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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TWINS/현오의 백두대간 꿰뚫어 보기

지리산을 찾아서....(백무동 ~ 한신계곡 ~ 영신봉 ~ 영신사터 ~ 거림갈림길 ~ 청학연못 ~ 촛대봉 ~ 연하봉 ~ 장터목 ~ 중산리)

 

 

산에 들지 않으면 나만 손해!

그것도 거려는 대상이 지리산이라면 두말해 무엇하리오!

지리산은 나에게만큼은 동네 뒷산 아니겠는가!

그저 머릿속으로 늘 그리고 있던 것을 그만큼의 그림만 찾아오면 될 것을 ......

과욕은 금물이다!

 

늘 그런 마음입니다.

비 핑계, 일 핑계, 노인네 핑계.....

산악회 차를 예약합니다.

가끔 찾는 지리산, 설악산 무박 전문 산악회.

이번에는 지리 주릉이 아니라 백무동에서 한신 계곡을 거쳐 영신봉 ~ 좌고대 ~ 영신대 ~ 창불대 ~ 청학연못 ~ 촛대봉 ~ 제석단 ~ 제석봉 ~ 천왕봉 ~ 법계사 ~ 문창대 ~ 중산리 코스를 계획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입금했으니 빼박캔트!

 

죽전으로 나갑니다.

안 타던 차를 타서 그런가?

해밀 차를 타면 바로 오던 잠이 도대체가 오질 않는군요.

특유의 낯가림?

함양휴게소에서 라면으로 이른 아침을 먹고 성삼재에 종주팀을 하차 시킨 다음 백무동으로 이동합니다.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8. 9. 22. 토요일

2. 동행한 이 : 박대감

3. 산행 구간 : 백무동 ~ 한신계곡 ~ 영신봉 ~ 영신사터 ~ 거림갈림길 ~ 청학연못 ~ 촛대봉 ~ 연하봉 ~ 장터목 ~ 중산리

4. 산행거리 : 21.31km

구 간

거 리

출발 시간

소요 시간

비 고

백 무 동

 

03:51

 

 

영 신 봉

7.37

07:15

144

 

영신사터

1.07

08:31

76

거림갈림길

2.15

10:14

103

청학연못

1.09

10:54

40

촛 대 봉

1.05

12:06

72

장 터 목

3.18

13:26

80

중 산 리

5.30

15:25

119

 

21.21 km

11:34

실 소요시간

 

산행기록

 

지도 #1

백무동 팀을 내려주고 차는 후미등을 켠 채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중산리 가서 푹 주무십시오.

03:51

베트남 며느리는 잘살고 있으려나?

외롭게 보이던데....

무속인이 백 명이 넘게 살아서 혹은 백 가구가 넘게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百巫洞입니다.

천왕봉의 성모사에서 기도를 드리는 갑남을녀들의 Base Camp 즉 성하촌聖下村 역할을 수행하던 곳이라 보면 됩니다.

용유담 옆의 용유당이 유치원이라면 이 백무동의 무속인들은 초등학교 그리고 제석봉의 제석당이  중등학교 정도 역할을 하였으니 역시 천왕봉이 성모사는 고등 기도처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겁니다.

그러니 백百리에 걸쳐 안개霧가 낀다거나, 백百 명의 무사武士가 살았던 곳이었다는 등의 엉터리 해석을 하면 좀 곤란합니다.

인터넷의 폐해弊害 중 하나입니다.

 

그걸 시각을 달리하여 그 부근 마을이 조성된 원인을 찾아볼까? 산내면의 군자리나 덕전리의 백무동이 마고할미가 백 명의 자식을 무당으로 보내 접신을 위해 찾는 새내기 무당들과 치성을 드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기도꾼들을 위하여 세워진 마을이라면 백일리는 실상사의 사하촌으로 그리고 이 함양의 의탄리나 금계동은 벽송사, 금대사, 안국사의 사하촌으로 형성된 마을이었다. 그런 마을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흘러들어온 피란민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모둠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초고 중에서 

 

1586년 9월 6일 이곳을 그린 청계도인 양대박(1543~1592)의 글을 보면 확실해집니다.

다시 산길 10여 리를 가서 백문당(白門堂: 혹 백무당(百巫堂)이라고도한다)에 도착하였다. 이 집은 길가 숲 속에 있는데, 잡신들이 모셔져 있고 무당들이 모이는 곳이다. 밤낮없이 장구를 치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희한하고 괴이하였다. 이곳은 얼른 떠나야지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 밥을 재촉해 먹고 얼른 신을 신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자신의 구역에 있던 곳이어서 그랬나요?

항상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군수였던 점필재 김종직(1451~1492)은 근무지인 함양 관아를 떠나  4박 5일 간의 지리산행을 마치고 날머리로 택했던 곳인 이 백무동을 지나면서 부속인들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이 없었습니다.

차에서 같이 내린 일행들이 바로 장터목으로 가야할 지 아니면 직진하여 한신계곡으로 갈 지 지도를 보고 있습니다.

다들 좌틀하여 장터목을 택합니다.

장터목까지는 5.8km.

세석까지는 6.5km.

저야 뭐 갈등을 느낄 필요도 없이 직진합니다.

영신봉에서 한신바위도 봐야 하고 운장바위도 봐야 하며 또 좌고대도 봐야 하니.....

그래서 세석길로 접어듭니다.

이제 세속을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 아니 지리산신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니 이제 정치니 경제니 하는 세진世塵들은 잠시 내려놔야겠죠?

한 5분 올라갔나요?

앞에 한 분이 후라쉬를 들고 걸어가고 계십니다.

같은 차를 타고 온 일행이군요.

길가에 있는 야생화를 관심 있게 보면서 촬영까지 하시고.....

"어느 코스로 가실 생각인가요?"

그분을 지나치면서 인사치레로 한 마디 던집니다.

"그냥 일반적인 코스로.... 근데 선생님은 어느 코스로 가시는지요?"

선생님은 무슨....

"전 그냥 시간이 좀 남을 것 같아 여기저기 들를 생각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반색을 하며,

"제가 이 길은 대학 때 한 번 오고는 처음인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조금 위험한 길 같으면 바로 "그러시죠." 했을 텐데 진행하는 구간이 비탐방 구간이기도 하고 그분이 어느 정도 구력이 있는 지도 잘 모르니...

"백두대간은 하셨나요?"

저도 모르게 습관상 산행 경력이나 산행의 이해력의 척도로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예. 아직 완주는 못했고 지금 속리산 구간 진행 중입니다."

어쭈?

그럼 산행 맛은 봤다는 얘기?

"어느 산악회에서 합니까"

"자유인에서 하고 있습니다."

자유인이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 그분을 쳐다봅니다.

물론 랜턴의 불빛을 손으로 가리고.....

"한회장님도 아시겠네요?"

"그럼요. 제가 현재 22기입니다."

일단은 오늘 같이 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사부님 되시는 준희선생님이나 박성태 선생님, 맨발사부님과도 오랜 교류가 있으신 분이니.....

04:26

"점필재 김종직 아시죠?"

한 마디 또 던집니다.

"아. 그럼요. 국사 시간에 배운...."

"예. 함양군수였던 점필재 선생이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이 첫나들이 폭포 부근에서 하산하여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을 만납니다. 재미 있죠? 오늘 제가 진행하는 곳들 중 몇 곳이 선인들의 체취를 느끼는 그런 산행일 겁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기대됩니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복부(僕夫)가 말[馬]을 데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 현 실덕부락)에 당도하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산록 중에서

어둠 속이지만 약간은 흥분한 듯한 얼굴을 볼 수 있고 그런 기대 섞인 목소리를 들으니 제가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예전에는 이 한신 계곡으로 내려오게 되면 최소 두 군데는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너야 했어요. 다리나 안전시설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죠,"

30여 년 전 학생 신분이었던 처남들을 데리고 지리산행에 나섰다가 이곳으로 하산하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초봄이나 늦가을에 이곳은 피해야 할 코스였어요. 그래서 장터목으로 많이 다녔지요. 찬 한신의 물을 건널 때 그 에는 듯한 고통이란!"

"그랬군요. 물소리가 아주 듣기 좋은데요"

손에 들고 있는 후레쉬로 연신 물소리 나는 곳을 비추면서 계속 갘탄사를 연발합니다.

그런데 폰으로 촬영을 하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이 정도 어딘가가 바로 장터목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일 것 같네요. 장터목 옛 야영장에서 우측으로 길이 보이는데 아마 이 길이 그 루트 같은데..... 저도 그 길을 가보지 않아..."

"........"  

지도 #2

어제 비가 와서인지 풀과 꽃이 반짝반짝 빛을 발합니다.

석산이라고 하는군요.

상사화에 속한다고 하며 독성이 있다고도 하는군요.

정말 멋지군요.

이제 보니 야생화 박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계곡 이름이 한신 계곡이잖아요? 혹시 왜 한신계곡이라고 이름 지어졌는지 아세요?

느닷없는 질문이었는가 싶어 곧 후회를 했는데 이분은 꼭 준비된 사람처럼 답변을 하더군요.

"오기 전에 찾아봤는데 너무 골이 깊어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고 해서 오히려 한산하다는 뜻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예습까지?

어쨌든 꼭 그렇지는 않지만 기다리던 답변이기도 하여,

"그러면 찰한寒이나 한가할閑을 써야 되지않나요?"

라며 되묻자,

"하긴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들은 그저 한 사람이 엉뚱하게 해석하여 올려놓으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퍼나른 것이라....."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얘기지만 어차피 오늘 하루를 같이 지내야 할 분이기 때문에 저에 대해서 알려줄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사실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의 저자입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시고요. 그러다 보니 나무와 꽃을 빼고는 봉우리의 이름 하나, 계곡의 유래 하나하나에 대해 신경이 써집니다."

"아! 그러시군요. 어쩐지...."

05:57

"마지막 폭포이지 않나 싶네요. 근데 어떻게 그리 야생화에 대해서 해박하시죠?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크다 보니 자연에는 영 젬병이라. "

잠시도 쉬지 않고 후래쉬로 주변을 살피며 올라가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입니다.

뒤에서 혹은 앞에서 주절거리며 꽃이름을 쏟아내니....

"글쎄요. 선생님이 산에 대해서 해박하신데.... 신은 한 사람에게 여러 재능을 주지 않으셨나 봅니다." 

06:33

"다 올라왔네요. 저 능선이 임천 건너에 있는 건데 임천지맥이라고 합니다. 가운데 가장 높은봉우리가 삼봉산1186.7m인데  저 능선이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의 도계가 되죠. 그 우측 봉우리가 오도봉1038.5m으로 어느 스님이 저 봉우리 부근의 암자에서 깨달음 가졌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랍니다. 견성오도의 그 오도悟道입니다. 그 옆의 쑥 들어간 곳이 오도재인데 그 고개에는 '지리산제일문'이라는 성문 같은 곳으로 차를 통행하게끔 만들어 놓았고 시비詩碑도 여러 개 설치해 놓았는데 무엇보다 'S'자형 고개는 함양의 명물이죠. 그  우측이 법화산992.9m으로 그 아래 엄천과 관련하여 강용화의 화산12곡이라는 명승지와 관련 시詩가 만들어 지게 되었죠. 법화산은 물론 불교의 법화경에서 따온 이름이구요. 그리고 그 엄천의 용유담이라는 곳이 있는데 가히 절경이고 바위에는 선인들이 각자刻字도 많이 있어 눈요깃감으로는 그만입니다."

"용유담이라 하면 아까 말씀하신 용유당과...."

"예. 바로 그 용유담 옆에 용유당이라는 당집이 있었죠. 지금은 없어졌지만....부근에 엄천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이 신라 왕들에게 제를 올리는 특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하죠. 워낙 큰절이라 앞을 흐르는 물줄기를 그 엄천사의 이름을 따서 엄천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것인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그저 임천이라고만 나와 좀 아쉽습니다."

그나저나 용유담이란 곳이 어떤 곳인데 이렇게 많은 풍류가객들이 이곳을 노래했을까? 용유담은 조선 말 유학자인 강용하(1840~1908)의 화산12곡에 나오는 지명 중 1곡에 해당하는 곳이다. 1곡인 용유담부터 시작하여 12곡인 엄천강 하류의 함허정에서 끝나는 절경을 노래한 시에 나오는 지명이다. 여기서 화산은 물론 법화산이다. 법화산은 법화경 즉 묘법연화경에서 따온 불교 용어인데 아무래도 유학자들이 불교적이 냄새를 지우고자 화산이라 불렀다. 참고로 보통 마을의 진산을 화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진산을 꽃봉우리에 비유하는 의미에서 많이 붙였다. 이 화산花山을 좀 더 화려하게 부르려 화산華山이라 부르거나 아예 비단으로 두른 산이라고 하여 금산錦山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이 강용하의 무산유집武山遺集 화산12곡에 나오는 지명은 각 그 부근의 바위에 각자刻字되어 있다. 그러니 그 각자刻字 바위를 찾으며 강 하류로 내려가는 것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이 각자와 시에 속에 숨겨져 있는 일화나 설화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그 기쁨을 배가 시켜준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초고 중에서 

06:43

능선으로 올라섭니다.

이번에는 남부지리를 봅니다.

"그럼 이게 대간길인가요?"

능선으로 올라서자마자 그 분이 한 마디를 던지더군요.

"그런 것도 아세요? 그냥 앞 사람 가는 대로 따라가면 대간길 아니예요?"

능청스럽게 한 마디 거들자 씩 웃으며,

"그런 것쯤은 저도 알죠."

"어련하시겠습니까. 한회장님에게 산을 배우시는 분인데. 정맥이라고는 들어봤나요? 자유인에도 정맥팀 있잖아요?"

"정선 부근 어느 지맥은 다닌다고 들어봤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있을 겁니다. 지금 호남정맥이라는 데를 하고 있고 있을 건데 저 구름 끝 좌측에 있는 게 그 호남정맥이 마지막 기지개를 켜는 백운산1228m이고 그 좌측이 억불봉1007.5m이죠. 백운산에서 억불봉으로 진행하는 줄기를 신산경표에서는 억불지맥이라고 하는데 대한산경표에서는 수어지맥이라고 하죠. 호남정맥은 저 백운산에서 수어지맥 앞으로 뚝떨어지면서 쫓비산538.2m을 지나 섬진강이 남해를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되죠. 사실 산경표에는 호남정맥의 끝이 저 백운산이라고만 나와 있어 그렇다면 호남정맥이 백운산에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산경표가 잘못 된 거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건 정말로 큰 오해예요. 그래서 박성태 선생님은 하는 수 없이 그의 저서 '신산경표'에서 그 끝을 망덕포구까지 끌고갔던 것이죠."

무슨 얘기를 하는가 하는 듯한 표정을 짓지만 그래도 스틱 끝을 주시하며 진지하게 귀담아 듣는 폼이 오히려 정겹습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백운산 주변의 산은 모두 백운산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쫓비산이나 망덕산도 모두 백운산이라는 거죠. 우리 선조들은 산을 크게 보았지 작게 보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구요. 아마 이는 중국을 모방해서 시를 짓다보니 뻥만 많이 늘어서 그렇게 된 거 같습디다. 이 백두대간만 해도 그래요. 산경표에는 백두대간의 끝이 지리산이라고만 나왔거든요. 그렇다면 지리산 어디가 그 끝이냐는 겁니다. 어디라고 보세요?"

"글쎄요. 중산리부터 시작했으니 중산리 아닐까요?"

멋적은 웃음을 띄기는 하지만 어느 사람은 안 그럴까?

"산경표의 기본 사상은 산줄기는 물을 만나면 그맥을 다 한다는 것이예요. 이른바 '산자분수령이라고도 하지요."

"산자분수령 저도 압니다. 우리 대장님도 산자분수령 얘기를 가끔 하더군요."

"그럼 뜻은 아시겠네요?"

"뭐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줄기는 산줄기를 나눈다.' 그런 거 아닌가요?

"그렇죠. 그 말은 대동여지도 발문에 나오는 구절인데 엄격하게 어법에 따라 해석하면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라는 뜻이예요.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自'의 훈이 '스스로'라는 말도 있지만 '~로 부터'라는 뜻도 있다고 배웠잖아요? 그런데 아마 어느 분인지는 모르지만 '산자분수령'이라는 문구를 보고서는 무릎을 탁 쳤을 것 같아요.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라는 해석이 가능하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 문장을 숙어로 생각합니다."

"요 아래 세석대피소에 가서 간단하게 뭐 좀 막고 영신봉으로 가기로 하죠."

어차피 저는 가지고 온 게 떡과 빵 뿐이니....

그건 그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간단하게 먹고 있는데 한 분이 들어오시더니 버너를 켜서는 뭔가를 들들 볶아 드십니다.

"많이 드시고 오십시오"

간단하게 요기를 끝낸 우리는 늦게 취사장으로 들어온 분에게 산인사를 건네고 영신봉으로 갑니다.

07:15

"이 이정목 너머가 헬기장이고 그 우측으로 들면 이따 들르려는 영신사터로 가는 길인데, 예전 사람들은 그 길로 지리 주릉을 걸었을 겁니다. 이곳 어딘가에 빈발암이 있었으니까 그 빈발암과 영신사를 잇는 길이 산길이었을 거라는 얘기죠. 이 얘기는 곧 지금은 대피소와 대피소를 잇는 곳이 등로이지만 예전에는 암자와 암자를 잇는 산길이 등로였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암자가 대피소, 산장, 캠프 역할을 했다는 얘기죠. 우린 뒤의 금줄을 넘어가야 합니다."

"아! 예전의 암자가 그런 역할도 하였군요. 이 줄을 넘으면 바로 불법행위를 하게 되는군요."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그분과 함께 금줄을 넘습니다.

"어쩔 수 없죠. 탐사가의 비애입니다."

"바로 여깁니다. 작년에 오를 때만 했어도 이 부근이 구절초와 쑥부쟁이 천국이었는데...."

조망이 터지면 하는 작업의 하나!

"좌측 끝에 보이는 게 연하봉이고 그 우측으로 구름에 덮힌 게 천왕봉이네요."

"저 흐르는 구름 속에 숨은 거 말인가요?"

"예. 어떨 때 보면 꼭 마이산 같이 보이기도 하더군요. 저 연하봉이 연하선경이라고 해서 약간 흐린 날 운무가 살짝 끼었을 때 저곳을 걸으면 몽환적인 느낌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는 곳입니다."

"이따 저기도 지나갑니까?"

"예. 오늘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것 같네요. 아까 얻어 먹은 사과값 치르는 겁니다."

"우측에 나무에 가린 게 촛대봉인데 이따 들를 겁니다. 이 영신봉은 워낙 기가 세서 사람이 접근하기가 어려운데 저 촛대봉은 그렇지가 않나 봅니다. 만만하게 여겨 사자봉, 시루봉 ,수리봉, 증봉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어요. 마천이나 하동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저 촛대봉을 영신봉보다 더 쳐주기도 했던 거 같아요."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 현 제석봉)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 현 중봉)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 현 시루봉)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 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 만하므로, 종자(從者)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취하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취하였다.  

 

증봉(甑峯 현 촛대봉)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沮原, 세석평전)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坑]도 놓아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를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한두 마리에 불과한데, 노리갯감으로 충당하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 김종직 유두류록

쌀 한 말을 남겨두고 승려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떠나 소년대에 올랐다. 솜대[?竹]를 뚫고 계족봉(鷄足峰)을 지나 30리 길을 걸어 빈발암(貧鉢庵)에 닿았다. 암자 아래에는 영신암(靈神庵)이 있었고 암자 뒤에는 가섭전(伽葉殿)이 있었는데 세속에서 영험이 있다고 말하는 곳이다. 나는 그곳을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돌덩이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 남효온 지리산일과日課

"우측 낮게 흐르는 산줄기가 낙남정맥인데 그 줄기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죠. 중앙 좌측으로 우뚝 서 있는 게 바로 삼신봉 중 바깥에 있디고 하여 외삼신봉1286.7m이고 그 뒤에 희미하게 높이 솟아 있는 게 아까 본 백운산입니다. 그 우측 줄기 중 중앙에 상대적으로 좀 높아 보이는 게 바로 삼신봉1288.7m이고, 그 바로 우측이 내삼신봉1355.1m이예요. 저 삼신봉에서 낙남정맥은 좌측으로 틀어 진행하는데 내삼신봉 쪽으로 트는 줄기를 특히 지리남부능선이라고 하죠."

좀 내용이 세분되어 복잡해지는 듯한 느낌이지만 설명이 정확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해력이 좋아서인지 제대로 알아 듣는 것 같더군요. 그러니 더 신이 나서 떠들게 되고.....산에 오면 느끼게 되는 방언方言 증상입니다.

"이 영신봉은 조선시대 이전에는 없던 이름이었어요. 그저 이 아래 있었던 빈발암과 영신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비롯된 이름이죠. 오히려 빈발봉이라 부른 흔적(남효온의 두류산 일과에 나옴)이 있는 것을 보면 빈발암도 상당한 규모의 암자였었나 보죠?  저 뒤로 가면 운장바위가 나오니 그거 보러 가시죠."

"운장 바위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 말입니까?"

"예. 맞죠. 서울 동묘에 관우 사당이 있잖아요? 영험하기로 이름 난 이 지리산에 기도를 하러 온 민초들이 없을 리 없었겠죠. 우측에 있는 바위에서는 한신을 부르고 이곳에 와서는 이 바위 아래에서 기도를 드리며 운장을 불러댔던 것이죠. 아마 임진왜란 혹은 고려 말 정도가 될 것 같아요. 저 일본의 왜구놈들이 하도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데 나라에서는 딴 짓만 하고 있으니... 그러니 그들에게는 난세의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겠죠.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영웅이 없었나 보죠? 그래서 찾은 신이 삼국지의 관우였으며 초한지의 한신이었던 것이죠."

예로부터 우리나라 무속인들과 민중들 사이에서도 석가나 공자 외에 옛날 중국의 지략과 무공이 출중한 영웅들 즉 관우, 장비, 유비, 제갈, 한신 등을 섬기는 사례는 빈번했다고 한다.

한국민속종교 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무속세계에서 중국 신령을 모시는 전래풍습은 임진왜란 때부터라고 한다.

명군明軍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崇明)사상이 발생하였고 이후 관우숭배사상으로까지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사대事大는 종교마저도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었죠.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러니 민초들도 따라서 그랬던 거 같아요."

여기서 잠깐 1924년 육당 최남선이 창간한 신문인 시대일보의 기사를 보기로 합니다.

청학동을 찾아 다니는 제군들아!

사람은 정신을 먼저 미신으로부터 타파하여야 될 것이다.

청학동은 진실로 미신의 한 주요물이 되었다.

거금 삼백 여 년전 한 도인의 秘書를 보건대 청학동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데, 장차 삼제갈 팔한신(三諸葛 八韓信)이 날 것이요, 그 동리를 복거(卜去)한지 십 리 이내에 車馬가 영문(盈門)이라 하였고, 그 후,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한 도승이 지리산을 답사하고 세무청학동(世無靑鶴洞)이라 하였다.

도인은 있다 하고 도승은 없다 하니 청학동은 진실로 전무후무한 혹세무민의 산물이다. 선영구토(先塋舊土)를 다 버리고 세탁가업(世倬家業)을 빙자하여 그야말로 당대 발복지인 청학동을 찾아 천 리를 멀다 않고 내왕하는 인사들아. 참으로 가석가애(可惜可哀)한 제군이다.

내일의 일은 예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사를 전람하면 알 것이다.

수 십 년 전으로부터 청학동을 찾으려고 지리산 남록에 거류하는 수 천 명의 경과를 보건데 십년 이내의 車馬 영영문(盈迎門)은 고사하고 반년 이내에 남에게 압박만 많이 받는다 한다.

현금(現今) 세소간(世所間)에 청학동이라는 곳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 세석평지 혹은 잔돌평지이라 하는 데는 평원광록이 주위 사십리나 되고, 자좌 우향(子坐 于向. 정북에서 정남방향)으로 되어 미신에 혹한 자의 눈으로는 한번 혹할 만도 하다.

-------------------- 중략 ------

諸君!

청학동을 찾아 제갈, 한신(諸葛, 韓信) 같은 자손을 바라는 것보다 청학동을 찾는 그 경비로 현대에 상당한 교육을 가르쳐 제갈, 한신 같은 사람을 배워서 성공하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곧 청학동인가 하노라.”

(대정 14524, 시대일보, 진주 一記者)

 

대정 14년은 1925년입니다.

기사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청학동은 세석평전이었습니다.

그러니 비결쟁이들은 오직 비결서에 기록된 삼제갈 팔한신의 예언을 따라 지리산의 이 세석고원으로 찾아 들어 둥지를 틀었숩니다.

그러고는 세석을 지키는 수문장 같은 영신봉을 한나라 관우關羽의 자를 따서 운장雲長바위, 그 맞은 편에 버티고 있는 바위를 역시 한의 무장이자 초나라의 제왕이었던 한신韓信의 이름을 따서 한신바위라 이름 짓고는 그 두 바위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살았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현실을 도피하려는 의식이 더 만연해지자 신문에 까지 이런 기사가 뜨게 된 것입니다.

 

 

그 운장바위를 보러 들어가는....

"하여간 이 분은 안 가시는 데가 없네요"

"잘 아시는 분이세요?"

"예. 광주 산꾼인데 우리나라 산 안 다니는 데가 없이 다 휘집고 다니시는 분입니다. 대단히 매력적인 분이시죠. 산행력도 독특하시고.... 지난 번 일때문에 광주를 간 적이 있는데 그냥 올라간 사실을 알고는 굉장히 서운해 하더군요. 홍어 먹으러 꼭 한번 가야 하긴 하는데.... "

"저 운장바위를 멀리서 보면 영신봉에서 북쪽으로 툭 튀어나온 것으로 보이죠. 그러니 기도꾼들은 저 바위 아래서 기도를 드렸다는 얘기죠. 그리고 저 맨 뒤 능선이 두류능선이 덕천(웅석)지맥의 동부능선에 달라붙게 되는 곳인데 툭 튀어 나온 곳이 하봉 옆 영랑대죠. 영랑대는 추성리 '말달린 평전'과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원효가 저 루트를 통해서 화엄사로 가서는 화엄사상을 배웠다는 얘기도 되고요"

 

이렇듯 백제의 화엄사상은 신라의 그것보다 근 100년이나 앞섰으니 그 화엄사상을 흠모하여 백제의 화엄사상을 배우러 온 승려 가령 원효나 의상 등 신라의 승려들이 많았고 그들의 행적이 화엄사와 함께 자주 거론됨은 승전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당시 원효(617~686)는 화랑의 장교 출신으로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의 '추성楸城'이나 '성안城內의 말달린 평전'과 관련 있는 인물임은 이미 지적했다. 그리고 덕천지맥의 지리동부능선에 영랑대소년대하는 지명이 신라 화랑과도 무관치 않으니 지리산은 신라와 백제의 승려들 간에는 교류의 장이어서 원효가 화랑시절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까지 왔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초고 중에서 

"그 앞 줄은요?"

"그 앞 줄이  제석봉에서 창암산으로 진행하는 창암능선인데 아까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올라간 분들이 저 소지봉1499.1m 부근에서 창암능선에 합류하게 되죠. 그러니까 저 두류능선 앞에 작은 초암능선이라는 게 있는데 그 초암능선과 창암능선 사이에 이름도 너무 아름다운 칠선계곡이 흐른다는 거 아닙니까."

"아! 그러니까 저 소지봉燒紙峰이 백무동과 연결이 되는 산 이름이군요."

"그렇죠. 저 가운데 불록 솟은 봉이 바로 창암능선의 마지막 봉우리인 창암산924.9m이죠. 그 뒤 왼쪽이 백운산904.1m이고 그 우측 조금 낮은 봉우리가 금대산851.5m인데 금대산에 있는 금대암이 조망좋기로 이름난 곳이죠. 금대암은 벽송사와 연결시키죠. 벽송사가 선원禪院이었고 금대암은 벽송사의 선방禪房이었으니까요"

천왕봉이 구름에 가려 있고 그 중앙에 뾰족한 것이 연하봉.

우측이 촛대봉입니다.

"반야봉이 희미하게 보이네요. 중앙 우측으로 지리북부능선이 흐르고 있고요."

"삼정산이 어느 것입니까? 지난 번 음정에서 벽소령으로 올랐었는데..."

백두대간을 하는데 음정으로 첫 구간을 끊은 것 같았습니다.

"저 우측 가운데 파인 곳이 영원령이니 바로 그 우측에 있는 봉우리죠. 실상 조망은 별로 없는 곳이에요. 중앙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삼각고지이고 이 앞이 칠선봉.... 좌측에 뾰족하게 삼각형으로 보이는 게 바로 노고단입니다. 반야봉에서 문수보살이 법문을 설하면 한 줄기는 저 노고단을 통해 화엄사로 내려가고 또 한 줄기는 토끼봉을 통해서 칠불사로 내려간다고 해요. 정면으로 설한 법문은 왕시루봉에 부딪쳐 떨어지게되는데 그 떨어지는 법문을 받는 곳이 바로 구례 토지면의 문수리 문수사이고 그 설하는 곳이 노고단에 있는 문수대이니 그 자리에 문수암이 있고 그 대臺가 지리 10대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북부능선 뒤로 서부능선도 보이건만 사진으로는 영....

우측 왕시루봉 그 앞 좌측이 황장산.

낙남정맥의 삼신봉 라인과 우측의 남부능선.

이따 진행할 촛대능선의 시루봉1578m입니다. 예전에는 무명봉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촛대봉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인 시루봉을 쟤가 가지고 가 버렸어요."

촛대봉과 시루봉.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나가시죠. 좌고대를 봐야죠."

영신봉에서 30분을 넘게 머물렀습니다.

07:48

"이 우측 아래가 영신사가 있던 곳이거든요. 거기서 보면 이 부근 어느 바위봉을 비로봉이라고 했거든요. 여기서는 안 보이나? 혹시 저거 아닌가?"

"지리에도 가을이 오고 있는 거 같은데요. 조금 더 이따 오면 무지 멋있을 것 같습니다. 지리산이 이렇게 오묘한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자주 와보세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지리를 두고 한 말입니다."

"예전에 이 길이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 봉우리들이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 벼랑 아래가 천 길 만 길이라고 했으니......"

"저 능선이 낙남정맥입니다. 저 좌측 바위 있죠? 영신사 내려가는 길이 헬기장 루트와 그 바위 아래 우측으로 들어오는 두 곳입니다. 이따 그리로 올라가기로 하죠."

"이 계곡이 세개골인데 대성골로 모여져 화개천이 되어 화개장터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죠. 우측이 토끼봉에서 칠불사로 내려오는 능선이고 그 능선은 신흥리 삼거리에서 모이게 되는데 그 삼거리 왕성분교 앞 계곡에 세이암이 있고 푸조나무가 있는데 그게 다 고운 최치원과 관련한 얘기가 전해지죠."

"대성골이면 이현상이 사살된 곳 아닙니까?"

"그렇죠. 민족사의 비극이죠. 대성리 빗점골이었으니....아까 얘기한 유목민 대장은 저 부근도 다 훑고 다녔던데 저는 아직...." 

"이 부근에서 찍은 사진같은데....이 칠선봉과 삼각고지가 운해로 쫙 깔리고 그 위에 반야봉만 드러나 있던데...아주 멋지더군요. 그림 잘 나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들으면서 살펴보니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오고 사진도...."

"바로 저 뒤에 있는 바위가 좌고대인데 내려가 보죠.

"한 20여년 정도 전에는 이 계단이 없어 이 부근 절벽을 기어오르다시피하여 진행했었어요. 초봄이나 늦가을에 눈이 녹거나 눈이 왔다 다시 녹을 때에는 장갑을 꼭 바꿔야 했죠."

좌고대를 지나쳐 가장 조망하기 좋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저 바위가 좌고대坐高臺입니다.

생긴 게 미어캣meerkat 같이 생겼죠?

"저 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죠."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 김종직 유두류록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봉우리에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 하였다. 이 좌고대는 상∙중∙하 3층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좌고대 뒤에 우뚝 솟은 바위는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내려다보았는데,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승려 의문은 두려워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고 좌고대 밑에 앉아 있었다. 이 날 서쪽 방면은 전날보다 훨씬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산 등을 두루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빈발암으로 되돌아와 저녁밥을 먹었다. 때마침 이 암자에서 지는 해를 보았다. 해기 지자 온 세상이 칠흙같이 어두웠다.

 

  - 남효온 지리산일과

 

"우리도 올라가보죠."

일반 화면.

광각화면.

이 좌고대는 상∙중∙하 3층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올라가 보실래요?"

이분은 담력이 좋으셔서 그런지 조심스럽게 올라가서는 포즈를 취합니다.

딱 걸터앉았는데 몸이 작은 여자는 절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영 오금이 저려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정말 경치 죽입니다!"

그분은 아주 지리를 만끽하고 계십니다.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이 촬영한 사진.

너무 멋지기만 합니다.

제가 촬영한 것과는 비교불가!

도솔산님 얘기는 가끔 제 글에 등장하죠?

좌고대에서 15분 정도 머물다 내려갑니다.

이제 영신사터입니다.

08:19

좌고대에서 내려와 칠선봉 방향으로 채 1분도 되지 않아 좌측으로 듭니다.

08:31

영신사터입니다.

제단을 보고....

아! 드디어 찾았습니다.

저게 비로봉이군요.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庵)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 유몽인 유두류산록

 

 

오늘 배운 꽃.

용담과에 속한 꽃이라고 합니다.

가섭상을 봅니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 김종직 유두류록

너무 지체한 듯 싶어 창불대로 가기 위하여 영시암터를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맞은 편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아까 세석대피소에서 식사를 하면서 산인사를 나누던 분이 나타납니다.

"좌선대도 갔다오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이분이 좌고대를 잘못 말씀하시는건가?'라는 생각으로 "좌선대 말씀이십니까?"라고 똑똑히 되묻자, "예" 하시는군요.

영신사 터 옆 석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우천 선생이 좌선했다고 하는 곳이라는 설명도 듣습니다.

우천 선생 얘기가 나오니까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행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니...그럼 안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이지 '이게 웬 떡이냐?'는 생ㄱ가이 들더군요.

다시 영신사터로 돌아와 우측 희미한 길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섭니다.

맑은 계류를 건너,

썩은 통나무風倒木를 밟고 올라 석문을 통과하니 별천지가 펼쳐집니다.

샘터도 지나고 한 1분 정도 더 걸으니,

제단의 흔적이 있는 좌선대坐禪臺입니다.

이분이 길 안내를 해주신 이카로스라는 닉을 가진 분입니다.

우측 굴에는 낙엽까지 깔려 있어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들 통성명을 하게 됩니다.

'그분'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한검 대장님의 본명과 비슷한 이름이어서 쉽게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이카루스님은 우리가 처음부터 같이 온 일행으로 알았답니다.

세석대피소 취사장에서 하도 재미나게 얘기를 하고 있어서 그랬다나요?

하여간 오늘 정말 좋은 곳 알게 되었습니다.

우천선생님 덕에 만난 좋은 인연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 중에 꼭 스승이 있다는 말 실감했습니다.

영신사 터로 되돌아 나와 그 석문을 보고....

이카루스님은 거의 지리산만 다니신다고 하는군요.

그나저나 우리 박대감님도 오늘 지리산에 너무 빠지셔서....

다음에 지리에서 또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자리를 뜹니다.

09:29

낙남정맥으로 올라왔습니다.

"여기가 아까 영신봉에서 갈라지는 낙남정맥 길입니다."

"그러면 헬기장이 있다는....."

"그 헬기장은 바로 요 위인데 지금 복원 중입니다. 실은 저도 비로봉을 찾아 올라가보려 했는데 시간도 그렇고 바로 위에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으니 그냥 내려가죠."

09:34

"여기가 창불대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자살바위로도 알려져 있어요. 이 아래 낭떠러지가 천길 만길이거든요. 그리고 여길 보려면 저 건너편으로 가야합니다."

옆 모습이 사람의 형상 같기는 한데....

09:39

건너 편에서 바라 본 창불대 모습입니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 김종직 유두류록

 

"이따 촛대봉 부근에서 이쪽을 보면 부드러운 라인이 볼만할 겁니다."

다시 되돌아 나갑니다.

"낙남정맥 길이 아주 좋네요."

"박대감님은 이 길이 처음이시죠?"

09:50

지도 #2의 ' '의 너럭바위는 전망이 탁 트이는 곳입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인가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벤처 기업인인데 낙남정맥을 하다가 아마 다른 곳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모양입니다. 용띠인데....젊은 나이에...."

"광활하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딱 어울리는 단어인데요?"

박대감께서는 자못 흥분한 말투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낙남정맥 길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백두산 갔을 때 지하삼림이라는 곳을 간 저기 있는데 그 느낌입니다."

꼭 그런 느낌이었숩니다.

고층 건물에서 몇 층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거기에 펼쳐진 숲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얼마 전 이곳을 지나며 본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좌측 외삼신봉, 중앙 삼신봉 그리고 우측 내삼신봉.....

우측으로 멀리 왕시루봉이 희미하게 보이는군요.

우측이 큰세개골......

09:54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다음 목표 지점인 시루봉이 봉긋 솟아 잇습니다.

"우리가 갈 청학연못이 저 시루봉 언저리에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갈 들머리가 서너 곳 있는 거 같아요. 여기서 그냥 숲을 뚫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건 지맥꾼이나 선택할 일이고 사실 요즘 저도 야성野性을 많이 상실해서 그런데 그냥 편한 길로 가는 게 낫겠죠?"

"저야 뭐...그냥 아시는 대로 가시는 게......"

"시간이 조금 달리는 거 같은데 음양수도 그냥 나중에 보고 조금 걸음을 빨리 하시죠."

음양수 있는 곳 까지는 조금 더 내려가야 하는데 시간 문제로 그냥 좌측으로 뚫고 진행합니다.

"우리가 내려온 루트가 오리지널 정맥길인데 공단에서 이곳을 비탐구간으로 막아놨거든요. 그러니 여기서 가짜 정맥길까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냥 산죽이나잡목을 둟고 가기로 하죠. 거기서 편하게 정규 루트를 이용해서 편하게 거림 삼거리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무명교 루트로 아니면 북해도교 루트로 올라가든지 들머리 상황을 보고 결정하기로 하죠."

10:14

속칭 남부삼거리입니다.

"여기서 무명교까지 한 40분 정도 내려가야 하는데 이쪽으로 희미한 족적이 보이니 그냥 뚫고 갈까요?"

"저는 초행이니 선생님 가시는 대로 따라 가겠습니다."

오랜만에 지맥꾼이 됩니다.

목표 지점을 설정하고 희미한 흔적을 따라 청학연못을 따라 갑니다.

마치 보물찾기를하는 아이처럼....

 

계류도 건너고.....

움막터도 지나,

10:54

드디어 청학연못입니다.

해발 1510m가 넘는 곳에 이런 연못이 있다니....

자연 연못이라고 보기 보다는 이 부근에 거주하고 있던 민초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저수지라고 보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바로 아래 축대같이 돌을 쌓은 흔적이 그걸 말해주는 거 같고.......

靑鶴이 무릉도원을 얘기하는 것이니 ....

저 암벽 위로 올라가면 촛대능선으로 달라붙는 등로가 있을 것이고.....

동쪽 photo zone에서.....

암벽에서.....

음....

사자봉, 촛대봉, 증봉, 시루봉, 수리봉......

창불대.....

현재 산이름이 시루봉.

10여 분 동안 간식을 먹으면서,

"행복하십니까?"

"저는 진실로 지리산이 이런 곳인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몇 번 와보긴 했지만 이렇게 역시와 비경이 숨어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조차 안 해봤습니다."

정말로 감격스러워 하는 모습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이게 지리의 1/100이나 되겠습니까? 정말 지리산은 알다가도 모를 산입니다. 저 까마귀를 보세요. 이 지리산에서는 저 산까마귀도 염송念誦을 한답니다. 가만히 들어보세요."

드디어 낙남정맥 능선과 지리남부능선 그리고 우측으로 불무장등능선이 보입니다.

바로 아래 시루봉.......

촛대봉의 쌍봉.

우측 바위의 좌측 면은 아기 독수리 같이 생겼고.....

이건 산구절초?

우리 존경하는 박대감님 따라서 또 한 장 컷!

내대리에 있는 하부저수지....

"아까 우리가 올랐던 영신봉 좀 감상하세요! 복습합시다! 아까 얘기했다시피 영신봉은 지리산에서 가장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그러니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고 기를 받기 위해 영신봉 주위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마천이나 거림 특히 마천에서올라오는 사람들은 이곳 시루봉甑峰1703.1m(지금의 촛대봉으로 지금의 시루봉1578m이 아님)을 제1봉으로 부르고, 제석봉을 제2봉인 중봉으로 불렀어요. 그 민초들이나 무속인들 중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명장 운장雲長 관우를 모시는 사람도 있었을테니 저 영신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지점에 있는 바위를 '운장바위'라 불렀다고 하고 또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고사성어로 유명한 초한지의 '한신장군'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저 바위 아래서 치성을 드리던 사람들은 저 바위를 '한신바위'라고 불렀을 것이니 우리가 올라온 '한신계곡'이란 지명은 바로 저 한신바위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박대감님의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다만 저러다 지리산에 빠져 버리면 어떻게 할꼬!

세석평전沮原.

그리고 창불대.

다른 것들은 다 구름에 가리고 저 반야봉만 그 구름에 떠 있는 모습을 나는 볼 수 없는 걸까?

세석은 이 촛대능선에서 봐야 제격입니다.

야영장을 없애버린 공단의 행정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냅니다.

너럭바위.....

"좌측 두 번째 봉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연하봉이예요. 아쉽게도(?) 운무가 낀 연하봉은 보지 못히더라도 나름의 멋은 볼 수있을 겁니다. 천왕봉에 구름이 지나간 다음 갈까요?"

"와! 대단합니다. 빨리 가고 싶습니다."

맨 뒷줄 좌측이 웅석봉이고....

황금능선과 구곡산961m.

다시 지리의 상봉인 천왕봉. 

촛대봉의 바위군.

도킹docking.

12:06

숨을 고릅니다.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함입니다.

"아무래도 천왕봉은 다른 분들에게 민폐가 될 것 같네요. 장터목에서 그냥 내려가서 씻고 하산주 한잔 하는 게 나을것 같습니다."

연하봉 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면서.....

삼신봉, 시루봉 그리고 촛대봉.

촛대봉 그리고 영신봉.

그 뒤로 반야봉. 

지도 #3

"반야봉 우측 뒤로 만복대가 보이는데요. 그리고 그 우측으로 정령치와 고리봉도....."

"그러네요. 앞 쪽 라인이 아까 얘기한 북부능선이니까 그 뒷라인이죠?" 

아까도 고리봉이 나왔는데 또 고리봉1248m입니다.

편의상 그 고리봉1305.4m을 큰고리봉이라 하고 이 고리봉을 작은 고리봉이라고도 부릅니다.

 

고리봉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정리하고 지나가자. ‘지리 99 팀에서 나온 얘기다. 즉 지리산의 고리봉은 백두대간의 서부능선 상에 두 곳이 있다. 성삼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봉1248m이 운봉읍과 주천면 그리고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봉1305.4m에 비해 낮다고 하여 작은고리봉이라 불린다.

 

예전 국립공원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실려 있었던 적이 있었다.

지리산의 전설 '김경렬' 님의 저서에도 그렇게 그려졌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 고어古語에서는 고리봉의 고와 두리봉의 두모두 높은 정상의 봉우리를 뜻하는 공통점이 있어 이에 착안하여 두 봉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고리봉이 산행 이정의 중심이 되고 두리봉이 인구 회자에 밀려짐에 따라 그 둘을 구분하고자 ''자와 '작은'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어를 놓고 보자면 높을보다는 머리가 더 높고 '대장'의 의미로 자주 채택되었음은 백두산을 통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던 터,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고리봉 = 고리봉’, ‘고리봉 = 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생각건대 국립공원에서는 이런 취지를 반영하여 이 봉우리에 '고리봉'이라는 정상석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 서부능선의 고리봉에서 가지를 쳐 고기리로 떨어지던 탈출로가 이제는 거꾸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갈림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 고리봉에 삼각점 그것도 2등급 삼각점(운봉 25)이 박혀 있어 그 중요도는 더 하게 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어쨌든 지리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부()능선의 중심이 만복대보다 오히려 고리봉으로 움직이게 된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정령치는 저기라고 보면 황령은 어디 있습니까?

상황소류지를 지나면서 좌측으로 삼봉산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임천지맥을 보게 된다. 이때 중앙 우측으로 드디어 천왕봉이 눈에 잡힌다. 하봉에서 중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힘차게 올라가는 지리 주릉의 힘이 느껴진다. 중황마을을 빠져나오면서 우측 아래로 다랭이논과 비닐하우스가 하황마을을 지나 60번 도로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이고 언덕을 올라 마지막 민가와 식당이 있는 곳을 지나니 등구재다.

 

 

 

그러고 보니 이 아랫마을(남원시 산내면 중황리)이 상황이니 중황 그리고 하황이라는 자 돌림 이름의 중심에 황치黃峙라는 지명이 보인다. 황치黃峙는 곧 황령치黃嶺峙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대를 다시 1구간인 달궁으로 옮겨볼 필요가 있다. 즉 제1구간에서 달궁을 얘기할 때 서산대사의 청허당집에 나오는 황장군과 정장군의 황령치와 정령치를 언급했었다. 그때 정령치는 운봉에서 들어오는 길목 즉 지리서부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라 특정했는데 황령치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었다. 바로 여기서 얘기하기 위함이었다. 즉 천혜의 요새인 달궁의 서쪽인 운봉은 정장군이 정령치에서 방어하게끔 성을 쌓았다면 달궁의 남쪽과 동쪽은 반야봉과 종석대 같은 험준한 산이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라 할 북쪽은 황장군 몫이란 얘긴가? 람천 너머 이 황치마을은 북부지리인 임천지맥의 투구봉 ~ 삼봉산 ~ 법화산에서 넘어오는 길목임과 동시에 람천의 동서를 커버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황장군은 이곳에 성을 쌓고 동으로는 변한의, 동으로는 진한의 그리고 북으로는 백제의 침공으로부터 방어를 할 수 있었으니 황장군의 역할은 그만큼 지대하여 이곳이 황령치가 되었고 황치-물론 필자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어서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가 된 것이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중에서 발췌

연하봉에서 가지치는 곡점능선.

멀리 반야봉.

멀리 임천지맥.

"드디어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연하봉과 천왕봉입니다."

뒤를 돌아보고....

13:03

이때 전화가 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한검 대장님.

백두대간에 계시는군요.

그런데 거기서 제 후배를 만나셨습니까?

후배 푸우님의 목소리도 듣고....

연하봉의 바위군들....

제석봉과 천왕봉.

"오늘 어떠셨습니까?"

하루 종일 저와 함께 많은 얘기를 한 박대감님.

몇 년을 함께 지낸 친구 같았습니다.

지금 이곳에 운무가 살짝 덮혔으면 정말이지 그림같은 풍광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딱 여기만 말입니다.

..............

진지한 산행.

느낄 줄 아는 산행.

왼쪽 뒤는 촛대봉.

공부하고 배우면서 오늘 하루를 즐겼습니다.

이때 천왕봉에서 전화가 옵니다.

고남님입니다.

오늘 천왕봉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우리가 너무 놀았군요.

수요일 함께 지리산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오늘은 아쉽지만.....

 

덕분에 인물사진도 남기게 되고.....

 

언제 이리도 많이 사진을 찍어주셨는지....

13:26

장터목입니다.

마지막으로 반야봉과 서부능선을 보고....

중산리 계곡을 본 다음 하산을 시작합니다.

.............

법천폭포.

홈바위교.

 

지도 #4

멀리 통천문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

돌탑.

칼바위.

통천길.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을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법계교法界橋.

이제 신선의 세계에서 벗어나다시 인간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15:25

존경하는 남명 선생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그 웃음의 의미는?

지리에서 자주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