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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11

백두대간 제7구간 빼재 ~ 덕산재(대덕재) 13.5km

끊어진 대간길(옛 빼재 차도)

 

길의 단절, 사유의 단절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백두대간의 품으로 파고드는 일은 여간 고된 것이 아니다. 대간의 마루금이 워낙 준험하고 세력이 강하다 보니, 그 산줄기는 도계(道界)나 군계(郡界), 작게는 면계(面界)의 경계선이 되어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한다. 나아가 그 자체가 깊은 오지이다 보니 일반적인 대중교통의 발길이 닿기에는 물리적인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많은 대간꾼들은 산악회의 전세버스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효율을 좇는 전세버스의 이용은 대간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단편적인 파편으로 전락시킨다. 내가 늘 강조해 온 '대간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삶과 역사, 환경'은 안중에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그저 인터넷 공간을 부유하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만이 정설인 양 대물림하게 되는데 나로서는 이런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번에 진행하는 빼재에서 부항령에 이르는 구간 역시 접근이 녹록지 않다. 무주읍에서는 고작 하루 두 차례, 거창읍에서는 세 차례 운행하는 군내버스가 전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창 쪽에서는 오전 740분에 출발하는 군내버스를 이용하면 빼재 부근까지는 그런대로 이른 시간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빼재에 굳건하게 자리한 표지석. 색깔이 많이 퇴색됐다.

 

빼재, 박제된 한자 속에 가려진 진실

그렇게 해서 힘들게 도착한 빼재. 그 빼재는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과 경상남도 거창군을 가르는 해발 920m의 고지에 있는 도계(道界) 중의 한 고개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이곳을 '빼어나게 수려한 고개'라는 뜻의 수령(秀嶺)이라 적고 있고 또 그 표지석까지 있지만, 이는 일제가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한자로 덧씌우면서 빌려온 억지스러운 해석에 불과하다.  현지인들조차 수령(秀嶺)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가로저으니, 이 화려한 작명은 고개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일각에서는 예전 산적들이 짐승을 잡아먹고 뼈를 산더미처럼 쌓아두어 '뼈재'라 불리던 것이 '빼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인적조차 드물었던 이 험한 고개에 산적이 터를 잡았을 리 만무하다는 반론 앞에 그 설득력은 힘없이 무너진다.

더욱이 추풍령에 대항하듯 붙여진 '신풍령(新風嶺)'이라는 이름에 이르면 관련된 이들의 우리 국토 정보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의 정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지도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 깊게 느껴지는 이 불신은, 결국 대간의 진실은 종이 위가 아니라 오직 굽이치는 능선 위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빼재터널 앞에[서 바라본 빼재

 

뻗어나가는 생명력의 이름, 뻗재에서 빼재로

생각건대, 늘 강조하듯 우리 선조들이 이 땅의 산줄기를 대할 때 가졌던 마음은 오직 하나, ‘경외감이었다. 덕유산이라는 저 신비롭고 거대한 산의 품에서 산줄기 하나가 힘차게 가지를 치며 뻗어 나오는 형상을 보라! 그 웅장한 기세는 마치 거대한 생명이 새로운 길을 향해 빠져나가는역동 그 자체다.

이 길목을 지키던 남쪽 사람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얼마나 강렬했을까. 그러니 '뻗어 나가는 고개'라는 의미의 현지 사투리인 뻗재로 불리다가, 세월의 풍파 속에 발음이 다듬어지고 깎여 지금의 빼재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심스러우면서도 강하게 고개를 든다.

남쪽 주민의 시선에서 본다면, 백두대간의 저 거대한 맥()이 삼봉산과 대덕산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는 그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그러니 수려하다라는 식의 겉치레식 한자어인 수령(秀嶺)이나, 근거 없는 산적의 뼈이야기보다는, 산의 기운이 뻗어나가는 형상을 그대로 담은 뻗재가 이 고개의 본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빼재(개흥)의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인 51번 군내버스

 

빼재로 향하는 고단한 여정

이렇듯 빼재를 찾는다는 것은 숱한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대간의 속살을 마주하려는 이들에게는 단순한 '등산'을 넘어선 준열 (峻烈) 한 '답사'의 시간이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심야버스에 몸을 실으면, 새벽 2시 조금 넘은 시간에 적막한 거창 시외버스터미널이 나를 맞이한다. 모두가 잠든 시간, 심야 PC방의 푸르스름한 불빛 아래서 영화 한 편으로 시간을 달래고 이른 요기를 마친다. 간단한 세수로 잠을 쫓고 밖으로 나서면, 억센 팔뚝으로 새벽을 쓸어내는 환경미화원들의 빗자루 소리가 정적을 깬다. 각자 자신의 생활 영역으로 들 때 나는 첫 버스에 올라 빼재로 향한다.

버스는 빼재터널 앞에서 차를 되돌린다. 기사는 오가는 이 없는 한적한 이 시골길에서 정해진 출발 시각을 기다리다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나는 차가운 아스팔트 길을 따라 대간 들머리로 발길을 옮긴다. 대간길이 지나는 빼재 고갯마루에는 현대식 시설의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이라는 그럴싸한 간판이 걸려 있다. 터널이 뚫리기 전, 이 고갯마루에는 휴게소가 있어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에게 요긴한 휴식처가 되어주곤 했다.

 

옛 휴게소 자리에 들어선 백두대간생태교육장

 

하지만 터널이 산의 배꼽을 관통하며 지상의 풍경도 변했다. 터널 착공과 함께 영업난으로 문을 닫은 휴게소는 단식원으로 명맥을 잇다 터널이 완공되자 결국 헐려 나갔다. 그 자리에는 거창군에서 큰마음을 먹고 세운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인적이 끊긴 고갯마루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찾을지는 미지수다. 문명은 속도를 위해 터널을 택했고, 고갯마루의 옛 기억은 그렇게 박제가 되어가고 있다.

 

들머리는 공사대기 중

 

노쇠한 길, 다시 돌아가는 대간의 입구

빼재에서 삼봉산으로 향하는 초입, 코끝이 땅에 닿을 듯한 급경사는 예나 지금이나 대간꾼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문득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이곳을 처음 지났던 20094월에도, 이미 이 가파른 비탈에는 나무계단이 놓여 있었다.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변하는 시간 동안, 누군가는 무릎의 통증을 줄여주는 이 계단에 감사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밟히는 흙의 촉감을 앗아간 인공 구조물을 원망했을 터다. 2015년경 대대적인 정비사업으로 지금의 매끄러운 모습으로 거듭나기 전부터, 대간의 등허리는 이미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대간꾼의 무릎을 보듬어주던 이 나무계단도 이제는 너무 노쇠해진 것일까. 붕괴의 우려가 있어 곧 보수 공사를 시작한다는 안내문과 함께 통행이 제한되고, 대간의 들머리는 뒤쪽으로 멀찍이 돌아가게끔 바뀌었다.

한때는 험한 산길의 구원자처럼 당당하게 서 있던 시설물조차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낡아버린 계단을 뒤로하고 우회로로 발길을 옮기며 생각한다. 세월에 약이 없기는 저 무뚝뚝한 나무 구조물이나, 다시 이곳을 찾은 사람이나 매한가지라고.... 낡은 것은 허물어지고 길은 다시 돌아가지만, 그 고단한 길을 굳이 찾아드는 대간꾼의 마음만은 여전히 2009년 그날의 뜨거움, 그대로이다.

 

조금은 흉측해 보이는가?

 

천지사방을 발 아래 둔 삼봉산에서의 조망

“형, 오늘 구간의 포인트는 뭐야? 아무래도 삼봉산 정상에서 보는 조망은 남다를 거 같은데!”

오늘 개인적인 일로 함산하지 못한 장 감독이 옆에 있었다면 모름지기 이런 질문을 던졌을 터다. 나는 대간의 서늘한 새벽 공기를 호흡하며, 곁에 없는 그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오늘 구간을 정리해 준다.

“우선 이곳의 지형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일 것이야. 지금 우리가 걷는 이 대간 산줄기는 도(道)와 도(道)를 나누는 경계야. 좌측으로는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가, 우측으로는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가 발아래 펼쳐져 있지. 넓게는 도계(道界)이지만, 좁게 보면 마을과 마을을 잇는 리계(里界)인 셈이야.”

'라' 지점의 수정봉은 잘못된 표기

 

그런데 좌측 덕지리 쪽을 가만히 내려다봐. 그곳에서 발원하는 원당천이 골을 아주 깊게 치고 들어와 대간길은 꺼먹바위골을 활처럼 크게 휘돌고 있지. 그러다 보니 직선이었다면 금방이었을 길을 아주 크게 돌아가는 기분이 들 거야. 하지만 굽이진 이 길엔 특별한 이유가 있어. 바로 그 깊은 골바람을 맞으며 자생하는 고산 식생과 백두대간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설정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 그것이지. 금강소나무 후계림과 활엽수 천연림이 공존하는 생태의 보고인 이곳은 대간길에서 겨우 2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도 해. 그 비밀스러운 숲에 잠시 들러보는 것도 산행의 큰 묘미가 될 거야.

간혹 일부 개념도나 지도에는 위치조차 불분명한 곳에 ’수정봉'이라는 이름이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잘못 표기된 것이니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고....

그리고 겨울이나 이른 봄, 숲이 제 몸을 비워낼 때, 이 구간을 지나다 보면 우측으로 금봉암이 눈에 들어오지. 말 그대로 황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이야. 석간수와 천연 석굴이 유명한데, 이따 잠깐 들러서 자세히 살펴보자고. 그리고 '금봉암 0.5km' 이정목을 지나자마자 연이어 나타나는 조망터에 서면 덕유산의 위용보다도 황강지맥과 대덕산 부근이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데, 거기서 황강의 발원지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할 거야.

뒷 줄 좌측 줄기가 초강지맥

 

기대를 한 삼봉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좀 아쉬운 감이 있어. 하지만 그 정상을 지나 소사고개로 내려갈 즈음이면 데크 주변으로 조망이 펼쳐지는데 거기서 비로소 덕유의 긴 자락이 좌측으로 그 자태를 온전히 드러내지. 그러고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가르는 오리지널 삼도봉은 물론 민주지산을 일궈낸 초강지맥의 흐름까지도 가늠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천지사방이 내 눈 아래 있는 셈이야.

다만, 고랭지 채소와 사과 농사를 위해 흉측하게 파헤쳐진 대간 산줄기를 마주할 때면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 오는 건 어쩔 수 없어. 산을 타는 이에게는 보존해야 할 대간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또한 치열한 삶을 일궈내는 터전인 것을 어찌하겠나!

그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고개를 들면, 또 다른 삼도봉인 초점산을 지나 대덕산으로 오르는 실루엣이 보일 거야. 거칠게 몰아치는 된비알보다는 육산 특유의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그 유순한 선 말이야. 그렇게 우리는 성격이 다른 두 개의 삼도봉을 눈에 담으며 덕산재를 향해 나아갈 것이야.”

 

이정목은 빼재와 신풍령을 혼용하고 있다.

 

빼재인가? 신풍령인가?

바뀐 들머리로 돌아들어 비로소 끊어졌던 대간 산줄기에 접속한다. 발등을 타고 전해지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은 푹신함마저 느끼게 해준다. 봄날이었다면 발아래로는 둥굴레가 싹을 틔우고, 눈높이에서는 분홍빛 진달래가 화사한 모습으로 맞아줄 길이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곳곳의 이정목들이 눈에 띄는데, 어떤 곳은 빼재, 또 어떤 곳은 신풍령으로 혼용되어 적혀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무주국유림관리소에서는 신풍령, 거창군에서는 빼재라는 표기를 고집하고 있음을 알겠다.

사실 신풍령은 고지도나 전통 문헌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근대식 조어일 뿐이다. 일제가 우리 땅의 고유 지명을 강제로 한자화하던 시절, 그 진정한 의미를 풀기 어려운 라는 음을 빼어나다()’로 오독하여 수령(秀嶺)’이라 부르더니, 급기야는 정체성조차 알 길 없는 신풍령이라는 이름을 덧씌워 오늘에 이른 것이다.

길을 처음 찾은 이들에게 혼란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땅의 이름을 대하는 산림행정의 무성의함이 느껴져 입안이 씁쓸해진다. 우리네 삶과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빼재라는 제 이름을 하루빨리 되찾아 통일된 이정목을 세워야 할 일이다.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도 잠깐 들를만 하다.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대간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들머리에 들어선다. 발길을 옮기며 펼쳐 든 개념도 위에는 ‘된새미기재’라는 지명이 선명하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 발을 딛고 선 이에게 이곳은 의문투성이다. 본래 ‘재(岾)’라 함은 산을 넘는 고개여야 하건만, 이곳은 고개의 형태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지형이기 때문이다.

‘새미’라는 정겨운 이름에서 어느 달콤한 샘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현장의 거친 숨소리를 듣지 못한 이의 사치스러운 오해일 뿐이다. 실제로 된새미골은 이곳에서 한참이나 비껴 나 있어, 이 대간 줄기와는 맥락을 같이 하지도 않는다. 지명이 품은 환상을 걷어내고 마주한 길은 오직 정직한 산줄기의 골격뿐이다.

덕유의 산죽은 지리의 그것과 달리 그렇게 거추장스럽지만은 않다.

 

꺼먹바위골을 굽이굽이 싸고돌며, 산죽(山竹)이 빽빽하게 호위하는 좁은 길을 헤치고 한참을 나아간다. 거친 호흡이 잦아들 무렵, 거대한 바위 하나가 마치 문지기처럼 앞을 가로막는다. 그 위용을 지나 우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비로소 명당의 기운이 서린 곳에 둥지를 튼 건물 몇 동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금봉암이다. 첩첩산중 깊은 품에 안긴 그 고요한 정취가 비로소 대간 길의 노고를 어루만져 주는 듯하다.

금봉포란형(金鳳抱卵形 )의 명당에 자리한 금봉암

 

황금 봉황의 품과 영험한 석굴

왕복 1시간 정도 시간을 내어 그 금봉암을 들러본다. 아까 얘기한 바와 같이 이 절집은 금봉암(金鳳庵)이라는 이름 그대로 '황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金鳳抱卵形)'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삼봉산의 험준한 암릉이 뒤를 받치고, 그 품에 아늑하게 안긴 암자의 모습은 대간의 거칠고 사나운 기운조차 이곳에서만큼은 자비로운 숨결로 변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금봉암 일주문

 

이곳의 백미는 인위적인 전각보다 자연의 솜씨를 그대로 빌린 석굴에 있다. 거대한 바위가 만든 천연 석굴 속에 나한상을 모셨는데, 이곳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영험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사찰 뒤편에서 솟아나는 석간수(石間水) 또한 명물이다. 가뭄 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이 맑은 물은 단순히 목을 축이는 샘물이 아니라, 합천의 젖줄인 황강(黃江)의 뿌리가 되는 물이다. 이처럼 평화로운 도량이지만, 구한말에는 의병들의 거점 역할을 했던 탓에 일제강점기 시절 소실되는 민족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탑선마을 뒤로는 황강지맥의 흐름이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새 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은 봉계리

금봉암 답사를 마치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연달아 나타나는 조망터들이 마치 작별 인사를 건네듯 발길을 붙잡아 세운다. 그곳에 서서 내려다보는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의 탑선마을 일대는 마치 하늘 위에서 땅의 지도를 펼쳐놓은 듯한 거대한 조감도로 다가온다.

시선 아래로는 황강의 물줄기를 따라 조금은 굵은 하얀 선 하나가 길게 그어져 있고, 그 선을 중심으로 좌우로 실선이 보이는데, 그 주변 여기저기에 희고 푸른 점들이 보석처럼 박혀 마을의 생동감을 전한다. 그 왼쪽으로는 울퉁불퉁하게 솟은 초록의 선이 끝없이 이어지며 황강지맥의 강인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고개를 조금 더 돌리면 왼쪽으로 초점산과 대덕산이 나타난다. 뼈를 감춘 채 넉넉한 흙으로 덮인 부드러운 육산(肉山)의 위엄이 과연 대간의 기둥답다. 그 산자락 우측 깊은 골짜기를 따라서는 집과 축사의 지붕이 푸른 점으로 보여 평화로운 풍경을 자아내지만, 그 반대편 왼쪽은 누런 속살이 흉측하게 드러난 채 비스듬히 누워 있어 보는 이의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만든다.

 

대간 초점산 오르는 길에서 돌아본 삼봉산(J3클럽 배병만 방장 사진). 우측 뒤로 향적봉이 보인다.

 

삼도봉은 덕유의 관문

세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그 이름이 붙었다는 삼봉산. 이 산은 한때 '삼봉덕유'라 불리며 덕유산의 든든한 문지기 역할을 자처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이 이중환은  그의 명저 '택리지'에서 덕유산이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三道)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라고 기록하며 그 영역을 지금의 오리지널 삼도봉까지 넓게 보았다. 그러니 옛 선인들이 이 삼봉산을 덕유의 수문장으로 여긴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통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택리지'는 물론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도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삼각점까지 품고 있는 이 산을 거창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받들고 있는 이유를 알겠다. 정상에서 발길을 떼자마자 마주하는 험준한 암봉에는 산꾼들의 안전을 배려한 데크가 놓여 있다. 그 덕에 우리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조망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고제면의 너른 들녘은 물론, 멀리 삼도봉에서 뻗어 나가는 초강지맥과 오른쪽으로 흐르는 대간 마루금, 그리고 황강지맥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더욱이 진행해 온 마루금의 왼쪽으로는 덕유산의 주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금원산과 기백산까지 시원하게 조망되니, 과연 이 삼봉산은 남부 백두대간의 요충지라 할 만하다.

 

고제면의 덕치리 땅은 백두대간에 둘러싸여 있는 아주 아늑한 마을이다.

 

소사고개의 옛 이름 도마치 (都麻峙)

삼봉산에서 소사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된비알이다. 멀리 무주와 거창을 잇는 1089번 도로 위로 동물이동통로가 있는 소사고개도 보인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삼봉산과 대덕산 사이의 저 고개를 도마치(都麻峙)라고 표기하였다. 지금의 소사고개를 선인들은 도마치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도마치라......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산꾼들에게 '도마'는 익숙하면서도 오해받기 쉬운 지명이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한북정맥 백운산 자락의 도마치(倒馬峙)가 떠오른다. 철원이나 포천에 가면 궁예와 태봉국에 얽힌 얘기들이 많은데, 이 도마치도 그것과 무관치 않다. 궁예는 패자요 왕건은 승자이니 으레  그에 걸맞게 스토리는 각색되기 마련이다. 들어보니 그곳도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다 말(馬)에서 떨어진(倒) 곳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에서 떨어졌으니 倒馬라 한자어 표기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곳의 한자 倒馬峙나 이곳의 한자 都麻峙 모두 우리말 '도마'에 억지로 한자 옷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 지명은 부자연스러운 사건보다 자연스러운 삶의 터전에서 솟아나기 마련이다.

우리말에는 '두르' 혹은 '둠'이라는 뿌리 깊은 말이 있다. '주변을 빙 둘러싸다'라는 뜻의 '돌다'에서 시작되어 '두르다'로, 다시 '두름'과 '둠'으로 분화되었을 것이라는 게 국어학계의 정설이다. 결국 이 말은 분지(盆地)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 혹은 우묵하고 깊숙한 땅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소사고개의 옛이름은 도마치였다.

 

이 '둠'이라는 씨앗은 시간과 지역이라는 바람을 타고 '도로', '두루', '도마', '두밀' 같은 다양한 열매를 맺었다. '두루'나 '두미'가 한자화되어 '학(鶴)'이 되기도 하고, 논의 '두렁'이나 옷의 '두루마기' 또한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다. 용인대 옆의 '학고개'나 성남과 의왕을 잇는 '하오고개'도 여기서 파생된 지명이다. 심지어 지리산(智異山)의 옛 이름인 '두류산(頭流山)' 역시 '백두(頭)가 흘러내려(流)와 멈춘 곳'이라는 멋드러진 수사(修辭)가 아니라,  '두르-드르-디리-지리'라는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의 긴 터널을 지나온 우리말의 변주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부근에 아직도 '도마마을'이 남아 있는 게 그 흔적이다. 따라서 이 고개의 옛 이름 역시 순우리말인 '도마고개'였는데 이를 억지로 한자의 틀에 가두다 보니 '도마치(都麻峙)'가 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렇게 불리던 도마치를 일제때에는 그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나누는 차가운 행정 편의주의로 '지경령(地境嶺)'이라 못 박았을 뿐이다. 이렇듯 일본인들은 땅을 나누기 위해 '단절과 분열'의 방식으로 이름을 붙였지만, 우리 조상들은 '포용과 아늑함' 즉 민초들이 산에 안기기 위한 형상을 보고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일제가 지은 지명은 늘 그러하듯 이름 속에 담긴 땅의 형세와 조상들의 숨결을 거세한 채, 땅의 경계만을 강조한 무미건조한 낙인인 것을 우리는 이미 덕유산에서도 자세히 살펴봤었다.

 

건너편이 도마마을이고 이곳은 소사마을 즉 모란마을이다.

 

소사(小沙), 그 가짜 이름을 걷어내며

고랭지 배추밭을 지나면 잠시 피곤한 다리를 쉴 수 있는 소사마을에 닿는다. 그리고 그 마을의 이름을 따서 도마치였다가 지경령이었던 고개가 다시 소사고개가 되었다. 도마치가 지경령이라는 이름을 거쳐 소사고개가 된 셈이다. 그런데 모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이 산중에 왜 '작은 모래'라는 뜻의 소사(小沙)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마을 입구에 서면 그 이름표부터가 못내 마음에 걸린다.

심지어 고갯마루가 항상 바람에 씻기어 모래가 희고 깨끗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명에 접하게 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살펴보면  역시나 이 이름 뒤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말의 변천사가 숨어 있었다.

본래 '몰'은 '뫼' 이전부터 산을 부르던 우리네 이름이었음을 이미 살펴봤다. 산 안쪽을 뜻하는 정겨운 이름 '몰안'은 세월의 풍파 속에 '모란'이 되었고, 다시 그 소리에만 매몰된 이들에 의해 '모래'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산 깊은 이곳에는 있지도 않은 모래를 찾아 헤매다, 결국 '소사(小沙)'라는 억지스러운 한자 옷을 입혀버린 것이다.

탑선마을은 사과농사가 한창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리산 자락을 빠져나오며 지났던 사치(沙峙)의 어원 역시 '모래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몰(산) + 애(접미사) + 재'가 합쳐진 이름이었다. '몰안'이 '모라내'를 거쳐 '모래내'로 변했듯, 한 글자인 '사(沙)'보다는 두 글자로 이름을 짓는 우리의 관습에 따라 몇 가구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는 뜻의 '소(小)'를 붙여 '소사'라 부르게 된 것에 불과하다. 지리산 자락에서는 두 글자로 만들기 위해 '사치재'라고까지 부르는데 비해 여기서는 얌전하게 '小'를 붙인 셈이다.

우리가 진정 찾아야 할 본질은 가짜 이름 '소사'가 아니라, 산의 품속 깊이 들어앉은 '모란마을'의 아늑함이다. 인근 마을 이름이 에워싸인 곳을 뜻하는 '도마마을'이었으니, 지금은 잊힌 이 마을의 옛 이름 또한 분명 '모란마을'이었으리라.

모란꽃 한 포기 없는 마을에 '모란마을'이라는 이름이 버거워 굳이 소사로 바꿔 불렀던 것일까? 이제라도 덧칠해진 가짜 이름을 걷어내 본다. 그러면 비로소 백두대간이 포근히 감싸 안은 우리말의 참모습, 그 뜨거운 생명력이 민낯을 볼 수 있다.

 

황강 발원지 들어가는 입구

 

황강의 탯줄을 지나 지맥의 갈래를 짚다

탑선슈퍼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다시 숲으로 든다. 공동묘지를 지나자 대간 길은 잠시 인도로 변해 밭고랑 사이를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굽이진 임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측 탑선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황강발원지’라 표기된 이정목을 만난다. 그 부름에 이끌려 발원지 깊숙이 발을 들여 본다.

황강 발원지 표지석

 

모름지기 발원지라 함은 물줄기의 시원(始源)으로서 적정한 수량과 종점까지의 장대한 거리를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이곳 ‘황강 발원지’ 각자 아래로는 비록 가느다랗지만 쉼 없이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맥동하고 있다. 이 물줄기가 세상으로 나와 처음 만나는 동네가 바로 탑선마을이다. 어찌 됐든 이 마을주민들은 황강 줄기에서 가장 높은 하늘 아래 터를 잡고 사는 이들이리라. 여기서 고개를 들면 병풍처럼 펼쳐진 삼봉산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황강의 발원지'라고 표기하여 이 물이 도달할 원대한 종착지를 보여주지만, '황강천 발원지'라 표기함으로써 이 황강이 가진 역사성과 생명력을 건조한 행정용어 속을 갇아놓은 느낌이다. '역전앞'이거나, 강 아래 다시 '내'가 있다는 중복표현으로 읽힌다.

 

황강은 거창 읍내에서 위천을 합수한다.

 

된비알을 힘겹게 치고 올라 삼도봉으로 향한다. 초점산으로도 불리는 이 삼도봉(경상남도 거창, 경상북도 김천, 전북특별자치도 무주)에서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과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의 도계를 따라 산줄기 하나가 가지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간도 정맥도 아닌 이 가지줄기가 그 하위 개념인 지맥(枝脈)에 해당하는지 그 분류 기준을 살펴보자. 이미 만복대를 지나며 서시지맥이 분기하는 지점에서 한 번 거론했으나, 여기서 다시금 그 기준을 명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산줄기가 ‘지맥’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 엄격한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 첫째, 산줄기 요건 : 백두대간이나 정맥, 혹은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지맥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여야 한다.
  • 둘째, 물줄기 요건 : 가지를 친 줄기 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강물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해야 한다.
  • 셋째, 길이 요건 : 그 도상거리가 30km 이상 이어져야 한다.

이 요건을 이곳에 대입해 본다. 우선 이 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몸을 일으켰으니 첫 번째 요건에 합당하고, 여기서 시작된 황강이 상위 등급인 낙동강으로 합수되니 두 번째 요건 또한 충족한다. 마지막으로 그 도상거리가 무려 104.6km에 달하니, 30km라는 기준을 훌쩍 넘어서는 명실상부한 길이 요건도 갖추었다. 그리하여 물줄기의 이름을 따 지명을 부여하니, 초점산에서 갈라진 이 산줄기는 비로소 ‘황강지맥’이라는 고유명사를 얻게 되는 것이다.

황강지맥 갈림길

 

이 황강지맥은 수도산과 단지봉, 우두산, 오도산을 거쳐 만대산과 솜등산, 성산을 품에 안고 유장하게 흐르다, 황강이 낙동강에 잦아드는 합수점에서 비로소 긴 여정을 마친다. 대간의 길목에서 이 산줄기들의 계보를 정갈하게 정리해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초점산이 삼도봉으로서 짊어진 임무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겠는가.

 

또 하나의 삼도봉인 초점산

 

세 번째 삼도봉을 향한 기다림과 장쾌한 조망

사족을 하나 달자면, 백두대간에는 세 개의 삼도봉(三道峰)이 존재한다. 우리는 북진하는 길 위에서 이미 첫 번째 삼도봉을 만나본 바 있다. '날라리봉'이라는 정겨운 옛 이름을 가졌던 지리산의 삼도봉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이곳 초점산이 두 번째 삼도봉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세 번째 삼도봉은 어디일까. 그리 급할 것 없다. 이제 그곳도 머지않았으니 말이다.

 

초점산에서의 조망은 날만 좋다면 지리산까지도 가능하다(배병만 사진).

 

삼도봉 초점산에서의 조망과 대간의 아픔

이곳 삼도봉에서의 조망은 실로 거칠 것이 없다. 발아래로 역동적으로 굽이치는 황강지맥은 물론이요, 멀리 함양 대봉산과  너머로 펼쳐지는 지리산의 파노라마까지 오롯이 시야에 들어온다. 덕유산의 흥덕산이나 지봉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뒤로 향적봉에서 시작된 덕유 주릉의 끝자락까지 장대하게 이어진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월봉산을 지나 금원산과 기백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눈 안에 가득 차오른다.

비록 대덕산 뒷자락까지는 아닐지라도, 백두대간의 척추와 그곳에서 뻗어 나간 지맥들이 그려내는 산세의 대서사시를 조망하기에 이보다 더한 명소는 드물 것이다. 백두대간의 수많은 조망터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절경임이 틀림없다.

다만, 거창의 특산물인 사과 재배를 위해 점점 고도를 높여오는 개간의 물결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전의 고랭지 배추밭이 이제는 사과 과수원으로 그 종목을 바꾸어 산의 품을 파고드는 형국이다. 그 침탈의 대상이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백두대간이라는 점이 못내 안타깝다. 인간의 생업과 백두대간 보호법 사이의 깊은 마찰이 앞으로 어떤 상흔을 남길지 깊은 우려가 앞선다.

 

대덕산을 지키고 있는 노송

 

대덕산 가는 길, 노송과 억새의 마중

삼도봉의 위용을 뒤로하고 대덕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1256.2봉 바로 앞,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송 한 그루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길을 막아선다. 소사마을을 인자하게 굽어살피는 저 굽은 노송은, 고향 집 어귀를 지키며 아우를 기다리던 우직한 형님처럼 나를 맞이한다. 거칠고 단단한 그 등걸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니, 대간을 타고 불어온 바람이 정수리에 맺힌 땀방울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대덕산의 산죽과 억새의 남다른 조화

 

길은 다시 산죽밭과 억새밭으로 이어진다. 대간의 다른 곳에서 만나는 산죽과는 사뭇 다르다. 이곳의 산죽은 어찌나 유순한지, 혹시나 머리 위를 든든히 버티고 선 노송으로부터 모나지 않게 살아가는 법을 전수받은 것일까.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은빛 물결을 만드는 억새와 어우러진 산죽의 조화가 무척이나 평화롭다.

마침내 다가선 대덕산 정상. 여느 산의 가파르고 날 선 오름짓과는 확연히 다르다. 평평하고 너른 정상부와 그곳까지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선은 산객의 긴장을 완벽하게 해제시킨다. 그 넉넉한 품에 안기고서야, 비로소 대덕(大德)이라는 그 이름에 담긴 너른 덕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대덕산 정상석

 

대덕산 정상에는 널찍한 헬기장과 두 개의 정상석, 그리고 2등급 삼각점(무풍 22)이 단단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경표'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이 산은, 멀리서 보아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이 부근의 랜드마크다. 이곳에 서면 남으로는 유장하게 뻗은 황강지맥의 산줄기가, 남동쪽으로는 덕유산의 장대한 줄기가 파도치듯 밀려온다. 북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가 나아갈 세 번째 삼도봉이 황악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어서 오라 손짓한다.

 

초점산과 황강

 

대덕산의 기백과 덕산재의 깊은 골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타고 덕산재로 내려서는 길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된비알의 연속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690m의 소사고개에서 5km 남짓한 길을 걸어 해발 1,291m의 대덕산 상봉까지 숨 가쁘게 올라왔건만, 다시 해발 644m의 덕산재까지 내려가는 거리는 고작 3.5km에 불과하다. 짧은 거리에서 600m 이상의 고도를 깎아내야 하니, 그 가파름은 짐작조차 버겁다.

그러니 겨울이면 아이젠의 날카로운 이빨이나 스틱의 지지력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산꾼들의 안전을 위해 곳곳에 매어둔 로프만이 생명줄처럼 길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산줄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려 지그재그로 휘어진 등로는, 결국 길이 사람의 걸음에 맞춰 제 몸을 낮추고 '결'을 내어준 자비로운 흔적이다.

얼음골 폭포

 

그렇게 한참이나 무릎팍을 울리는 고도를 깎아내다 보면, 적막한 숲 사이로 '얼음골 폭포'를 알리는 삼거리가 마법처럼 나타난다. 여기서 우측으로 발길을 들이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다. 시린 물에 손을 담그는 순간, 온몸을 짓누르던 산행의 노고는 단숨에 씻겨 내려간다.

만일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산행 중이라면, 배낭 속에서 이미 미지근해진 물통을 주저 없이 비워내도 좋다. 그 자리에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얼음골의 생명수를 가득 채우는 호사야말로, 고단한 대간 길 위에서 만나는 가장 청량한 위로가 아니겠는가.

 

언제나 덕산재를 지키고 있는 표지석

 

작은 봉우리 하나를 더 넘어 고도를 완전히 떨어뜨리면 마침내 30번 도로가 지나는 덕산재에 닿는다. 한때 대간꾼들의 쉼터였을 휴게소와 암자는 이제 문을 닫아걸고, 낡은 건물만이 흉측한 몰골로 남겨져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