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아산 전투는 농민군으로서는 애초에 이길 수 없었던 전투였다.
장동마을을 우측에 끼고 밭고랑과 무덤을 지나 희미한 대간 길을 이어간다. 숲으로 들어서 크게 우틀하여 방아산으로 향하는 완만한 길을 걷다 보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반대편 산동 부절리 쪽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게 된다. 1894년 11월 14일, 누군가는 이 길을 편안히 지켰으나, 누군가는 저 아래 ‘시케골’에서 피 냄새 진동하는 사선을 넘어 기어올라야만 했다. 해발 640.3m. 그 숫자는 누군가에게는 안락한 조망의 높이였지만, 그날의 동학군에게는 목숨을 걸고도 닿지 못한 통한의 높이였다.

그 역사적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방산성삼거리에서 이정목을 따라 직진한다. 보통은 사면을 따라 진행하기 쉬우나 잠시 방아산(640.3m)을 들르기로 한다. 산 정상부에는 마한과 백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석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직경 30cm 남짓한 돌무더기들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이곳에서 지형을 살펴보면 당시의 전황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운봉읍의 최저지대에 있는 운봉읍사무소나 여원재의 해발고도가 약 460m 정도이니, 방아산성은 운봉 고원 쪽에서 보면 해발 180m 정도의 야산이나 언덕에 불과하다. 하지만 부절리 마을(해발 약 250m)에서 올려다보는 방아산은 하늘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이다. 실제 농민군이 무려 400m에 가까운 고도 차이를 극복해야 했던 서북쪽 사면은 가파르고 험준했다. 짚신을 신고 조총과 죽창을 든 농민군들에게 이 성벽은 넘을 수 없는 운명의 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가파른 골을 따라 내디디는 발걸음 위로 성벽의 화포와 화살, 돌덩이가 빗발쳤을 것이다. 앞서가던 동료들이 쓰러져 구르고, 그 피가 발등을 적시며 아래로 흐를 때 골짜기는 이미 시체로 가득 차 ‘시케골’로 변하고 있었다. 반면, 박봉양이 이끄는 수성군의 지원을 받는 민보군은 고원의 이점을 안고 부드러운 사면을 겨우 180m 올라와 앞선 화력으로 공격했다. 지형이 이미 승패를 결정지은, 동학군에게는 참혹할 만큼 불리한 싸움이었다.

방아치 동학혁명 유적지를 뒤로하고 봉우리 서너 개를 오르내리면 밧줄과 계단이 숨을 가쁘게 한다. 고남산이 가까워질 무렵 좌측으로 좁은 골짜기가 올라온다. 관암재다. 이곳 역시 그날 농민군의 한 부대가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다 쓰라린 패배를 맛본 곳이다. 방아산성에서 640.3m의 높이를 실감했다면, 이곳 관암재에서는 좁은 길목을 지키기 위해 쏟아졌을 포성과 비명을 듣는다. 운봉이라는 거대한 성채를 무너뜨리기 위해 민초들이 기어올랐던 그 백두대간의 능선은, 누군가에겐 가닿지 못한 낙원이자 통한의 능선이었다.

이성계는 고남산에서 왜적들을 내려다보며 승리를 확신했다.
그날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마지막 나무 계단을 딛고 일어서면 산불감시초소가 지키는 고남산(846.8m) 정상이다. 사방이 뻥 뚫린 조망이 보상처럼 다가온다. 발아래 펼쳐진 인월의 '병목안' 지형을 내려다본다. 640여 년 전, 이성계는 바로 이 자리에서 저 병목을 내려다보며 승전의 작전을 숙의하고 제를 올렸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나라를 구한 '승전의 사령부'였던 이 봉우리가 동학군에게는 끝내 허락되지 않은 '통곡의 벽'이었다는 사실이 역사의 지독한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846.8m의 고도는 변함없건만, 그 위를 스쳐 간 인간의 운명은 이토록 극명하게 엇갈린다.
* 승전의 사령부였던 봉우리 : 이래서 태조봉이며 제왕봉이라도 불린다. 이 이름에 비춰 고남산은 아직도 지리산의 영역에 속함을 알 수 있다.

남동쪽으로는 지나온 수정봉 너머로 만복대가 아스라하고, 지리산 서북 능선이 노고단을 향해 뻗어 나간다. 그 좌측으로는 반야봉이 특유의 둥근 자태를 뽐내며 솟아 있다.

시선을 서쪽으로 돌리면 요천 너머로 길게 늘어선 요천지맥과 그 옆을 시원하게 가르는 광주대구고속도로가 현대적인 선형을 그리며 달린다. 요천지맥의 주봉인 천황봉이 위용을 자랑하고, 그 곁에는 월석리(月席里)를 병풍처럼 에워싼 882.1봉이 육중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다.

고남산 정상에서 운봉 시내를 내려다보면 올해로 개교 119주년을 맞이한 운봉초등학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우측 서림 공원에는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두었는데, 그중 유독 우측 상단이 깨진 비석 하나가 눈에 밟힌다. 일명 ‘박봉양 장군비’라 불리는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跡碑)다. ‘도적을 때려잡은 공적’을 기록했다는 그 서늘한 문구 뒤편에는, 방아치 능선에서 지형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져간 동학 농민군들의 통한이 서려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서서히 올바른 대간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인 매요교회 구간
정상석에서의 기념 촬영을 뒤로하고 길은 임도와 산길을 번갈아 허락하며 고도를 낮춘다. 권포리 갈림길을 지나 통안재에서 편안한 임도를 버리고 다시 거친 숲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매요마을에 가까워질 무렵, 새로 설치된 이정목은 마을 안쪽이 아닌 능선 쪽 사치재 방향을 가리킨다. 예전에 마을 안으로 진행하며 헷갈렸던 대간 길을 바로잡으려는 남원시의 부단한 노력이 엿보여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올바른 대간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길의 끝자락은 조금 아쉽다. 제대로 된 대간 능선은 매요마을 뒤 언덕을 따라 매요교회로 이어져야 하지만, 대나무 숲과 민가가 가로막고 있어 온전한 통과가 쉽지 않다. 능선의 마루금을 고집하기보다 주민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자 잠시 길을 내어주고 마을 한 켠으로 들어선다. 이는 산객이 마땅히 가져야 할 예의이자 배려이기도 하다.

마을 길로 내려와 다 보면 대간꾼들의 영원한 오아시스였던 매요휴게실 앞에 멈춰 서게 된다. 지친 이들에게 따뜻한 라면 한 그릇과 시원한 음료를 내어주며 고단함을 달래주던 공순임 할머니의 정취는 이제 만날 수 없다. 지난 2021년 할머니가 별세하신 뒤 휴게소 문은 굳게 닫혔고, 그 넉넉했던 인심은 이제 전설이 되어 종주자들의 가슴속에만 깊이 새겨졌다. 이제 매요마을을 지나는 산객들은 할머니의 빈자리를 기리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낮지만 유치삼거리도 온전한 백두대간길이다.
길은 다시 이어져 ‘산경표’의 한 단락을 당당히 장식한 유치(柳峙)에 닿는다. 겉보기엔 평범한 평지 같지만, 이곳은 엄연히 남원 운봉과 장수 번암을 가르는 시계(市界)이자 백두대간의 능선길이다. 길 위에서 마주하는 빗방울 하나에도 오묘한 지리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즉,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 쪽으로 떨어진 물은 요천을 타고 섬진강으로 흐르고, 남원시 운봉읍 가산리 쪽으로 흐른 물은 람천과 남강을 거쳐 낙동강에 닿는다. 대간이 국토를 동서로 양분하는 거대한 분수계임을 장감독 또한 이 길 위에서 몸소 체득해 나간다.
“형, 그런데 여기는 버드나무가 많은 것도 아닌데 왜 버들 유(柳)자를 써서 유치라고 부르는 거야?”
장감독의 예리한 질문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지명이라는 것은 본래 단순했다. 옛사람들은 땅의 끝부분이나 뾰족하게 내민 곳을 ‘곶’이나 ‘꽃’이라 불렀고, 한자화 과정에서 곶(串), 화(花)나 화(華)로 옮겨지기도 했다. 서울의 양화진(楊花津)처럼 버드나무와 무관해 보이는 곳에 ‘버들’이 붙은 것은, 대개 ‘바깥쪽으로 벌어지다’라는 뜻의 ‘버드러지다’에서 온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기며 ‘버들’의 음(楊, 柳)이나 뜻을 빌렸기 때문이다. 이곳 유치 역시 람천으로 뻗어 나가는 대간의 끝자락, 즉 ‘벋은 곶’의 형상을 보고 지어진 이름이라 추론해 볼 수 있다.

황산의 함성에서 사치재의 뿌리까지
그 부드러운 이름 뒤로 시선은 어느덧 이성계의 황산 갈림길로 향한다. 멀리 황산을 조망하고 있노라면 1380년 이성계 장군이 왜군을 괴멸시켰던 그날의 함성이 고원의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하다. 숲으로 들어 554.4봉에 오르려면 삼거리가 나오고, 갈림길 우측으로 운봉과 아영을 가르는 면계(面界)를 따르면 명석재를 넘어 황산대첩의 현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황산 삼거리를 지나 이성계의 기개를 뒤로하고 다시 능선에 오르면, 길은 부드러운 흙길을 내어주며 사현(沙峴)이라고도 불리는 ‘사치재(沙峙岾, 500m)’로 이어진다. 88올림픽고속도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죽음의 도로’라 불릴 만큼 좁고 열악했던 그 길은 이제 광주대구고속도로라는 새 이름을 달고 시원하게 뚫린 왕복 4차로의 현대적 도로로 변신했다. 도로의 환골탈태와 맞물려 백두대간의 맥을 잇는 산객들의 발걸음에도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예전에는 대간 능선을 잇기 위해 고속도로 노면을 무단으로 횡단하거나, 고개 100m 아래에 뚫린 어둡고 좁은 토끼굴로 돌아서 진행해야만 했던 고단한 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로 위로 번듯하게 조성된 동물이동통로를 통해 어엿하게 대간 길을 잇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새로 닦인 동물이동통로 위를 걷는 편안함도 좋지만, 굳이 옛 도로의 흔적을 찾아 발길을 아래로 옮겨본다. 이제는 적막감마저 감돌고 대간꾼들의 애환이 서려 있던 그 옛날의 토끼굴을 확인해 보니, 문명의 속도가 산의 허리를 끊어놓았던 상처와 그 상처를 봉합하며 다시 이어진 대간 길의 역사가 터널 위로 오롯이 새겨져 있는 듯하다.

한편, 흔히 이 고개를 한자 뜻 그대로 '모래 고개'라 풀이하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리 옛말의 깊은 뿌리와 마주하게 된다. 우리말에서 '산'을 뜻하는 옛말 중에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몰'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몰'은 시대가 흐르며 '모리'를 거쳐 '모이', 그리고 중세 국어의 '뫼'로 변해왔다. 인천의 '모래내'나 평창의 '모래재'가 그러하듯, 이곳 사치재 역시 '몰(산) + 애(접사) + 재'가 합쳐진 '모래재', 즉 '산에 있는 고개'라는 소박하고도 당당한 우리 이름을 품고 있는 것이다.
후대에 이르러 이 정겨운 이름을 억지로 한자로 옮기다 보니, 소리 나는 대로 '모래 사(沙)' 자를 빌려 '사치(沙峙)'라는 다소 생경한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발밑에 서걱거리는 것은 풍화된 화강암의 잔해일지 모르나, 그 이름에 담긴 진실은 이 땅이 수천 년간 지켜온 '산의 고개'라는 본연의 모습이다. 이제 사치재는 더 이상 이름 모를 모래 언덕이 아니다. 백두대간의 척추를 이루는 '산(몰)' 그 자체의 고개임을 깨닫고 걷는 길, 그 발걸음이 한결 묵직하고 경건해진다.
사치재를 지나 아막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하는 새맥이재(조항치). 흔히 '새의 목'을 닮았다 하여 조항(鳥項)이라 풀이하지만, 이는 우리말의 뿌리를 거세한 작위적인 해석이자 한자의 굴레에 갇힌 표현일 뿐이다.
실상은 봉화산과 고남산이라는 거대한 두 산덩어리 사이를 잇는 가느다란 '사이목'이자,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다음 도약을 위해 스스로 몸을 조여 숨을 고르는 지형적 요충지다. '새의 목'이라는 박제된 이름보다, 두 거산을 잇는 '길목'이라는 생동감 넘치는 우리말이 이 산줄기의 실체에 훨씬 가깝다. 끊어질 듯 이어지며 기운을 모으는 이 잘록한 지점이야말로, 대간의 맥이 가장 세밀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국경의 칼끝, 아막산성에 서다
대간길은 요천지맥의 천황산을 멀리 보면서 ‘복성이뒷재’를 지나 아막산성에 닿는다. 대간길이 복성이재로 내려서기 전, 빽빽한 잡목 사이로 불현듯 나타나는 석성의 자취가 바로 아막산성이다. 해발 600m 고지에 둘레 633m로 조성된 이 성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붙었던 최전방 요새였다. 신라에서는 이곳을 '아막성'이라 불렀고, 백제에서는 '모산성(母山城)'이라 칭하며 서로 자기 땅이라 우겼을 만큼 전략적 가치가 컸던 곳이다.
이곳은 전라북도 남원(백제)과 경상남도 함양(신라)의 경계다. 백제가 호남 평야의 풍요로움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면, 신라는 백두대간을 넘어 서진(西進)하기 위해 이곳을 반드시 빼앗아야 했다.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운봉 고원과 함양의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적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관찰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였음을 증명한다.

세월이 덮어버린 석성의 운명
현재 아막산성은 정비되지 않은 채 잡목과 이끼 속에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거칠게 깎아 쌓아 올린 성벽의 돌들은 1,400년 전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와 칼과 창이 부딪치는 비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화려한 복원보다는 이렇듯 '석성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모습이 오히려 대간 길을 걷는 산객들에게는 더 깊은 역사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진달래 군락지를 지나 부드러운 능선 속에 숨은 삼각점을 보물찾기하듯 찾아내면, 마침내 751번 도로가 지나는 복성이재에 도착한다. 산줄기를 끊어놓은 도로 위에서, 방금 지나온 석성의 침묵과 현대의 소음이 묘하게 교차한다.

아막산성, 무너진 석성(石城)의 침묵 속에 3구간의 짐을 풀다
아막산성의 고요한 침묵을 뚫고 내려오면, 751번 지방도가 대간의 허리를 무심하게 베어 물고 있다. 아스팔트 열기 위에 서서 방금 지나온 천 년 전의 석성을 돌아보노라면, 길은 끊겼으나 역사는 이어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도로 우측 아영면 성리 마을은 쫓겨난 흥부가 부자가 되어 정착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흥부의 모델이 고려 말 귀화한 위구르인 장순룡일지도 모른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곱씹으며, 마음속으로 판소리 ‘흥부가’의 가락을 읊조려 본다. 이처럼 백두대간의 한 구간은 지리적 통찰과 역사, 그리고 설화의 숨결이 뒤섞인 채 복성이재에서 비로소 그 갈무리를 맺는다.
'백두대간 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제4구간 복성이재 ~ 중재 (약12.1km) (2) | 2026.04.02 |
|---|---|
| 백두대간 제5구간 중재 ~ 육십령 (약19km) (0) | 2026.03.26 |
|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제2구간 성삼재 ~ 여원재(연재) : 약21.3km (1) | 2026.03.14 |
| 제1-2구간. 벽소령 ~ 성삼재(약15.3km) (3) | 2026.03.13 |
| 제1-1구간. 천왕봉~벽소령(약11.4km) (0) | 2026.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