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산의 'ᄇᆞᆰ' 사상
장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 불상사를 막았다. 덕분에 오후 내내 푹 쉬며 기력을 보충했고, 다음 날 일정을 깔끔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의 들머리는 어제의 날머리인 지지리 마을에서 중재로 오르는 길이다. 접속 구간만 약 1.2km, 중재에서 육십령까지 이어지는 본 구간이 20km에 달하니 새벽 공기를 가르며 출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아침 이슬이 산죽 잎사귀마다 촉촉하게 맺혀 있다. 어제 하산을 결정할 때의 초조함은 간데없고, 장 감독은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활기찬 발걸음을 옮긴다. 중재에 올라 대간 마루금에 접속한다. 여기서 중고개재까지는 약 1.6km.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만큼 존재감이 미미한 곳이지만, 고갯마루의 적막함 속에서도 예전 이 길을 넘나들던 민초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중고개재를 지나자마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된비알이 시작된다. 생태계 복원 안내문들을 지나며 잠깐씩 터지는 조망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특히 좌측으로 펼쳐진 장안산의 넉넉한 품은 고된 산행 중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고마운 선물이다. 그러나 이정목이 가리키는 1.4km 지점에 다다르자, 드디어 백운산은 감춰두었던 진면목을 드러낸다. 거대한 산채가 눈앞을 가로막으며 진정한 사투가 시작된다.

가빠오는 호흡, 비 오듯 흐르는 땀, 시큰거리는 다리…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어제 술을 좀 덜 마실걸', '일찍 잘걸', '괜히 북진을 고집했나' 하는 후회들이 된비알의 경사만큼이나 무겁게 짓누른다. 그 고통의 끝자락, 갑자기 비탈이 수그러들며 우측 무덤 뒤로 상연대(上蓮臺)에서 올라오는 중봉과 끝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상연대는 고운 최치원이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깃든 절집이다. 여기서 1.7km 떨어져 있지만 시간이 허락하면 한번 들러볼 일이다. 발아래 펼쳐진 함양군 백전면의 풍경이 보상처럼 다가온다. 이 백운산(1,278.9m)은 전국 30여 개의 백운산 중 단연 최고봉이다.

흰 구름에 가려진 'ᄇᆞᆰ'의 본질
정상에는 구형과 신형, 두 개의 정상석이 각기 다른 높이에서 산객을 맞이한다. 큰 정상석 뒷면의 ‘흰 구름산이라는 뜻의 백운산 (白雲山) .....’이라는 문구를 보던 장 감독이 툭 한마디를 던진다.
“형, 이거는 마치 백두산 이야기 같네요. 산이 높아 사시사철 눈이 덮여 있어 이름 붙었다는 그 얘기 말이에요.”
일반인들에게 백운산은 그저 ‘흰 구름이 머무는 산’으로 읽히기 쉽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숭고한 산의 이름을 그리 단순하게 짓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육당 최남선을 소환해 본다. 그는 1925년 발표한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통해 우리 민족의 고대 사상인 ‘ᄇᆞᆰ’을 설파했다. ‘불함’은 곧 ‘ᄇᆞᆰ’이며, 이는 광명과 하늘, 태양, 그리고 신(神)을 뜻한다.
단군신화의 태백산(太白山)이 곧 백두산(白頭山)인 이유도 같다. ‘ᄇᆞᆰ뫼’에 존경과 최고를 뜻하는 ‘두(頭)’가 붙어 형성된 이름이다.
“장 감독, 우리 조상들은 부족마다 자신들만의 신령스러운 산, 즉 ‘ᄇᆞᆰ산’을 섬겼어. 부족들이 통폐합되면서 산줄기의 서열도 정해졌고, 결국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우뚝 서게 된 거지. 대간 줄기에 ‘백(白)’ 자 계열의 이름이 많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야. 전국 곳곳에 백운산이라는 이름이 널려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이 ‘ᄇᆞᆰ’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박, 발, 밭’ 등으로 변형되었다. 제천의 박달재 역시 ‘ᄇᆞᆰ+달(높은 곳)+재(고개)’의 조합이지, 흔히 말하는 박달나무와는 거리가 멀다. 백운(白雲) 또한 ‘ᄇᆞᆰᄋᆞᆫ’에서 온 것으로, 이곳이 곧 천계를 의미하는 신령스러운 ‘신의 산(神山)’임을 뜻한다.

계관봉(鷄冠峰)에 박제된 언어의 왜곡
그 신성한 백운산 정상석을 뒤로하고 동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함양의 진산 대봉산(1,252m)이 거대한 날개를 펴고 서 있다. 예전엔 갓을 걸어두었다는 뜻의 괘관산(掛冠山)이라 불렸으나, 이제는 제 이름인 대봉산(大鳳山)을 되찾은 곳이다. 특히 암봉으로 이루어진 계관봉의 위용이 당당하다.
“장 감독, 말이 나왔으니 하나 더 알아보자고. 저 계관봉 말이야. 사람들이 닭 볏을 닮았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 ‘계(鷄)’ 자는 우리 고어의 ‘달’에서 온 거야. ‘달’이나 ‘두(頭)’, ‘마(馬)’, ‘고(高)’는 모두 ‘높다’는 뜻을 품고 있지. 그 ‘달’이 세월이 지나면서 ‘닭’으로 변했고, 또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억지로 ‘닭 계(鷄)’자를 쓴 거라고.”
결국 계관봉은 닭을 닮은 봉우리가 아니라, ‘가장 높고 신령스러운 봉우리’라는 뜻의 우리말이 한자의 옷을 잘못 입은 셈이다. 백운산의 ‘ᄇᆞᆰ’ 사상처럼, 우리 산줄기 곳곳에는 하늘과 맞닿은 높고 밝은 곳을 숭상했던 선조들의 언어가 지명 속에 박제되어 있다. 산 이름은 결국 ‘산악숭배사상’의 결과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둘러 영취산을 향해 발을 떼며 장 감독에게 말을 건넨다.
“장 감독, 저기 멀리 우리가 샅샅이 톺아보며 지나온 대간길의 실루엣이 보이시나? 여기서 보니 대간의 맥동이 한눈에 잡히는구먼.”

영취산, 금남호남정맥의 갈림길에서 산경표를 묻다
백운산 정상을 뒤로하자마자 대간 마루금은 왼쪽으로 크게 휘어지며 급격히 고도를 낮춘다. 행정구역이 함양군 백전면에서 서상면으로 바뀌는 이 지점은 지리산의 거대한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줄기로 접어드는 경계다. 좌측으로는 금남호남정맥의 기둥인 장안산(1,237.4m)이 육중한 자태를 드러내고, 정면으로는 뾰족한 영취산(1,075m)이 수줍게 머리를 내밀고 있다. 등로 곳곳에는 지난겨울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꺾인 나뭇가지들이 산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1085.3봉을 지나 안부에 내려서니 선바위 방향으로 무령고개행 길이 선명하다. 이 길로 하산을 하면 무령고개에서 2026. 1. 13. 완공한 장수산악관광안내센터에서 산행자료를 얻을 수 있으며, 이 센터 바로 아래에 요천의 발원지인 무령샘을 확인할 수 있다. 산죽밭을 5분 정도 더 치고 오르자,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살짝 기울어진 정상석이 이제는 똑바로 선 채 우리를 맞이한다.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이 갈라져 나가는 분기점, 영취산(靈鷲山)이다. 낙남정맥에 이어 대간길에서 만나는 두 번째 정맥과의 조우다.

세 물줄기의 분수령, 삼파수(三派水)의 지혜
영취산 정상에 서니 장 감독의 머릿속은 지형도와 산경표의 데이터를 맞추느라 분주해 보인다.
“형, 여기가 그 영취산이네.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셨던 인도의 영축산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곳.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에 따라 대간과 정맥이 갈리며 금강과 섬진의 물줄기를 가르는 요충지 맞지?”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깨우치는 장 감독의 대견한 물음에 슬쩍 허를 찔러보았다. 대간 북서쪽으로 금강이 흐른다면, 남서쪽으로는 무엇이 흐르느냐는 질문에 그는 지도를 펴들고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음… 설마 섬진강이 여기서 발원하는 건가?”
사실 섬진강의 공식 발원지는 정맥 줄기인 팔공산 인근의 데미샘이다. 강의 발원지는 유로가 가장 길고 일정 수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현대적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 역시 수분재 옆 뜬봉샘을 발원지로 본다.
하지만 영취산 안내판에 적힌 ‘삼파수(三派水)’라는 글귀는 우리 선조들의 또 다른 혜안을 보여준다. 이곳은 북서쪽의 금강, 남서쪽의 섬진강뿐만 아니라, 동쪽 골짜기로 흐른 물이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영취산은 한반도의 주요 3대 수계인 금강, 섬진강, 낙동강이 제 갈 길을 찾아 나뉘는 명실상부한 ‘세 물줄기의 모태’인 셈이다.

정맥은 반드시 대간에서 갈려야 하는가?
지도를 유심히 뜯어보던 장 감독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대간에서 직접 갈라지지 않고, ‘금남호남정맥’이라는 겹침줄기를 거쳐 나뉘는 구조가 산경표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장 감독, 누구도 정맥이 반드시 대간에서 직접 갈라져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어. ‘산경표’나 ‘여지고’ 어디에도 그런 규정은 없지. 정맥은 본래 10대 강을 구획하는 줄기를 의미해. 강줄기를 따라가다 보니 부득이 호남과 금남의 공통 구간이 생겼고, 선조들은 이를 ‘금남호남정맥’이라 명명했던 거야. 물의 흐름을 우선시했던 지극히 필연적이고 실용적인 명명법이지.”
우리가 익숙한 ‘대간-정맥-지맥’의 수직적 서열 구조는 사실 현대에 들어 체계화된 개념이다. 조선의 산경표는 철저히 유교적 질서와 행정적 요충지를 고려했다. 한북정맥이 한양을 지나고, 금남정맥이 공주와 부여로 향하며, 낙남정맥이 김해에서 멈췄던 것은 당시 사람들의 삶의 터전과 산줄기를 하나로 보았던 독특한 세계관의 반영이다.

영취산인가, 장안산인가? 고지도의 수수께끼
장 감독의 궁금증은 지명의 유래로 이어진다. ‘산경표’ 백두대간 편에는 영취산 대신 ‘장안치(長安峙)’라는 고개 이름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좋은 지적이야. 하지만 그 ‘산경표’ 금남호남정맥 편에는 ‘장안산’이라 기록되어 있어 큰 문제는 아니지. 흥미로운 건 고지도의 기록이야. 옛 장수현 지도에는 두 산이 구분되어 있지만, 안의현 지도에는 영취산이 아예 없거든. 심지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취산은 일명 장안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영취산을 독립된 봉우리로 볼 것인지, 장안산의 한 줄기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나는 현지 주민들의 목소리가 담긴 읍지(邑誌)의 기록을 중시하는 편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전국을 누볐다는 전설과 달리, 지도는 결국 현지의 구술과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된다. 현지인들이 같은 산으로 보았다면, 그 지리적 정체성을 존중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제 모양을 갖춘 영취산 정상석 앞에 서서, 우리는 복잡하고도 오묘한 산줄기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대간의 줄기에서 정맥의 가지가 뻗어 나가듯, 우리의 이야기도 이제 육십령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갈 채비를 마쳤다.

백두대간과 삼국사기를 넘은 가야의 숨결
영취산을 뒤로하고 30분 남짓 편안한 산길을 따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슬그머니 고도를 낮추며 뻗어 나가는 덕운봉(983m) 삼거리에 닿는다. 대간 마루금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덕운봉은 조망도 없고, 그 흔한 정상석조차 허락되지 않은 곳이다. 그곳의 적막은 오롯이 일반 산행객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우리는 대간의 맥을 온전히 잇기 위해 다시금 북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북바위에 올라서니 발아래로 대곡호가 크게 보이고, 그 뒤로 백화산의 웅장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통영·대전 고속도로의 궤적을 굽어보며, 아스라이 멀리 보이는 논개 생가의 위치를 가늠해 본다. 927.5봉의 조망터를 지나 민령에 닿았을 때, 산중의 평화로운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발아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이다. 현대 문명의 소리가 대간의 능선까지 치고 올라오는 그 묘한 이질감 속에서, 나는 시공을 초월한 한 세력의 흔적을 목격한다.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육중한 교각 바로 뒤, 백화산 끝자락에 고요히 몸을 눕힌 삼봉리 가야고분군과 마주한다. 이곳 장수 땅은 비단 삼봉리뿐만이 아니다. 삼고리, 호덕리, 장계리, 월강리, 동촌리 등 굽이치는 산자락 곳곳에서 같은 핏줄을 나눈 고분군들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우리 고대사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이다. 남원 아영의 두락리·유곡리 고분군이 백두대간의 동쪽, 즉 이동(以東)의 산물이라면, 이곳 장수의 발견은 가야의 기상이 험준한 마루금인 백두대간을 넘어 그 이서(以西) 지방까지 거침없이 뻗어 나갔음을 입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흔적은 무덤 속에만 갇혀 있지 않다. 원형 집수정(集水井)을 세 개나 갖춘 완벽한 방어 기지인 침령산성이 법화산 자락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바로 옆 봉화산으로 결집하는 110여 개의 봉화는 산줄기를 타고 북으로는 금산, 서로는 전주에 이를 정도다. 이는 장수를 중심으로 한 가야 세력이 얼마나 강력한 통치력과 정보망을 행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디 그뿐인가. 골짜기마다 확인된 70여 개소의 철 생산 유적, 특히 덕유 서봉 바로 아래 장계면 명덕리 대적골의 흔적은 경탄을 자아낸다. 원료인 철광석과 연료인 숯, 그리고 이를 제련할 첨단기술까지 완벽히 갖추었던 이 장계분지의 가야는 결코 가야연맹체의 일부분이나 변방의 소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국방과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철의 왕국'이라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 없는 위세를 떨쳤다. 백두대간이라는 거대한 자연 장벽을 넘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철의 문명을 꽃피웠던 그 당당한 역사를 이제 우리는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장수가야'라는 이름으로 불러주는 건 어떨까? 그것이 대간의 거친 산행길 곳곳에 뜨거운 숨결을 남긴 고대인들에 대한 정당한 예우가 아닐까? 장수는 고대부터 하늘의 기운과 땅의 철이 만나 찬란한 꽃을 피운 약속의 땅이었다. 그 중심에 우뚝 선 '백화산(白華山)'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야는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남해로 나아간 것에 그치지 않았었다. 그들은 육십령을 교두보 삼아 금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하여 당당한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ㅇ다. 이제 장수의 가야 유산들도 '남원 가야고분군'처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세계에 알려야 할 때다. 이렇듯 대간의 마루금을 걷는 이 길은, 단순한 산행을 넘어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맥을 찾는 고귀한 여정이다.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한 왜곡된 사관이나, 승자의 기록에만 매몰된 삼국사기적 관점을 넘어 이제 역사책을 다시 써야 할 지점에 이른 것이다.

깃대봉이 아닌 ‘구시봉(1014.3m)’, 제 이름을 되찾다
민령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다. 이곳은 과거 민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지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 살기에 필수적인 물줄기를 이 밋밋한 지형에서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차라리 그 생김새대로 '밋밋한 고개'라 하여 '민령(밋밋령)'이라 불린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품어본다.
민령의 운치 있는 소나무를 뒤로하고 철쭉 터널을 지난다. 육산(肉山) 특유의 부드러움을 만끽하며 걷다 보면, 이번 구간의 마지막 봉우리인 구시봉에 닿는다. 이곳은 2006년 이전까지 우리에게 '깃대봉'으로 더 익숙했던 곳이다.
"형, 그럼 깃대봉이라는 이름은 왜 붙은 거야? 백제와 신라 군사들이 승전 깃발이라도 꽂았던 걸까?"
카메라를 든 장 감독의 물음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런 전설도 떠돌지만, 전국의 수많은 ‘깃대봉’은 대개 일제강점기의 서글픈 잔재야. 우리 국토를 정밀하게 측량하여 수탈하기 위해 산봉우리마다 붉은 깃발을 꽂았던 일제의 흔적이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지."
다행히 2006년 1월, 이 봉우리는 식민지의 때를 벗고 '구시봉'이라는 제 이름을 당당히 되찾았다. '구시'란 소나 돼지의 먹이를 담는 '여물통'의 방언인데, 봉우리의 생김새가 이를 닮아 붙여진 참으로 정겹고 우리다운 이름이다.
구시봉 정상에서 고개를 들면 덕유산의 정취가 가위 압도적으로 밀려온다. 특히 덕유의 초입에 버티고 서 있는 할미봉 정상의 거대한 바위들은 백미 중의 백미다. 만약 눈 덮인 겨울날 이곳에 선다면, 마치 히말라야의 고봉을 마주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터. 대간을 걷는 이들라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산꾼의 정이 담긴 참샘과 육십령의 변화
육십령으로 내려가는 길목 우측으로 수량이 풍부한 참샘이 산객을 반긴다. 마루금 산행에서 이토록 정갈하게 관리된 샘터를 만난다는 건 여간 행운이 아니다.
“이 샘이 내가 아까 얘기한 ‘준희’ 선생의 작품이지. 전국의 산줄기를 돌며 숨은 물길을 찾아 샘터를 만드는 것이 그분의 평생 소망이었거든. 함께하던 동료가 먼저 세상을 떠나 지금은 작업이 멈췄지만, 이 시원한 물 한 모금에는 산을 사랑하는 이들의 지극한 정성이 담겨 있는 셈이야.”

육십령의 빈터에서 다음을 기약하다.
마지막 하산길은 휴게소 주차장 방향으로 이어진다. 도착한 육십령(六十嶺)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일제가 맥을 끊어놓았던 고갯마루에 2012년부터 시작된 ‘백두대간 생태축 복원 사업’을 통해 거대한 터널이 만들어졌고, 그 위로 끊어졌던 산줄기가 다시 이어졌다.
이 복원 사업은 산행의 들머리 풍경도 바꾸어 놓았다. 영취산 방향(남진)의 들머리는 여전하지만, 이제 봉황봉(남덕유산)을 향하는 북진의 길은 휴게소 계단을 통해 당당하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이어진 산줄기처럼, 우리의 대간 여정도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며 육십령에서 한 호흡을 고른다.
그런데 이 육십령 아래로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리며 산 아래 지방도로의 역할이 축소된 탓일까. 한때 산객들의 쉼터였던 육십령 휴게소는 지난 2024년 5월경 철거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텅 빈 휴게소 자리가 초봄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맞물려 유독 쓸쓸하게 다가온다.
번듯했던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른 바람만이 맴돌고, 그 공허함이 산행의 고단함보다 더 깊게 발목을 잡는다. 그 쓸쓸함을 뒤로하고 구석에 있는 정자에 올라 다시 고개를 든다. 저 멀리 할미봉과 서봉이 묵직한 자태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금은 비록 빈터가 된 육십령의 풍경에 마음이 시리지만, 산줄기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 다음 여정을 손짓한다.
"장 감독, 오늘은 여기까지 하세. 저 봉우리들은 내일의 몫으로 남겨두고 말이야."
정자 기둥에 기대어 덕유의 초입을 눈에 담으며, 다음 산행의 마루금을 그려본다. 육십령의 적막 속에 대간의 숨결만이 깊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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