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십령에서 덕유의 품으로
지리산의 장쾌한 기운을 뒤로 하고, 백운산을 넘어 드디어 덕유산권의 관문인 육십령(六十嶺)에 발을 들인다.
경남 함양과 전북 장수를 잇는 이 고개는 본래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로, 옛 문헌인 '산경표'나 '택리지'에서도 덕유산 자락의 으뜸가는 요충지로 꼽혔던 곳이다. 영·호남을 잇는 이 길은 단순히 지역 간의 경계를 넘어, 한양에서 통영으로 이어지는 ‘통영대로’가 제 구실을 다하도록 숨통을 틔워주던 결정적인 보조 축이었다. 전라도 전주와 경상도 함양, 안의 등을 잇는 가장 빠른 지름길로서, 서해의 소금과 젓갈은 물론 호남의 농산물이 영남 내륙의 약초와 남해안의 해산물과 교차하고 의병들의 함성이 고갯마루를 넘나들던 소통과 항쟁의 통로였던 셈이다. 해발 734m, 죽령보다도 높고 험준한 산길이었으나 이 고개가 없었더라면 이 길을 오가 이들의 발길은 기약 없이 멀어졌을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육십령의 잘린 허리를 보듬은 생태 통로를 지나며, 나는 비로소 속세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덕유의 품 안으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는다.

예부터 선비들은 덕유산의 넉넉하고 신령스러운 품을 중국의 명산 여산(廬山)에 빗대어 ‘광려산(匡廬山)’이라 일컬었다. 소동파가 그 참모습을 다 알 길 없다고 노래하고 이백이 폭포를 예찬했던 여산처럼, 덕유 또한 웅장한 육산(肉山)의 면모 속에 날카로운 암봉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장수대(서봉)와 봉황봉(남덕유산) 사이를 휘감는 유려한 활꼴 능선이 봉황의 기상으로 꿈틀대고, 늘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변화무쌍한 선경을 연출하니 과연 수양의 적지로도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예순 명의 발길이 모여야 넘던 고개, 육십령의 서늘한 역사
이 육십령이라는 이름에는 함양 감영과 장수 감영에서 각각 60리 거리라는 설과 60번을 굽이돌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무엇보다 산세가 험하고 도적이 들끓어 최소 예순 명은 모여야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소위 ‘도적론’은 단순한 구전을 넘어 실증적인 근거를 품고 있다. 육십령 아랫마을인 장계면 명덕리의 ‘대적골’은 장수가야 시절 철광산과 제련 시설을 갖췄던 곳이다. 당시 철은 곧 권력이자 부의 상징이었으니, 약탈을 일삼던 도적 무리가 이곳을 본거지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요새였을 것이다. 철제 기구가 유통되던 길목이었으니 보부상과 등짐꾼들의 발길 또한 잦았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오늘날 대적골은 흙과 바위가 철분으로 인해 붉게 물든 지형적 특성을 따 ‘대적골(大赤谷)’이라 표기하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육십령의 역사와 맞물려 도적의 소굴이었던 ‘대적골(大賊谷)’로 해석한다.
이렇듯 육십령은 단순한 고갯마루가 아니다. 지리(智異)의 포근한 품을 뒤로하고, 넉넉하면서도 치열한 덕유(德裕)의 골산(骨山)으로 들어서는 엄숙한 세례의 공간이다. 누군가에게는 은거지였고,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위해 공포를 무릅쓰고 넘어야 했던 절박한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이제 그 서늘한 역사를 뒤로하고, 나는 덕유의 첫머리인 할미봉을 향해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할미봉, 이름에 가려진 '한뫼'의 기개
육십령을 뒤로하고 할미봉으로 향하는 길은 들머리는 예전과 사뭇 다른 풍경으로 대간꾼을 맞이한다. 봉황산(남덕유산)의 품으로 향하던 익숙한 나무 계단은 자취를 감추었고, 해발 697.7m의 옛 휴게소 주차장 남쪽에서 곧장 솟구치는 새 계단이 대간꾼을 안내한다. 가파른 밧줄 구간과 새로 설치한 데크를 연이어 통과해 할미봉 정상에 서면,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박힌 정상석이 기묘한 기운을 뿜어낸다. 함양군 특유의 정상석 필체이며 색깔이다.
정상의 붉은 글씨가 자아내는 기묘한 분위기와는 달리, 사실 할미봉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할머니(老姑)'와는 하등에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옛말의 깊은 뿌리와 맞닿는다.
‘크다’ 혹은 ‘넓다’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 ‘한’이 ‘산’을 의미하는 ‘뫼’와 결합하여 ‘한뫼’, 즉 ‘크고 높은 산’이라는 뜻을 품게 된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음운이 변하며 ‘ᄒᆞᆫ뫼’가 ‘한뫼’로, 다시 ‘할뫼’를 거쳐 오늘날의 ‘할미’로 굳어진 것에 불과하다. 겉으로 드러난 이름의 형상에 가려진, 이 거대한 바위 봉우리의 본디 이름은 결국 ‘큰 산’이었던 셈이다.

품을 벗어나야 마주하는 할미봉의 참모습
사실 이 할미봉의 참모습을 보려면 그 품을 벗어나야 한다. 남강지맥의 1,360.7봉이나 월봉산(1,281.7m), 거망산, 구시봉 혹은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등지에서 멀찍이 바라보아야 그 거친 골격이 제대로 드러난다. 운무가 자욱한 날, 뾰족하게 솟구친 바위들은 마치 지리산의 연하봉을 옮겨 놓은 듯하고, 때로는 하늘에 바치는 장엄한 왕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할미봉 정상에서 잠시 마른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예전에 서봉으로 가기 위해 지나는 할미봉 내리막은 상당히 난해한 구간이었다. 어설프게 엮여 위태롭던 나무 사다리와 밧줄들은 이제 산뜻한 나무 계단으로 바뀌어 한결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밧줄이 긴요한 보조 수단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할미봉이 얼마나 억세고 강인한 바위 봉우리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신음하는 대간의 속살
그러나 그 장엄한 왕관 아래로 시선을 돌리면, 차마 마주하기 힘든 처절한 생존의 현장이 펼쳐진다. 산객들의 무심한 발길에 흙은 이미 다 떠나보내고, 나무들은 이제 제 속살인 뿌리를 흉측하게 드러낸 채 얼마 남지 않은 흙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다. 마디마디 하얗게 불거진 저 안타까운 몰골은 비바람에 맨몸을 내맡긴 나무들의 소리 없는 통곡이자, 길을 빌려 쓰는 우리에게 던지는 서글픈 경고처럼 읽힌다.
잠시 그 미안함 앞에 숙연해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이제 덕유산의 장쾌한 파노라마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발을 옮길 차례다..

덕유태극의 길목에서 마주한 파노라마
서봉의 정점에 서기 전, 좌측 진안군 동향면 학선교에서 시작해 영구산을 거쳐 역동적으로 올라오는 '덕유태극'의 길목을 내려다본다. 이곳은 이른바 '덕태'라 불리는 덕유태극종주의 핵심 구간이다. 능선의 굴곡이 태극 문양을 닮은 코스를 잇는 태극종주는 지리산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설악, 덕유, 소백, 속리 등 주요 산군에서 산꾼들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 삼거리에서 지극히 평평한 이 봉우리에 올라 '덕유산 서봉'이라 표기된 정상석과 마주하면, 비로소 덕유산의 장쾌한 전모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기록에서 지워진 철의 제국, 서봉에서 굽어보는 장수가야
덕유태극 삼거리에서 정상으로 올라 1,500여 년 전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서봉은 단순히 경치만을 탐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역사적 진실을 품고 있는 곳이다.
오늘 이곳에 선 이유는 이 험준한 산악 지대를 무대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철의 왕국' 장수가야의 숨결을 되살리기 위함이다. 시선은 장수의 중심인 백화산과 봉화산이 계남천을 따라 흐르는 19번 도로 사이로 형제처럼 마주 선 곳에서 멈춘다. 봉화산(烽火山)은 그 이름처럼 불꽃을 피워 올리던 곳이다. 장수 지역에서만 발견된 가야 시대의 봉수 유적이 무려 100여 곳에 달한다는 사실은, 당시 이 땅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강력한 군사 체계를 갖춘 독립 국가였는지를 웅변한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대가야의 접경지였던 이곳 장수가야에서 그들이 피워 올린 불꽃은 침입에 대비한 경고였을까, 아니면 철기를 가득 짊어지고 고개를 넘는 이들을 안내하는 횃불이었을까. 발치 아래 명덕리 대적골에서 철을 녹이던 뜨거운 열기는 밤낮없이 타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승자의 기록 어디에도 이들의 이름은 선명하지 않다. 기록에서 지워진 비운의 왕국은 오직 땅속에 묻힌 철기 유물과 둥근 고분들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존재를 나직이 속삭일 뿐이다.

용의 등에서 봉황의 머리로.... 서봉이 품은 조망
서봉에서의 조망은 실로 압도적이다. 지나온 대간의 흐름을 자세히 추적할 수 있음은 물론, 무룡고개에서 장안산을 따라 성수산, 운장산, 대둔산을 넘어 날만 좋다면 멀리 계룡산까지도 시선이 닿는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함양 대봉산 너머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해 반야봉을 거쳐 백운산으로 향하는 도도한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좌측으로는 비록 남덕유(봉황봉)에 가려 아쉽기는 하나 황석산의 굳건한 기세를 마주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백미는 향적봉에서 시작되는 덕유의 능선미다. 그 유려한 흐름은 백암봉에 이르러 백두대간의 본줄기가 마치 거대한 용의 등처럼 아름다운 곡선미를 뽐내며 봉황봉(남덕유산)까지 이어진다. 그 흐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룡산을 넘어올 때 거대한 용의 등줄기처럼 느껴지던 산세는, 삿갓봉을 지나며 봉황의 날개로 펼쳐지더니 결국 남덕유에 이르러 웅장한 봉황의 머리로 완성된다. 그 좌측 뒤로 수도산과 가야산이 마치 왕관을 쓴 듯 호위하고 있는 풍광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오죽하면 장수군에서 '서봉' 대신 '장수덕유' 혹은 옛 이름인 '장수대(將帥臺)'라는 당당한 이름으로 불러달라 청했을까.
이 장수대를 바라보며 혹자들은 섬진강과 금강이 발원하는 이 지방 장수를 긴 물이 흐르는 '長水'라고 단순하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장자, 장손을 뜻하는 '으뜸'의 의미를 품고 있다. 산자분수령의 원리 속에 남과 북으로 흐르는 큰 물줄기를 두 개나 품고 있는 이 장수를 명실상부한 '물의 어른'이라 부를 만하다.

서봉은 '장수대(將帥臺)'라 불러야 한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문구 '덕유산 서봉'이라 표기된 정상석을 본다. 사실 덕유산을 이야기할 때 결코 서봉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이 남덕유산(봉황봉)만 찍고 하산하지만, 사실 봉황의 날갯짓을 제대로 보려면 이곳 서봉에 서야 한다. 그러나 대간꾼들은 괜시리 그런 걱정을 할 필요 없다. 이 서봉으로 대간길이 지나기 때문이다.
한편 옛 기록인 ‘장수읍지’나 ‘유람록’ 등에서는 이곳을 '장수대(將帥臺)'라 불렀다. 장수가 지휘하는 대(臺)처럼 사방이 탁 트여 그 기세가 당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싑게도 여기에는 국토지리정보원이 숨겨온 '행정편의주의'가 서려 있다. '장수가 걸터앉아 만군을 다스릴 만하다(如將帥之 處臺上)'는 옛 기록과 장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가장 높은 곳이라는 자부심이 투영된 이곳을, 국토지리정보원은 그저 '남덕유산의 서쪽에 있는 봉우리'라는 뜻의 무미건조한 방위명(方位名)으로 격하시켰다. 지금도 장수의 노인들은 이곳을 남덕유산보다 영험하게 치며 '장수대'라 부른다. 이제 우리는 그 잃어버린 이름을 돌려주어야 한다. 봉황의 왼쪽 날개이자 호남의 기개를 대변해 온 이 봉우리는 그 자체로 우리 산하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봉황의 머리에 이름을 되찾아주다, 남덕유 아닌 ‘봉황봉’
이 장수대에서 남덕유(봉황산)로 발길을 옮기기 전, 향적봉에서 흘러내려 오는 유장한 덕유 주릉을 다시금 감상한다. 조선의 선인들은 덕유의 거대한 산군을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했다. 주봉인 향적봉을 필두로, 지금의 무룡산인 불영봉(佛影峰), 그리고 현재 남덕유산이라 불리는 봉황산(鳳凰山) 등이 그것이다.
특히 '산경표'를 비롯해 '해동지도', '광여도' 같은 옛 문헌을 살펴보면 '봉황산'이라는 지명은 너무도 뚜렷하고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현대의 '1산군 1산이름' 법칙을 적용하더라도, 봉황산이 덕유산의 울타리 안에서 호구(戶口)를 빼지 않는 이상 그 본래의 위상을 존중해 적어도 '봉황봉'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 장엄한 줄기를 마무리하는 봉황산을 덕유에서 제외한다면, 어쩐지 이빨 빠진 동그라미처럼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고산자 김정호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대동여지도'에도 이곳을 '봉황봉(鳳凰峰)'으로 명징하게 표기해 두었다. 이에 본서에서는 옛 기록과 산줄기의 정체성을 이어받아 앞으로는 남덕유산을 과감하게 '봉황봉'이라 부르고자 한다.

반가운 개념도, 그러나 여전히 눈에 거슬리는 이정목
다행히 최근 덕유산국립공원의 바뀐 개념도를 보니 이 남덕유산을 ‘봉황산’으로 표기하고, 그 아래 괄호로 ‘남덕유산’이라 병기한 것이 눈에 띈다. 잃어버린 제 이름을 당당히 앞세우고 방위명을 뒤로 물린 이 작은 노력이, 내게는 우리 산하의 자존심을 되찾는 장족의 발전처럼 느껴져 반갑기 그지없다.
하지만 산객들이 실제 마주하며 이정표로 삼는 현장의 이정목에는 여전히 ‘남덕유산’이라는 건조한 표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어 못내 눈에 거슬린다. 이정목의 글자 하나를 바꾸는 것은 단순한 명칭의 변경이 아니다. 그것은 국토지리정보원의 안일한 행정이 그어놓은 인문학적 단절의 선을 지우고, 우리 산줄기가 본래 품고 있던 웅장한 기상과 서사를 복원하는 일이다. 봉황의 머리에 서서 정작 봉황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이 괴리감을 언제쯤이면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까.

최고봉의 권위에 밀려난 이름, 봉황산의 수난사
사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지명의 뿌리를 캐보면, 그 기저에는 씁쓸한 행정적 농간이 숨어 있었다. 1910년대 일제가 제작한 지도만 보더라도 지금의 남덕유산을 그저 ‘덕유산’이라 불러 덕유의 주봉을 이 봉황봉으로 여겼던 반면, 현재의 최고봉인 향적봉은 이름조차 없는 무명봉(無名峰)에 불과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국토지리정보원은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을 덕유산의 주인으로 세우면서, 정작 오랜 세월 덕유의 자존심을 지켜온 봉황산을 ‘남쪽에 있는 덕유산’이라는 뜻의 ‘남덕유’로 격하시켜 버렸다. 괄호 속에 갇힌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다. 최고봉 중심의 ‘1산군 1산이름’ 법칙을 억지로 꿰맞추느라, 우리 선조들이 뚜렷이 새겨놓은 ‘봉황’의 기상을 행정의 잣대로 거세해 버린 것이다.

덕유라는 이름에 갇힌 봉황
지형적으로 봐도 그렇다. 넉넉하고 너그러운 육산(肉山)인 향적봉과 달리, 봉황봉은 날카로운 바위가 솟구친 골산(骨山)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 제작과정에서 이 거친 기세의 봉황산이라는 찬란한 이름을 지우고 굳이 '남덕유'라 고쳐 부르게 한 속내를 이해하기는 사실 참 어렵다. 생각건대 봉황은 곧 성군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영물(靈物)이다. 그 이름을 지우는 행위는 단순히 지도 제작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서린 왕기(王氣)를 누르고 조선 민초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정신적 구심점을 거세하려는 인문학적 압살에 다름아니다. 국토지리정보원이 봉황의 머리를 '덕유의 남쪽의 끝'이라 명명하는 순간, 비상을 꿈꾸던 우리 산줄기의 기개는 그가 쳐놓은 방위(方位)의 창살 안에 갇히고 말았다. 결국 '남덕유'라는 이름은 이 산의 강인한 개성과 상징성을 격하시키거나, 향적봉의 부속 봉우리 혹은 덕유산이라는 이름의 틀 안에 가두어 놓았다. 향적봉은 오히려 살린 채, 이 봉황산만 개명을 시켰으니 하는 말이다. 건들지 말자. 그저 향적봉은 그냥 향적봉으로, 이 봉황산은 남덕유가 아닌 봉황산 아니면 적어도 봉황봉으로 놔두자는 말이다.
주객이 전도된 이 기막힌 상황 속에서, 그나마 최근의 국립공원 개념도가 봉황산을 주명칭으로 세우고 남덕유산을 괄호로 밀어낸 것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향한 뒤늦은, 그러나 장족의 발걸음이라 할 만하다.

남강의 시원, 봉황봉 절골의 너덜샘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장수대의 낡은 철계단을 내려서며 봉황봉(남덕유산)으로 향한다. 우측 영각사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 깊게 팬 절골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절골의 거친 너덜지대 바위틈바구니 어디쯤에선가 들려오는 가느다란 물소리. 이 가냘픈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음향이 아니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가른다는 산자분수령의 대명제를 세상에 천명하는 장엄한 선포다. 백두대간이라는 거대한 몸집이 빚어낸 이 작은 실핏줄이 영남의 젖줄인 남강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지리학적 진리를 넘어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한때 국립공원 공단에서는 지리산 천왕샘이나 덕유산 참샘 혹은 삿갓샘을 남강의 발원지라 안내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의 맥락을 짚어온 이들은 절골 해발 약 1,370m 지점에 숨어 있는 작은 너덜샘이 진정한 남강의 시원임을 찾아냈다. 낙동강의 제1지류인 남강은 이 고요한 샘에서 시작하여 의령 땅에서 낙동강과 몸을 섞게 되는 것이다.

서출동류(西出東流)의 물줄기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대체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이른바 '동고서저(東高西低)'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큰 강물은 동출서류(東出西流)라 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서출동류(西出東流) 하는 물길은 지형적 특성상 매우 드물기에, 예로부터 이런 물길이 흐르는 곳을 기가 응집된 명당이나 신성한 기운이 서린 곳으로 보았다. 거창 위천의 구연정이나 용암정, 그리고 함양 화림동의 농월정 등에 정자를 설치한 것이 그 반증이다.
봉황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이 서출동류의 물줄기는 여기서 남강의 첫 숨결이 된다. 동쪽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는 저 물길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덕유가 품어온 장엄한 기개를 세상에 전하는 생명의 전령인 것이다. 그 장엄한 합수점을 머릿속에 그리며, 나는 남덕유산 아니 봉황봉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삼파수의 정점
선인들이 이곳을 봉황산 혹은 봉황봉이라 이름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봉황의 머리에 해당하는 정상을 중심으로, 활짝 편 한쪽 날개는 삿갓봉으로, 다른 한쪽은 장수대(서봉)를 향해 웅장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리학적으로도 이곳은 세 갈래의 큰 물이 발원하는 시작점이다. 서쪽으로는 금강의 본류가 되어 서해로, 남쪽으로는 남강이 되어 낙동강으로, 동쪽으로는 위천이 발원하여 거창에 이르러 황강이 되어 낙동강과 몸을 섞는다. 옛사람들은 이처럼 세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을 '삼파수(三派水)'라 하여 명산의 으뜸 조건으로 꼽았다. 이렇듯 봉황봉은 곧 호남과 영남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어머니의 산'인 셈이다.

덕유의 품에서 읽어내는 산줄기의 서사
'남덕유산'이라고 표기한 정상석이 있는 봉황봉 정상으로 오른다. 그 정상에 서면 시선은 거침없이 남쪽을 향해 내달린다. 이곳에서는 영각사 방향 철계단에서 연신 셔터를 누르며 찰나의 기억을 남기려는 산객들조차 이 거대한 산수화의 일부가 된다. 발아래 영각사의 고요한 경내를 굽어보며, 추사 김정희가 거닐었을 옛길을 상상해 본다.
현지에서 '칼날봉'이라 불리는 1,168.3봉 너머로 월봉산과 거망산, 금원산이 줄달음치고, 그 끝에 희미하게 머리를 내민 기백산의 자태는 장쾌하기 그지없다. 산꾼들 사이에서 '황거금기' 혹은 '기금거황'이라 불리는 이 26km의 능선은 1,000m급 산줄기를 타며 남강지맥은 물론 황강지맥의 수도산, 가야산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그야말로 산행의 종합선물세트와 같다.
이렇게 그 활기찬 기운을 빌려 장감독에게 남강지맥의 도도한 흐름을 설명하자, "여기서 가지를 친 산줄기가 남령을 지나 월봉산 ~ 금원산 ~ 기백산 ~ 황매산 ~ 한우산 ~ 우봉산을 지나다가, 이 남강이 낙동강에 합수되는 그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139.3km의 큰 지맥이 된다는 것이고, 저 '황거금기'는 대간길이나 지맥길에서 조금 벗어나는 봉우리들이 있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도에 마루금을 그려서 그 봉우리와 고개들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네."
장감독의 통찰력 있는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잇는다.

봉황봉에서 그려보는 남강지맥
“거창의 군계를 따라 도는 '거창환종주' 같은 코스는 당장이라도 배낭을 메고 뛰어들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곳이야. 하지만 산행의 본질은 언제나 체력에 맞춘 안전한 귀가에 있잖아. 초보 시절의 단산 산행을 지나 산줄기 산행으로 반경을 넓히고, 그러고는 대간과 정맥, 지맥으로 뻗어 나가는 여정은 절대 녹록지 않아. 길 없는 곳을 뚫고, 가시나무와 잡목을 헤쳐 나가야 하는 고역도 견뎌야 하기 때문이야. 사실 나에게 산은 단순한 취미가 아닌 생활의 일부야. 종이지도 위에 스스로 마루금을 긋고 체력에 맞춰 산행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구도(求道)의 길일지도 몰라. 정해진 맥(脈)이나 산길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이들이 느끼는 산줄기에 대한 갈증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어쩌면 우리 선조들은 백두대간을 따라 면면히 이어지는 산줄기의 흐름이 백암봉을 거쳐 이곳 봉황봉에 이르러, 그 아래로 물결치듯 잦아드는 지리산의 연봉들을 조망하는 것에 산행의 주안점을 두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유두류산록’ 곳곳에서 덕유의 형세를 ‘활처럼 휘어 있다’라고 묘사하며, 장수대(서봉)와 이 봉황봉을 잇는 능선의 역동적인 흐름을 주목했던 기록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본래 봉황봉(사실은 봉황산)이었던 이름이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 제작 과정에서 남덕유산으로 바뀌었으니 하루빨리 제 이름을 찾아서 그렇게 불러줘야 하지 않을까? 봉황산 혹은 봉황봉으로 …

계절의 터널을 지나는 된비알의 여정
봉황봉 정상에서 백두대간의 기개를 만끽하고 내려서는 길, 장수대와 갈리는 삼거리에는 삼군(三郡)의 숨결이 교차하는 너른 광장이 펼쳐진다. 함양과 거창, 그리고 장수의 경계가 한 점으로 모이는 이 접점에서 대간길은 다시금 가파른 된비알로 이어진다.
이 길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로 산객을 맞이한다. 늦은 봄이면 진분홍과 연분홍 철쭉이 환희처럼 피어나고, 여름이면 울창한 잎들이 초록 터널을 만들어 뜨거운 볕을 가려주는 고마운 길이 된다. 그러다 겨울이 오면,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가지마다 보석 같은 상고대를 매달아 은빛 궁전으로 변모시키는 마법 같은 곳이다. 자연이 빚어낸 그 찬란한 통로를 따라 한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면, 마침내 팽팽했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안부(鞍部), 월성재(月城岾, 1,240m)에 닿는다.

월성재, 달빛 아래 겹겹이 쌓인 민초들의 실핏줄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계북면과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을 잇는 이 고개는, 육십령이 나라에서 관리하던 번듯한 관로(官路)이자 영남의 함양과 호남의 장수를 잇는 대동맥이었다면, 이곳 월성재는 그늘진 곳에서 묵묵히 흐르던 민초들이나 등짐꾼의 실핏줄 같은 길이었다. 육십령 굽이마다 도사린 도적들을 피하기 위해 혹은 장수에서 정성껏 벼린 철기와 농산물을 지고 영남의 거창 장터로 가기 위해 혹은 반대로 거창의 약초와 남해의 해산물을 지고 장수나 진안 혹은 전주의 장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등짐꾼들의 은밀하고도 절박한 통로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들은 필경 이곳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와 정보를 나누었을 것이니 이 월성재의 고갯마루는 그런 '만남의 장(場)'의 역할도 톡톡히 했으리라.

월성재는 짐꾼들의 땀을 위로하는 달빛이 흐르던 곳이었다.
월성재를 그리노라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속 한 장면이 겹쳐진다. '월성(月星)'이라는 다분히 서정적인 이름은 달이 뜨면 성곽처럼 둘러싸인 산등성이에 달빛이 가득 차오르는 그 장관을 보고 지었을 터이다. 시대를 넘어 이 월성재의 달빛은 고단한 등짐꾼과 오늘의 대간꾼 모두를 보듬어주는 따스한 위로이자 격려 그 자체였으리라.
그런 월성재에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그동안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던 월성재에서 토옥동(土玉洞)을 거쳐 양악호에 이르는 구간이 드디어 빗장을 푼 것이다. 장수의 너른 품으로 이어지는 그 길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옛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이제 비탐(非探)의 사슬을 끊고 열린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예전에 불꽃과 달빛 아래를 걷던 등짐꾼들의 거친 숨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
양악호의 깊은 물줄기를 따라 토옥동 계곡으로 들어서면, 오래전 달빛을 등짐 지고 넘나들던 이들의 생경한 숨결이 전해올 것이다. 거창 황점의 묵직한 무쇠솥을 지게에 얹고 봉황의 날카로운 바위 능선을 타던 등짐꾼들에게, 이 길은 단순한 고갯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가족의 생계를 길어 올리던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다.

황점마을에 숨겨진 참뜻, 지명이라는 이름의 기록
그런데 등짐꾼들이 이 월성재에서 하산을 하면 만나게 되는 '황점(黃店) 마을'이라는 이름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왜 이 길을 따라 걸었을까?
본디 '점(店)'의 현대적 풀이는 단순한 가게나 점포를 뜻하지만, 옛 문헌과 지명 속의 점(店)은 그 결이 전혀 다르다. 예전의 점은 물건을 파는 곳이기에 앞서, 원료를 채취하고 가공하여 완제품을 만들어내던 '국가 공방'이자 '민간 공장'을 일컬었다.
철광석을 캐서 쇠를 달구고 두드려 농기구나 무기를 만들던 철점(鐵店), 흙을 빚어 구워내던 사기점(沙器店), 그리고 그 뜨거운 화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숯을 대량으로 구워내던 탄점(炭店) 등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니 황점마을은 삿갓재와 월성재 발치 아래로 길게 늘어진 위천(渭川) 골짜기를 따라 철광석을 나르고, 울창한 덕유의 숲에서 구워낸 숯으로 풀무질을 하며 옛 가야의 철기 문명을 이어가던 전통 산업의 현장이었던 셈이다.
덕유산이 내어준 나무와 물, 그리고 흙이 빚어낸 한 줄기 역사였다. 월성재를 넘던 등짐꾼들의 지게 위에는 황점의 무쇠솥뿐만 아니라, 토옥동 계곡물에 씻겨 나온 사기그릇의 맑은 소리도 함께 얹혀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고요한 산촌이 되었으나, '점(店)'이라는 글자 속에 박힌 그 역동적인 생산의 기억은 여전히 위천의 물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다. 이처럼 우리 땅의 이름은 우리 선인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정직한 기록표이다. 월성재 마루금에 서서 굽어보는 황점마을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마을이 아닌, 잊힌 왕국의 숨결을 보존하고 있는 거대한 노천 박물관으로 다가온다.

사라진 이정표와 남아있는 기억
월성재를 지나 삿갓봉으로 향하는 길은 만만치 않은 오르내림의 연속이다. 날카로운 바위들을 우회하며 숨 가쁘게 걷다 보면, 이제는 제 기능을 잃고 덩그러니 서 있는 낡은 무선안테나를 마주하게 된다. 녹슬어가는 그 쇳덩이를 바라보며, 문득 덕유산을 처음 마주했던 수십 년 전의 그 설렘을 떠올린다.
과거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누운 나무 이정목'과 바위에 정성스레 새겨져 있던 '바위 약도'는 이제 세월의 풍파에 깎였는지 아니면 공단직원들이 수거를 했는지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산의 얼굴이 바뀌듯 우리가 의지하던 징표들도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니, 익숙한 풍경을 잃어버린 산꾼의 마음에는 짙은 아쉬움만 남는다.

덕유의 파노라마를 완성하는 10분의 고비
삿갓봉(1,418.6m)은 우회 등로에서 우측으로 고작 100m 거리에 있다. 쉼터인 삿갓재대피소까지는 비록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마지막 고비일지라도, 딱 10분만 투자해 정상에 서보기를 권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곳에 올라야만 비로소 덕유의 장쾌한 파노라마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황점마을이나 덕유 주릉 어느 곳에서 보아도 뾰족한 삿갓 모양이 뚜렷한 그 정상에는, 이제는 산의 일부가 된 통신시설과 커다란 안테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삿갓봉은 봉황봉이나 장수대가 주는 위엄 서린 권위와 기개를 내려놓고, 누구나 품어줄 듯한 소박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산객을 맞는다.

바람에 녹아내리는 수고로움
정상에 서서 앞으로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그림자를 보듯 높게 치솟은 무룡산(옛 이름은 佛影山)과 그 우측으로 늘어지는 대간 줄기를 감상하고, 뒤로는 지나온 봉황봉과 장수대의 굴곡을 읽노라면 삿갓봉의 시원한 바람은 산행의 모든 고단함을 깨끗이 녹여준다. 기꺼이 호흡을 가다듬고 정상을 밟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이 홀가분함이야말로 대간이 주는 최고의 성찬이 아닐까.
시원한 조망을 뒤로하고 내려오면, 멀리서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드디어 백두대간의 고단함을 뉘어줄 안식처인 삿갓재 대피소의 아늑한 품에 당도한 것이다.
삿갓재 대피소 우측 계단으로 60m만 수고롭게 내려가면 사시사철 마를 날이 없는 삿갓샘(참샘)에서 물을 보충할 수 있다.사실 삿갓재대피소는 이용하는 산객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 항상 친절한 직원들의 모습을 대할 수 있다. 대피소에서는 햇반이나 물, 캔커피와 초코파이 등 간단한 먹거리와 에어파스 같은 비상약을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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