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두대간/백두대간(2009. 3. 17.~2009.9.13.)

백두대간 제13구간(지기재~비재, 21.9km) 나 홀로 산행

선잠이 들었는데 밖이 약간 소란스러운 걸 보니 부산 부경대 교수님 부부가 온 것 같다. 정년 퇴임을 앞 둔 교수님은 퇴임을 하게 되니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정리하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백두대간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가장 난이도가 낮은 곳이라 할 수 있는 큰재~추풍령 구간을 인터넷에서 찾게 되었고 오늘이 그 대장정의 첫 걸음인 것이다.

3. 29. 04:30에 기상을 하여  대장님이 해주는 누룽지밥을 먹으면서 떠드는 소리에 잠에서 깨신 교수님 내외와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즉 혼자서 대간을 하는 내가 부럽다는 이야기와 자신들도 이제라도 그 결행을 하였다는 것에 대한 자찬 등 흥미로운 몇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짐을 꾸렸다.

 

 

05:40 어제 산행을 마친 곳에 도착하여 분수령 표지판을 촬영한 다음 시멘트 포장도로로 진입하면서 오늘 산행을 시작한다.

 

 

 

약200여m 들어가자 비닐이 벗겨진 포도밭이 나오고 그 옆으로 표지띠가 붙어 있는데 철근과 대나무로 길이 막혀있어 잠깐 헛갈릴 수밖에 없었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장애물을 넘어 무조건 표지띠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농기구 자재 창고 인 듯한 그 대간 길은 이내 언덕으로 향해 있었고 그 길은 조그만 야산을 지나 콘크리트 포장이 된 농로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미루나무.

초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그 나무와 매미 노래를 한 번 불러보면서 상큼한 새벽 공기를 마시는데 앞에 보이는 마을에서 개들이 짓기 시작한다.

 

 

 

 

그 마을로 들어가기 전 한우 몇 마리를 키우는 듯한 작은 목장 맞은편으로 난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니 이내 다시 또 야산 길로 접어든다.

 

 

 

 

날은 밝아오면서 포도밭 옆으로 길은 이어지고 그 길은 잡목으로 이어지면서 대간 길은 좀처럼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평탄한 길을 아무런 제약 없이 운행을 하다 보니 좀 밋밋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금 너른 지대 옆으로 철탑이 나오는가 싶더니 찻소리가 들리면서 바로 신의터재다.

 

 

 

간이화장실까지 설치되어 있고 신의터재에 대한 유래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이 곳은 비록 표고 280고지일 정도로 낮은 곳이지만 그래도 여기가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 곳이 '큰재'부터 시작된 이른바 '중화지구대'가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신의터재의 원래 이름은 신은현(新恩峴)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 이후에 신의터재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때 어산재로 바꿔 불리던 것을 1995년에 다시 본 이름인 신의터재로 바로 잡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왜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넘어뜨리고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북진을 거듭하고 있을 때, 상주 화동면 판곡리 출신인 김준신(1561~1592)은 4. 25. 해발 280m인 나즈막한 이 재에서 관군 60명, 의병 600명과 함께 왜군 17,000여명과 격전을 벌여 중과부적으로 전투에는 졌으나, 이 곳에서 왜군 수백명을 잃은 왜군 정규군은 비정규군인 의병장 김준신에게 당한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준신의 가족 뿐만이 아니라 주민들도 모조리 살해를 하게 되었는데, 여인들은 왜군들로부터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근처에 있는 못에 빠져 죽음을 택했는데 그 못이 낙화담(落花潭)이며, 일제는 후에 이런 사실을 알고 신의터재를 어산재로  고쳐 불렀던 것을 1995년이 되어서야 바로 잡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름대로 왜 일제가 '신의터재'를 왜 '어산재'로 바꿔 부르게 되었는지 그 '어산재'의 의미를 알아보려 하였으나, 정확한 뜻을 알려주는 문헌이 없어 그 이유를 기술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대충 볼일을 마치고 ‘화령재’가 11.3km 남았다는 표지판이 향하는 곳을 발길을 옮기자 이내 토종닭 몇 마리를 키우는 닭장이 있는 양옥집을 지나니 선교리 마을이 펼쳐지는데 나는 오른쪽 철조망 옆 무덤 쪽으로 올라서자 또 잡목 숲이다.

 

 

 

 

 

특별한 것이 있을 리 없는 길을 무작정 걷다보면 잠시 왼쪽으로는 선교리 마을이 오른쪽으로는 어산리 마을의 일부를 잡목 사이로 힐끗힐끗 보면서 갈 뿐 이곳이 대간 마루금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질 수 없을 정도다.

힘이 들다하면 들고 너무 가벼운 산행이다 생각하면 그런, 약간은 무료하다 할 산행이 계속 이어진다.

 

 

 

그래도 오르막이 계속되는 곳에서 왼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지점에 이르자 그 뒤 잡목 사이로 보이는 봉우리의 윤곽이 ‘무지개산’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친절하게 붙어 있는데, 이 산은 야트막하고 빼어난 산은 아니지만 육산으로서 멀리서 보면 보는 이로 하여금 친근감을 주는 그런 산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나는 나는 그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돌아 잡목 사이로 보이는 윤지미산을 향해 내리막길을 걷는다.

 

 

 

 

 

오르내리기를 몇 번 다시 노란 ‘삼현여자고등학교’ 표지띠는 계속 나를 앞서서 가고 ‘잡목. 잡목’을 뇌이며 조망을 아쉬워 할 때 멀리 판곡저수지가 파란 색깔을 드러낸다.

결국 나는 지금 화서면 선교리와 봉촌리를 안고 돌아 신봉이로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럴 즈음 오른쪽으로 찻소리가 나면서 회색빛 교각이 들어나면서 화령재로 향하는 25번 국도와 상주-청주간 고속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까 본 판곡 저수지가 더 커질 무렵 나는 작은 돌로 쌓았고 그 위에 뾰족한 돌을 맨 위에 놓고 그 편편한 부분에 검은 유성펜으로 썼을 법한 ‘윤지미산(538m)에 섰다.

 

 

 

 

 

정상이라고 해서 잡목 덕분에 특별히 조망이 좋을 리 없는 윤지미산에서 배낭을 이용하여 다시 셀프 서비스를 하여야만 하였고 다시 내리막이 급한 길로 한참이나 내려오자 이번엔 포도밭이 아닌 인삼밭이다.

 

 

 

그 인삼 밭 옆으로 큰 농로가 나 있으며 이 농로는 비포장 차도와 연결이 된다.

 

 

 

뒤를 돌아보자 윤지미산이 그 앞의 봉우리 뒤로 머리끝만 살짝 내밀고 있었으며 도로변 언덕에 혼자 서 있어 마치 고추를 거꾸로 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한 향나무 모습이 이채롭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 순결하여야 할 대간 길에 누군가 건축 폐기물을 무단 투기하여 놓았는데 그렇게도 버릴 곳이 없었을까...

 

 

 

내 밑으로 차량이 쉴 새 없이 지나는 고속도로 터널 위를 걸으면서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고 잡목 숲의 오솔길이 왕복 4차선 도로로 이어진다.

 

 

 

 

10 : 35.

화령재(320m)다.

이곳까지 14.5km를 5시간에 온 꼴이다.

이곳은 한국전쟁 때 칠곡의 다부동 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곳이며 1950. 7. 17.부터 25. 사이에 처절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이 전투가 있었기에 국군은 낙동강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6일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었으며,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제17연대 장병들에게 전원 1계급 특진이 주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화령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마침 지기재 산장의 대장님이 서울을 올라갈 예정이라며 비재까지 갈 경우에는 전화를 달라고 하여 비재까지 가야겠다고 하자 그럼 1시 반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한다. 

배고픔을 이기려 오이 두 개와 미니 쵸콜렛을 먹어 보지만 입맛이 당기지 않아 물만 축이고 표지띠가 날리는 나무 계단을 오른다.

그런데 이 길은 잘못이다.

비록 그 나무계단을 오르면 잡목으로 직진을 하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길을 살짝 막아 놓아 나는 급좌회전을 하여 국도 옆으로 난 좁은 길을 향하여 밭 옆길을 가기는 했지만 이게 대간 길인지에 대하여 의심이 들어 두 번이나 제 자리로 돌아가 길을 확인해야 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였다. 

 

 

즉 화령재 뒤로 올라가는 길에 표지띠도 달려 있어 그 길로 올라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길은 직진을 하여야 하는지 좌회전을 하여야 하는지 길이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는 그 표지띠를 부시하고 화령 방향의 국도를 따라 가는 것이 정답이다.

국도의 모퉁이를 돌면 오른쪽 밭을 끼고 400여m를 걸으면 이내 사거리가 나오고 거기에 표지목이 서 있다.

 

 

이 길은 화령의 상현리를 끼고 돌아가는 형태로 되어 있는 곳으로 지루한 오르막의 연속이다.

뾰족하게 보이는 봉황산을 향하여 끊임없이 올라갔다 내려오는 일을 몇 번 힘들게 반복해야 한다.

 

잡목 사이로 49번 국도가 보이며 오른쪽으로 꼬불꼬불 올라가는 삼령고개도 보이며 새로운 파노라마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580m)에 오르자 전망이 트이고 맞바람이 나를 반긴다. 

 

 

 

정면으로는 대궐터산 연봉이 보이고, 가야할 방향인 왼쪽으로는 봉황산이 높게 서 있으며 뒤를 돌아보니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지나온 산군들이 보인다.

 

 

봉황산을 오르는 도중 부부 산객을 만나 산인사를 나누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바라보는 나의 인상은 좀 참혹하였으리라.

배고픔 때문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자장면과 짬뽕 생각으로 가득차 하는 수없이 '청포도 사탕'을 입에 물고 억지로 물까지 마셔보았으나 허기는 가라 앉을 줄 모른다.

"30분 정도만 가면 되요."라고 하던 산불감시 할아버지의 말씀은 완전히 '구라'라는 것을 실증하 듯 오르고 또 올라도 봉황산은 나타나지 않고, 우(右)로 좌(左)로 계속 굽었다 올라가는 것이  아주 사람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다.

50분을 기다시피 오르니 원형 나무 의자가 설치되어 있는 봉황산이다.

해발 740.8m의 이곳에서는 바로 앞에 대궐터산(746.5m)이다.

이 산의 정상은 평평하여 견훤이 군사들의 무예를 지도하던 연병장이 있었다고 하며 근처에 견훤대왕을 모시는 '불천위사당'이 있다고 한다.

상주견(甄)씨의 시조인 견훤은 지렁이의 후손이라는 전설이 있고 원래 이(李)씨였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다.

 

 

 

나무 의자에 카메라를 잘 세워놓고 셀프로 한 장 찍어 보았으나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다.

출구를 보았으나 시작부터 급경사다.

 

 

 

 

그 내리막을 내려오다 가야할 곳을 조망해 보니 이건 하산길이 아니라 다시 봉우리를 몇 개는 더 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허기는 배가가 되는 느낌이다.

뒤를 돌아보니 많이도 내려온 것이 그 경사도를 짐작하게 만든다.

 

예상했던 대로 아니 지도가 보여주는 대로 봉우리를 넘고 그 다음 봉우리의 모퉁이를 돌기 몇 번하던 중, 구렁이가 고개를 쳐들고 있는 형상을 한 것과 같이 소나무가 그 몸통을 바닥에 완전히 깔고는 그 줄기를 하늘로 올린 기형 소나무를 발견한다.

 

 

 

 

낙엽송과 잣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는 곳에 다다르자 아저씨 한 분이 딸 인 듯한 아이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어 가볍게 산 인사를 하고 대장님이 기다리고 있을 비재로 내려선다.

산행을 마치고 보니 그 아저씨는 택시기사였고 아마도 그 아저씨는 내 뒤를 쫓아오는 어느 산객의 호출로 대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13:55.

21.9km의 거리를 8시간 15분에 허기 속에서 마감을 하였다.

어제와 오늘 51km의 산행을 18시간 9분의 긴 산행을 하였다.

뿌듯하다.

대장님은 컵라면과 뜨거운 물을 준비해 가지고 오신 배려도 아끼지 않았으며 나는 대장님의 차를 타고 구병산을 바라보며 속리산 IC를 통해 천안으로 가서 나는 16:08 영등포행 새마을호를 타고 상경을 하여 저녁은 집에서 먹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