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백두대간을 마친 다음 바로 한북정맥에 들었고 그 한북정맥을 졸업한 다음 한남금북을 이어가려는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런데 한북정맥을 하면서 거기서 가지를 쳐 나가는 줄기들의 행방(?)이 궁금해졌고, 그 가지 줄기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진행한 줄기가 한북정맥에서 가지를 친 11개지맥이었고 자연스레 한남금북정맥은 그 지맥을 하고 난 뒤로 미뤄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북 11지맥을 마치고 난 다음 한 일은 한남금북정맥에 드는 게 아니라 지맥에서 가지를 친 그리고 한북정맥에서 가지를 친 단맥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을 한북정맥의 잔 가지들과 놀게 되었고 한남정맥이나 나머지 정맥들은 그 한북의 잔 가지들을 샅샅이 훑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그 잔가지들을 헤치고 다닐 때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이렇게 사람이 다니는 길인데 등로 정비 좀 해줬으면 안 되나."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정맥을 마치고 기맥이나 지맥을 하면서도 여름날 가시덤불을 헤치며 지날 때에도 그 바람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아구지맥
한편 정맥을 한답시고 남들에게 으스대며 다닐 때 사실 저의 산줄기에 대한 지식은 정말이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럴 때 후배가 이끄는 산악회에서 낙동정맥을 시작하였고 교통 편의 문제를 이유로 저는 홀로산행을 접고 그들을 따라 낙동정맥에 들게 되었습니다.
예습을 하느라 지도를 펴들고 선답자의 산행기를 읽으면서 주요 지점에는 당구장 표시를 하고는 동그라미도 치고 그럴 때 눈에 들어온 지맥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구지맥이었습니다.
'아구지맥'이라.
바로 아구찜과 아구탕이 연상되는 말이었습니다.
당연히 아구의 그 살벌한 이빨이 생각났고....
도대체 그 산줄기는 얼마나 험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졌고 첨탑과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으면 아구라는 말을 갖다가 붙였을까.
아구지맥이라는 이름은 항상 그렇게 저의 뇌리에 박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낙동정맥을 하면서 삿갓봉이라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는 봉우리에 눈길이 갔고 그렇게 잠시 뇌리에서 사라졌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그 아구지맥이 안일지맥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바로 안일왕산이 발견 아니 안일왕산이라는 봉우리가 제 이름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안일왕산이라......
안일왕을 이야기하려면 실직국이라는 옛 부족국가를 거론해야 하고 그것에 대하여 인터넷을 뒤져보니,
안일왕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이곳 동해안에는 강릉지역의 예국(濊國), 삼척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란 군장국가가 공존해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하여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합니다.
창해삼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와 같은 국가의 기틀을 갖춘 나라가 아니고, 소집단이 모여 한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무리사회적 군장국가로서 당시 한반도 내에는 그러한 군장국가가 130여 개나 있었습니다.
철기시대를 맞아 다량의 청동제 및 철제무기를 소유한 이들 세나라는 영역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게되고, 기원 후 50년경이 되면 마침내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공하여 합병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당시 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하였습니다. 이 산성은 안일왕이 피난 와서 축조한 성(城)이라 하여 안일왕산성이라 부르는데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가면 지금도 정상부에 산성의 형태가 잘 남아있습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의 하천변에 자연석 바위로서 안일왕산성을 알려주는 황장금표(黃 禁表)를 지나 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남쪽은 울진에서 제일 높은 통고산, 북쪽은 삿갓봉, 동쪽은 동해바다와 울진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데, 이러한 지형지세로 볼 때 이 산성은 동쪽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 판단되며, 당시 창해삼국의 전투가 바닷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강릉의 예국이나 삼척의 실직국, 울진의 파조국 모두 강문항, 삼척항(정라진), 죽변항 등의 포구를 전투기지화했으며 그곳이 주된 침투경로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실직국의 왕(王) 가운데 유일하게 그 이름이 남아있는 "안일왕". 울진지역에서는 "안일왕" 보다 "에밀왕"으로 불려지는데, 그곳의 70대~80대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답니다. 즉 예국이, 강릉의 예국이 쳐들어 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말입니다.
이와 함께 안일왕 산성 주변의 통고산은 안일왕이 이 산을 넘으면서 하도 재가 높아 통곡했다 하여 통고산, 삿갓봉의 복두괘현( 頭掛縣.일명 박달재라고도 함)은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 즉 임금이 쓰던 모자를 벗어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울진군 서면 왕피리(王避里)라는 마을은 임금이 피신했던곳, 병위동(또는 병우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또는 임왕기)는 임금이 앉아 쉬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그런 지명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울진지역에는 2천여 년 전 영동남부지역의 중심세력이었던 실직국의 역사가 아직도 그 숨결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보다 울진지역에 실직국 관련 설화가 잘 남아있는 것은 울진지역의 지형적 고립성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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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훌륭한 글을 쓰면서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생기는 대목이 있습니다.
황장금표(黃腸禁標)가 안일산성을 알려주는 표석이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글이나 한자표기의 한자 누락 및 오기.
그리고 왕피천은 14세기 중엽 고려 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백두대간이 지나는 월악산 옆 하늘재를 통해 이곳 왕피천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에서 유래가 되었을 것인데 그게 안일왕때문에 왕피천이 되었다고 하는 것들이 그렇군요.
한편 위 황장금표는 우리가 명산 치악산을 할 때 구룡사를 지나 매표소 바로 옆의 바위에서 읽은 기억이 나지요.
어쨌든 그 공포에 가까운 아구지맥이 안일지맥으로 바뀐만큼 등로의 사정은 어떨까요.
준희선생님께서는 "많이 좋아졌으니 괜찮을거다. 우리는 그 옆의 쇠치지맥 하느라 고생 참 많이 했다."고 말씀하실 때가 작년 5월 경입니까. 박성태선생님 7순 기념 산행을 할 때 덕구온천 옆 자연휴양림에서 뵜을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어쨌든 그 안일지맥의 첫 구간은 무사히 마쳤는데 오늘의 그 두 번째 구간은 어떨까요?
지금까지 사설(辭說)을 늘어놓은 게 사실은 오늘 등로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산 행 개 요
1. 산행일시 : 2015. 08. 22. 토요일
2. 동행한 이 : 산악랜드 대원
3. 산행 구간 : 주리재~안일왕산~아구산~용천사
4. 산행거리 : 14.72km (올해 누적 산행거리 : 623.08km)
구 간 |
거 리 |
출발시간 |
소요시간 |
비 고 |
주 리 재 |
|
11:54 |
|
|
새 재 |
0.80km |
12:13 |
19 |
|
안일왕산 |
2.83 |
13:11 |
58 |
|
아 구 산 |
5.79 |
15:16 |
125 |
10분 휴식 |
수 렛 길 |
3.85 |
16:24 |
68 |
|
용 천 사 |
1.45 |
16:46 |
22 |
|
계 |
14.72km |
04:52 |
04:42 |
실 소요시간 |
산 행 기 록
지도 #1
어쨌든 경상북도에서도 한참이나 오지에 있는 안일지맥에 접근하기는 첫 구간이나 두 번째 구간 마찬가지입니다.
국도에서도 한참이나 들어가야 하는 정말로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첫 구간은 그런대로 집행부의 배려로 대과없이 끝낼 수 있었으나 2구간에 들어서도 비슷한 상황은 계속 벌어집니다.
서울에서 울진까지의 접근거리가 만만치 않고 그 울진에서도 2구간의 들머리인 소광리까지의 길이 너무도 멉니다.
거기에 더하여 1914년 '서면'이라는 이름으로 근 100년을 넘게 사용되어 오던 행정구역 명칭이 2015. 4. 21. '금강송면'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의 세계적인 생태자원인 금강송을 세계적인 명산품으로 만들고 인문지리성과 역사문화성을 동시에 아우르며 지역 정체성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울진군에서는 하고 있는데 이에 산림청에서도 보조를 같이 하여 그 자원들을 보호, 보존하기 위하여 탐방자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서 우리같은 산꾼들이 마음대로 다니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민들의 수익 증진을 위해서 주민들이 음식물을 팔거나 그 수단으로 임도의 차단기를 열고 등산객들을 수송하는 것은 눈을 감아주는 것 같습니다.
집행부에서는 이러한 점을 간파하여 지난 번 이용했던 식당 주인께 부탁을 하여 버스의 진출입이 가능한 곳부터 오늘 구간의 들머리인 주리재까지 대원들이 반트럭을 이용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하였군요.
트럭 두 대에 나눠타고 주리재로 향합니다.
2호차에는 오랜만에 뵙는 '행소리'형님이 열심히 셧터를 누르고 계십니다.
척추디스크 수술 후에도 형님의 산에 대한 열정은 뻬앗지 못 하는 듯 언제 내가 허리가 아팠느냐며 산행에 매진하고 계십니다.
존경스러운 분.
주리재에 도착하자 역시 선두그룹에 당연히(?) 서서 진행하셔야 할 분들이 먼저 오르기 시작합니다.
트럭을 운전해 오신 두 분 사장님께서는 저희들을 배웅해 주시고.....
지난 구간을 잠깐 둘러 봅니다.
좌측 봉우리가 쇠치지맥으로 갈리는 봉우리같고 우측 가려진 부분이 북면에서 갈라져 내려온 봉우리(865.3m)인가요?
우선 오늘의 첫봉우리인 666.8봉에 오르는데 그저 밋밋한게 봉우리라는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고도를 낮춥니다.
이 샛재가 임도는 아니고 수렛길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이 길을 통하여 금강송면 소광리 사람들과 북면 두천리 사람들이 오갔다는 얘기군요.
이곳이 울진 십이령길이기도 하고....
울진에서 해산물을 싣고 이 길을 통해서 봉화로 지어 날랐다는 이야기겠지요.
조령성황사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성황당입니다.
조령(鳥嶺)이라 새재이고...
국사성황당(國師城隍堂)이라는 당집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여기서 국사는 고려시대때 자주 쓰이던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국사가 아니고 하느님 즉 단군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죠?
육당 최남선 선생의 '백두산근참기'를 읽어보면 1926. 7. 31. 백두산을 오르던 중, 국사대천왕사당(國師大天王祠堂)을 만나서는 "송악의 국사당에는 도선을, 한양 목멱산(남산)에는 무학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국사를 승계(僧階)인 것으로 혼동....."
우리나라 산이름 중 가장 많은 산 이름이 국사봉이고 그 다음이 수리봉이니 대강 짐작이 갑니다.
소광리로 내려가는 길....
정말이지 쭉쭉 뻗은 순 한국소나무입니다.
왜송과 비교나 되겠습니까.
636.7봉을 넘어 마루금을 따라 일열로 진행하는 대원들의 모습입니다.
마침 삼림욕을 하는 일반 탐방객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700.7봉을 가기 전 좌측으로 조망이 트입니다.
멀리 송신탑 같은 게 보이는군요.
그렇습니다.
이 안일지맥이 낙동정맥으로부터 갈라지는 속칭 삿갓봉입니다.
라인 전체적으로 보면 삿갓 모양인가요?
글쎄요...
함께 조망하는 '산으로'님이 바로 아래가 십이령길이라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십니다.
준희선생님의 격려 말씀을 듣습니다.
지난 번 성지지맥을 졸업하셨으니 오늘은 또 어느 지맥에 들으셨을지요.
성치도 않은 무릎으로 우리 마루금을 하나라도 더 진행하시려는 선생님의 산줄기 사랑은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십니다.
700.7고지에서 살짝 우틀하고....
도대체 왜 이렇게 길이 좋은 겁니까?
지도 #1의 '가'의 곳에서 이정표를 만납니다.
대왕송을 안내하기 위함인가요?
일단 조금 오름짓하여 777.6봉에오른 후 이정표를 따라 크게 좌틀합니다.
오던 흐름을 따라 직진을 하면 세덕산(740.8m)을 지나 대광천으로 떨어지는 길이겠고.....
대왕송 방향을 따릅니다.
763.1봉은 지나는지도 모르게 지나고....
그만큼 고도편차가 없다는 말이겠죠.
굳이 낙동정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이렇게 백두대간 운운한 것만 봐도 뿌듯한 마음이 생기고 산림청은 이제 어느 정도 9정맥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림청 사무관 중 어느 한 분은 아직도 태백산맥 운운 하던데 그런 분 때문에 산림청이 중앙정부기관 중 말석에서 간신히 명함장만 내놓고 있는 게 아닌가요?
국토의 70%가 산지라는 것을 말로만 할 게 아니라 그 70%의 산지를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우리나라 국익과 직결되는 것일텐데 그런 중요한 기관을 '청'으로 푸대접하는 것은 '경제'라는 논리에 비추어봐도 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놓자고 혈안이 되어 있고 그것도 부족해 사문서 위조까지 행하는 작태를 보노라면 어이가 없어집니다.
산양.
참 이곳도 산양서식지라고 하는군요.
설악산과 이곳.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본 배설물이 염소의 그것이 아니고 산양의 그것?
드디어 대왕금강송을 알현할 수 있는 곳이군요.
이 집광판에서 좌틀하고,
이 판을 만들어 주신 분께서 형제봉이니 뭐니 작명까지 해 주셨지만 어쨌든 훌륭한 조망처에서,
좌측으로 삿갓봉과 지나온 지맥을 둘러보고,
이 멋진 금강대왕송도 봅니다.
이제 잽싸게 이판의 서면이라는 단어도 바꿔야겠지요.
자랑스럽게 울진군 금강송면으로 말입니다.
일본놈들 식으로 동서남북으로 정리를 하니 모든 게 기분이 나쁩니다.
원남면도 매화면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바꿨으니 이참에 북면도 다른 이름으로 바꾸시죠.
몇 분 머물다 일어섭니다.
대왕금강송을 보고 주위 풍광에 너무 취하다 보면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즉 길이 너무 좋으니 사면으로 잘 나 있는 등로를 만연히 걷다보면 이 지맥의 주봉인 안일왕산을 빠뜨리기 십상입니다.
대왕금강송을 지나면서 정신을 차리고 마루금을 고집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아까 해설에서 보았던 '안일왕'의 안일왕산성을 볼 수 가 있고,
그 정상에 있는 2등급삼각점(죽변22)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왼쪽 멀리서 달려오는 줄기가 지나온 안일지맥, 우측으로 진행하는 줄기가 쇠치지맥일 것이니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응봉산(999.7m) 정도가 되겠군요.
안일왕이 보았다는 동해쪽으로는 조망이 막혀 있고....
안일왕산을 떠나 잠시 내리막길을 걸으면,
좌측으로 표지띠가 날리는 곳을 만납니다.
지도 #1의 '나'의 곳인데 지도를 보면 그저 밋밋하게 직진을 하는 길이지만
현장에 임해보면 상당한 된비알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까 좌틀하는 길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좌측으로 나무를 박아놓은 계단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보노라니 낙엽에 숨겨져 있는 그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좀 더 쉽게 내려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등로는 여전합니다.
과연이 길이 그렇게 내심 공포스럽게 바라봤던 아구지맥 아니 안일지맥이었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예전에 봤던 고전에 속하는 산행기를 봤을때 무척 고생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지도 #2
눈요기에 소나무 산림욕까지....
이게 지맥길입니까?
너무 편안한 산책길입니다.
이게 580.1봉인데 아무리 봐도.....
.........................
몇 분이 간식을 드시고 계신 이곳은 아마 예전의 송이채집하던 분들의 캠프 같습니다.
이런 계단이....
우측 사면으로 좀 치고 올라갑니다.
519.9봉에서,
4등급삼각점(울진404)도 확인하고,
진행할 644.3봉도 봅니다.
479.6봉을 우측 사면으로 내려오니,
홍륜사로 내려갈 수 있는 임도를 만납니다.
맞은편으로 치고 올라갑니다.
십지송은 안 되더라도 팔지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지도 #3
어느 덧 마루금은 그동안 멋지게 진행해온 금강송면을 벗어나 울진읍으로 들어서게 되니 이제부터는 북면과 울진읍의 면계를 따라 걷게 되는군요.
그 첫봉우리가 641.8봉인데 여전히 고도편차를 크게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무난한 줄기의 연속입니다.
지도 #3의 '다'의 이동식산불감시초소입니다.
다른 어느 곳보다 확실히 관리되어야 할 곳이 곳입니다.
조금 전부터 계속 따라오는 케이블매설 안내판.
마루금과 같이 합니다.
장구령을 지나고.....
잘 다듬어진 헬기장도 지납니다.
그동안 너무 쉽게 걸었음인지 644.3봉에 오르는 데에는 땀 좀 흘려야 하는군요.
여기도 산불감시초소가 또 세워져 있고....
좌측 중앙에 북면과 금강송면의 갈림봉인 865.3봉이 뾰족하고, 그 너머 우측으로는 쇠치지맥이 흐르는 모습입니다.
조금 더 우측으로 보고.............
그러고는 안일왕산에 주인을 빼앗긴 아구산에 오릅니다.
3등급삼각점(울진301)이 정상을 지키고 있고....
여기는 그래도 예전에 선생님이 지나시면서 부착해 놓은 산패가 지나는 이들에게 현재의 위치를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아구산에 올랐으니 부산에 사시는 GPS의 대가이신 조은산선배님의 아구산에 관한 촌평을 들어봅니다.
아구산(峨口山)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물고기 아귀의 입같이 생겼다고 하여 어구산(魚口山)에서 아구산 또는 악구산으로 불려졌다 한다.(울진군 유래)
물고기 입은 대부분 다 그렇게 생겼는데 왜 하필이면 아구인가? 아구 입은 특별한가?
아귀는 못생겼다. 맛도 없어 그물에 걸리면 곧바로 내던졌고, 이 때 텀벙 소리가 난다고 해서 ‘물텀벙’이라 불렀단다. 아구찜의 원조격인 마산 인근에 있는 산이라면 또 한가닥 이해가 되기도 하겠다만 동해안 지방에서는 쳐다보지도 않고 천대받는 물고기가 아귀였고, 또 한자로는 餓鬼라 쓰는데 이는 입은 크나 목구멍이 좁아 아무리 쳐먹어도 삼키지 못한다는 불교 용어에서 비롯된 것이고,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는 아귀를 낚시를 하는 물고기라는 의미의 '조사어(釣絲魚)'로 이름지어 졌다고 한다.
조선지형도를 보면 금산 위쪽에 현재의 아시고개에 岳厚峙가 있는데(アオヂ 악오치?), 이를 보면 더욱 아구는 아닌거 같은 심증이 든다. 흔히 산 친구를 뜻하는 岳友에서 악우산 > 아구산으로 바뀌지나 않았는지 의심(!)해 본적이 있는데, 조선지형도에는 아구산을 카다카나로 ‘アコ-サン’이라 표기했다. 발음은 아고산. 아구라면 ‘アク’로 표현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우리 지형도의 峨口山 표기는 누가 쓴 건지 몰라도 우리말 발음에 맞는 한자를 찾다보니 그리 된거라 보더라도, 이것을 물고기 아귀에 갖다 댄 거나, 울진에서 보면 아구의 입처럼 생겼다는 유래의 근거는 수긍이 안되는 것이다. 오히려 악우나 악후에서 근거를 찾음이 더 타당하겠다. 신림리에 있는 용천사의 절 이름 [악구산 용천사]를 보더라도 아구산은 아닌 것이다.
아구산은 두 개의봉우리로 이루어졌군요.
아까 오른 서봉과 동봉이라 할 수 있는 이곳.
헬기장을 지나는데 이제부터 마루금이 조금 복잡해집니다.
아픈 옛 상처를 보고...
일제들은 이런 것 까지 자원공출이라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동원하여 다 채취케 했으니....
그렇게 많은 재산과 인명에 대한 배상이 고작 한일행정협정으로 다 끝났다고 떠벌이고 있고 대통령의 동생이라는 철없는 여편네는 거기에 놀아나고....
516고지 즉 지도 #3의 '라'의 곳을 오르는 길에 갑자기 눈이 훤해집니다.
푸른 풀과 소나무의 조화.....
안구세척(眼球洗滌)을 합니다.
좌측의 424.3봉을 올라 1km 정도만 더 진행하면 오늘 구간은 끝나게 되겠군요.
424.3봉에 자리한 헬기장을 지나니,
아!
드디어 동해바다가 보입니다.
날씨 탓에 푸른 물은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바다인 것만은 틀립없군요.
우틀하여 사면을 조심스럽게 내려갑니다.
소나무도 좋지만 예전에 이 나무들로 궁궐이나 있는 사람들 집을 짓는데 썼다는데 도대체 민중들은 이것들을 이고 나르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눈에 선합니다.
김옥현의 묘를 지나고,
오늘의 봉우리 중 가장 낮은 363.5봉을 오르는데 마지막 힘을 다 쏟든 땀을 흘립니다.
역시 마루금 산행은 끝까지 만만한 곳이 하나도 없군요.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낮은 봉우리라 하더라도 고도를 낮췄다 다시 오르게끔 되어 있으니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지도 #4
봉우리 끝에서 잠시 좌측 숲으로 들어가서,
4등급삼각점(울진409)을 확인하고 다시 빠져나와,
선생님의 산패를 확인하고 그 뒤 잡목 숲으로 들어가 좌틀하여 진행합니다.
조금 복잡해진 숲을 지나면,
수렛길이 나옵니다.
지도 #4의 '마'의 곳으로 오늘의 마루금 진행은 여기까지 입니다.
다음 안일지맥 졸업 산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겠군요.
좌틀하여 수렛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여전하고.......
그리고 용천사는 보너스 관광이로군요.
약사전에서 약사여래불께 삼배 올리고....
요사채....
이 용천사는 약사여래불 도량인지....
오늘 집행부에서는 후미 기준 5시간 반 정도로 컷오프를 전했는데 이 정도면 민폐는 되지않았을 것 같고 곧 이어 후미대원들도 다 도착되는 것을 보니 대단하신 분들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근처 농가에서 어른신께 양해를 구하고 등물까지 시원하게 하고는 집행부에서 마련해 준 추어탕에 막걸리를 반주로 마시고 별로 막히지 않는 고속도로를 따라 올라오는데 역시 울진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멀고 가장 오지인지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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