 어근에서 시작하여 두르 드르 드리 디리 지리의 음운변화 과정을 거쳐 (비원순모음화, 전설모음화, 구개음화의 과정) 지금의 '지리'로 정착된 것이다. 결국 '지리산''크게 둘러쳐진 거대한 산줄기'라는 순우리말 뜻을 품고 있으며, 나중에 그 소리에 맞춰 '智異'라는 한자가 덧씌워진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리산의 수많은 이름 중 그 성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단연 '덕산(德山)'이다. 지리산 자락인 시천면 중산리 인근의 '덕산'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남명 선생이 생애 마지막을 보낼 곳으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천왕봉의 장엄한 덕을 닮겠다."라고 하는 결연한 의지 때문이었다. 아울러 예로부터 지리산에 드는 것은 곧 '덕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入德)'이라 여겼다. 덕산은 난리 중에 사람을 숨겨주고 기근에 사람을 먹여 살리는, 말 그대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었기 때문이다.

 

지리산 이름의 언어학적 지도

단계 변화 과정 관련 언어 현상
뿌리 두르 (Dur)' 둘러치다', '둥글다' 의미의 고어
변화 1 드르/드리 모음 변화
변화 2 디리 전설모음화
정착 지리(Jiri) 구개음화 (''''로 변함)
한자화 智異山 소리에 맞춰 '지혜''다름'의 의미를 부여

 

산천재에서 바라본 천왕봉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

 

북진(北進)의 첫걸음을 떼기 위해 지리산의 관문인 중산리로 향한다. 이 길은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라, 남명 조식의 정신과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입덕(入德)’의 길이다. 북진 종주의 시작점인 천왕봉에 닿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 있다. 산꾼들은 이를 접속 구간이라 부른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백무동, 추성리 등 여러 갈래가 있지만, 우리는 가장 일반적이고 정통적인 중산리~천왕봉 구간(5.4km)’을 택한다. 이 길을 걷는 것은 곧 우리 선조들이 남긴 '산경표'의 궤적을 오늘날의 발걸음으로 잇는 숭고한 작업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 접속 구간에 있는 것들을 살피면서 천왕봉으로 오른다.

 

천왕봉으로 향하는 4대 루트

 

코스명 경로 요약 특징
중산리 코스 중산리 법계사 천왕봉 최단 거리(5.4km)이자 가장 대중적인 '입덕'의 길
백무동 코스 백무동 장터목 제석봉 천왕봉 완만한 능선과 대피소 접근성이 좋은 코스(7.5km)
칠선계곡 코스 추성리 칠선계곡 천왕봉 우리나라 3대 계곡 중 하나로 험난하지만 절경을 이용하는 코스(9.7km)
새재 코스 윗새재 치밭목 중봉 천왕봉 호젓한 숲길과 중봉의 조망과 황금능선을 즐길 수 있는 길(약8.8km)

 

지리산의 관문 입덕문

 

1. 입덕문(入德門) : ()으로 들어가는 통로

덕산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덕천강 강변에 예전에는 덕천 벼리(德川遷)라 하여 덕천강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거대한 바위 절벽과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작은 자연 석문이 있었다. 선비들은 이곳을 스승 남명 조식의 체취가 서린 곳이자, 지리산의 장엄한 덕을 마주하기 전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상징적 문으로 여겼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도로공사로 석문은 사라졌으나, 후학들이 바위에 각자(刻字)를 새겨 그 정신을 보존했다. 현재는 국도 확장 공사 등을 거치며 옮겨진 표지석과 안내석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입덕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그 입덕문 인근에는 남명 선생이 마음을 씻기 위해 갓끈을 씻었다는 탁영대(濯纓臺)와 시를 나누었다는 덕암(德巖))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천앙봉이 올려다 보이는 산천재

 

2. 남명의 숨결 : 남명기념관과 산천재(山天齋)

 

덕산 마을에 들어서면 남명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기리는 공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선생의 탄신 5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남명기념관에서는 실천적 유학자의 삶과 유물을 엿볼 수 있다.

남명기념관 길 건너에 있는 산천재는 남명이 생애 마지막 12년을 보내며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산천(山天)'이란 주역의 괘에서 따온 말로 '날마다 덕을 새롭게 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천왕봉을 마주 보는 이곳을 천혜의 길지로 삼아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다. 마당의 '남명매'는 선생의 고고한 기개를 닮아 오늘날까지 꽃을 피운다.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는 성모 석상

3. 성모 석상 : 천왕봉의 원래 주인

 

중산리 천왕사 법당 뒤편에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성모 석상이 모셔져 있다. 본래 천왕봉 정상에 머물며 민초들의 애환과 기도를 들어주던 지리산의 수호신이었던 성모 석상이었으나 수난의 역사 속에 지금은 산 아래 사찰에 머물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소원을 빈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현실은 지리산이 품은 또 하나의 아픈 서사로 남아 있다.

 

남명 조식의 두류산가

 

4. 증산리 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하는 접속 구간 산행

 

중산리 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하여 백두대간의 남쪽 기점인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여정은 단순한 산행을 넘어 역사와 전설, 그리고 국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그 시작인 산청분소 입구에는 남명의 두류산가가 새겨진 표지석이 있어, 이곳이 예로부터 선비들이 무릉도원을 꿈꾸며 들었던 입구임을 상기시킨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이제 속세를 뒤로하고 본격적인 산길에 들기 위하여 법계교를 건너면 우측 소공원에 지리의 수호자 허만수 선생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평생 지리산을 가꾸다 산의 품으로 사라진 우천의 추모비 앞에서 산에 드는 예의를 갖춘다. 두류삼거리에서 좌측 통천길로 든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칼날처럼 선 기개의 칼바위를 만나고, 현수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우틀하면 악명 높은 돌계단 된비알이 시작된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즈음 나타나는 망바위는 시원한 조망으로 산객의 땀을 씻어준다. 날씨가 좋으면 진주 시내까지 볼 수 있다는 이 망바위에서 충분한 휴식과 수분을 보충하고 올라갈 일이다.

 

신문창대에서 바라본 문창대

 

5. 비운의 천재 고운 최치원 문창대

 

로터리 산장이 지척일 무렵 우측 산죽밭 뒤로 커다란 바위가 주위를 압도한다. 신라의 대문장가로 당나라에서는 그 이름을 떨쳤지만 정작 고국인 신라로 돌아왔을 때는 골품제의 벽과 중앙 귀족들의 견제에 부딪혀 은둔의 길을 택했던 고운 최치원. 비운의 천재였던 그의 흔적은 쌍계사의 진감선사탑비문, 쌍계석문, 범왕리 신흥교 옆에 있는 세이암(洗耳岩), 불일폭포 부근의 환학대(喚鶴臺), 완폭대(琓瀑臺), 문창대 등 지리산 이곳저곳에 남아 있지만, 지리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세상과 작별한 후, 정신적 자유를 찾은 그에게는 말 그대로 안식처였다. 그중 그가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고, 천왕봉을 향해 활을 쏘며,,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겼던 이 고대(高臺)는 그에게는 천상의 서재였던 곳으로 지리의 기운이 응집된 지리 10중 하나이기도 하다.

 

'법계사 사적비명 바위' 와 삼층석탑

 

6. 하늘과 땅의 경계 법계사

 

문창대를 등지고 내려와 19781026, 남명 조식의 13대손 조재영이 부산 로터리클럽의 후원으로 문을 열었던 로터리 대피소에서 잠시 가쁜 숨을 고른다. 대피소 바로 위, 해발 1,450m 고지에 자리한 법계사는 태백산 망경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지에 있는 사찰이다. 이 절집은 왜구의 침탈과 중창주 손청화 보살의 인연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전란의 화마로 두 번이나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손보살의 지극한 정성과 민초들의 불심이 모여 오늘날의 영험한 터를 다시 일궈냈다. 한편, 인문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곳은 세석평전의 우천 허만수, 천왕봉 토굴의 김순룡 노인, 그리고 법계사의 손보살이 깊은 교류를 나누며 지리산의 정기를 지켰던 상징적인 공간이다. 특히 1960년대의 법계사 초막은 정상을 향하는 등구(登口)이자, 지리산을 사랑하는 이들이 복원 불사에 마음을 보태던 아주 특별한 산장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 여담이지만 사찰 삼층석탑(보물473) 옆 조망터에서 바라보는 문창대는 아무래도 노을이 지는 일몰 때 봐야 제격이다.

 

시대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 개선문

 

이름표를 바꾼 개천문

 

7. 정상을 향한 마지막 관문인 개천문(개선문)

 

법계사를 나와 천왕봉을 향하노라면 신문창대와 쉼터를 지나고 경사진 험한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정면으로 지붕 없는 대문 형태를 한 선바위가 보인다. 195772일 중산리를 출발한 지 3일 만에 이곳에 도착한 부산 대륙산악회의 성산 선생 일행이 이 바위를 보고는 이 정도 오르면 개선장군들이라 생각하고 이곳을 개선문이라고 명명했다.’라고 해서 지금까지도 개선문이라 불리는 바위이다. 하지만 천왕봉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하늘로 통하는통천문(通天門)이 버티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그와 대칭을 이루는 이 동쪽의 문은 개천문(開天門)’이라 부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서쪽에서 하늘로 통()하기 전, 동쪽의 이 문에서 먼저 하늘을 연다()는 의미를 새긴다면 지리산의 동서 균형은 비로소 완결될 것이다. 성산 선생이 명명한 개선의 기개를 존중하면서도, 지리산의 정기를 온전히 깨우는 '개천'의 의미를 더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바위문을 통과한다. 이제 동쪽의 문을 열어 하늘을 마주했으니(開天),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이 지리산의 정기를 가슴에 새기며 민족의 기상이 머무는 천왕봉의 품으로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천왕봉 직벽 아래, 마지막 숨을 고르는 석간수

 

8. 천왕샘이기에 받는 예우

 

개선문을 지나면 경사도는 약 30°에 달할 만큼 급격히 거칠어진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땅만 보고 걷다가 고개를 들면, 비로소 천왕봉이 코앞에 육중하게 서 있다. 하지만 그 깎아지른 직벽은 인간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절벽 우측으로 우회하며 끝없이 이어질 듯한 계단만이 산객을 기다릴 뿐이다. 이 긴장된 직벽 아래, 바위 틈새를 뚫고 석간수(石間水)가 졸졸 흐른다. 천왕봉에 오르기 전 마지막 숨을 고르는 이곳 '천왕샘'은 산꾼들에게 단순한 샘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해발 1,850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이 샘터는 남명 의 13대손 조재영이 개척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국립공원공단에서 이곳에 남강의 발원지라는 푯말을 세워둔 적이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남강의 진정한 발원지는 백두대간에서 남강지맥이 갈라져 나오는 봉황산(남덕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물이 시천천을 이루고 덕천강을 지나 결국 남강으로 흘러들 것을 생각하면,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위용에 바치는 예우(禮遇) 차원에서 그렇게 명명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지리학적 시원은 아닐지라도, 민족의 영산 가장 높은 곳에서 솟아나는 이 맑은 석간수야말로 남강을 품어 안는 지리산의 지극한 정성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받드는 기둥, 지리산 천왕봉

 

9. 백두대간의 시작점이자 끝점인 천왕봉(1,915m)

 

이제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고작 300m. 하지만 그 길은 오직 가파른 계단뿐이다. 고통을 잊으려 계단 숫자를 하나하나 세어보지만, 200개쯤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숫자를 놓치고 만다. 중간에 돌계단을 지나야 하고  해발 1,900m가 내어주는 희박한 산소와 평소 경험하지 못한 된비알의 피로감이 의식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계단 끝에 서면 우측으로 중봉과 써리봉이 위용을 드러내고, 좌측 정상석 주변으로는 인증샷을 위해 길게 줄을 선 산꾼들의 행복한 얼굴들이 보인다. 중산리에서 5.4km, 4시간의 고투 끝에 닿은 정상이다. 정상석으로 발을 옮긴다. 이곳의 바람은 산 아래의 그것과 결이 다르다. 사방이 트여 있어 사계절 내내 매섭고 거칠지만, 그 바람 소리가 마치 마고할미가 등을 두드리며 건네는 따스한 격려처럼 들려온다. 그 속에서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새겨진 묵직한 정상석을 마주하니 고단함은 씻은 듯 사라지고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전율이 차오른다. 낯선 이들에게라도 이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보라! 나는 지금 천왕봉 머리에 올랐노라. 구름과 안개를 모두 헤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 되어 하늘 위에 올랐노라.”

 

본격적으로 백두대간의 길을 내딛기 전, 정상의 흔적들을 살펴본다. 과거 천왕봉을 지키던 성모 석상은 우여곡절 끝에 이제 천왕사로 내려갔지만, 최근 국립공원공단에서 새로운 석상을 모셔놓아 그 빈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록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매끄러운 자태이지만, 인자한 미소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을 찾는 이들의 고단함을 품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옛 성모상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위로하듯, 새 석상 곁에 머무는 바람이 유독 정겹게 느껴진다. 또한 정상 바위 바로 옆에 새겨진 천주(天柱)’라는 글귀는 이곳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임을 다시금 각인시킨다. 사실 이 천주는 단순히 산의 정점을 표시하는 돌덩이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잇는 영적인 통로이자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선조들의 결연한 의지가 이 획(劃) 속에 서려 있는 것이다. 천왕봉에서 사방을 조망한다. 동쪽으로는 중봉과 하봉을 거쳐 왕등재, 웅석봉, ‘달뜨기 능선으로 이어지는 덕천지맥(웅석지맥)이 시원하게 뻗어있다. 과거 지리동부능선이라 불리던 이 줄기 중 하봉을 지나 쑥밭재 옆 독() 모양의 독바위 인근은 우리 현대사의 아픔인 빨치산의 주요 루트였다. 마천면 추성리에 본부를 둔 그들이 누비던 이 험로를, 훗날 ‘J3 클럽의 배병만이 지리 주릉과 서부능선을 엮어 지리태극종주라는 거대한 길로 완성해 냈다. 북쪽을 바라보니 활처럼 굽은 봉황산(남덕유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도도한 흐름이 눈앞에 선명하다. 그 우측으로는 남강지맥(진양기맥)이 북동쪽으로 흘러 황매산, 한우산으로 이어지는 흐름도 읽을 수 있다. 다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날씨가 허락하는 한 좌측의 왕시루봉, 중앙의 노고단, 그리고 우측의 둥그스름한 반야봉이 지리산의 광활한 품을 완성하고 있다. 이 장엄한 파노라마를 뒤로하고, 우리는 이제 민족의 혈맥인 백두대간을 향해 첫발을 뗀다.

 

산행 중 장 감독이 혼란스러워했던 산줄기 용어를 '나무'에 비유하여 정리한다.

 

용어 나무에 비유 설 명
백두대간 나무의 밑동과 큰 줄기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국토의 뼈대
정맥/지맥 옆으로 뻗은 가지 줄기 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강물을 가르는 산줄기
산자분수령 가지와 물의 공생 산줄기가 갈라지는 사이에는 반드시 물줄기가 생김
합수점 가지가 끝나는 곳 지맥(가지)은 강물을 만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