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의 찬탈, 누군가에겐 형제봉이나 그들에겐 부자암(父子巖)이었다
벽소령을 떠나 발걸음을 옮기면 나무 계단이 잦아진다. 천왕봉 아래 '개천문'을 연상시키는 선바위를 지나면, 발아래 바위가 험해진다. 전망대에서 시원한 조망을 즐기며 내려오면 이정목 뒤 커다란 바위에 퇴색한 '연하굴'이라는 페인트 글씨가 산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여기서 삼각고지까지 본격적인 암릉 구간이 시작된다. 멀리서 볼 때 거대한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산꾼들이 흔히 형제봉(兄弟峰)이라 부르는 곳이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이곳에는 성불한 형제가 지리산녀의 유혹을 뿌리치려 등을 맞대고 서 있다가 그대로 돌이 되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터무니없는 이 전설은 허점투성이이다. 즉 이미 성불(成佛)한 고승들이 여인의 유혹 때문에 돌이 되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서사의 모순이라는 얘기이다. 또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는 이 바위를 '부자바위(父子巖)'라 명시하면서도, 정작 봉우리 이름은 '형제봉'으로 표기하는 해괴한 모순을 보인다. 기록의 불일치이다. 사실 산의 이름을 가장 잘 아는 이는 그 산에 기대어 사는 주민들이다. 마천 삼정마을(양정·음정·하정) 사람들은 이곳을 결코 형제봉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곳은 대대손손 내려온 '부자암봉'일 뿐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광대골에 전해 내려오는 '지리산판 선녀와 나무꾼' 설화에 있다. 즉 하늘로 떠난 아내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매일 지리산에 올라와 그녀를 기다리던 나무꾼 인걸과 그의 두 아들, 즉 삼부자(三父子)가 결국 화석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설은 책 속에만 박제된 이야기가 아니다. 하정마을 사람들은 1976년 '석문암계'라는 계를 조직했고, 선녀와 나무꾼이 살았다는 계곡에 '선유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지금도 매년 초복이면 화석이 된 삼부자를 위해 정성껏 제사를 올린다. 산객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이 바위는 누군가에겐 등 돌린 형제의 유혹 극복기일지 모르지만, 이곳 주민들에겐 천년을 이어온 가족의 그리움이 서린 부자암(父子巖)이다. 외지인의 입맛에 맞게 이름 붙여진 '형제봉'이라는 표기가 마을 사람들에겐 못마땅한 '이름의 찬탈'로 느껴지는 이유이다.
* 연하굴 : 1955년 5월 5일 결성된 구례의 ‘지리산 산악회’의 전신 ‘연하반 산악회’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구례중학교 교사였던 우종수 선생에 의하여 결성된 이 산악회에 의해 연하굴이나 연하천, 연하봉, 산희샘이라는 이름들이 붙게 되었다.

이름은 시대의 거울, 비극의 고지에서 지리의 골격을 보다
삼각고지에 이르면 오랫동안 동행했던 경남 마천과 작별하고, 전북 산내의 산자락을 맞이하게 된다. 이름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 했던가?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목격하게 된다. 하나는 ‘삼각고지'라는 이름 그 자체로 한국전쟁의 포화와 빨치산의 잔영을 떠올리게 하여 왠지 모를 서글픔과 부정적인 잔상을 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형적으로 이곳이 지리의 북쪽과 주릉을 잇는 중추적인 경계의 정점으로 지리 북부능선의 골격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살펴보자면 이 삼각고지에서 조금 내려오면 우측으로 갈라지는 은밀한 등로가 보인다. 바로 영원령~삼정산(1156.2m)~실상사로 이어지는 '지리북부능선'이다. 능선의 일부는 경상남도와 전라북도를 가르는 도계(道界)가 되며, 영신봉에서 뻗어 나가는 ’지리남부능선‘에 대응하며 지리산의 북쪽 울타리를 완성하는 핵심 능선이 된다. 지리의 오묘한 대칭의 미학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삼각고지라는 이름은 지리산이 견뎌온 현대사의 상흔을 그대로 투영한다. 군사적 지표로 치환된 이름 뒤에서 서글픈 역사의 여운을 읽어내고, 비로소 경계를 넘어 지리산 북쪽 울타리가 완성되는 웅장한 대칭의 미학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산꾼들의 영원한 로망, '지리남북종주'
사실 지금은 탐방로 제한으로 지리북부능선은 탐방 자체가 자유롭지 못하지만, 예전 산꾼들에게 이 길은 도전 그 자체였다. 즉 지리 남북종주 코스라 하여 실상사 → 삼정산 → 삼각고지 → 지리 주릉 → 영신봉 → 삼신봉 → 상제봉(형제봉) →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이 남북종주는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코스와 더불어 지리산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던 최고의 코스였다. 실상사의 고즈넉한 새벽 기운을 받으며 시작해 지리의 남북을 관통하는 이 장대한 여정은, 지리산의 전체상을 몸으로 새기는 의식과도 같았다.
위에 얘기하였다시피 이 지역이 비탐방코스가 많이 섞여 있는 관계로 일반 산객들은 이 지역을 걷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도 길은 있는 법, 지리산의 '7암자 순례 코스 산꾼들 사이에서는 신비로우면서도 경건한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일 년에 단 한 번 부처님 오신 날(사월 초파일) 만 합법적으로 이 비경을 마주할 소중한 기회이니 택일을 잘해야 할 일이다. 지리산의 북쪽 자락인 삼정산(1,182m)을 중심으로 암자들이 구슬처럼 꿰어져 있는 이 ’7암자 순례 코스‘를 분석해 본다.
구 분 |
시 작 | 거리(km) | 소요시간 | 구간설명 |
순 서 |
음정마을 | 순례의 시작점 | ||
| 1 | 도솔암 | 약3.5 | 약 1시간20분 |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고요함이 일품 |
| 2 | 영원사 | 약1.8 | 약 40~50분 | 과거 100명이 넘는 고승들이 수행했던 유서 깊은 사찰 |
| 3 | 상무주암 | 약3.2 | 약 1시간30분 | 보조국사 지눌이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조망이 매우 뛰어남 |
| 4 | 문수암 | 약1.0 | 약20분 | 바위 틈에서 솟는 샘물과 천연 동굴이 매력적인 암자임 |
| 5 | 삼불사 | 약0.5 | 약15분 | 아담하고 소박한 멋이 있으며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볼 수 있음 |
| 6 | 약수암 | 약2.2 | 약50분 |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목조 건물이 인상적임 |
| 7 | 실상사 | 약1.0 | 약20분 | 산이 아닌 평지에 위치한 천년고찰로, 순례의 마침표를 찍는 곳임 |
| 합 계 |
약13.2 | 약 5시간25분 |

산자분수령의 원칙과 '친절한' 등로 사이의 변증법
“형. 어기는 왜 이리 물이 많아? 이 실개천 같은 걸 우리가 건너고 있는 거네? 그렇다면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잖아! 우리는 절대로 물을 건너면 안 되는 거잖아!”
등로가 좀 질퍽 인다. 등로에 물이 워낙 많아 징검다리로 돌을 많이 박아놨는데 그걸로도 감당이 안 되자 이제는 산객들의 편의를 위해 아예 데크를 설치해서 그 아래로 물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래. 네 말이 딱 맞아! 원래는 저 위 명선봉 능선으로 진행해야 우리는 물 한 방울 안 밟고 가는 건데, 지금 공단이 우리를 밥 먹이고, 물 먹이려고 대피소 쪽으로 길을 살짝 굽혀놓은 거야. 우리가 지금 대간 원칙을 어기는 게 아니라, 공단이 길을 '친절하게' 틀어놓은 거지! 우리가 이런 사실을 인식했다는 것만 확인하고 대피소로 가서 잠깐 쉬었다 가기로 하자!“
장감독의 지적은 예리했다. 사실 원래 대간길은 명선봉을 타고 그대로 직진해야 한다. 하지만 국립공원공단에서 산객들의 안전과 편의, 그리고 식수 보급을 위해 연하천 대피소 쪽으로 등산로를 살짝 틀어서 닦아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비추어 장감독의 지적은 아주 예리했다. 사실 여기서 대간길은 능선을 타고 명선봉으로 바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공단에서는 연하천 대피소로 산객들을 유도하느라 명선봉 능선길은 비탐방 구간으로 묶어 놨다. 그러니 현재 우리가 걷는 데크와 징검다리는 엄밀히 말하면 백두대간 길이 아니라 능선 바로 아래의 '계곡의 발원지' 즉 물줄기를 지나고 있는 셈이다. 사시사철 충분한 수량을 자랑하는 연하천 대피소의 '안개와 노을이 어우러진 샘'이라는 낭만적인 이름 연하천도 사실은 1955년 5월 이곳을 지나면서 샘물을 발견한 구례 ’연하반 산악회‘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에 불과하다.

토끼(卯)의 굴레를 벗고 묘봉(妙峰)의 향기를 맡다
이름마저 고운 연하천 대피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투박했던 옛 판잣집의 정취는 현대식 건물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대피소 문 앞에 새겨진 이원규 시인의 구절은 여전하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삼대째 적선을 해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시인의 말을 곱씹으며, 겸허한 마음과 뼈를 깎는 회한을 배낭 속에 고쳐 맨다. 불일폭포의 굉음, 세석평전의 연분홍 철쭉, 섬진강의 푸른 산그림자를 떠올리다 문득 귀해진 세석의 철쭉 소식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명선봉을 향한 기나긴 나무 계단에 발을 올린다. 명선봉 정상은 우측으로 비껴간다. '정상 인증'의 욕심을 내려놓고 걷는 길, 안부에서 토끼봉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이 유독 버겁다. 해발 1410m에서 1535m까지, 140m 가량의 표고 차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조망도 없는 험한 된비알을 오를 땐, 차라리 머릿속에 화두 하나를 던져두고 몰입하는 편이 낫다.
"장 감독, 우리가 오르는 이 '토끼봉' 말이야. 이름이 좀 가볍지 않나? 우리 선조들이 산 이름을 허투루 지으실 분들이 아닌데."
"나도 늘 그게 의문이었어. 하지만 지리산의 정중앙인 반야봉에서 볼 때 정동쪽, 즉 묘방(卯方)에 있다고 하여 토끼봉이라 부른다는 거 아니야?"
장 감독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가 쓴 예전 책들(’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현오와 걷는 지리산‘)에서도 같은 오류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한글 순화 차원에서 토끼봉이라 고집했지만, 그것은 나의 연구 부족이었다. 지리산의 지명은 반드시 '불교지명설'의 관점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지리산 까마귀는 염송하고, 지리산 바위는 경전을 읽는다 하지 않았던가.
이 봉우리는 '토끼 묘(卯)'가 아니라 '묘할 묘(妙)', 즉 묘봉(妙峰)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불가에서 말하는 '묘(妙)'는 단순히 신비롭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 완전무결함, 즉 구족원만(具足圓滿)의 상태를 뜻한다. 반야봉 아래 묘향대(妙香臺)가 있고, 그 기운이 이 묘봉(妙峰)으로 이어진다. 구도자는 바람을 거슬러 퍼지는 부처님의 바른 향기(妙香)를 맡으며 깨달음의 지혜(般若)에 이르는 완벽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반야봉에서 발원한 기운은 서쪽으로 흘러 노고단을 지나 화엄사에 닿고, 동쪽으로 흐른 기운은 이곳 묘봉에 머물다 칠불사와 연곡사로 스며든다. 토끼봉이라는 친숙한 이름 뒤에 숨겨진 '묘봉'의 참뜻을 깨닫고 나니, 버겁던 된비알 길마저 부처의 향기로 가득 차는 듯하다.
*완벽한 그림 : 지리99팀의 엉겅퀴

묘봉 정상에서 왼쪽으로 굽어지는 칠불사 길은 눈으로만 확인한다. 발길이 닿지 못하는 '비탐방구간'이라는 이름표가 못내 아쉽지만, 그 금기가 오히려 산의 생명력을 지키는 울타리임을 알기에 무거운 돌길을 밟으며 화개재로 내려선다. 내려가는 길 우측으로 노란 지붕의 묘향암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수행하시던 호림스님과 목을 축여주던 석간수의 서늘함이 불현듯 스친다. 하산하여 여원재 법당으로 거처를 옮기셨다고 하는데, 스님이 떠난 자리에도 묘향(妙香)의 기운은 여전한지 궁금해진다. 발길을 재촉하면 곧 넓은 광장 같은 분지가 나타난다. 지리산 주능선 위에서 만나는 가장 활기찬 역사적 현장, 바로 화개재다. 화개장터의 효시, 해산물과 산나물의 만남. 화개재는 단순한 고개가 아니다. 옛날 하동 사람들은 소금과 해산물을 등에 지고 연동골을 거슬러 올랐고, 남원 사람들은 삼베와 산나물을 봇짐에 싸서 뱀사골을 타고 올라왔다. 영남과 호남의 삶이 이 높은 능선 위에서 만나 흥정을 하고 안부를 물었으니,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아는 화개장터의 진정한 효시라 할 수 있다. 구름 위에서 열린 이 거대한 장터의 활기를 상상해 본다. 땀에 젖은 등짐을 내려놓고 막걸리 한 사발에 고단함을 씻어냈을 선조들의 숨결이 화개재의 바람 속에 섞여 있는 듯하다. 그러니 혹시라도 산행 중 급박한 하산이 필요하다면, 뱀사골 본류보다는 하동 사람들이 이동했을 좌측의 연동골을 이용해 목통 마을로 내려가는 것이 훨씬 빠른 탈출로가 되어줄 것이다.

인내심이라는 통행료, 뱀사골이 낸 지루한 수행의 길
우측으로 길을 틀면 뱀사골을 거쳐 반선으로 내려가는 길이 열린다. 한때 백여 명의 산객을 품어주던 '뱀사골 산장'은 2008년 운영을 멈추어 신축한 목책은 창고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다. 가을이면 불타는 듯한 단풍으로 산객의 마음을 뺏는 뱀사골이지만, 그 이름만큼이나 길고 구불구불한 계곡 길은 전혀 만만치 않다. 안내판에 적힌 '9.2km'라는 숫자는 실제 발걸음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온다. 이 길을 내려가려면 소요 시간 그 이상의 '인내심'이라는 통행료가 필요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하산길은 어쩌면 지리산이 산객에게 주는 마지막 수행 과정일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왼쪽을 본다. 섬진강 너머로 백운산의 호남정맥 줄기가 유려하게 흐르고 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두 산의 흐름을 확인하며, 다시 지리산의 품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낫 날의 기억과 불모(佛母)의 줄기, 삼도봉에서 길을 묻다
다시 나무 계단이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선 곳은 삼도봉(1501m). 지리산을 오래 다닌 이들이라면 이 봉우리를 마주할 때 이름도 정겨운 ‘날라리봉’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1990년대 초, 국립공원공단은 경남, 전남, 전북의 삼도(三道)가 만나는 지점이라 하여 이곳을 ‘삼도봉’으로 개명했다. 하지만 원래 이름은 ‘봉우리가 낫의 날처럼 날카롭다.’라고 하여 붙여진 ‘낫날봉’이었다. 이것이 세월을 타며 ‘날라리봉’으로 변한 것인데,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그 역사적 맥락마저 지워버린 셈이니 봉우리 입장에서는 참으로 애꿎고 억울한 일이다.
삼도봉에서 남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시원하게 뻗은 불무장등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능선은 경남과 전남의 도계를 가르며 흐르다 당재에서 칠불사와 연곡사로 갈라진다. 바로 반야봉의 거대한 기운이 함축되어 흐르는 길목이다. 그런데 '불무장등'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혹자는 대장간의 '풀무(불무)'처럼 생겼다 하여 형상에서 유래를 찾기도 하고, 한자로 '不無長嶝'이라 쓰며 '우두머리 봉우리'라 해석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궁색하다. 생각건대 지명은 그 땅을 터전 삼아 온 사람들의 문화와 의식이 응축된 결정체다. 지리산이 곧 불도(佛都)임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불교지명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사실 이 부근의 산줄기는 반야(般若)의 기운이 흐르는 긴 줄기이다. 지리산 서부의 맹주인 반야봉은 곧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다. 불가에서 반야는 깨달음에 이르는 최고의 지혜이며, 이는 곧 모든 부처를 낳는 어머니인 '불모(佛母)'와 통한다. 따라서 반야봉의 기운을 받아 길게 뻗어 내린 이 능선은 본래 '불모장등(佛母長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불모'라는 발음이 세월의 풍파 속에 '불무'로 변이된 것이다. 반야봉에서 내려온 기운이 삼도봉을 거쳐 불무장등과 황장산을 지나 섬진강 합수점까지 힘차게 뻗어 나가는 거대한 줄기(長嶝)라는 '지리99' 팀의 연구 결과는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지리산의 속살을 깊게 파고든 이들의 안목에 다시금 경의를 표하게 된다.
* 삼도봉 : 우리나라 백두대간에는 세 개의 삼도봉이 존재한다. 지금의 이 지리산 삼도봉(1501m)은 경남(하동), 전남(구례), 전북(남원)이 만나는 곳이고, 초재산 삼도봉(1249m)은 경남(거창), 전북(무주), 경북(김천)이 만나는 곳이며, 민주지산 삼도봉(1177m)은 전북(무주), 경북(김천), 충북(영동)이 만나는데, 이 민주지산 삼도봉이야말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접점인 곳으로 진정한 의미의 삼도봉이라 할 수 있다.
* 불무장등 : 이태의 ‘남부군’을 읽다 보면 ‘풀무잔등’이라고 부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혜의 정점 반야봉
삼도봉을 내려와 소금장수 묘를 지나면, 우측으로 묘향암 입구가 나타나고 곧이어 반야봉을 가리키는 이정목이 발길을 붙잡는다. 거리 1km. 주저할 이유가 없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반야로의 오름을 시작한다. 보통의 종주자들은 체력과 시간을 이유로 이곳을 지나치기 일쑤지만, 대간꾼들에게 반야봉은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성지이다. 지리산의 신령한 기운을 오롯이 받는 곳이자,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라 물줄기를 건너지 않고 이어지는 소위 오리지널 대간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이 없다, 오르막이 너무 험하다."라는 핑계는 지리산행 나아가 백두대간의 본질을 잊은 변명에 불과하다.

반야봉의 위상
천왕봉의 '천왕(天王)'이 우리 민족 신앙의 하느님을 상징한다면, 반야봉의 '반야(般若)'는 어떤 번뇌라도 깨뜨릴 수 있는 최고의 지혜를 뜻한다. 문수 신앙의 중심지로서 서부 지리산의 맹주 역할을 하는 반야봉을 생략하는 것은,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서사의 절반을 덮어버리는 것과 같다. 반야봉에서 발원한 기운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노고단을 거쳐 차일능선을 타고 화엄사로 흐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살핀 불무장등을 타고 내려가 연곡사와 칠불사로 잦아든다. 그 거대한 기운의 변곡점에 서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꺼이 이 된비알을 올라야 한다.
반야(般若)는 불교적 의미 외에도 '귀녀(鬼女)'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일까, 멀리서 본 반야봉은 여인의 봉긋한 젖무덤을 닮았다. 전설에 따르면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은 형상이며, 그 수많은 골짜기는 치마폭의 주름이라 한다. 세상을 바로잡으려던 이들이 끝내 형편이 여의찮을 때 왜 마지막으로 이 산을 찾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남도 땅에서 가장 깊고 넓어 더는 갈 곳 없는 이들을 품어줄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골짜기들은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피신처였고, 끝내 돌아가지 못한 이들의 무덤이었다. 무덤의 둥근 곡선은 자궁을 상징한다. 죽음이 태어났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생각하면, 지리산의 여신령은 수많은 자궁(골짜기)을 지니고 있다가 의로운 이들에게 따뜻한 죽음의 자리를 내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화엄사와 연곡사, 법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마지막으로 용맹정진한 곳이 바로 반야봉 북동쪽의 묘향암이다. 이쯤 되면 반야봉은 설화의 공간이 아니라 엄연한 역사의 한 장(章)이다. 야간 산행과 야영이 금지된 지금, 지리십경 중 하나인 '반야낙조'를 온전히 지켜보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노고단 대피소에 1박을 예약하고 느긋하게 그 황홀경을 마주해도 좋은 일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왕시루봉과 황장산, 그리고 멀리 호남정맥의 유려한 능선들이 시원한 조망을 선물하며 못내 서운한 산객의 마음을 달래준다.
* 죽음의 자리를 내어준 것 : 조정래 태백산맥 10권 '지리산 동계 대공세' 중에서
* 반야봉 북동쪽의 묘향암 : 물론 지금 묘향암 자리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루목에서 건져 올린 언어의 뿌리
반야봉의 묵직한 기운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해 내려오니, 산줄기가 만나는 길목에 ‘노루목’이라는 이정목이 서 있다. 흔히들 노루가 고개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보면 설악산 비선대 길목부터 포천, 안성, 진주에 이르기까지 ‘노루목’이라는 지명은 도처에 널려 있다. 어떤 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한자로는 노루 장(獐)에 목 항(項)을 써서 장항(獐項)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 가보면 노루가 다닐 만한 길목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여기서 ‘노루’의 뿌리는 짐승이 아니라 ‘늘어진 땅’에 있다.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뻗어 나온 땅의 모양인 ‘늘’이 그 시작이다. 이 ‘늘’이라는 발음이 비슷한 훈(訓)을 가진 ‘누를 황(黃)’으로 변하기도 하고, 다시 소리가 닮은 ‘노루 장(獐)’으로 차용된 것이다. 여기에 목이 긴 짐승인 노루의 이미지가 겹치며, 너른 산자락에서 좁게 좁혀지는 지형을 일컫는 최적의 단어인 ‘노루목’이 탄생했다.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안산의 옛 이름인 장항구(獐項口) 역시 그 지형적 생김새를 들여다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늘이 그 시작이다 : '늘(늘어진 땅) -> 노루 -> 장항

의적의 요새, 임걸령(林傑嶺)에 흐르는 민초의 생명수
노루목의 언어학적 산책을 마치고 닿은 곳은 임걸령이다. 이곳의 샘터는 원래 천호샘이라 불렸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지리산을 오가는 이들에게는 생명수와도 같은 곳이다.
덕평봉의 선비샘과 더불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이 샘터를 그냥 지나치지 말자. 지리산의 수많은 샘물 중에서도 물맛으로는 단연 제일이라 손꼽히는 곳이다. 수통을 비우고 차디찬 감로수를 가득 채운다. 혀끝을 타고 넘어가는 청량함은 반야봉 된비알에서 흘린 땀방울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임걸령(1,320m)이라는 지명 앞에는 늘 '의적 임걸(林傑)'의 전설이 따라붙는다. 명종 대의 임꺽정, 숙종 대의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의적?)으로 꼽히기도 했던 임걸. 그는 이곳에 은거하며 험준한 지형을 요새 삼아 부패한 관아의 재물을 털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샘터와 이정목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한때 이곳에는 그가 머물렀다는 '임걸정(林傑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이곳은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방이 트여 적의 동태를 살피기 좋고,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장기 항전이 가능한 천혜의 요새였다. 사실 임걸령에 얽힌 이야기는 단순한 '도둑 이야기'를 넘어선다.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는 언제나 시대의 모순에서 탈출한 이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임걸과 같은 이들이 이곳으로 숨어든 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그들을 품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험한 능선 위에서 평등한 세상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관군의 추격 속에서도 임걸령 샘물을 마시며 다시 일어섰을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바람결에 묻어나는 듯하다. 지리산은 이처럼 의로운 도둑부터 이름 없는 민초들까지, 세상의 법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차별 없이 품어 안았다. 세월이 흘러 임걸정의 기둥은 썩어 없어지고 의적의 호령도 끊겼지만, 임걸령은 여전히 산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반야봉을 넘어온 지친 다리를 누이고 차디찬 샘물로 마른 목을 적시는 순간, 우리는 잠시 500년 전의 시간과 만난다. 샘터 앞의 널찍한 터를 보며,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거나 보초를 섰을 그 옛날 사내들의 눈빛을 상상한다. 지리산은 이렇듯 길목마다 역사의 마디가 만져지는 산이다. 임걸령의 물맛이 유독 달고 깊은 것은, 아마도 그 속에 담긴 민초들의 간절한 생명력과 투쟁의 역사가 녹았기 때문이 아닐까.

피(稷)의 단풍과 저무는 시대
임걸령을 빠져나오면 이정목은 이내 피아골과 노고단을 가리킨다. 피아골 삼거리이다. 피아골은 그 이름부터가 섬뜩한 오해와 서글픈 진실을 동시에 품고 있다. 즉 본래 식용 곡물인 '피(稷)'를 많이 재배하여 '피밭골'이라 불리던 것이 한자어인 '직곡(稷谷)'을 거쳐 피아골로 변했다는 설과 한국전쟁 전후, 토벌대와 빨치산의 격렬한 전투로 흘린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다는 민초들의 통한의 해석 등이 그것들이다. 내용이야 어떻듯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묘사듯, "피아골 단풍이 유독 붉은 것은 죽어간 이들의 넋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풍광 뒤에 숨겨진 동족상잔의 비극을 상징하는 단풍의 역설이기도 하다.
한편, 1970년대 무인대피소 시절부터 노고단을 지켜온 '노고단 산장의 아버지' 함태식 선생. 척박한 환경에서 등산객의 생명을 구하고 지리산 생태계를 보전해 온 그였지만, 2007년 '규정'과 '현대화'라는 차가운 행정 논리 앞에 35년 정든 터전을 떠나야 했다.
"허허, 이 사람아. 내가 짐이지, 짐이야. 산이 나를 가라는데 사람이 무슨 힘이 있겠나."
산악인들의 거센 반발을 뒤로한 채, 선생은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서운함을 감추며 낡은 배낭을 고쳐 매고, 운해 깔린 노고단 정상을 마지막으로 응시하고 질매재를 넘어 피아골로 내려가던 그의 뒷모습은, 지리산의 한 시대가 저무는 풍경이었다.

돼지령에 서서 옛 시간을 묻다
돼지령으로 향하는 이 구간은 특히 이른 봄이면 지천으로 깔린 피나물과 둥굴레를 볼 수 있다. 이 돼지령에 서서 발아래 심원계곡을 내려다본다. 저 아래 저연(猪淵)에서 목을 축인 멧돼지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올랐을 이 봉우리는, 이제 짐승의 발자국 대신 대간꾼들의 거친 숨소리만 가득하다. 멧돼지들의 풍요로운 먹이터였던 이곳에서 나는 길상봉의 적막한 실루엣을 보며, 풍요와 결핍이 공존했던 지리산의 옛 시간을 반추한다.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섬진강의 유려한 물줄기와 호남정맥의 힘찬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철쭉밭 사이로 난 좁은 터널같은 숲을 빠져나오면 삼각형 모양의 길상봉(노고단)이 위용을 드러낸다.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정상 길은 현재 비탐방 구간으로 묶여 고요에 잠겨 있다. 그 입구에 홀로 서서 썩어가는 비목(碑木) 하나가 이름 모를 조난자의 영혼을 대신하여 산객을 맞이하는 듯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민족의 시원(始源)을 품은 제단, 노고단에 오르다
백두대간 능선에서 노고단 정상을 향해 곧장 뻗은 길은 없다. 그 비탐방 구간을 억지로 숲을 헤치고 들 수도 있겠지만, 촘촘하게 들어찬 잡목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다. 길을 따라 우측으로 크게 돌면 목책 옆으로 공단 초소가 나타나고, 좌측으로 눈을 돌리면 거대한 케른(Cairn, 돌탑)이 등대처럼 서 있는 노고단고개에 닿는다. 성삼재에서 올라온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대개 이곳이 여정의 끝이지만, 대간꾼에게는 새로운 성소(聖所)로 들어서는 문이다.
좌측 완만한 경사를 나무 데크 위로 오른다. 거대한 케른과 정상석, 그리고 1등급 대삼각점(운봉 12)이 반기는 노고단 정상이다. 지리 10경 중 하나라는 '노고운해(老姑雲海)'를 꿈꿔보지만, 그 찰나의 장관을 인간의 의지로 어찌 맞출 수 있으랴. 운해 대신 지리산의 서늘한 바람이 온몸의 땀을 씻어낼 뿐이다.

노고단에 얽힌 세 가지 이야기
“형, ‘단(壇)’은 제단을 뜻하는 걸 텐데, ‘노고’는 정확히 무슨 뜻이야?”
장 감독이 지적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세 가지 설이 있지. 하나는 신라, 엄밀히 말하면 통일신라 이후의 내린 이야기 곧 전승(傳承)일 거야. 이 땅이 본래 백제의 영역이었으니 말이야.”
① 마고할머니와 삼신(三神) 설
우리 풍습에는 아이를 점지하고 양육하며 무병장수를 주관하는 삼신할머니가 있다. 이 삼신이 바로 마고, 궁희, 소희 세 분을 일컫는다. 박제상의 ‘부도지(符都誌)’에 따르면, 6만 3천여 년 전 파미르 고원 마고성의 성주였던 마고할머니로부터 우리 민족의 계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즉, 노고단은 우리 민족의 시원(始源)과 맞물려 있는 신성한 제단인 셈이다.
② 선도성모(仙桃聖母)와 국가 제례 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지리산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는 기록이다. 나라에서는 이곳에 남악사(南岳祠)라는 사당을 세워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올렸다. 민중의 성모 신앙을 국가 차원에서 흡수한 결과다. 현재 남악사는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 구례 군민들이 곡우절마다 산신제를 올리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형, 이 삼신을 천·지·인으로 보기도 하고, 환인·환웅·단군으로 보기도 하잖아. 결국 우리 선조들은 신령한 존재가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죽어서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 산신이 된다고 믿었던 것 같아.”
“그래,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도 삼신을 환인, 환웅, 단군으로 해석했지.” 역시 다큐멘터리 감독다운 장 감독의 해박한 지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지. 단군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고, 탈해왕도 토함산의 신이 되었으니까.”
③ '한뫼'가 '할미'로, 어원설
“그런데 마지막 설은 좀 더 소박해. 우리말의 ‘한’은 ‘크다, 높다’는 뜻이잖아? 그래서 큰 산을 ‘한뫼’ 혹은 ‘한메’라고 불렀지. 이 ‘한뫼’가 세월이 흐르며 발음이 변해 ‘할미’가 되었고,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노고(老姑)가 된 거야. 전국 곳곳에 있는 노고산들이 대개 이런 경로를 거쳤지.”

문명과 자연의 충돌: '현대식 비녀'
노고단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실로 장엄하다. 동쪽으로는 방금 지나온 반야봉과 삼도봉이 굽이치고, 남쪽으로는 왕시루봉을 필두로 문수사와 화엄사의 가람 배치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섬진강 건너 계족산, 둥지리봉, 오산을 잇는 흐름은 대지의 힘찬 호흡 같고, 서시천 넘어 서시지맥과 북쪽의 만복대, 바래봉까지 이어지는 조망은 좀처럼 산객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다시 노고단고개로 내려와 대간 길을 잇는다. 사실 정통 대간 길은 고개에서 돌계단을 타고 대피소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KBS 노고단 송신소’ 방면으로 직진하여 무넹기로 이어져야 올바른 대간길 걷기가 된다. 성스러운 제단인 노고단(老姑壇) 곁에 현대 문명의 상징인 거대한 송신소 철탑이 우뚝 서 있다. 고대부터 이어온 신령한 기운과 디지털 전파가 교차하는 묘한 풍경. 그 철탑 아래를 지날 때면 지리산의 신음이 들리는 듯하여 대간꾼의 마음은 늘 무겁다.
"저 거대한 철탑이 지리산의 맥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네."
"그러게나 말이야. 마고할머니의 머리맡에 현대식 비녀를 꽂아둔 격이지. 저 전파가 산의 고요를 깨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무넹기의 역설, 산자분수령을 넘은 자비의 물길
본래 대간길은 이 송신소에서 직진하여 무넹기를 거쳐 종석대로 이어져야 마땅하나, 공단이 ‘자연휴식년제’로 길을 묶어 놓았으니, 법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피소 방향으로 우회하며 끊어진 대간의 맥을 잇는다. 발길은 자연스레 현대식 호텔처럼 변모한 노고단 대피소로 향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52동이나 위용을 자랑하던 선교사 별장은 이제 흔적도 없고, 뼈대만 남은 교회터만이 쓸쓸히 옛날을 추억하고 있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법정 탐방로를 따라 돌계단을 내려오면 좌측으로 틀자마자 만수천 상단부의 다리 하나를 건넌다. 다리 밑으로는 계절에 상관없이 수량이 풍부한 물줄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흐른다.
“장 감독, 이 물은 어디로 가겠니?”
“글쎄… 어디로 갈까?”
“대간꾼에게 이건 상식이야. 백두대간의 가장 큰 역할이 뭐지? 한반도를 동서로 양분하는 아버지 줄기잖아. 북진 방향에서 대간 우측으로 흐르는 이 물은 당연히 만수천이 되어 람천에 합류한 다음, 임천 -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 부산 을숙도 앞바다로 가는 거지.”
“신기하네. 왜 바로 남해로 흘러가지 않는 거야?”
머뭇거리는 장 감독에게 자꾸 질문을 던져본다.
“아까 영신봉에서 갈라지는 낙남정맥 기억나지? 낙동강의 남쪽 울타리인 그 정맥에 막혀 물길은 남해로 직행하지 못하고 낙동강으로 모이는 거야.”
다리를 건너 다시 대간 길에 합류해 코재로 향하며 멀리 종석대를 본다. 혹여 종석대에 오를 수 있다면 우번암 삼거리를 지나 바위봉인 종석대만 바라보며 걸었으리라. 그때 뒤로 펼쳐질 노고단과 반야봉의 풍광은 또 얼마나 장관일까. 대부분의 탐방객은 대피소를 지나 성삼재로 내려가며 구간을 마무리하지만, 예리한 대간꾼이라면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분명 백두대간 마루금은 코재를 지나 종석대(1360.9m)를 거쳐 성삼재로 내려서야 정석이다. 현재 비탐방 구간이라 직접 밟지는 못해도 먼발치에서나마 종석대의 위용을 눈에 담아야 하는 이유다. 머릿속으로만 걸어야 하는 구간을 또 하나 지난다. 그런데 도로 좌측으로 물소리가 나며 ‘출입 금지’ 표지판이 걸려 있다. 그때, 갑자기 장 감독이 큰소리를 친다.
“형! 지금 이 길은 백두대간 능선이잖아! 그런데 왜 이 물은 능선을 넘어서 화엄사 쪽으로 가고 있어? 거긴 섬진강 방향이잖아!”
날카로운 지적이다. 다리를 건너 성삼재로 향하다 보면 코재 직전 좌측으로 시끄럽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있다. 이 물은 분명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원칙대로라면 낙동강으로 가야 한다. 산자분수령의 예외란 말인가? 사실 이 물은 노고단의 물이 맞지만, 그 길은 인공 수로다. 예전 화엄사 부근 마산면 들녘에 가뭄이 극심했을 때, 노고단의 풍부한 물을 반대편으로 넘겨주기 위해 만든 자비의 물길이다. 그래서 이름도 ‘물을 넘겼다’ 하여 ‘무넹기’이다. 인공으로 물길을 돌렸으니, 낙동강이 아닌 섬진강으로 가게 된 것이고, 이는 원칙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빚어낸 예외다. 머쓱해하는 장 감독을 보며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산자분수령만 제대로 알아도 대간꾼 자격은 충분하지.’

코재의 가파른 로망과 성삼재의 세련된 아쉬움
요즘 산행 코스는 실로 다양해졌다. 백두대간과 정맥, 지맥은 물론이고 태극종주, 5산 종주, 각종 도계(道界)·시계(市界) 종주에 '알프스'라는 이름이 붙은 코스들까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하지만 예전 산꾼들에게 '로망'이란 단어는 오직 두 곳에만 허락되었다. 설악산의 '서북능선 종주', 그리고 지리산의 '화대종주'였다. 화엄사에서 출발해 대원사까지 이어지는 약 46km의 거친 길. 그 고난의 첫 관문이자 지리 주능선으로 접어드는 가파른 들머리가 바로 이곳 '코재'이다.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파르다 하여 이름 붙여진 코재를 넘어선 후에야 비로소 지리산은 제 등줄기를 내어주었다. 지금도 매년 '화대종주 산악마라톤'이 열리는데, 그 긴 거리를 7시간 43분에 주파하는 초인들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노고단 하산길, 돌바닥이 전하는 무릎의 충격을 고스란히 느끼며 내려서면 너른 주차장이 반기는 성삼재(姓三岾)에 닿는다. 성삼재라는 이름에는 삼국시대의 기묘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성(姓)이 다른 세 명의 장군, 즉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이부(異父) 형제 장군들이 성터(수비 요새)를 쌓고 이곳을 지켰다는 데서 유래했다. 과거 반선(뱀사골 입구)에서 이곳을 거쳐 구례로 이어지던 좁은 비상 군사 도로(861번 도로)는 1988년경 확장·포장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도로가 뚫리자, 지리산은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접근이 쉬워진 덕분에 이제는 고전적인 '화대종주'보다 '성중종주(성삼재~중산리)'가 무박 산행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편리함이 가져다준 대중화 뒤에는, 코재를 기어오르며 지리산의 속살을 대면하던 옛 산꾼들의 투박한 낭만이 한 켠으로 밀려난 듯하여 묘한 아쉬움이 남는다. 성삼재 주차장에 내려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세련되게 단장된 휴게소 건물이다. 그중에서도 24시간 불을 밝히는 무인 편의점은 요사이 백두대간을 타는 산꾼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지리 주릉을 뒤로하며
지리의 등줄기를 타고 흐른 수십 킬로미터의 여정이 성삼재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잠시 멈춰 섰다. 천왕봉에서 성삼재까지, 우리는 지도 위에 그어진 선을 따라 걸었으나 정작 우리가 만난 것은 선이 아닌 깊고 너른 '품'이었다.
그 품 안에서 우리는 전쟁이 찬탈해 간 산의 이름을 되찾아 '삼각고지'의 서글픔을 달래주었고, 토끼봉이라 낮게 불리던 봉우리에 '묘봉(妙峰)'이라는 구족원만의 제 이름을 찾아주었다. 산자분수령의 엄격한 원칙을 배우면서도, 가뭄 든 민초들을 위해 제 몸을 갈라 물을 넘겨준 '무넹기'의 자비 앞에선 법도보다 깊은 인간의 온기를 목격했다.
돌이켜보면 백두대간 북진은 단순히 북으로 향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박제된 편견과 오해를 씻어내고, 지리산이 품은 수많은 죽음과 생명력이 어떻게 오늘날의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과정이었다.
이제 성삼재의 불빛을 뒤로하고 다시 배낭을 고쳐 멘다. 지리 주릉은 끝났으나 대간의 길은 만복대로, 고남산으로, 그리고 저 멀리 백두의 끝을 향해 여전히 일렁이고 있다. 산은 결코 우리를 가두지 않으며, 우리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지리산이 그러했듯, 남은 길 또한 이름 없는 모든 것에게 머리 숙여 문안하며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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