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삼재를 지나도 아직은 지리산 땅
“무슨 길이 이래? 순전히 꼬불꼬불이라 차멀미가 날 지경이야.”
장감독이 차창 밖을 보며 혀를 내두른다. 구례에서 성삼재를 거쳐 반선으로 이어지는 861번 지방도는 험준한 산자락을 깎아 만든 탓에 급커브가 쉼 없이 이어진다.
“이 길이 예전에는 군사 도로였어. 그러다 1988년 올림픽 전후로 관광 활성화를 위해 확·포장됐지. 단풍철이나 휴가철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차량으로 몸살을 앓는 아주 유명한 길이야. 덕분에 접근성은 좋아졌지만, 지리산 허리춤은 그만큼 깊은 흉터가 남았지.”
“형, 본격적으로 걷기 전에 이 부근 코스 좀 정리하고 가자.”
* 구간거리에는 주지봉 왕복거리인 약0.6km가 합산되었음.

성삼재 소고(小考): 지리의 능선들
성삼재 주차장의 서늘한 새벽 공기 속에서 배낭을 고쳐 매는 장 감독의 자세가 자못 결연하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잊혀가는 옛길의 기억을 나직이 꺼내어 놓았다.
“장 감독, 예전에는 서울에서 밤 열차를 타고 내려오면 구례구역 앞에 군내버스와 택시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지. 그 파르스름한 새벽빛을 맞으며 버스에 오르던 설렘이 있었는데… COVID-19를 거치며 2023년 9월 1일부터 열차 시간표가 바뀌는 바람에 그 시간대 노선이 아예 사라져 버렸어. 결국 기차에 몸을 싣고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던 그 낭만적인 추억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셈이지.”
내 말에 장 감독은 말없이 배낭 끈을 더 단단히 조였다. 열차 편이 끊긴 지금, 홀로 산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은 예전보다 훨씬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산꾼은 안내산악회나 각자의 동호회 관광버스에 몸을 의탁해 이곳으로 실려 오듯 도착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울의 경우 동서울터미널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심야버스가 있다는 거야. 이 버스가 우리 같은 산꾼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이지. 물론 겨울철에는 운행을 쉬었다가 봄철 산불방지 기간이 끝나는 5월 1일경부터 운행이 재개되고, 한창 사람이 몰리는 성수기에는 증차가 되기도 하지.”

성삼재 주차장을 가득 메웠던 인파가 약속이나 한 듯 노고단 방향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장 감독이 툭 던진 한마디에 나는 지리산의 골격을 머릿속에 그리며 대답했다.
“사람들이 다 노고단 방향으로 가네?”
“그래. 성삼재에 내리는 사람들 태반은 노고단을 거쳐 천왕봉으로 향하는 주릉 종주자들이야.”
“우리가 가는 방향은?”
“백두대간 종주자 말고는 드물지. 간혹 서북능선을 타는 당일 산행객들이 있긴 하지만, ‘지리’ 하면 다들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주릉만 떠올리니까.”
장 감독은 뿌리를 뽑겠다는 듯 다시 묻는다.
“서북능선? 그건 또 뭐야?”
“학술적으로나 산행기에서나 서북능선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야. 천왕봉에서 밤머리재로 흐르는 ‘동부능선’에 대응하는 개념이지. 다만 설악산에도 유명한 서북능선이 있다 보니, 지리산 안에서는 동서 대비를 위해 서부능선이라 부르기도 하지.”
나는 스틱 끝으로 어둠에 잠긴 반야봉과 우리가 가야 할 고리봉 방향을 번갈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지리산의 5대 능선 체계
| 명 칭 | 주요 구간 | 연장할 경우 |
| 주릉(主稜) | 성삼재 ~ 노고단 ~ 반야봉 ~ 영신봉 ~ 천왕봉 (지리의 대들보) | |
| 동부능선 | 천왕봉 ~ 중봉 ~ 하봉 ~ 왕등재 ~ 밤머리재 | 웅석봉 ~ 십자봉 ~ 성심원 |
| 서북능선 | 성삼재 ~ 고리봉 ~ 만복대 ~ 바래봉 | 인월 혹은 운봉 |
| 남부능선 | 영신봉 ~ 삼신봉 ~ 형제봉 ~ 신선봉 | 한산사 혹은 최참판댁 세트장 |
| 북부능선 | 삼각고지 ~ 삼정산 ~ 실상사 |
“1980년대 이우형 선생에 의해 ‘산경표’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산꾼들에게 이 능선들은 개별적인 종주 코스로서 산꾼들에게는 그야말로 로망이었어. 하지만 대간 종주가 활성화되고 정맥이나 지맥 산행도 대중화되면서 요즘의 지리산 5대 종주코스는 그 의미가 백두대간이라는 큰 줄기에 통합된 느낌이야. 게다가 지금은 국립공원공단에서 비탐방 구간을 엄격히 관리하고 있어 예전처럼 마음껏 그 구간들을 헤집고 다니기도 쉽지 않지.”
“아하, 지리 태극종주라는 것도 이 능선들을 엮은 거겠네?”
“정확해. 그건 나중에 덕유산 정도에 가서 다시 얘기하자.”
성삼재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버스가 반선 방향으로 멀어지며 붉은 잔영을 남긴다. 우측 도로 건너편,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이정목이 우리를 반긴다.
‘당동마을 3.0km / 만복대 5.3km’
“휴, 저걸 언제 다 가나.”
장 감독이 제법 엄살을 부리지만, 평소 자전거로 다져진 그의 탄탄한 하체를 나는 안다. 지리산의 서쪽 어깨를 타고 넘는 제2구간의 첫 발걸음은 그렇게 묵직하고도 경쾌하게 시작되었다.
장 감독은 수통의 위치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사라진 열차의 기적 소리 대신, 성삼재를 떠나는 심야버스의 차폭등을 보면서 만복대를 향한 첫발을 내디딘다.

지리학의 정수, 만복대에서 확인하는 산자분수령
“형, 오늘 가는 길에 대해서 계속 얘기해줘.”
장 감독의 채근에 나는 얘기를 이어간다.
“산행 구간은 팀마다 제각각이야. 보통은 여기서 여원재까지 끊지만, 조금 욕심을 내면 유치삼거리까지, 더 길게 타는 사람들은 사치재까지도 가곤 하지. 무박 산행이라면 유치삼거리가 정석이지만, 오늘은 여원재에서 마무리할 예정이야. 거리가 가까우니 걸으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펜스 안으로 들어서자, 야생동물 이동 현황을 조사하는 장비들이 눈에 들어오고, 발목을 스치는 조릿대 소리가 서걱거린다. 이 구간에는 이름이 같은 ‘고리봉’이 두 개나 있어 헷갈리기 쉽다. 헬기장을 지나 고도를 조금 올리자 ‘고리봉’이라 표기된 정상석이 아침 이슬에 촉촉이 젖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 1,248봉을 ‘작은 고리봉’이라 부르고, 나중에 정령치를 지나 만날 1,305.4봉을 ‘큰 고리봉’이라 불러 구별한다. 구체적인 사연은 이따 큰 고리봉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참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사면을 치고 오르자, 꽉 막혔던 시야가 돌연 터지며 눈앞으로 환한 천상의 화원이 불쑥 다가선다. 발밑을 짓누르던 산의 무게는 간데없고, 해발 1,433.4m의 고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넉넉하고 평평한 초원이 발길을 붙잡는다.
“와! 형, 이게 뭐야? 시원한 바람에 이름 모를 야생화들까지… 여기가 꼭 점봉산 곰배령 같은데!”
옆에서 걷던 장 감독이 아이처럼 흥분한 목소리로 탄성을 내뱉는다. 그의 시선은 이미 발치에 점점이 박힌 꽃송이들에 마음을 뺏긴 모양이다. 7~8월의 만복대는 그야말로 황금빛 원추리의 바다다. 거센 산바람을 이겨내고 피어난 원추리들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연출하고, 그 사이사이로 보랏빛 층층잔대와 수줍게 고개를 숙인 주홍빛 동자꽃이 수채화 같은 색감을 더한다.
“그래, 장 감독. 이게 바로 지리의 여름 선물이지. 저 원추리들의 강인한 생명력이 바로 만복대의 얼굴이야.”
만 가지 복이 깃든다는 이름처럼, 산은 고된 산행 끝에 당도한 이들에게 이토록 찬란한 풍경으로 위로를 건넨다. 거친 바위산의 위용 대신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만복대의 능선 위에서, 우리는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지리가 허락한 가장 풍요로운 순간을 만끽한다.

만복대를 내려오면서 야자 매트가 깔린 길을 걷다 보니, ‘곰을 만났을 때 대처 방법’ 현수막이 보인다.
“형, 진짜 곰이 나타나면 어떡해?”
긴장한 장 감독의 목소리. 사실 나 역시 혼자 걸을 때는 조릿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설 때가 있다.
“산은 그들의 집이고 우리는 잠시 빌려 쓰는 손님일 뿐이야. 정해진 탐방로를 벗어나지 않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게 최선이지. 하지만, 이 적막 속에서 저 현수막을 마주할 때의 묘한 긴장감은 어쩔 수 없더군.”
이때, 장 감독이 지도를 살피더니 묻는다. “여기가 서시지맥 갈림길이군. 개념도에는 견두지맥이라고 되어 있는데?”
“‘신산경표’에서는 견두지맥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신산경표는 산경(山經) 위주로 선을 긋다 보니 물줄기와의 관계를 놓치는 등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에 어긋나는 오류가 종종 발견돼. 가령 이 서시지맥만 봐도 그래. 이 줄기는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쳤으니, 그 끝점은 여기서 발원하는 서시천과 그 상위 하천인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도상거리 약37.4km)이어야 돼. 그런데 견두지맥은 끝점을 잘못 찾아가고 있어. 물줄기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견두산~천왕봉~수양봉 팻말~갈림봉~봉성산을 거쳐 이 서시천과 섬진강의 합수점으로 가야 하는데, 견두지맥은 갈림봉에서 국사봉~병방산으로 향하거든. 산줄기의 길이는 조금 더 길고(도상 거리 약37.5km), 봉우리도 많아 제법 완전한 산줄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건 물줄기를 무시하는 결과야. 산자분수령의 원리에 어긋나는 거지.”

“글쎄… 지맥의 끝점은 반드시 합수점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점은 어렴풋이 이해가 가긴 하는데…”
“그래. 우선 그 ‘합수점 요건’이 지맥의 세 가지 요건 중 하나이고 ‘도상 거리 30km 이상’은 그 두 번째 요건이지. 우선 이것들만 알아두고 나머지 지맥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
한편, 어떤 학자는 대간길이 여기서 서시지맥을 타고 가다가 다름재를 지나 수정봉으로 이어져야 한다며 산경표를 비판하기도 했다. 구룡폭포의 물줄기를 건너야 하니 산경표가 틀렸다는 논리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건 책상물림들의 탁상공론일 뿐이야. 우리가 내려갈 고기리를 직접 가서 보라고 해. 고기천과 주천천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그 분수령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대간이 물을 건넌다는 말은 절대 못 할 거야. 산줄기는 결코 물을 건널 수 없다는 그 지엄한 원칙을 수계(水系) 중심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낸 것이 우리 ‘대한산경표’의 자부심이지. 고기삼거리에서 노치마을을 지나 수정봉으로 오르는 그 길이야말로 단 한 방울의 물도 건너지 않는 진짜 대간길임을 우리는 몸으로 증명하며 걷는 셈이야.”
“형, 그런데 그냥 폰 앱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굳이 종이지도를 오려서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뭐야?”
우리는 영진문화사의 1:50,000 지도를 구간별로 정성껏 오려 비닐 케이스에 담아왔다. 그러고는 고비마다 그 지도를 꺼내 현재 위치를 확인한다. 사실 요즘은 스마트폰 GPS 앱이 발달해 편리하지만, 나는 전적으로 그것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작은 화면은 내 발밑만 보여줄 뿐, 내가 딛고 선 능선의 거대한 흐름과 산자락이 뻗어 나가는 기세를 보여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산세의 맥락을 짚고, 내가 건너온 봉우리와 마주할 봉우리와 골짜기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데에는 역시 손에 잡히는 종이지도가 제격이다. 비닐 너머로 지형도를 읽어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 나는 단순한 보행자를 넘어 이 땅의 지도를 그려낸 선조들의 마음과 조우하곤 한다.

나침반은 신라의 발명품?
정령치가 가까워질수록 발끝에 닿는 흙의 기운이 낮게 가라앉는다. 완공된 동물이동통로를 지나면서 부서진 산자락을 메우려는 인간의 뒤늦은 노력을 묵묵히 지켜본다. 자연을 허무는 데에는 찰나의 순간이면 족하지만, 그 상처를 보듬는 데에는 산천이 몇 번을 변해야 할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거운 마음을 눈치챘는지, 장 감독이 불쑥 질문 하나를 던지며 분위기를 바꾼다.
“형, 궁금한 게 있어. 예전 선조들은 어떻게 이 거대한 백두대간을 파악했을까? GPS는커녕 나침반도 없었을 텐데.”
“나라고 안 궁금했겠어? 그런데 재미있는 기록이 있어. ‘삼국사기’를 보면 당나라 승려 법안이 신라에서 자석을 얻어갔다는 기록이 나와. 서기 669년에는 자석 두 상자를 당에 보냈다고도 하지. 나침반은 흔히 중국의 3대 발명품이라 하지만, 그 기원을 따져보면 ‘신라침반(新羅針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해. 여기서 '신'자를 빼면 우리가 아는 '나침반'이 되는 거지.”
“세상에, 나침반이 신라의 발명품이었다니! 그런데 왜 우리는 그걸 모르고 살았을까?”
“우리 지식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일본이나 서구의 시각으로 재편된 탓이 크지. 산경표도 마찬가지야. 조상들은 산줄기보다 오히려 물줄기를 먼저 보셨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두 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이 나오고, 그 끝이 곧 산줄기의 마루금이라는 걸 터득했던 거지. 물줄기를 산줄기의 거울로 본 거야. 그래서 한북정맥, 한남정맥처럼 강 이름을 따서 산줄기 이름을 지은 것이고.”
정령치는 동물이동통로가 완공된 후 그 모습이 사뭇 달라져 있다. 아쉽게도 대간꾼들과 산객들의 고단한 몸을 달래주던 아지트 같던 매점은 문을 닫았지만, 깨끗하게 정비된 화장실과 현대식 편의시설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멋들어진 정령치 정상석 앞에는 차를 타고 올라온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다. 땀 냄새 밴 우리의 차림새와 대비되는 그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대간의 호흡을 가다듬으며 ‘큰 고리봉’을 향해 발을 뗀다. 본격적으로 능선에 붙기 전, 이정목이 가리키는 ‘개령암지’와 ‘정령치 마애불상군’을 들른다. 대간 마루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잠시 발길을 돌려 예(禮)를 갖출 일이다.

어떤 게 진짜 고리봉인가? 지명의 재발견
정령치를 지나자 곧 이른바 ‘큰 고리봉(1,305.4m)’에 닿는다. 아까 지나친 정상석이 서 있는 고리봉(1,248m)은 이 ‘큰 고리봉’에 대해 엄밀히 말하면 ‘작은 고리봉’이라고도 불린다. 멀리서 보면 만복대나 노고단, 반야봉의 위세에 눌려 다소 왜소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두대간 마루금이 갈라지는 2등급 삼각점 지점(1,305.4m)을 ‘큰 고리봉’이라 부르고, 그곳을 ‘작은 고리봉’이라 칭하며 구분한다. 그런데 과연 이 명명법이 합당할까?
고리봉 지명에 대해 이참에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 보자. 예전 국립공원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기재된 적이 있었다. 생각건대 우리 고어에서 고리봉의 ‘고(高)’와 두리봉의 ‘두(頭)’는 모두 높고 으뜸인 봉우리를 뜻한다. 백두대간이 대중화되면서 고리봉이 산행의 중심이 되자, 두 봉우리를 구별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큰’과 ‘작은’을 붙여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고어의 격(格)을 따져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머리 두(頭)’ 자는 백두산의 예에서 보듯 ‘대장’과 ‘근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 고리봉 = 고리봉’, ‘큰 고리봉 = 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지명의 위계상 더 합당할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예전에는 서부능선의 지엽적인 탈출로에 불과했던 고리봉 하산길이 이제는 백두대간의 당당한 주축이 되었다. 나아가 2등급 대삼각점(운봉 25)이 박혀 있는 큰 고리봉은 이제 지리 서부능선의 중심축을 만복대에서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렇다면 위상에 밀려 이름마저 ‘작은’ 자를 빌려 쓰고 있는 그 작은 고리봉에게 제 이름을 찾아주는 건 어떨까? 달궁을 지키던 황장군의 전설이 서린 황령치가 지금의 묘봉치로 추정되는 만큼, 그 맥락을 이어 이 봉우리를 아예 ‘묘봉(妙峰)’이라 부르는 걸 고려해 보는 건 어떨까? 지명은 박제된 이름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숨 쉬는 생물과 같다. '큰'과 '작은'이라는 단순한 수식어 대신, 우리 땅의 역사와 전설이 깃든 '묘봉'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준다면 지리산의 서쪽 어깨가 한결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우리는 여기서 직진하여 바래봉으로 향하는 서북능선을 뒤로하고, 좌회전하여 고기리 방향으로 급격히 고도를 낮춘다.
“저기 봐, 장감독. 동쪽으로는 반야봉에서 천왕봉까지 지리 주릉이 한눈에 들어오고, 저 뒤로는 우리가 지나온 만복대가 든든하게 서 있지? 우리가 갈 쪽을 보면 수정봉과 고남산의 철탑, 그리고 그 좌측 뒤로 요천 너머로는 천황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어!”

장감독이 발밑의 돌덩이를 보며 묻는다.
“형, 근데 이 삼각점은 왜 자꾸 찍는 거야? 측량용이지 우리 산행하고는 상관없잖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백두대간이나 정맥을 탈 때 이 삼각점은 아주 긴요한 확인 도구가 돼. 길을 잃기 쉬운 지맥 산행에서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지. 이번 기회에 삼각점에 관해서 관심 좀 가져봐.”
📍 알고 가면 유익한 '삼각점' 상식 삼각점은 지형도를 그릴 때 위치(경도, 위도)의 기준이 되는 지점이다. 주로 산 정상에 설치되며 화강암 기둥에 지명과 숫자가 새겨져 있다. 지명(예: 설악 11, 운봉 25): ‘설악’이나 ‘운봉’같이 해당 지역 1:50,000 지형도의 도엽명, 숫자는 등급 및 고유 번호를 나타냄 * 11~19: 1등 삼각점 (국가 기본망, 약 174개) * 21~29: 2등 삼각점 (약 1,102개) * 301~399: 3등 삼각점 (약 3,045개) * 401~499: 4등 삼각점 (약 11,753개) 우리나라 높이의 기준: 인천 앞바다의 평균 해수면을 0m로 잡으며, 인하대학교 교정 내에 설치된 '수준원점(26.6871m)'이 대한민국 모든 고도의 기준점이 된다. |
장감독은 비로소 삼각점을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다시 바라본다. 이제 우리는 지리산의 거대한 품을 잠시 벗어나, 인간의 마을인 고기리로 내려선다.
내리막길은 급격히 고도를 낮추며 무릎을 압박해 오지만, 발밑의 작은 돌덩이 하나에도 우리 국토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니 걸음이 한결 정성스러워진다. 이제 곧 마주할 고기리 분수령에서,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않는다는 그 엄연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할 차례다.

백두대간은 생물(生物)이다 : 고기리 60번 도로의 비밀
소나무 숲을 지나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신다. 고리봉에서 내려오는 길은 쉼 없는 내리막이다. 편안한 숲길인 듯싶다가도 어느새 급경사가 나타나니 무릎 건강에 신경을 쓰며 천천히 발을 옮긴다. 귓가에 거센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어느덧 고기삼거리다.
좌측의 원천천은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며 고기저수지에 모였다가, 구룡폭포를 지나 남원 시내의 요천에 합수되어 섬진강으로 흐른다. 반면, 대간 우측으로는 주촌천이 발원하여 운봉읍의 람천에 합수된 뒤, 임천과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이제 걷게 될 60번 도로는 이 교묘한 분수계(分水界) 위에 놓여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현장이다. 이제 근본적인 '구룡폭포 하천 쟁탈'의 문제를 짚어보자.

* 하천 쟁탈(Stream Piracy)로 바뀐 대간길
운봉고원은 해발 450~550m의 분지형 고원이다. 이곳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형학적 사건이 발생한다. 즉 침식의 불균형 그러니까 경사가 완만한 낙동강 쪽 주촌천에 비해, 섬진강 쪽 원천천은 경사가 매우 급하여 침식작용이 활발하다. 그러니 원천천은 좁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며 상류 쪽(운봉고원 안쪽)으로 골짜기를 계속 확장해 나가는, 이른바 원천천의 두부침식(頭部浸蝕)이 이루어진다. 이는 유역 쟁탈로 이어지는데 결국 원천천이 고갯마루를 넘어 주촌천의 상류 유역을 가로채 제 유역으로 삼아버렸다. 이것이 바로 하천 쟁탈이다.
이 과정에서 원래는 낙동강으로 흘러야 했을 물줄기가 섬진강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고, 그 결과 백두대간의 마루금도 요동치게 되었다. 이를 지형학적으로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라 부른다. 만약 현재와 같은 침식이 수만 년간 이어진다면, 대간의 분수계는 고원 중앙부 그러니까 운봉읍 쪽으로 더 깊숙이 이동할 것이다.
* 보통 '분수계'라고 하면 높은 산등성이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곡중분수계는 말 그대로 '골짜기(谷) 안(中)에 있는 분수계'를 뜻한다. 따라서 이곳 고기리 구간은 산마루가 아닌 마을의 논둑과 밭둑이 분수계 역할을 한다.

* 백두대간을 걷는 이들이 확인해야 할 것
고기삼거리에서 노치마을로 이어지는 약 2km의 60번 도로를 그냥 걷지 마라. 도로를 경계로 농경지의 높낮이를 유심히 살펴보라. 도로 왼쪽(섬진강 유역) 원천천의 강력한 침식으로 인해 오른쪽보다 지면의 고도가 약 10m가량 더 낮은 반면, 분명 도로 오른쪽(낙동강 유역)은 여전히 완만한 낙동강 최상류의 지형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하자!
과거 낙동강의 땅이었던 곳을 원천천이 뺏어가는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백두대간 산행의 진짜 묘미이자 '대한산경표'가 지향하는 수계 중심의 산행이다. 이 이치를 깨닫고 걷는다면, 발밑의 아스팔트조차 수만 년의 시간을 품은 거대한 역사책으로 다가올 것이다.

갈대가 많아 노치(蘆峙)라고? : '갈라진 재'의 역사
노치마을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그 전면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소나무 다섯 그루가 동에서 서로 병풍처럼 나란히 서 있는데,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조선 초, 이곳에 터를 잡은 경주 정 씨와 이 씨 문중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기 위해 심었다는 이 나무들 아래엔 지금도 당산제단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매년 7월 백중이면 온 마을이 정성을 다해 올리는 ‘노치마을 당산제(堂山祭)’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갈대가 아닌 '갈라진 곳'의 노치
60번 도로 버스정류장에서 좌측 마을 길로 들어선다. 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동네 이름을 '갈재'라고 불렀다. 흔히들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여 있어 '갈대 노(蘆)' 자를 쓴 노치(蘆峙)라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갈대는 주로 강가나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이 아닌가? 산꼭대기 마을에 웬 갈대란 말인가. 지명의 본뜻을 알기 위해서는 국어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주촌면과 운봉읍의 경계였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와 신라의 국경 마을이었다. 즉, 이곳은 자연스럽게 길이 갈라지고 땅이 나뉘는 '갈리다'라는 의미를 품은 곳이었다.
여기서 잠깐 지명의 변천 원리를 본다.
①갈라지다 → 갈 → 갈재(岾) : '산줄기가 나뉘는 고개'라는 뜻의 우리말
②음차(音借)의 오해 : '갈'이라는 소리를 한자로 옮기면서 갈대 노(蘆)를 쓰게 됨.
③역해석의 오류 : 한자 뜻에 맞춰 나중에 ‘갈대가 많아서 노치(蘆峙)다’라는 가짜 전설이 덧붙여짐.
전국의 수많은 '갈라산'이나 '갈미봉' 역시 칡(葛)이나 갈대와는 관계가 없다. '산꼭대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형상을 뜻할 뿐이다. 호남정맥에서 가지를 친 영산북지맥(영산기맥)의 노령(蘆嶺) 역시 원래 이름은 '갈재'였다. 그 옆의 추령(秋嶺) 또한 단풍이 고와서 '가을 추(秋)'를 쓴 것이 아니라, '가르다 → 갈 → 가을'로 변한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이중환의 택리지(1751년)를 보면 ‘남원 동쪽으로 노령을 넘으면 운봉현이 나온다.南原之東, 踰蘆嶺則雲峯縣).’라고 했는데 여기서 노령이 노치(蘆峙) 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노치마을을 갈대밭이 아닌,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가르고 낙동강과 섬진강의 물줄기를 나누던 장엄한 '분수계의 고개'로 읽어야 한다. 마을 앞 노치샘에서 흘러나온 빗물 한 방울이 지붕의 방향에 따라 남해와 동해(낙동강)로 갈라지는 운명, 그것이 바로 노치라는 이름에 새겨진 진짜 역사다.

대간꾼이라면 주지봉을 들러야....
수정봉(805.1m) 정상에 서면 듬직한 정상석이 가장 먼저 산객을 반긴다. 고개를 돌려 지리산 서북능선을 훑어내리면, 바래봉에 이어 그 끝자락에 솟은 덕두산(1,150.5m)이 아스라한 연무 속에서 눈에 들어온다. 수정봉을 뒤로하고 내려서면 만나는 입망치(笠望峙)는 우리말로 ‘갓바래재’라 불리는 정겨운 고개다. 운봉과 남원을 잇는 세 개의 고개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길은 다소 단조로운 듯 이어지지만, 좌측으로 남원의 진산인 교룡산이 특유의 기세로 동행해 주니 지루할 틈이 없다. 이윽고 도착한 주지사 갈림 삼거리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직진하여 주지봉(648.3m)으로 향한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그저 숫자로만 남겨진 무명봉이나, 실상은 ‘해동지도’와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유서 깊은 석봉이다.
주지봉 정상에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소원을 들어주는 ‘여원인(與願印)’을 한 불상이 남동쪽을 향해 서 있다. 사방으로 터지는 조망을 즐기며 땀을 식힌 후,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여정을 이어간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무덤가를 지나면, 비로소 여원재의 민박집과 식당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대간꾼들이 고대하던 휴식처다. '운봉 막걸리는 며칠 숙성되어야 제맛'이라는 덕담과 함께 들이는 막걸리 한 잔에 산행의 고단함이 씻겨 내려간다. 무덤 옆 오솔길을 빠져나오면, 백두대간 제2구간의 끝점인 여원재이다. 현지에서는 여원재보다는 연재로 불리는 이 고개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이성계의 역전극, 황산대첩과 여원재
여원재는 단순한 고개가 아니다. 1380년, 최무선의 진포대첩에서 배를 잃고 육지로 도망친 왜구들은 이곳 운봉에 집결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이성계는 여원재 부근에 주둔하던 중, 꿈속에서 백발 노파의 계략을 듣고 왜구를 섬멸한다. 이것이 바로 고려 4대 대첩 중 하나인 '황산대첩'이다.
이 승리로 이성계는 훗날 역성혁명의 기틀을 마련했고, 우리는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날 수 있었다. 이성계는 꿈속 여인에 대한 고마움으로 사당을 지어 '여원(女院)'이라 불렀고, 마애불까지 새겼으니 고개 이름은 자연스레 여원재가 되었다.
학계에서는 조각의 투박한 수법을 들어 고려시대의 산물로 보지만, 이 땅을 밟고 살아온 이들은 이를 고려 말 황산대첩의 승전보와 함께 태어난 수호신으로 믿어왔다. 이성계 장군에게 승기를 일깨워준 이름 없는 여인의 넋이 이 바위 속으로 스며들어, 거친 대간 길을 지키는 부처로 화현(化現)했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 벅찬 것 같다.
"장 감독, 저기 마애불을 봐.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얼굴조차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저 자리에 서서 대간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지키고 계시지 않은가. 화려한 금칠을 한 불상보다 저렇게 바위와 하나가 된 마애불이 진짜 산의 주인 같아 보여."
"정말 그러네요, 형. 꼭 우리처럼 대간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애썼다, 조심히 가라'고 어깨를 토닥여주시는 것 같네."

1901년, 고토 분지로가 이곳을 넘은 이유
그런데 1901년 1월, 한 일본인이 분노 섞인 마음으로 이 고개를 넘고 있었다. 바로 우리에게 잘못된 '산맥' 체계를 이식한 고토 분지로다. 그는 단순한 지질학자가 아니었다. 일본 해군이 최무선에게 참패했던 진포대첩과 이성계에게 궤멸당했던 황산대첩의 치욕을 역사적으로 꿰뚫고 있었다. 그는 여원재를 지나며 이를 갈았다.
'감히 미개한 조선인들이! 내 기필코 이성계가 승리했던 이 여원재와 이순신에게 패했던 명량을 샅샅이 뒤져보리라. 그리고 유럽 학자들에게 받은 수모를 씻기 위해서라도 조선 땅에 나만의 독창적인 지질 이론(산맥 체계)을 세우리라. 그것이 천황 폐하께 보은하는 길이다!'
구한말, 학술 조사를 빙자해 조선의 산하를 훑고 다닌 일본 학자들의 속내는 결국 자원 약탈과 식민 지배의 정당성 확보에 있었다. 고토 분지로가 세운 산맥 체계는 우리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백두대간'을 토막 내어 지질 구조상의 선으로 전락시켰다.
분수계로서의 여원재
여원재는 해발 470m의 상당한 고지다. 24번 도로를 경계로 빗물이 좌측으로 흐르면 섬진강으로, 우측으로 흐르면 낙동강으로 향한다. 역사적으로도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던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물줄기와 산줄기의 경계로 남겨져 있다.
비록 고토 분지로가 이 길을 걸으며 야욕을 불태웠을지언정, 대간은 여전히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 왜곡된 시선을 거두고, 우리 땅의 참모습인 백두대간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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