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구간 천왕봉~성삼재(26.7km)
백두대간 북진의 서막 : 삼도(三道)를 가르고 정맥을 깨우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로군. 긴장이 돼.”
천왕봉을 뒤로하고 내딛는 첫걸음에 팽팽한 긴장감이 실린다. 내가 가야 할 백두대간 북진의 첫 구간은 장쾌한 지리의 주릉이다. 이 길은 단순한 산길이 아니라, 국토의 허리를 가르는 엄중한 경계의 선이다. 함양군과 하동군의 군계를 따라 걷던 발길은 벽소령을 지나 삼각고지에 닿으며 비로소 전북 남원시와 만난다. 이때부터 대간길은 전북과 경남의 도계(道界)를 이루며 나란히 달린다. 그러다 날라리봉’(1501m)이라 불리던 삼도봉(三道峰)에 이르면, 전남 구례군까지 가세하여 영·호남의 세 갈래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 전북과 전남의 도계를 따라 이어지는 이 도도한 흐름은 대간의 관문인 성삼재(姓三岾)까지 쉼 없이 지속된다. 이 장쾌한 능선 위에서 특별히 마음이 머무는 곳은 아무래도 영신봉과 반야봉이다.
그중, 영신봉(靈神峰)은 자연지리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곳이다. 한반도 남단을 동서로 가르는 낙남정맥(洛南正脈)이 이곳에서 갈라져 나가기 때문이다. 국토의 혈맥이 분기하는 그 장엄한 현장을 걷는다는 것은 대간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을 준다. 반면, 반야봉(般若峰)은 인문지리적 측면에서 지리산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지혜를 뜻하는 '반야(般若)'라는 이름답게, 이곳은 문수 사상의 중심지로서 구도의 길을 걷던 수많은 선인의 사유(思惟)가 서린 곳이다. 지리산의 주봉은 천왕봉이나, 정신의 깊이는 반야봉에 닿아 있다는 말처럼 그 둥그스름한 봉우리는 늘 산객의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려준다. 경계의 선 위를 걸으며 대간의 기운을 느끼고, 정맥의 갈라짐을 보면서 선인들의 지혜를 되새기는 길. 이제 그 위대한 여정의 첫 페이지가 펼쳐진다.
* 날라리봉 : 국립공원공단에서는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등 삼 개 도가 만나는 곳이라 하여 1990년대 초 ‘삼도봉’으로 개명했다. 실은 이 봉우리가 낫의 날같이 뾰족하다고 하여 ‘낫날봉’이었다. 그게 시간이 흐르면서 음운이 변하여 날라리봉으로 되었던 것인데 애꿎게 이름만 나무란 꼴이다.

원시의 숨결을 간직한 칠선계곡과 하늘로 통하는 문
천왕봉의 장엄한 기운을 뒤로하고 백두대간의 여정을 이어가기 위해 천왕봉을 내려서노라면, 까마귀 한 마리가 길잡이인 양 앞서 날아오른다. 하늘 아래 첫 바위를 돌아서자마자 우측 목책 너머로 보이는 '출입금지' 표지판과 감시 카메라는 이곳이 인간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땅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낙동정맥 왕피북지맥(안일지맥)의 응봉산 덕풍계곡, 설악산 천불동 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장의 계곡이며 아름다움과 적요함으로 손꼽히는 칠선계곡 들머리이다. 사실 칠선계곡은 닿기가 너무도 어려워 더욱더 간절한 원시의 미(美)를 지닌 곳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산객의 추억과 한이 켜켜이 쌓인 곳이자, 여전히 태고의 원시림을 고이 간직한 지리산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제한탐방제’라는 이름의 빗장에 가로막혀 그 깊은 속살을 마음껏 들여다볼 수 없는 아쉬움은 발걸음마다 짙게 남는다. 잡목 속 안의 철계단 아래로 1964년 11월 28일 부산의 김경렬, 성산 등으로 이루어진 ‘지리산 동부 개척단’의 땀내와 거친 호흡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칠선계곡 : 칠선계곡 루트는 길기도 하지만 험악하기도 하여 1964년 11월 28일 부산의 김경렬, 성산 등으로 이루어진 ‘지리산 동부 개척단’에 처음으로 그 문이 열렸다. 당시 칠선계곡에서 곰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하니 험준한 곳인 것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 제한탐방제 : 칠선계곡(비선담 ~ 천왕봉 구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특별보호구역’이다. 자연 생태계 회복을 위해 평소에는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다가, 일 년 중 딱 4개월(5~6월, 9~10월) 동안만 공단 직원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문을 열어준다. 자세한 것은 ‘국립공원 예약시스템’ 참조.

아쉬움을 뒤로하고 날카로운 바윗길을 조심스레 내려가면, 마침내 통천문(通天門)에 다다른다. 부정한 자는 이 통천문으로 출입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름 그대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그 문을 나가기에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으나, 우리와는 달리 제석봉에서 천왕봉 방향으로 오르는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이다. 오죽하면 시인 고은은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적어도 지리산에서만큼은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을까! 그래서 그런가? 내려가는 길과는 달리 거꾸로 이곳을 통과하는 이들은 이 좁은 바위틈을 지나야 비로소 지리산의 신성한 영역으로 온전히 들어섰음을 실감하게 된다. 천왕샘 아래의 개천문으로 인해 그 존재감을 한층 더 느끼게 되는 문이다.

제석봉은 그 이름의 유래와 한자가 가진 의미로 일반 산봉우리에 비해 더 장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 이미지 뒤에 숨어 있는 고사목의 슬픈 얘기는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사실 지금의 제석봉은 연하선경과 더불어 사진작가들이 탐내는 지리 최고의 명소다. 비스듬히 누워 세월을 버티는 앙상한 고사목 지대는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낭만적인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이 본래 주목과 구상나무가 하늘을 가릴 만큼 빽빽한 밀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10만여 평의 이 너른 들판 같은 곳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꿋꿋했으나, 정작 숲을 무너뜨린 것은 전쟁이 아닌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었다. 자유당 시절, 주목이 고급 관상수와 가구재로 팔린다는 소문에 권력 실세들이 이 신성한 숲에 손을 댔다. 쇠파이프 레일을 깔아 소를 이용해 나무를 실어 나르던 그들은, 도벌의 실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증거인멸을 위해 고의로 불을 질렀다. 며칠간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찬란했던 원시림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이 비극을 듣고 나면 눈앞의 풍경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닌 아픈 상처로 다가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등로 좌우의 향적사와 제석당은 터만 남아 옛 기억을 붙잡고 있고, 무심한 샘물만이 이곳이 예전의 감로천(甘露泉)임을 증명할 뿐이다. 장터목으로 내려가기 전 전망대에 서니, 일출봉과 연하 선경이 지척이다. 발아래 중산리 계곡부터 하동 금오산으로 흐르는 낙동정맥의 줄기, 섬진강 건너 호남정맥의 백운산과 억불봉까지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온다. 장엄한 산의 흐름을 눈에 담으며, 지리산 종주의 쉼표인 장터목 대피소로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과거 장터목 대피소는 지금보다 훨씬 북적이는 야영장의 모습이었다. 현재 탁자와 빈 드럼통이 놓인 자리에는 울긋불긋한 텐트들이 어지럽게 들어차곤 했다.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무리의 소음, 요리 과정에서 나오는 냄새와 연기로 지리산의 맑은 공기를 오염시키던 소란스러운 풍경은, 그 시절 산꾼들에게는 하나의 통과의례 같은 추억이었을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천왕봉 일출에 대한 인간의 욕심이다. 밤새 술을 퍼마시느라 정상을 오를 기력을 잃은 '게으른 산꾼들'은 천왕봉 대신 영신봉 방향의 낮은 봉우리에 살짝 올라 일출을 맞이하곤 했다. 혹자는 아예 그곳에 터를 잡고 누워서 해를 기다린다고도 해 일출봉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그 게으름이 선사하는 풍경만큼은 전혀 가볍지 않다. 이곳에서 제석봉과 천왕봉을 배경으로 남기는 사진 한 장은 지리산 종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록 중 하나다.

일출봉의 숲길을 빠져나오면 비로소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연하봉의 비경이 펼쳐진다. 장터목의 소란함을 뒤로하고 원시의 고요함 속으로 다시금 발을 들이는 순간이다. '연하(煙霞)'의 사전적 의미는 안개와 노을을 뜻하지만, 그보다는 '고요한 산수의 경치'라는 풀이가 더 절묘하게 어울린다.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선경(仙境)의 뜻을 더해 보아도, 결국 연하선경은 '고요한 산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사실 수많은 선인이 이곳을 지났으나, 이 빼어난 아름다움에 가장 깊이 심취한 이는 아무래도 점필재 김종직이었으리라. 당시 이곳은 이름조차 없어 유몽인이나 남효온 같은 문장가들도 그저 무심히 지나쳤던 길이었다. 동행했던 유극기가 경탄하는 점필재를 보며 "이름을 지어달라" 청했을 때, 점필재는 무엇이라 답했을까? "고요한 산수 속에 운무가 피어오르고 노을이 어우러지니, 이를 일컬어 연하선경이라 함이 어떠한가." 그날 점필재가 이런 낭만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는 정작 "증거가 될 만한 것도 없는데 어찌 이름을 붙이겠는가!"라는 엄격한 한마디를 남긴 채 이곳을 지났다. 비록 선인들은 함부로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역설적으로 그 '이름 없음' 덕분에 이곳은 더욱 신비롭고 그윽한 선경으로 남았다. 이름에 갇히지 않은 풍경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형언할 수 없는 고요와 감동을 선사한다. 연하봉이 있는 지금의 연하선경을 이렇게 지난다.
연하선경의 황홀한 여운을 뒤로한 채 철계단을 딛고 암봉(1693.6m)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펼쳐지는 조망은 가히 압도적이다. 북쪽으로는 투구봉과 삼봉산을 잇는 임천지맥이 꿈틀대고, 그 우측으로는 오도재를 넘어 법화산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북서쪽 장항마을 좌측으로 덕두산과 바래봉이 세걸산, 만복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장관이 펼쳐지고, 지나온 방향으로는 낮은 목책 사이로 적당히 스틱을 딛으며 연하봉으로 향하는 산객의 모습과 그 뒤로 제석봉, 천왕봉에서 중봉과 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본류가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단 한 순간도 놓치기 아까워 연신 동영상을 돌리며 자문해 본다. "이토록 아름다운 바위 봉우리에 어찌 이름 하나 없을까?" 하지만 역시나, 누군가 이 비경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나 보다. 그 누군가는 이름 없던 이 바위 봉우리에 화장봉이라는 이름으로 숨결을 불어 넣었다. 화장봉이라 … 얼굴을 단장한다는 ‘화장(化粧)’보다는, 만물이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된 불교의 연화장 세계를 뜻하는 ‘화장(華藏)’이 이 풍경에는 훨씬 더 걸맞은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화장봉(華藏峰)이다.
다시 숲으로 몸을 든다. 바위 사이로 난 좁은 등로는 마치 신비로운 미로 같다. 숨 가쁜 오르막 대신 평탄하게 이어지는 이 구간은 걷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다독여준다. 한참을 걷다 좌측으로 거림마을이 언뜻 보일 무렵, 거대한 암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길은 봉우리를 직접 넘는 대신 우측 사면을 타고 부드럽게 돌아 나간다. 지도상에 고도 표기조차 되어 있지 않은 이 이름 없는 봉우리를 사람들은 '삼신봉'이라 부른단다. 문득 의구심이 스친다. '삼신봉'이라 하면 통상 낙남정맥의 삼신봉(1288.7m)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해발 1690m에 달하는 이 거봉에 같은 이름을 붙인 연유는 무엇일까?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배낭에 담은 채, 지리산의 깊은 품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 점필재 김종직 : 수많은 선인이 이곳을 지났으나, 이 빼어난 아름다움에 가장 깊이 심취한 이는 영남학파의 종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1431~1492)이었다. 그는 40세 되던 해인 1470년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2년 뒤 지리산을 유람하고 그 감흥을 담아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이라는 불멸의 산행기를 남겼다. 훗날 그의 제자 김일손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라는 피의 역사가 시작되지만, 적어도 이 길 위에서만큼은 그는 그저 산을 사랑한 선비였다.
* 함부로 이름 : 다만 남효온(1454~1492)은 ‘향적암을 떠나 소년대에 올랐다.’하여 연하봉을 소년대로 인식했다.
* 걸맞은 이름 : 불교지명설
* 풀리지 않는 궁금증 : 이 궁금증은 잠시 후 칠선봉에서 자연스럽게 풀린다.

편안했던 숲길도 잠시, 해발 1620m 안부에서 촛대봉으로 향하는 계단은 유독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선인(先人)들은 지리학적 비중이 큰 영신봉보다 오히려 이 촛대봉에 더 깊은 의미를 두었다. 그 애정만큼이나 촛대봉을 부르는 이름 또한 다채롭다. 김종직과 하달홍은 중봉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는데 특히 김종직은 증봉甑峰이라고 불렀으며,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 송병선은 촉봉燭峰 그 외 시루봉, 수리봉, 취봉鷲峰, 유몽인은 사자봉으로 불렀다.
* 계족봉 : 지명에 숨겨진 언어의 비밀 즉 '닭'인가, '높음'인가? 자세히 살펴본다.
1. 계족봉(鷄足峰), 닭의 발이 아닌 '높은 산'의 흔적 : 흔히 계족봉이라 하면 닭의 발 형상을 닮았다고 풀이하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고어의 흔적이 숨어 있다. 국어학적으로 ‘ᄃᆞᆯ’은 ‘높다(達)’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달동네’가 단순히 달이 잘 보이는 동네가 아니라 지대가 높은 ‘산동네’를 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 '달(達)'에서 '월(月)'로, 그리고 '계(鷄)'로의 변이 : 이 ‘달’이라는 소리는 한자 표기 과정에서 흥미로운 변화를 거친다. 즉 달(達) → 월(月): 하늘에 떠 있는 달로 해석되어 월출산(月出山), 월악산(月岳山), 월봉산(月峰산) 등의 지명을 낳았다. 또한 달(達)은 발음이 유사한 ‘닭(鷄’로 전이되어 표기되기도 했다. 결국 계족봉이나 계룡산(鷄龍山) 같은 지명 역시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계포란형(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나 '비룡승천형' 같은 거창한 수식 이전에, 본래 '아주 높은 산' 혹은 '높은 곳에 있는 용(산줄기)'이라는 담백하고도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3. 물줄기에 담긴 '달'의 의미 : 이러한 맥락에서 ‘달천’이나 ‘달내’라는 지명 또한 높은 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촛대봉을 오르며 마주하는 이 지명들은 단순한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높은 곳을 향해 경외심을 가졌던 우리 선조들의 언어적 유산인 셈입니다.
자세한 것은 졸저 전게서 286쪽, 341쪽 이하
* 수리봉 :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것이다. 이 예로 단옷날(端午)의 순우리말이 수릿날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또한 그 수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정수리가 된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 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설악산이나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이다. 참고로 이 수리를 한자로 쓰다 보니 수리‘鷲’가 되었고 수리가 매이다 보니 매‘鷹’이 된 것이다. 따라서 수리봉 = 매봉 = 응봉 = 취서산 = 영축산인 것이다. 또한 수리 > 시루이다 보니 시루‘甑’이 되었으니 수리봉 = 증봉(甑峯)이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사자봉 : 이 역시 ‘불교지명설’로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탔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 이 촛대봉과 코앞의 영신봉은 지리산의 단순한 '지형'을 넘어서 '역사의 압축판'과도 같은 곳이다. 천왕봉, 반야봉과 더불어 지리산 어디서나 그 위용을 드러내는 촛대봉에 서면, 산줄기는 단순한 풍경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로 다가온다. 우리가 딛고 선 대간의 도도한 흐름이 발치 아래 깔리고, 영신봉은 남한 9개 정맥 중 첫 번째인 낙남정맥이 힘차게 가지를 치며 뻗어 나가는 기점이 된다. 남동쪽 섬진강 너머로 일렁이는 호남정맥의 흐름까지 한눈에 드니, 과연 지리산의 조망처 중 으뜸이라 할 만하다. 지명의 무게감 또한 남다르다. 반야봉이 불교의 문수신앙을 품은 성지라면, 영신봉은 한신바위와 운장바위를 품은 우리네 토속신앙의 본거지이다. 이곳엔 삶의 흔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기도 하다. 매가 걸려들기만을 고대하며 엎드린 '매잡이'의 간절한 모습, 그리고 이 높은 고산습지의 물을 끌어다 어떻게든 농사를 지어보려 했던 민초들의 억척스러운 생명력이 이 세석평전에 녹아 있다. 사실 저여원(沮洳原)이라 불렸던 세석평전은 단순한 고원이 아니다. 이곳은 신비와 아픔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공간이다. 즉 신선들이 노닐었을 청학연못의 전설이 고원의 안개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고. 평전 아래 도장골은 인민군 야전병원이 있는 등 빨치산의 처절한 투쟁과 죽음이 서린 한국 현대사의 아픈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지리산의 전설적 인물 우천 허만수 선생이 초막을 짓고 산을 지켰던 숭고한 흔적 또한 이곳의 일부이다. 결국 세석평전은 척박한 고산지대까지 밀려 올라와 삶을 일궈야 했던 민초들의 고단함과 파란만장한 현대사가 겹친, '역사의 살아있는 전시장'이다. 우리는 지금 그 뜨거웠던 역사의 한 장 위를 경건히 걷고 있다.
“형, 그런데 이 영신봉이 우리가 처음에 자세히 알아봤던 그 영신봉인가?”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 장감독이 기억을 되살리며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신봉이 가진 지리학적 무게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 세석평전 : 자세한 것은 졸저 전게서 443쪽 이하 참조.

“네가 대화의 물꼬를 다시 산경표의 정체성으로 돌려놓는구나! 그래, 맞아. 박성태 선생은 대간길이 여기서 낙남정맥의 삼신봉 방향으로 뻗어 나가 옥산(614m) 부근에서 금오산을 넘어 노량 바다로 향한다고 보았지. 그걸 ‘신백두대간’이라 불렀어. 그렇게 되면 실질적인 낙남정맥은 옥산 부근에서 시작해 녹산교에서 마무리되는 셈이지. 결국 영신봉은 단순한 봉우리가 아니라 우리 땅의 뼈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지는 분기점(Junction)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곳이야!”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리 땅의 줄기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 즉 ‘원산경표, 신산경표, 그리고 대한산경표’의 차이를 머릿속에 그렸다.
구 분 |
백두대간의 주행 | 낙남정맥의 주행 | 낙남정맥의 시점 | 낙남정맥의 끝점 |
| 원산경표 | 백두산 ~ 지리산 | 영신봉 ~ 옥산 ~ 매리2교 | 영신봉 | 매리2교 |
| 신산경표 | 백두산 ~ 영신봉 ~ 노량 | 옥산 ~ 녹산교 | 옥산 | 녹산교 |
| 대한산경표 | 백두산 ~ 지리산(천왕봉) | 영신봉 ~ 옥산 ~ 녹산교 | 영신봉 | 녹산교 |
“이해가 가니? 이 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신봉의 지위가 명확해지지?” 고개를 끄덕이는 장감독이 잠시 표를 들여다 보다 이내 말문을 연다.
“그래. 원산경표는 전통적인 관점으로, 영신봉에서 시작해 김해 낙동강 변의 매리2교에서 맥을 다한다고 보고, 신산경표는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한다.'라는 원칙에 더해, 실제 물줄기의 흐름을 중시하여 대간의 끝을 노량 바다로 보고, 낙남정맥의 시점을 옥산으로 하향 조정했고 그 끝점을 녹산교로 확정해 이를 ‘신낙남정맥’으로 불렀고, 대한산경표는 박흥섭이 주창하는 이론으로 가장 최근의 해석이자 산자분수령 원칙에 철저한 입장으로, 영신봉을 낙남의 시점으로 유지하되 끝점은 하구둑 건설 등으로 변화된 지형을 반영해 녹산교로 잡고 있다는 것이고 형은 ‘대한산경표’를 따른다는 거 아니야?”
그렇다! 결국 영신봉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산줄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토를 읽는 거대한 세계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참고로 낙남정맥을 진행하는 삼신봉에서 직진하는 길은 외삼신봉으로 가는 정맥길이지만, 우측으로 진행하면 내삼신봉, 관음봉을 지나 거사봉 분기점에서 좌틀하여 칠성봉 ~ 구재봉으로 진행하면 횡천지맥길을 가게 되는 것이고, 그 분기점에서 직진하면 형제봉 ~ 신선봉으로 가는 지리남부능선길이 된다.
"자, 이제 정맥이나 지맥은 모두 대한산경표의 발길을 따라 걷게 될 거야. 이 복잡한 족보를 정리했으니, 진짜 영신봉의 기운을 받으러 가볼까?"

촛대봉을 내려와 고산습지를 지나면 한신계곡 사거리에 닿는다. 영신봉 정상과 음양수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초입은 비탐방구역으로 묶여 있어, 정맥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정표를 따라 의신 방향으로 진행하여야 한다. 한편, 대간길은 영신봉을 우측에 두고 우회해야 한다. 그 우회로 좌측으로 펼쳐지는 아찔한 벼랑 아래가 바로 영신대(靈神臺)이다. 옛 영신사가 터를 잡았던 이곳은 선인들이 지리산을 오고 가던 본래의 등로이기도 하였으며 왜구 잔당들의 도주로이기도 했다. 175개의 계단을 내려가며 마주하는 추강대 옆 좌고대는 예부터 이곳에 올라 예불을 올리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영험한 곳이다. 이제 조망은 천왕봉을 뛰어넘어 낙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거대한 흐름으로 옮겨간다. 영신봉에서 뻗어 나가는 맥의 흐름을 쫓다 보면, 뒤편에서 고개를 쫑긋 내민 촛대봉조차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만큼 낙남정맥 산줄기의 위용이 대단하다. 바위 기둥들이 흩어져 있는 칠선봉 군락에 들어선다. 하지만 산꾼들이 체감하는 진정한 칠선봉은 조망터 역할을 하는 찰선봉은 사실 1558.3봉이다. 이곳은 대간 주릉뿐 아니라 낙남과 호남의 두 정맥을 가장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천혜의 장소이며, 주위 봉우리에 비해 고봉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칠선봉이려면 대(臺)이든, 봉우리이든 7개는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밀린 느낌이다. 한편, 이곳에 설치된 안내판은 엉뚱한 봉우리를 삼신봉으로 표기하여 산객들에게 심각한 혼란을 준다. 두 가지 결정적 오류를 정리해 본다.
| 구 분 | 작성자 | 오류부분 | 실제 지리학적 사실 |
| 칠선봉 위치 | 국토지리정보원 | 지도상 1558.3봉 | 현재 바위군 지점 |
| 삼신봉 위치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 화장봉과 촛대봉 사이의 약1693.6m의 석봉 | 낙남정맥의 1288.7m의 삼신봉 |
칠선봉에서 휴식과 조망을 마치고 다시 숲으로 든다. 덕평봉을 좌측으로 우회하니 지리산의 명수(名水) 선비샘이 나타난다. 예전의 넉넉했던 수량은 간데없고, 이제는 외줄기 물길만이 졸졸 소리를 내며 산객을 맞는다. 오공능선이 갈라지는 바른재를 지나 고도를 낮추다 보면, 지리산의 아픈 상흔인 1023번 지방도와 마주하게 된다. 1968년 연동골의 무장 공비 소동을 계기로 지리산을 파헤쳐 만든 이 '벽소령 종단도로'는 개통 50여 년이 지난 지금, 서서히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다만 벽소령 북쪽의 양정·음정 주민들은 이 도로를 부분적으로 산간 경작이나 토봉(土蜂)을 위해 이용하고 있으나, 남쪽의 삼정 ~ 벽소령 구간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차는커녕 사람조차 다니기 힘들 정도이며, 1995년 지름길마저 영구 폐쇄되어 도로 기능은 이미 완전히 상실했다.

“형. 나는 벽소령하면 벽송사가 연상이 돼. 혹시 이 벽소령과 벽송 지엄 선사와 무슨 관련이 있어서 그렇게 지어진 거 아니야?”
한편, 산꾼들은 흔히 '벽소령'이라는 이름에서 인근의 벽송사(碧松寺)를 떠올리곤 한다. 사실 이는 근거 없는 추측이 아니다. 과거 벽송 지엄선사의 제자 70여 명은 지리산 남북의 여러 암자에서 수행했다. 북쪽으로는 벽송사, 영원사에서, 남쪽에서는 쌍계사, 칠불사, 신흥사, 의신사 등이 그것이다. 도반(道伴)이었던 이 승려들은 당연히 서로 교류하기 위해 넘나들던 이 고개 이름이 '벽송령(碧松嶺)'이었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발음이 변하고,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희고 맑은 달빛"이라는 서정적인 의미가 덧칠해지면서 오늘날 지리 10경 중 하나인 '벽소명월(碧宵明月)'로 굳어진 것이다. 유래보다는 풍경에 천착하게 된 세태에 묘한 씁쓸함이 남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산수편에는 지리산에 대한 찬사와 함께 "벽소운동(碧宵雲洞)과 추성동 역시 명승지"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벽소운동은 고개가 아닌 '마을'을 뜻하는 것이기에, 추성동과 대비되는 백무동의 옛 모습이나 그 일대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벽소령은 단순한 고갯마루를 넘어, 지리산 남북을 잇는 삶과 신앙의 통로였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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