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이 지나는 여원재로 돌아옵니다.
생각건대 여원재(치)는1380년 9월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 1597년(정유년) 6월 9일 이순신의 백의종군길 그리고 1894년 11월의 동학농민 항쟁 중 방아치 전투 등과 맞물려 있는 아주 중요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거기에 하나 더 왜란 당시 유정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지났다고 각자刻字를 해 놓은 게 있다고 하는데....
다시 둘레길로 돌아온다. 운봉읍내를 걸어 운봉사거리를 지난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24번 도로를 따라 연재라 부르는 여원재를 지나 남원으로 갈 수 있고, 우회전하면 용산주차장으로 가서 아까부터 계속 보고 진행해 온 바래봉으로 오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만약 이 지리산 둘레길을 필자가 기획했다면 분명 백두대간 상의 저 여원재를 지나게 그렸을 것이다. 그랬으면 이 둘레길은 역사지리의 한 부분으로서의 여원재를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이 '통영별로'를 지나는 이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위하여 만든 고려 사람들의 '마애불'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황산전투를 앞두고 부장들과 전략을 숙의하는 태조 이성계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시대를 달리하여 무능한 선조로부터 고문까지 당한 뒤 서울을 출발하여 임지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이 여원재에 이르러 마침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면서도 누명에 대한 분노보다는 피난 가느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장군의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신분해방을 외치는 농민군과 이를 제압하려는 민보군의 격렬한 싸움의 현장을 매천 황현과 함께 바라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치기 위하여 참전하여 이곳을 두 번이나 지난 중국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의 흔적도 볼 수 있어 한층 심도 있는 걸음이 되었을 것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볼까?
여원재와 이성계 그리고 고토 분지로 그러나 함포를 장착한 최무선의 전함에 무참히 참패를 당하게 된다. 불명예였다. 일본군이 고려 해군에 참패를 당하다니! 당시 배를 잃은 패잔병들이 산줄기를 이용하여 도주를 하였다. 당시 상황을 보자. 군산진에서 패한 패잔병들은 이른바 ‘왜구(倭寇) 루트’를 통하여 도망갔다. 김천을 지나 그들의 2차 집결지는 지금의 바로 이 남원 운봉이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다. 그는 토벌군의 구원요청을 받고 긴급 출동하여 백두대간 상의 이 여원재 부근에 주둔하게 된다. 그때 홀연히 백발의 여인이 꿈에 나타난다. 그 여인은 이성계에게 일본군을 물리 칠 계략을 일러준다. 반신반의했지만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이성계는 그 여인의 작전에 따라 전투를 수행하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투가 진포대첩과 함께 고려 4대 대첩 중 하나인 ‘황산대첩’이다. 택리지에도 ‘우리 태조가 왜구를 크게 섬멸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토는 택리지의 일어 번역본인 조선팔역지를 통하여 익히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성계는 이 여인에 대한 고마움을 기려 사당을 지었고 그 사당을 여원女院이라 하였다. 그러니 여원이 있는 부근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여원재女院岾라 불렸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여원치女院峙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여원재는 태조 이성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지금의 운봉읍과 이백면을 잇는 24번 도로는 여원재 옛길과 조금 다르다. 여원재에서 남원 방향 도로로 약 100m 정도 내려가면 ‘여원재마애불(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안내 푯말이 보인다. 이곳에서 산자락 아래로 신작로 같은 너른 숲길이 이어진다. 산자락 아래가 이백면 양가리와 운봉읍 장교리를 잇는 ‘여원재 옛길’이고, 남원과 인월-함양을 잇던 조선시대 간선도로인 통영별로 ‘응령역-인월역’ 구간 길이다. 숲길을 잠시 내려서면 오른쪽 절벽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마애불을 만난다. 이 마애불 오른쪽에는 1901년 운봉현감 박귀진이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설화를 새긴 명문이 있다. 즉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노파(지리산 도고道姑 할미)의 계시를 받아 왜구를 섬멸하였고, 이는 지리산신이 나타났던 것으로 여겨 불각을 짓고 모시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420년 전인 1597년(정유년) 6월 9일(음력 4.25일) 낮. 남명 조식의 제자 정탁鄭琢(1526~1605)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 ‘백의종군길’에 오른 이순신 장군은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경남 초계(합천)로 가기 위해 이 길을 지나 운봉 박롱(혹은 박산취)의 집에서 유숙한다. 비가 몹시 내려 길을 멈추고 있는 사이, 권율이 전라도 순천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음날 구례로 향하게 된다. 바로 남원-구례-하동-산청 방향으로 ‘지리산권역 백의종군로’가 바뀌게 되는 순간이다.
이 마애불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옛길은 예전과는 달리 남원시에서 제초 작업을 하여 ‘백의종군길’을 활성화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쓰러진 나무와 초목이 뒤엉켜 어지럽고 빽빽한 숲은 발 디딜 곳을 찾을 수 없어 진행하기가 어려웠던 곳이었는데 남원시 덕에 옛길을 찾은 것이다. 약 5분 정도 인적 없는 편안한 길을 내려가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유정이 두 번 이 길을 지나갔다며 ‘유정부과劉綎復過’라고 글을 새겨놓은 거대한 바위에 닿는다. 돌탑이 함께 있는 이곳은 여원재 아래 ‘황산로 690번’ 표지판이 있는 도로변 공터로도 길이 이어진다. 정유재란 막바지,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협공하기로 한 약속을 어겨 순천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일망타진을 무산시킨 유정이 ‘여원재 옛길’을 지나간 것은 1594년 음력 3월이다. 그로부터 약 3년 뒤 백의종군을 하며 이 길을 지나가던 이순신 장군은 이 바위를 보았을까? 지리산권역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와 맞물려 있는 이 ‘여원재 옛길’이 복원되어 한결 여유롭게 '백의종군 길'이나 '여원재 옛길'을 지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200여m 더 내려가면 그가 처음 이곳을 지나면서 ‘유정차과劉綎此過'라고 각자한 바위도 볼 수 있으니 이왕이면 조금 더 발품을 파는 게 나을 것이다.
.한편 전남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 조은숙은 지리산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여원재가 있음을 찾아낸다. 즉 이태조가 왕이 되기 위하여 지리산 산신에게 기도를 올린 곳이 바로 이 여원재이고, 이 여원재에서 기도하는 숨은 이유는 이태조가 그러했듯이 자신들 즉 동학농민혁명의 주재자들도 역성혁명을 꿈꾸고 있었음을 은근히 암시했다는 것이다. 동학이 주창하는 인내천人乃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명제 아니던가. 임금도 하늘이니 양반이나 상민도 하늘이며, 종도 하늘이니 그 주인도 하늘이요, 남자가 하늘이고 여자도 하늘이라는 거 아니던가.
소설 '녹두장군' 속의 손화중은 여기서 지리산의 성모 ‘마고’를 끌어들인다. 모든 산의 신이 남자임에 반해 이 지리산만큼은 여신이 주재를 하고 있다는 데 착안했을 것이다. 곧 그 지리산의 산신이라는 엄청난 ‘빽’을 끌어들였으니 추종하는 세력들의 믿음도 그만큼 더 확고해졌을 것이다. 나아가 유교사회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었던 여성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여할 수 있게끔 저변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여원재 길은 동학혁명 당시 혁명군과 민보군이 함께 드나들던 곳이기도 하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초고 중에서.
여원재에서 대간길로 올라서는 계단에 장승과 백의종군길 안내판 그리고 동학혁명 안내석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길이 이순신의 '백의종군로'라는 것이죠.
남원 구간 루트를 잠깐 볼까요?
'백의종군로' 중 남원 이하의 루트는 구례에서 하동을 지나 산청, 합천, 사천, 진주를 거치는 161.5㎞의 길이죠.
고증을 거쳐 복원하여 전 구간이 개통될 날을 기다려 봅니다.
운성은 운봉현을 말하니 곧 이 장승은 운봉을 지키는 벽사辟邪장승입니다.
즉 마을 입구나 사찰 입구에 서 있으면서 잡귀를 막기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 벽사신앙辟邪信仰의 한 유형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이라!
당시 승승장구하던 농민군은 방아치 전투와 방아산성 전투에서 민보군에게 대패를 하면서 전세가 역전이 되게 됩니다.
이따 방아치를 찾아서 자세히 보기로 하죠.
이백면 방향으로 약 100m 정도만 내려가면 마애불 안내판이 나옵니다.
도로에서 200m 정도만 내려가면 된다고 하는군요.
이순신 '백의종군로'는 곧 옛 여원재 길이기도 하니 그 너른 길을 따라가면 우측으로.....
좀 투박한 마애불과,
그 우측의 각자刻字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용인 즉슨 1901년 운봉현감 박귀진이 1380년 태조 이성계가 남원에 침략한 왜구를 맞아 싸울 때 꿈에 노파가 나타나 황산에서 이길 것을 예언해 주어 꿈대로 황산대첩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불상 옆에 글을 썼다는 내용입니다.
이성계는 황산전투의 승리로 역성혁명의 기틀을 잡게된 것이죠.
이상훈의 논문 '고려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에 의하더라도 당시 왜구의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강 만 여명(진포 해전에 투입된 왜구가 만 여명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상당한 왜구가 몰살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황산 전투의 왜구 병력이 만 여명이 넘는다고 하니 이 숫자는 당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왜구 잔당들이 상주를 거쳐 운봉으로 총 집결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의 전투 인력 중 살아남은 자가 70여 명이었다니 대단한 전과였음은 분명합니다.
이 패잔병 중 일부가 뱀사골 ~ 영신봉아래의 영신사 ~ 천왕봉으로 도망간 흔적은 김종직의 두류산록에 잘 나와 있습니다.
뒤에 지리산 주릉을 걸으면서 자세히 봅니다.
마애석불을 빠져나와 5분 정도 내려오면 큰 바위에 각자가 보입니다.
'羅州 林氏三世 忠義碑나주 임씨삼세 충의비'로군요.
글자도 희미하거니와 간단한 문장도 아니어서 닥밭골 심충성 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副司果 林珪 羅州人 居南原 (부사과 임규 나주인 거남원): 부사과 임규는 나주사람으로 남원에 살았다.
壬辰 餞天將 殉義 于此 (임진 전천장 순의 우차): 임진년에 명 장수를 보내고 의로써 죽었다.이로써
贈 左承㫖 (증 좌승지): 좌승지로 올렸다.
子 大儒 甲子 追賊過 此有軍功(자 대유 갑자 추적과 차유군공):
임규 아들 임대유는 갑자년에 적을 쫓아가서 물리쳐 이 군사의 공이 있어
贈 漢城庶尹(증 한성서윤): 한성서윤으로 올렸다.
大儒孫芫戊申以食+高軍將到此有功(대유손원무신이고군장도차유공):
임대유의 손자 임원이 무신년에 군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전진하여 이 공이 있어
贈 漢城左尹(증 한성좌윤): 한성좌윤으로 올렸다.
三世并旌閭(삼세병정려): 삼 세대를 아울러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역시 집안 내력이군요.
여기서 5분 정도 더 내려가니 커다란 바위가 보이며 보이는 면에는 덩굴이 예쁘게 줄쳐져 있군요.
드디어 오늘 찾던 소위 '유정부과 ' 바위입니다.
좌측에는 돌탑이 한 기 서 있고,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라는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돌탑 내부에는 촛불을 켠 흔적이 보이고......
중앙에 고대하던 글귀가 보입니다.
萬曆 二十二年 甲午歲 季春月 征倭都督 豫章省吾 劉綎復過(만력 이십이년 갑오세 계춘월 정왜도독 예장성오 유정부과)
1594년 3월에 왜군을 치는 장수 중국 예장 출신이며 자가 성오인 유정이 두 번째 지나가다.
萬曆 後 四周 癸丑 仲秋月 湖南左營將 李民秀 改刻(만력 후 사주 계축 중추월 호남좌영장 이민수 개각)
1793년 8월에 호남좌영장 이민수가 고쳐 새기다.
萬曆 後 五周 己酉 季秋月 湖南左營將 洪永錫 再刻(만력 후 오주 기유 계추월 호남좌영장 홍영석 재각)
:1849년 9월에 호남좌영장 홍영석이 두 번째 새기다.
'부과復過'라고 하였으니 처음 지났을 때는 그냥 지나갔나요?
하긴 '부과復過'이니 '초과初過'를 쓰려고 하니 외국인인 그가 '부과復過'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200m 정도 더 내려갑니다.
그렇군요.
또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희미한 글귀가 어지럽게 각자되어 있습니다.
다시 심충성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萬曆 癸巳歲 仲夏月 征倭都督 洪都省吾 劉綎過此(만력 계사세 중하월 정왜도독 홍도성오 유정과차)
:1593년 5월에 왜군을 치는 장수인 중국 홍주 도독부의 자가 성오인 유정이 처음 지나가다.
湖南 兵馬節度使 李鐽 崇禎 後 三 甲申 改刻(호남 병마절도사 이달 숭정 후 삼 갑신 개각)
:호남 병마절도사 이달이 1764년에 고쳐 새기다.
節度使公 曾孫 顯稷 八十五年後 戊申 改刻(절도사공 증손 현직 팔십오년후 무신 개각)
:절도사 이달의 증손 이현직이 85년 뒤 1848년에 고쳐 새기다.
節度使公 玄孫 前 承㫖 鶴榮 統營覲 行瞻拜 戊申後 二十一年 改刻(절도사공 현손 전 승지 학영 통영근 행첨배 무신후 이십일년 개각)
:절도사 이달의 현손으로 승지를 지낸 이학영이 통제사를 뵙고 사당에 절을 하고 1869년에 고쳐 새기다.
그냥 이곳을 지나간 것이니 과차過此로군요.
그러니 유정은 이곳을 1593. 5.에 처음 지나고 이듬해 3월에 지났으니 거의 10개월 만에 다시 지나간 것입니다.
심충성 님은 제대로 보일 리 없는 이 글을 읽기 위해 이끼를 정성스럽게 걷어내고는 물을 뿌려 확인했다고 하는군요.
결국 유정이 이곳을 지나면서 새긴 각자가 마모되는 것을 보고 이달 →이현직 →이학영이 차례로 다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여원재로 돌아나가니 아직 09:00도 채 되지 않아 11시에 도착인 대원들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지루할 것 같습니다.
시간도 나고 하니 이참에 방아치와 방아산성이나 둘러보고 올까요?
가다가 대원들을 만나면 다시 되돌아 오면 그뿐이고.....
09:00정도 여원재를 출발하여대원들이오고있는 방향으로 북진합니다.
09:24
여원재에서 방아치로 가는 길에 예전에 이곳을 지나면서 달고 간 제 표지띠를 만납니다.
'현오삼과玄悟三過'의 흔적인가요?
09:54
방아치에 도착을 하여 전화를 해보니 이제 고남산이라는군요.
고남산이라.....
조선시대에는 적산赤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불렸었죠.
적산의 赤은 '박, 밭, 불' 등의 뜻을 가진 지명이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바뀐 이름입니다.
그러니 원래는 '아래 아'를 써서 'ㅂ.ㄺ산' 즉 산악숭배사상의 소산인 '신성한 산'의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황산전투를 앞두고 이 고남산에 올라 약수로 목욕을 하고 제를 지냈던 것이죠.
그러니 적산赤山인 이 고남산을 태조봉이나 고조봉高租奉, 제왕봉帝王峰, 일광산日光山 등으로 부른 이유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원들은 아직도 한 시간 정도는 더 걸려야 내려올 것군요.
그럼 되돌아 나가 방아산성을 갔다오기로 합니다.
이 방아산성은 할미산성, 합민성으로도 불립니다.
오던 길을 400m 정도 되돌아 나간 다음 이정목을 만납니다.
이 지점이 운봉읍과 이백면 그리고 산동면 등 이른바 삼면봉입니다.
이정표는 우측으로 들어서 400m 정도 직진하면 방아산성이 나온다고 알려줍니다.
방아산성 가는 능선은 산동면과 이백면의 면계인데 잡목이 아주 성가시게 합니다.
당시 농민군은 산동면 부절리의 부동에 요천을 등뒤에 놓은 이른바 배수背水의 진陣을 쳤습니다.
문제는 이 방아산성은 마한이나 백제 때 운봉지역이 고원지대라는 걸 염두에 두고 조성한 석성입니다. 즉 운봉 쪽에서 보자면 그저 나즈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이백이나 산동에서 보자면 640m나 되는 상당한 고봉입니다. 그러니 그 우측의 고남산이 846.8m이고 보면 운봉을 치고 인월을 지나 산청으로 진격을 하자면 어차피 여원재가 아닌 방아치였을 겁니다. 1894년 11월 14일 유복만, 남응삼이 이끄는 농민군은 권포리의 관암재 부근 곧 고남산 바로 아래에 진을 치고 있던 민보군과 대격전을 치르게 됩니다.
이 방아산성을 장악한 민보군은 거친 서쪽 사면을 치고 올라오는 농민군에게 등로 좌측으로 보이는 직경 30cm 정도의 돌들을 굴립니다.
크기가 일정한 것을 보니 이 돌들은 여기서 주운 것이 아니고 작전에 공하기 위하여 일부러 사람이 지고 온 돌들입니다.
이틀에 걸친 대접전은 일목장군 박봉양의 승리로 끝났고 농민군은 남원으로 패퇴하게 됩니다.
이 돌들이 그때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옵니다.
.............
지금과 같이 나무가 많지 않았을 당시의 사정을 고려해 보면 '돌 굴리기 작전'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훌륭한 계략이었을 것입니다.
요천 건너 연화산527.9m과 요천지맥의 맹주 천황산909.6m이 보이는군요.
이 방아산성 정상에는 전주최씨 음택이 자리하고 있군요.
어떻게 이런 곳에 묘를 썼는지.....
사실 제 관심은 이 3등급삼각점(남원306)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삼각점에 좀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 지도를 보면 이 봉우리는 이백면 강기리와 산동면 부절리의 면계 상에 있는 봉우리인데 삼각점 조서를 보면 이 점의 지번이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 장동'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긴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나와 있는 오류가 어디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자꾸 누가 지적을 해줘야 하는데.....
10:28
방아산성을 빠져나오면서 적산이라고 불리던 고남산을 보며 내려옵니다.
산성 입구 삼거리에 도착하여 전화를 해보니 대원들은 아직 방아치를 지나지 않았군요.
한 15분 정도 기다리니 선두대원들을 필두로 서서히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11시 여원재에 도착하기로 했는데 조금 늦은 시간입니다.
여원재 할머니 민박집에 주문해 놓은 점심을 먹고 저도 함께 나머지 구간을 걷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걷는 대간길은 그저 한가롭기만 합니다.
다음 구간은 고기삼거리에서 성삼재라!
고리봉에서 반야봉과 천왕봉 그리고 삼정산과 새봉까지 잘 보이겠죠?
만복대 못 미친 지점에서 서시(견두)지맥도 눈여겨 봐야겠고.....
무엇보다 종석대와 종석대 우측으로 가지를 치는 간미봉과 지초봉을 놓치면 그것도 안 되고.....
어디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백두대간도 이제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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