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의 품을 벗어나 덕유를 향하는 길목에서
“이제 지리산 구간은 다 끝났나?”
장감독이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묻는다. 백두대간 남부의 기둥인 지리산을 빠져나온다는 사실이 못내 섭섭한 모양이다. 하지만 참으로 대견한 일이다. 산길에 익숙지 않은 그가, 결코 짧지 않은 지리산 주릉을 세 구간으로 나누어 묵묵히 받아내지 않았던가. ‘혼자 가면 빨리 가고, 여럿이 가면 멀리 간다’라는 산꾼들의 평범한 격언이 새삼 가슴에 뜨겁게 와닿는 순간이다.
문제는 이번 구간의 길이다. 당일 산행으로 끊기에는 참으로 애매한 거리다. 중재까지는 약 12km,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무령고개까지 가면 21km 정도가 되는데, 거기서 남은 영취산~육십령 구간 12km가 다시 숙제로 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장감독은 산행에 탄력이 붙었는지 “한 방에 끊자”라며 겁 없는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도상 거리만 31km에 달하는 산길을 단숨에 주파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람아, 산길 30km가 장난인 줄 알아? 그건 ‘J3’나 ‘무한도전’ 같은 철각들이나 하는 거지, 우리 같은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간 가랑이 찢어지네. 굳이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들머리를 복성이재가 아니라 육십령으로 잡세. 복성이재의 고갯마루 고도가 610m가 채 안 되는데, 백운산이 1,200m가 넘으니 거기서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남진(南進)이 훨씬 용이할 걸세.”
나의 합리적인 제안에도 장감독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그는 끝내 “북진으로 그냥 하자. 잘 따라갈게.”라며 고집을 피운다. 결국 우리는 계획했던 대로 북을 향해 다시 발을 내딛기로 한다. 이번 구간은 지리산을 뒤로하고 덕유산으로 다가가는 중간 가교와도 같다. 특히 영취산은 대간 줄기에서 금남호남정맥이라는 큰 가지를 뻗어내는 중한 지점이다. 이 맥은 마이산을 지나 조약봉에서 다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갈라지며 우리 국토의 골격을 완성한다. 또한 봉화산 부근에서 갈라지는 임천지맥의 흐름 역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일찍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덕유산의 정기가 서쪽으로는 마이산이 되고,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되었다고 그 맥락을 짚어내지 않았던가.

분홍빛 설렘, 매봉의 꽃길을 걷다
복성이재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면, 어느덧 시야는 온통 분홍빛 설렘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바로 이 구간의 첫 번째 관문이자 ‘철쭉의 바다’라 불리는 매봉(712.2m)이다. 사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곳엔 ‘매봉’이라는 번듯한 정상석조차 없었다. 지금도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으며, 당시엔 철쭉의 양도 그리 많지 않았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의 매봉은 천지개벽이라도 한 듯 달라졌다. 복성이재에서 매봉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길은 봄이면 마치 화려한 레드카펫을 깔아놓은 듯 장관을 이룬다. 이 아름다움은 오롯이 자연이 빚어낸 것만은 아니다. 산을 가꾸고 지키려는 장수군의 집요하고도 정성 어린 손길이 깊게 배어 있다. 본래 지리산 바래봉에 버금가는 철쭉 군락지였던 이곳에, 장수군은 산객들에게 더 큰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꾸준히 꽃밭 조성 사업을 펼쳐왔다. 능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철쭉 터널은 군(郡)에서 전략적으로 가꾼 ‘인공의 미’와 백두대간 본연의 ‘야생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장감독, 이 꽃길이 그냥 생긴 게 아니야. 장수군에서 작심하고 매달려 만든 ‘작품’이지. 지금도 저 아래에선 새로운 철쭉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나중에 우리가 다시 올 땐 이 능선 전체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어.”
매봉 정상에서의 조망도 놓치면 안 된다. 복성이재에서 숲속을 헤치며 오느라 좀 답답했던 눈을 아영 벌판과 연비산~오봉산~삼봉산으로 이어지는 임천지맥 라인이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준다. 물론 지나온 대간길의 아막산성터와 좌측의 왕산과 황매산, 뒤로는 지리의 천왕봉 등 그 연봉들의 흐름도 눈에 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측 번암의 요천지맥과 팔공산부터 개동산을 거쳐 천황산으로 이어지는 흐름도 빠뜨리면 절대 안 된다.
“형, 요천지맥의 개동산이 보이니 팔공산도 보이겠고, 그렇다면 금남호남정맥도 곧 보이겠네. 그리고 임천지맥이라고 하니 저 봉화산 바로 위에서 우측으로 갈라지는 능선 맞지? 이 매봉에서의 조망도 정말 장난이 아니네!”
“그래. 이름도 그렇잖아. 기억하고 있나? 이 매봉의 원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고구려 말 ‘수리’에서 온 것이잖아! '높다'는 뜻의 '수리'니까 높은 하늘을 나르는 ‘매’이겠고, 그러니 한자로는 매'응(鷹)'이나 수리 '취(鷲)'로 바뀌었지. 또 수리가 '시루'나 '써리' 등으로 바뀌었으니 수리봉, 매봉, 응봉, 취봉, 증봉, 시루봉, 써리봉, 싸리재까지 다 한 뿌리인 셈이고.”

데크를 따라 치재로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철쭉 터널이다. 고갯마루에 정자가 보이고, 그 철쭉의 끝자락에 봉화산의 봉화대와 데크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온다. 봉화산 우측으로는 대봉산의 계관봉과 천왕봉이 뚜렷하게 그 위용을 드러낸다. 치재 정자 옆 큰 표지석에는 ‘봉수왕국 전북가야’라고 표기되어 있다.
“형,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과거에는 가야가 낙동강 유역인 경상도 지역에만 국한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고고학적 조사 결과, 전북 지역에서도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가야 세력이 존재했음이 밝혀지면서 붙여진 명칭이야. 즉 전북 동부 산악 지대에는 약 100개에 달하는 가야 시대의 봉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가야 세력이 백제나 신라와 국경을 맞대며 매우 체계적이고 긴밀한 정보 통신망을 구축했음을 의미하지. 산줄기마다 봉수를 세워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 빠르게 대처했던 ‘통신 강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니,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통신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민족인가 봐.”

나는 장감독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또한 이 지역은 당시 ‘철의 왕국’이라 불릴 만큼 제철 유적이 풍부해. 특히 장수와 남원 일대에서는 철을 제련하던 대규모 야철지들이 확인되었는데, 여기서 생산된 고품질의 철이 가야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근간이 되었지. 일본식 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를 제대로 다시 써야 할 대목이야. 참고로 내가 임천지맥을 할 때 직접 본 건데, 이 부근의 두락리와 유곡리에서 수백 기에 달하는 고분과 유물이 출토되었고 2023년 9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까지 등재되었어. 시간 되면 꼭 한번 들러보자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곳 지명이 ‘치재’임에도 안내판의 표기는 ‘지재’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지명의 정확성은 땅의 역사를 지키는 기본이기에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치재에서 봉화산으로 오르는 능선은 완만하다. 하지만 그 완만함이 겨울 눈길을 만나면 길 찾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표지띠와 나무 사이의 간격을 유념하며 신중히 발을 옮겨야 한다. 걸음을 좀 더 재촉하면 탁 트인 조망이 기다리고 있는 봉화산에 닿는다. 봉화대 모형과 정상석, 삼각점(함양 23)이 반겨주는 이곳에서의 조망은 가위 일품이다.

좌측으로는 동화저수지가 보이고 그 너머 우측으로 팔공산(1149.4m)이 위용을 자랑한다. 뒤를 돌아보면 임천지맥 사이로 광주대구고속도로와 매치, 그리고 황산이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천왕봉을 중심으로 중봉과 웅석봉까지 시야에 잡힌다. 우측으로 지리의 주릉을 따라 반야봉, 만복대가 이어지고, 수정봉에서 고남산까지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날 산행은 큰 성과를 거둔 셈이다.
“어떠냐? 대단하지?”
“와! 일망무제(一望無際)! 형, 정말 대단하다. 저게 지리산 줄기고, 뒤가 우리가 걸어온 대간길이네. 저 동화저수지 건너는 요천지맥이고, 저게 팔공산이란 말이지?”
장감독의 감탄사가 봉화산의 시원한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간다. 지리산의 품을 벗어나 덕유로 향하는 이 길목에서, 우리는 우리 땅의 맥락과 역사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지형의 가치와 임천지맥의 이해
산이 주는 아름다움에 취해 자칫 놓치기 쉬운 지형적 가치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대화가 이어진다. 봉화산 정자 뒤편에서 우측으로 낮게 흐르는 산줄기는 전북 남원시와 경남 함양군의 경계인 ‘도계(道界)’를 이룬다. 저 아래 고속도로가 가로지르는 낮은 고개 ‘매치’도 바로 그 선명한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줄기의 흐름, 즉 수계(水系)의 원리다. 봉화산 우측으로 흘러내린 물은 임천으로 모여 남강으로 향하고, 도계 너머의 물은 위천으로 모여 결국 남강에서 하나로 만난다. 이 산줄기는 임천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되는데, 도상 거리는 약 38.2km에 달한다. 이것이 바로 ‘임천지맥(臨川枝脈, 연비지맥)’의 정체다. 지도를 거꾸로 훑어 올라오며 맥을 확인하는 장감독의 눈빛이 벌 산줄기의 개념을 완전히 꿰찬 듯하다.
“그래, 이제는 알지. 그러니까 저 지맥이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이 산내에 모여 임천이 되고, 그 임천은 상위 등급의 물줄기인 남강에 합수되잖아. 그 합수점에서 이 지맥이 맥을 다하게 된다는 거 아니야? 그게 형이 말한 ‘합수점 요건’이지?”
“정확해. 그걸 특히 ‘물줄기 요건’이라고 하지. 그런데 우리가 지금 걷는 길은 최고 등급의 산줄기인 백두대간이잖아. 지맥이라는 이름을 얻으려면 이 대간이나 정맥처럼 상위 등급의 줄기에서 가지를 쳐 나와야 해. 이걸 ‘산줄기 요건’이라고 불러. 여기에 마지막으로 도상 거리 30km 이상이라는 ‘길이 요건’까지 충족해야 비로소 하나의 지맥이 완성되는 거지.”

* 합수점형 지맥의 요건
이를 학술적으로 다시 정리하자면, 지맥(枝脈)이라는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필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산줄기 요건으로 백두대간이나 정맥, 혹은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지맥에서 분기한 줄기여야 한다.
둘째, 물줄기 요건으로 분기 지점 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그보다 상위 등급의 물줄기와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해야 한다.
셋째, 길이 요건으로 산줄기의 전체 도상 거리가 30km 이상이어야 한다.
이러한 요건을 갖춘 지맥의 이름은 그 물줄기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게 되는 것이니, 이 구간의 줄기 역시 임천의 이름을 빌려 ‘임천지맥’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형 공부를 뒤로하고 진행 방향을 바라보면 봉화산 쉼터에 임도와 정자가 나타난다. 이 임도 사거리에서 좌측 길을 따라 내려가면 번암의 하동마을로 하산해 743번 도로에 접속할 수 있는데 그 거리는 무려 6.9km에 달한다. 탈출로로서는 부적합하다는 얘기다. 다만 우측 아영의 부동마을로 가는 임도는 상대적으로 짧아 탈출로나 들머리로 요긴하게 이용되는 분위기다. 어쨌든 가을이면 은빛의 억새꽃이 바다를 이루는 봉화산에서 10여 분을 내려오면 만나는 쉼터다. 다만 이곳 쉼터 주변의 나무 계단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파손되어 혹시나 안전사고의 원인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내 임천지맥(신산경표에서는 연비지맥) 갈림길에 들어서면 우측으로 함양읍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옥잠봉(703.5m)과 이 지맥의 최고봉인 연비산(843.1m)이 첩첩이 쌓인 산그림자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제부터 남원시와는 이별하고 온전하게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과 전라북도 장수군의 도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 합수점형 지맥 : 지맥의 유형으로는 합수점형과 울타리형 그리고 산줄기형 등 세 가지가 있다.

산줄기, 물줄기와 행정구역의 이해
산행의 묘미는 단순히 정상에 서는 것이 아니라, 발아래 굽이치는 능선과 물길을 보며 그 땅에 깃든 삶의 무늬를 읽어내는 데 있다.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니 새로운 산줄기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해발 539m, 금남호남정맥의 등줄기가 잠시 숨을 고르는 그 고갯마루에는 한때 사람들의 온기가 머물렀다. 굽이치는 길을 따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 차량들은 이곳에서 멈춰 섰고, 운전자들은 주유기 앞에 차를 세우며 마른 목을 축였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그 풍경은 이미 빛바랜 기억이 되었다. 그 수분령 우측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며 위용을 드러내는 장안산. 바로 금남호남정맥의 첫 봉우리이다.

수분령은 이름 그대로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계(分水界)라는 뜻을 품고 있다. 떨어지는 빗물 한 방울이 이 고개 어디에 맺히느냐에 따라 한 줄기는 금강이 되어 서해로, 다른 한 줄기는 섬진강이 되어 남해로 가야 하는 즉 운명이 갈리는 중한 지점이다.
사실 생활권을 결정짓는 것은 산이 아니라 물이었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 시절, 사람들의 삶을 규정한 것은 행정구역의 선이 아니라 물길의 흐름이었다. 번암면 지지리 사람들을 예로 들어보자. 직선거리로는 장수읍이 8km로 가장 가깝고, 낙동강 유역인 함양은 15km, 섬진강 유역인 남원은 25km나 된다.
수치상으로는 장수가 제일 가깝지만, 지지리 사람들이 장수 장을 보러 가려면 해발 930m의 험준한 무령고개를 넘어야 했다. 반면 남원으로 향하는 길은 멀긴 해도 물길을 따라 걷는 평탄한 길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직선거리의 가까움' 대신 '물길의 편안함'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지지리가 장수군에 속해 있으면서도 정작 생활권으로는 가장 먼 동네가 된 이유다.

번암의 지지리, 논곡리, 사암리, 유정리 사람들이 험한 산줄기로 가로막혀 직접적인 왕래가 적었음에도 같은 말씨를 쓰고 같은 음식 맛을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모두 요천(蓼川) 물가에 사는 사람들로서 '남원'이라는 거대한 문화적 구심점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산줄기는 사람을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물길은 사람과 문화를 하나로 묶어주는 혈관 역할을 한다. 생활권을 구분하는 진정한 기준은 산줄기가 아니라 물길이며, 그 물길이 모이는 도시가 곧 삶의 중심이 되는 법이다. 사실 번암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만 해도 엄연한 남원 땅이었다. 일제가 인위적으로 그어버린 선 때문에 지금은 장수군에 속해 있지만, 땅의 역사와 사람의 숨결은 여전히 남원을 향해 흐르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 - 백용성 선사와 고운 최치원
물론 물길이 닿지 않아도 사람의 의지가 산을 넘는 일도 있었다. 중재(중치)를 통해 번암 사람들과 함양 사람들이 교류했던 흔적들이 그러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선사다. 번암 죽림리에서 태어난 선사는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함양군 백전면에 '화과원(華果院)'을 세웠다.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실천하며 구국의 결의를 다졌던 그분은 아마도 이 백두대간의 중재를 숱하게 넘나들었으리라.
한편, 함양의 최고지에 있는 암자 상연대(上蓮臺)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성지다. 이곳은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재직할 당시, 어머니의 안녕을 빌며 기도를 올리던 중 연꽃을 타고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여 이 상연대를 짓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화과원에서 상연대를 거쳐 백운산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을 걷는 것도 의미가 있겠네!”
“맞아. 백용성 선사의 생가가 있는 죽림선원 들러 그분이 주창하신 생활불교의 참뜻을 먼저 새겨보는 것도 좋겠지. 거기서 화과원으로 넘어가 선사의 고결한 독립 정신을 기리고, 다시 최치원 선생의 효심 어린 설화가 깃든 상연대를 거쳐 백운산 정상에 오르는 거야. 그 길은 그야말로 우리 근현대사와 고대사가 산줄기 위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보석 같은 길이 될 걸세.”
나의 대답에 장감독의 눈빛이 다시금 반짝인다. 산행의 피로보다 그 길에 담긴 이야기의 무게가 더 큰 설렘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백운산(1,278.9m)이라는 거대한 산체는 단순히 높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백용성과 최치원이라는 두 거인의 발자취를 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라보는 마지막 조망
이제 백운산까지 가는 동안 조망처는 더 이상 없다. 숲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니, 대간길의 파노라마가 그야말로 절정을 이룬다.
좌측으로는 금남호남정맥의 출발점인 수분령과 장안산의 장쾌한 능선이 하늘을 긋고, 중앙으로는 우리가 기어이 마주해야 할 백운산의 묵직한 존재감이 시야를 압도한다. 그 우측으로는 대봉산의 천왕봉과 계관봉이 이루는 수려한 산그림자가 첩첩이 쌓여 장관을 연출한다. 이 장엄한 흐름을 보고 있노라니 산줄기와 물줄기가 빚어낸 이 땅의 역사가 얼마나 깊고 오묘한지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광대치에서 월경산으로
조망이 주는 감동을 뒤로하고 발길을 재촉해 광대치에 닿는다. 이 고개 역시 예전에는 번암의 광대동에서 광대골을 타고 올라와 백전의 대상동 마을과 정을 나누던 통로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그 옛길의 숨결은 희미해지고 고개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한 듯 보여 씁쓸함이 스친다.
약초 재배 단지를 통과하자마자 나타나는 철조망에는 수많은 대간꾼의 이름이 적힌 리본들이 반갑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아는 이들의 표지띠를 찾아보며,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선배 산꾼들의 숨결을 기억해 보는 것도 대간 산행이 주는 작은 즐거움이다.

곧이어 삼거리가 나오고 월경산 이정표가 나타난다. 하지만 실제 정상은 이정표 우측 뒤편의 희미한 길을 따라 약 7분 정도 더 발품을 팔아야 만날 수 있다. 작은 헬기장 흔적과 삼각점이 남은 그곳에는, 아쉽게도 우리나라 최고의 산꾼 ‘준희’ 님의 정겨운 안내판은 온데간데없다. 대신 2024년 서울의 한 산악회에서 세운 금속 정상주(頂上柱, 981.9m)만이 차가운 빛을 발하며 지친 산객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다.

중재로 내려서는 길
월경산의 고요함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잇는다. 무릎에 힘을 싣고 가파른 등로를 한참이나 내려오면, 드디어 오늘 구간의 주요 기착지인 중재(중치)로 떨어진다. 지리산을 벗어나 덕유로 향하는 이 긴 호흡의 중간 지점에서, 산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겸손하게 몸을 낮추라 이르는 듯하다.
“형, 여기가 아까 얘기했던 백용성 선사께서 수도 없이 넘어 다니셨다던 그 중재로구만. 우측에는 민박집도 있고 거기서 중재 마을로 내갈 수 있고, 좌측으로는 지지리로 가게 되겠네.”
장감독이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이미 짙은 피로가 깔려 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리산의 여운과 매봉의 꽃길, 그리고 봉화산의 조망에 취해 달려왔으나 몸은 정직한 법이다.
“여기서 1.6km 정도 더 가면 중고개재가 나오고, 거기서도 우틀하면 중기마을, 좌틀하면 지지마을로 탈출하는 길이 있지.”
나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장감독의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진다. 호기롭게 ‘북진 한 방’을 외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탈진의 기색이 역력하다.
“형, 갑자기 기운이 다 빠지는 것 같네. 더 이상 가기 힘들 거 같은데 여기서 탈출하는 건 어떨까?”
“그래, 처음에는 그게 쉽지 않아. 사실은 지금부터가 진짜 난코스야. 잘 생각했어. 무리하지 말고 여기서 이 중재에 얽힌 이야기나 나누며 오늘 대간길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배낭을 내려놓고 앉으니, 중재의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사실 이 고개는 함양 백전의 중재 마을과 연결되는데, 예전에는 장수 번암보다 함양 백전 쪽의 수요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만큼 보부상들에게는 '숨 가쁜 쉼터'이자 소중한 주막거리였다.
남원 요천의 물산이 함양으로 넘어가고, 함양의 깊은 산에서 난 약초와 곡물이 전라도로 넘어오던 길목. 지금은 잡풀이 무성하지만, 과거 이곳엔 고개를 넘기 전 목을 축이던 주막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보부상들은 막걸리 한 사발에 고단함을 씻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보를 나누었을 것이고. '중재를 넘어야 비로소 영남 땅을 밟는다.'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이 고개는 양 도를 가르는 심리적 경계선이었다.

“장감독, 이 길을 ‘소금길’이라고도 불렀어. 서해안에서 올라온 소금이 남원을 거쳐 함양과 거창 내륙으로 들어갈 때 이 중재를 거쳤거든. 험준한 백운산 주릉을 타는 대신, 그나마 낮은 이 고개를 택해 무거운 소금 짐을 지고 날랐던 민초들의 땀방울이 이 길 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셈이지. 번암 지지리 사람들이 함양 사람들과 말씨는 달라도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건 다 이 고갯길 덕분이야.”
내 목소리가 낮아지자, 장 감독은 가만히 억새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이 길엔 따뜻한 정만 흐른 건 아니다. 지리산과 덕유산이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 사이에 낀 탓에, 한국전쟁 전후로는 빨치산들의 주요 이동 경로가 되기도 했다. 군경 토벌대와 빨치산이 이 고개를 차지하려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평화로워 보이는 저 억새 물결 아래에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인 총성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용성 선사의 구국을 향한 발걸음까지 더해지면 이 고개는 그야말로 역사의 전시장이나 다름없다.
"형, 이 고갯마루 돌무더기 하나에도 사연이 없는 게 없네."
장감독이 중재의 낡은 이정표를 만지며 나직이 중얼거린다. 그의 손길에서 오늘 산행의 아쉬움과 우리 땅에 대한 경외감이 동시에 묻어난다. 비록 오늘 백운산 정상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중재의 흙먼지 속에서 우리는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진짜 대간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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