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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백두대간(2009. 3. 17.~2009.9.13.)

백두대간(제15구간, 버리미기재~늘재) 나홀로 산행 14.7km

2009. 4. 26.

연풍초등학교 총동문회에서 주관하는 체육대회 행사에 온 면 전체가 들썩이며 밤새도록 시끄럽다.

노래방이 가까운 이 여인숙은 그 노랫소리와 밤새도록 불어대는 바람 소리에 창문이 흔들려 새벽 1시 정도에 잠에서 깨어 민감한 나는 도저히 추가 잠을 이룰 수 없어 그저 눈만 말똥말똥 뜨고서 잡념에 시달려야 하였다.

비가 온다면 그 빗속을 또 가야 하나, 오늘은 그냥 저 땀복에서 벗어나 07:30에 출발하는 직행버스를 타고 수안보 가서 온천욕이나 하고 갈까, 저 바람 속을 가다 큰 탈이나 나는 게 아닐까 하는 별 생각이 다 든다.

03:00 밖에 나가보니 별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비는 오지 않고 다만 바람만 좀 세게 불어 체감 온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별로 배가 고픈 것은 아니지만 일단 다시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 먹으려 하는데 도저히 입맛이 없다.

어제 슈퍼에서 준비한 우유 2개와 빵 세 개 그리고 오이 1개와 사과 작은 거 1개가 양식의 전부다.

물론 기본적인 쵸코렛이나 사탕 등 가벼운 간식거리는 있지만 최근의 산행에서 그들을 맛 본 기억이 없어 그냥 그 정도면 되리라 생각하고 생수 2리터 짜리를 수낭에 채우고 물 조금 남은 것을 500ml 수통에 보충을 한 후, 류기사님께 전화(011-785-1255)를 하고 그 분이 도착하는 동안 나머지 볼 일을 보고 있는데 도착했다는 클랙슨 소리가 들린다.

04:05.

행운여인숙을 나와 어둠 속을 뚫고 장연, 청천을 지나 버리미기재에 도착한다.

04:30.

진행방향 오른쪽 철책이 끝나는 부분인 입구 즉 철책이 시작되는 곳을 확인하고 아저씨를 보낸 다음(택시비 30,000원인데 상당히 적게 받은 거 같음) 옷매무새를 고치고 04:35 드디어 오늘 산행에 착수.

 

들어가서는 안 되는 길을 "다들 그렇게 했습니다."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남기고 오는 것은 항상 '추억과 발자국'이라는 지론으로 '출입금지' 표지판을 넘어선다.

 

초소를 뒤로 하고 오른쪽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오르는데 표지띠가 보이지 않는다.

"이크, 이 거 또 알바 아닌가?"

다시 길을 내려와 초입으로 내려가 왼쪽으로 올라가 보지만 길은 선명한데 여기도 표지띠가 없다.

 

헤드랜턴을 들어 올려 좌우를 쏘아보니 양쪽 다 검은 물체만 보여 제대로 앞을 가늠할 수 없었는데 그래도 가파르게 오르는 부분이 맞을 거 같아 다시 내려 온 길을 오르다 보니 반가운 오래된 표지띠가 다시 나타나며 바람직스럽게 급경사를 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헬기장이다.

정확하게 길을 찾은 것이다.

 

 

헬기장을 지나 어둠 속을 헤치며 지나가는데 길일 법한 곳은 등산로가 아니라고 팻말이 붙어 있어 어리둥절해 하면서 시커멓게 길을 가로막은 앞을 보니 바위 한 구석에 표지띠가 붙어 있고 바위 옆으로 로프가 늘어져 있다.

 

그 로프를 타고 올라가라는 것이다.

즉 그 바위가 대간길인 것이다.

어제 내린 비로 이미 축축하게 젖은 로프를 타고 오르고 또 올라갔으니 또 로프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장갑이 이미 다 젖어버렸다.

아침부터 온 몸 운동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은 상쾌하다 싶었는데 또 길이 막힌다.

또 기어 올라가라는 것이다.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지난다는 선답자들의 기록이 이 곳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또 로프를 타고 그 곳을 기어오르고 내리니 이번에는 로프도 없는 바위가 앞을 가로 막는다.

 

가벼운 욕을 입으로 되뇌면서 바위틈을 찾아가며 몇 번 발을 옮긴 후, 평편한 바위위에 오르자 곰넘이봉(733m)이라 쓰인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정상석을 보는 첫 느낌은 곰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약 오르지."하면서 놀리고 있다는 느낌이 괜히 들었다.

 

 

 

아직 사위를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어두운 하늘에서도 슬슬 걷혀져 가는 먹구름을 볼 수 있었고 멀리 마을의 일찍 깬 집의 불빛이 보이며 이제는 바위 위로 난 길이 아닌 흙으로 된 길이다.

 

멀리 뾰쪽한 봉우리가 보이는데 생긴 것을 보니 꼭 대야산 같다.

 

 

미륵바위를 지나자 날은 어느 정도 개어 카메라에도 물체가 인식이 되는 것 같았는데 지도를 보고 확인해 보니 아까 본 그 뾰족한 봉우리가 대야산 맞다.

 

그 정상 부분이 아직도 구름에 가린 것을 보니 그 곳은 지금 비가 오는지 아니면 안개만 끼었는지 모르겠는데 그 생김새가 오를 때 힘이 깨나 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따 물을 먹을 때 배낭 옆 주머니에서 빼고 끼우는 불편함을 덜기 위하여 우선 물은 500ml 생수통의 것을 먹고 수낭의 것은 나중에 빨아 먹으면 될 것이기에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고 생수통의 물부터 비우기 시작하였다.

 

 

폐핼기장을 지나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낙엽이 두텁게 깔린 오솔길이 나의 아침 발길을 가볍게 한다.

오늘은 참으로 즐거운 산행이 될 것 같다.

부질없이 수안보에 가서 목욕이나 하려 했던 나의 잠시 동안의 갈등을 다시 질책해 본다.

역시 '홀대모'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자 자기 자신과의 약속인 그 예정된 산행을 자신을 속이지 않고 묵묵히 이행하는 실천이자 채무변제(債務辨濟)이다.

봐라.

그 오솔길을 지나자 잡목 사이로 파란 물을 먹은 풀이 양 옆에서 나를 호위해 주지 않는가!

그래서 '홀대모'의 '홀'은 '홀로'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냥 단순히 '홀수'라는 의미로 이럴 때는 받아들여야 한다.

별 쓸 데 없는 생각을 다하고 운행을 계속하는데 내리막길이 나타나며 사거리가 나온다.

 

불란치재이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불란치재.

그냥 불란고개일 것인데 고개라는 의미의 한자어 치(峙)와 우리말 재의 두 개의 명사가 중첩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른쪽으로 틀면 우회로로서 촛대봉(668m)을 지나치는 길이어서 그 위로 난 언덕으로 올라간다.

 

지도상에는 667m로 표기 되어 있는데 661m로 표기 되어 있는 정상석 너머로 대야산 정상부가 고개를 내민다.

 

바위 위에 카메라를 거치해 놓고 셀프 촬영을 해보았는데 왜 그렇게 인상이 굳었는지 정말 못생겼다.

 

 

 

어느 짓궂은 산꾼이 1시간 30분 중, '1'을 지워 놓아 마치 대야산까지는 '30분' 남았다는 착각을 줄 법도 싶은 표지목을 지나자 아까 불란치재에서 갈라졌던 길이 다시 합류 한다.

 

표지목이 쓰러져 있는 촛대재를 지나자 본격적으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어느 정도 긴장은 했고 마음의 준비를 가지지 않았던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미클라이밍 정도를 넘어 줄을 의존하지 않으면 절대로 오를 수 없는 즉 한 줄로 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나 뿌리 혹은 돌이나 바위틈을 잡고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닌 오로지 줄만 잡고 올라야 하는 그런 난코스였다.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 없이 올랐으니 오른 것이지 특히 여자들과 같이 산행을 하는 팀이라면 즉 대간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여기까지 오느라 어느 정도 경험이 축적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코스이지 초보라면 분명하게 삼가야 하는 특히나 비오거나 비온 다음의 산행 특히 겨울 산행은 절대적으로 불가한 그런 코스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코스를 카메라에 담고 싶어도, 발을 딛고 카메라를 잡을 수 있는 틈도 그리 많지 않았고 더욱이 젖은 장갑을 벗고 흙 묻은 손을 바지나 티에 문질러 닦은 다음 카메라를 만진다는 절차도 번거로워 촬영이 가능한 곳에서 몇 장을 담았으니 몇 장 주워 담은 이 코스는 결국 위와 같은 이유로 난코스가 아닌 구간이다.

 

 

 

 

이상한 바위가 나타나고 이윽고 정상이다.

'대야산(930.7m)'이라는 글 대신에 '문경시산악연합회'라는 뒷부분이 보이며 전망이 탁 트여 있어야 할 그곳은 아래에서 보듯 그대로 구름에 휩싸여 있었다.

 

계곡 건너 암릉이 보이며 그 뒤에 서 있는 봉우리 사이로 구름이 바람에 밀려오다가 그 봉우리에 부딪쳐 위로 솟구쳐 오르는데 마치 파도가 방파제를 치고 그 위로 부서져 오르는 모습보다 더 장관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 커트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아직도 아래쪽 마을로는 조망이 되지 않고 암릉을 밟으며 내려가다 뒤를 바라보니 그렇게 힘들게 올랐던 대야산 정상은 너무도 예쁘다.

그렇게 안부 부분으로 내려와 만연히 직진으로 진행을 하다보면 중대봉이다.

 

 

 

여기서는 다행히 로프가 길을 터주면서 그 로프를 따라 급좌회전을 하여 바위 위를 지나다보면 '밀재'로 가는 표지목이 보이고 그 표지목을 따라 가다보면 역방향으로의 안내 표지목이 나타나면서 내가 정상적으로 운행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크게 우회전을 하여야 할 806고지에 이르기 전의 안부에서 잡목 사이로 약간의 시야를 확보해 주어 그 곳에서 가야할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어느 정도 날은 개이기 시작하였고 멀리 밀재 - 고모치 - 조항상산- 청화산 그리고 시루봉 등이 어렴풋이 보인다.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가 싶더니 그 바위로 옆으로 고양이머리 바위가 서 있고 그 옆의 가운데로 난 사이로 들어서는데 이 길 전체가 사실은 바위 위로 나는 현재 바위 위를 걷고 있을 정도로 커다란 바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 바위 뒤편은 쓰러질 염려가 있게 보였는지 장난기 많은 산꾼들은 또 그 큰 바위에게 버팀목을 설치해 주면서 그 바위의 안위를 도모해 주었다.

 

 

그 바위군을 지나 806고지에서 아까 지나온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속리산 입석대 같은 돌이 서 있고 그 옆으로 고양이 머리 바위가 선명하게 보였으며 앞으로는 밀재 위의 봉우리 등이 구름을 걷고 있었다.

 

 

 

 

이윽고 밀재에 떨어지자 지금까지 내가 힘겹게 걸어온 우리 대간은 걸어와서는 안 될 길이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팻말이 서 있어 다시 나는 가소로운 국공파들의 위선적인 정책을 비웃으면서 그곳을 지났다.

즉 지자체가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데 관광 수입을 올린다고 하는 안에 동의를 한다는 국공파들의 이중적인 행태에 역겨울 따름이다.

 

 

조항산을 향하며 가는 길에는 집채바위 혹은 굴바위라는 이상한 모양의 바위들이 있었으며 그 곳을 올라서면 언뜻 보이는 진행 방향의 마루금은 장쾌하게 뻗쳐 있었다.

 

 

 

 

 

길은 호젓했고 854고지로 가는 길은 암릉과 잡목을 번갈아 바라볼 수 있어 그런대로 괜찮은 조망이다.

그런데 이거 큰일 났다.

아까 바위를 기어오르고 숲을 헤치고 하다 보니 수낭의 대롱 마개가 어디선가 빠져나가 배낭 안에 들었던 수낭의 물이 다 빠져나가 수낭은 이미 빈 수낭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가지고 있는 물이란 생수통의 약 50ml 정도.

산행에서 다른 것도 아닌 물이 떨어지다니...

지나는 사람도 없고 설사 있다 하여도 다른 것도 아닌 물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산행 자체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을 때 산객 한 병이 다가온다.

늘재에서 06:30에 출발을 하였는데 벌써 여기란다.

무지무지한 속보이다.

밀재 못 미쳐 849고지와 854고지 중간 부분인 이곳까지 3시간 만에 왔다니 이건 보통 속보가 아니다.

밀재에 감시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답을 해 주고, 산 인사를 마치고 나는 나대로 27명의 일행이 뒤에 따라 온다고 하는 그는 그대로 산행을 계속한다.

 

왼쪽 사면에 대간을 황폐화 시켜 놓은 채석장이 흉물스럽게 보인다.

지나는 산악마라토너 일행들은 산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에게 물 한 모금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여서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뚝 떨어진 고모치 고개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고개 바로 밑에 있는 고모샘이 어제 내린 비로 비록 대롱으로는 물이 나오지는 않으나 바위틈으로 물이 조금씩 바위를 적시며 타고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낙엽을 치우고 혓바닥을 대니 물이 적셔진다.

한참 핥아 먹듯이 목을 채운 다음 생수통을 꺼내 그 주둥이를 대자 물이 조금씩 생수통 안을 채운다.

500ml 수통을 가득 채운 다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다시 고개로 오르자 그들 일행의 마지막인 듯한 젊은 녀석 둘이 산인사도 없이 지난다.

 

조항산이 1.1km 남았다는 표지목 뒤로 대야산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약초 혹은 나물을 캐고 있는 촌로를 만나 인사를 하자 "아니 금방 가고서 왜 다시 올라오는 거유?" 하신다.

"아, 저는 '홀대모'고 그 사람들은 '떼대모'예요."라고 그 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자, "뭐유?", "아니요. 그 사람들은 제 일행이 아니고 저는 혼자서 이쪽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예, 수고 하시고 많이 캐세요.", "그래 잘 가요."

 

 

잠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그 오르막에는 내가 이름 모를 너무 예쁜 옅은 푸른색 꽃과 분홍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의상저수지로 빠지는 삼거리에 이르자 산악회의 길 안내지가 어지러이 널려 있는데 이게 바로 대간을 어지럽히는 쓰레기가 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일회용 종이를 이용하는 것보다 그 종이를 코팅을 하여 선두리더가 갈림길이나 요주의(要注意) 길에 놓고 가면 후미에서 그것을 다시 수거해 가는 방법을 이용하면 저런 쓰레기가 대간길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최소한 그 정도의 양식은 가지고 있어야...

 

 

앞으로 보이는 볼록 솟은 봉우리가 조항산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고 왼쪽 뒤로 채석장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의상저수지에서 올라오는 산판길이 보이고 지금 밟아 온 능선 좌측 길로 또 채석장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청화산 줄기 뒤로 속리산 연봉이 눈에 들어오며 급경사를 오르자 이내 조항산이다.

 

 

 

해발 951m인 조항산에서 마지막 남은 우유 한 통을 고소하게 마시면서 빵 한 개로 점심을 해결하면서 가야할 갓바위재 너머 청화산 연봉과 속리산 연봉을 조망해 본다.

정말 멋있고, 그 멋있고 힘찬 줄기는 바로 뛰어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우유팩을 발로 편 다음 서둘러 자리를 뜬다.

눈앞에 있는 암릉을 밟기 위해....

 

 

 

바위를 밟고 가야하는 암릉은 로프도 없이 바위를 잡고 지나거나 밟고 지나가야 하는 재미있는 즉 사방을 조망하면서 갈 수 있는 아주 장쾌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앞으로는 청화산 능선과 속리산 능선, 왼쪽으로는 궁기리 마을, 오른쪽으로는 입석리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궁기리 마을.

견훤이 어릴 적 활을 쏘며 놀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백두대간 부근에 견훤대왕과 관련한 전설, 유래 등은 이제 종언을 고하는 것 같다.

 

바위 사이로 궁기리 마을을 다시 바라본다.

 

 

 

 

낙엽을 밟고 앞을 바라보면 801고지가 눈에 들어오고 그러다보면 갓바위재로 떨어진다.

 

 

 

걸어온 완만한 능선 뒤로 멀리 뾰족 튀어나온 대야산이 아직도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으며 왼쪽으로 상궁, 중궁, 하궁 등 궁기리 마을이 뭉싱뭉실 피어오르는 숲 뒤로 펼쳐져 있으며, 858고지 뒤의 청화산, 시루봉 능선이 눈에 잡힌다.

 

858고지가 눈에 가까워진다.

 

 

의상골을 바라보면서 위로 오르는 길은 산죽도 나타나는 길이며 아무 생각 없이 땀만 흘리다보면 마지막 봉우리에서 3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대간 길이며 왼쪽으로는 시루봉을 지나 연엽산으로 가는길.

표지판은 진행해온 방향이 아닌 다른 어느 곳으로 가도 우복동천으로 가는 길이란다.

우복동천(牛腹洞天).

지형이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이 살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라는 우복동천.

그렇다.

이 곳의 지형을 보면 서쪽은 속리산 바위가 병풍처럼 첩첩히 둘러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늘재(눌재, 널재)가 남쪽으로는 갈령이, 고개를 넘지 않는 동쪽으로 문경가는 길은 가파른 벼랑이 연이어 있는 쌍룡계곡이 가로막고 있어 지금과 같이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예전에는 천혜의 깊은 산골이었으리라!

결국 이 곳은 민초들의 영원한 이상향, 즉 영월의 정동, 풍기의 금계 등과 함께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시루봉 능선을 조망해보니 멀리 떡시루를 얹어놓은 듯한 시루봉이 보이며 잡목 뒤로 걸어 온 대간 마루금이 보이며 이내 청화산이다.

늘재의 잠룡(潛龍)이 승천하는 형국이라는 청화산은 부드러운 능선과 날카로운 암릉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글쎄 나는 아무리 봐도 그런 느낌은 가질 수 없다.

감성의 부족...

 

 

 

 

 

 

어쨌든 청화산 정상에서는 시루봉도 확연하게 그 이름의 유래를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우봉동천, 속리산 연봉 중 문장대의 철탑도 그리고 하북을 지나 갈령에 이르는 992번 지방도가 천왕봉을 배경으로 그 모습을 드리우고 있다.

 

 

헬기장을 지나자 급경사가 늘재로 나를 인도한다.

 

 

'어머니공원'이 보이고 물류창고 뒤로 이강년 선생의 묘소가 보인다.

가은 출신의 의병장 운강 이강년 선생은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의병을 일으켜 고모산성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셨던 분이다.

 

 

속리산 연봉이 더 가까워지며 뒤로 잡목사이의 청화산이 보인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이곳에 올라 주변을 굽어보며 '최고의 복지'라 칭송했던 청화산제단을 지나 늘재에 도착하니 시계는 13:47을 가리킨다.

 간식을 먹고 휴식 시간을 포함하여 총 9시간 12분이 걸렸다.

 

 

 

늘재에 도착하여 무릎보호대, 모자 등 장비를 정비하고 하북면으로 가서 유일한 중국집에서 짬뽕(3,500원)으로 허기를 달래며 15:00에 상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상주로 이동하여 터미널에서 세 블록 아래에 있는 사우나(4,000원)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17:00 동서울행 버스를 타고 귀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