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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낙동정맥(2011.11.12.~2012.12.8.)

낙동정맥 8구간(윗삼승령~굴아우봉~아랫삼승령~독경산~창수령~울치재~양구리)

 

'창수령 해발 7백 미터.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지난 번 이 구간 산행을 비슬님의 컨디션 난조로 완주를 하지 못하고 초반에 포기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은 다음 구간을 하기에 앞서 그 구간을 진행하기 위하여 하루 먼저 낙동에 들어 그 8구간을 한 다음 토요일에 대원들을 만나 9구간을 함께 하기로 계획합니다.

3. 8. 19:00 청량리를 출발한 기차는 22:45 안동역에 도착을 합니다.

예전에 대간을 할 때 태백산 구간을 할 때 기차를 이용하고서는 산행에 기차를 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안동역 부근에 있는 사우나에서 잠을 자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을 하여  07:39  영양행 버스에 오릅니다.

09:00 영양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10:00에 출발하는 기산리행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아주머니 두 분을 더 태운 버스는 이윽고 지난 번 우리 부장님이 가신 코스를 따라 지겹게 더 길게 진행합니다.

그런데 빗방울이 버스 창에 붙는 것을 보고 버스 기사님은 연실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시킵니다.

예보대로 비때문에 오늘도 쉽지 않은 산행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하다 기산리에 내립니다. 

 

산 행 개 요 

1. 산행일시 : 2012. 3. 9. 금요일

2. 동행한 이 : 홀로

3. 산행 구간 : 낙동정맥 8구간(윗삼승령 ~ 굴아우봉~아랫삼승령~쉰섬재 ~ 지경~ 독경산 ~창수령 ~ 울치재~ 양구리)

4. 소요시간 : 정맥 구간(19.5km, 소요시간 6시간 22분)

  구 간

  거 리

출발시간

소요시간

비 고

기산리

 

10:50

 

 

윗삼승령

 2.1km

 11:30

40

5분 장비 점검

아랫삼승령

 3.2

12:28

  58

 

지 경

7.5

15:04

156

 

독 경 산

3.7

16:27

83

10분 간식

창 수 령

1.0

16:48

21

 

울 치 재

4.1

18:07

95

 

양 구 리

1.1

18:20

13

 

22.7km

7:30

7:15

실 소요시간

 

 

산 행 기 록

10:50

전에 우리가 버스를 타고 올 때 저 버스는 우리와 교행하여 죽파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기다리고 계시다가 승차를 하시는군요.

다행히 비는 그치고 비 대신 싸락눈이 내립니다.

 산행 준비를 좀 갖추고 삼거리에서 우틀합니다.

그러면 벌써 제 냄새를 맡은 녀석들이 합창을 하기 시작합니다.

저 앞에 자세를 잡고 있는 놈 정말로 한 대 패주고 싶었습니다만... 

익히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예전보다 그리 멀어보이지 않습니다.

이정표도 익히 보던 것이고.... 

11:30

드디어 윗삼승령에 도착합니다.

벌써 세 번째 오게 되는 곳입니다.

행장을 갖추고 낙동의 품에 듭니다.

11:35

오늘은 혼자고 날머리인 양구리에는 6시 40분 정도까지만 내려가면 되므로 좀 여유있는 산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첫봉우리인 712봉입니다. 

여기서 부드럽게 우틀하면서 진행을 하면 굴아우봉 바위들이 나타나겠지요.

우선 왼쪽으로 굴아우봉에서 흘러내리는 줄기가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랫쪽에 삼승바위가 보이는군요.

조금 당겨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삼승바위의 모습입니다.

멀리서 바라본 삼승 바위는 참으로 일품이군요.
아직도 처녀처럼 그대로 보존된 삼승 바위는 너럭바위 앞면 수십 길 절벽앞에 단애를 이룬 봉이 마치 불상을 보는 것 같이 어느 정도는 환상적이며 바위틈에 뿌리 내린 분재와 같은 노송들이 그 옆을 장식하고 있군요.
양 옆에 2개의 바위가 서있고, 그 가운데 바위가 하나 덩그렇게 올려져 있는데 가운데 바위 위에도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올려져 있는 모습이 어느 정도는 신비롭기 까지 하군요.

 

 

삼승바위를 멀리서만 바라보고 가까이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산리 주민들에 의하면 삼승 바위는 삼 정승이 놀던 곳이기도 하고, 삼승 바위에 가면 바위에 바둑판과 장기판도 그려져 있으며, 굴바위 속에 동굴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샘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굴바위는 사람이 15명~20여명이 들어 갈수 있는 넓은 동굴이 있는데 굴바위 속 샘은 사람 열 명이 오면, 열 명이 먹을 물이 나오고, 이십 명이 오면 이십 명이 먹을 물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게 확인된 사실이라고도 하는군요.

그 삼승바위 아래 방향으로 진행하는 길이 희미하게나마 보입니다. 

국립지리정보원 발행의 지도를 보면 굴아우봉이 746m로 표기된 곳인데 이 왼쪽으로 들면 희미한 등로를 따르는 이 길이 칠보지맥 마루금입니다.  

칠보지맥을 진행한 선답자의 기록에 의하면 절벽 아래로 희미한 족적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바로 뚜렷한 등로가 나온다고 하는군요.

그 희미한 족적이 보이는 곳이 바로 이곳인데 눈 때문에 들머리만 확인합니다.

 

칠보지맥은 낙동정맥 상의 굴바위봉에서 분기하여  잔두목이, 원수목이 ,칠보산(810m), 응봉산을 거쳐 등대산(53m)을 마지막으로 동해로 빠지는 28.2km의 지맥을 말합니다.

 

이 지맥을 종주하신 분의 전언에 의하면 칠보산을 지나면 완전히 잡목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아주 고생스런 구간이라고 하는군요.

지도를 보면 칠보산에서 남진하는 줄기 하나가 더 있는데 이 줄기는 동운산, 자시봉을 지나 송천으로 떨어지는 약 7km정도의 줄기가 됩니다.

 

 

12:00

그곳을 지나 삼각점이 있는 굴아우봉(746m)에 섭니다. 

일부 지도에는 747.3m 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한데 국립지리정보원 지도에는 746m라고 표기되어 있군요.

한편 이 굴아우봉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봉우리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영양군 영양읍과 울진군 온정면의 경계를 걸어왔는데 이제부터는 울진군은 버리고 영덕군 창수면을 따라 걷게 됩니다.

그러니 이 봉우리 또한 온전한 삼군봉(三郡峰)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뒤로 칠보지맥이 분기하게 되고 그 칠보지맥을 경계로 울진군과 영덕군을 구분하게 되는데 칠보지맥 등로는 이 굴아우봉 뒤가 직벽이기 때문에 진행이 불가능하고 아까 지나온 길로 우회하여 진행하여야 합니다.

어느 녀석의 발자국인지 ...

이 녀석도 낙동의 마루금에서 벗어나지 않고 꾸준하게 걸었군요.

 좌측으로 자모터 마을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삼승바위 우측의 뒷면에 있는 바위인데 당기니까 해상도가 떨어지는군요. 

12:09

그러고는 삼승령입니다.

이 삼승령을 가운데 놓고 양 쪽으로 임도를 만드는 바람에 아랫 삼승령, 윗삼승령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입니다.

삼승령은 영양군과 창수면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가 514m이다. 보림·집희암·자무기 등에 있던 절에서 스님들이 이 고개를 넘어 영양과 서울을 왕래할 때 반드시 3명의 승려가 동행하여 넘었다 하여 삼승령이라 하였다 한다.

조금 조망이 터지는 곳에서 나무숲을 헤집고 들어가 촬영을 해봅니다.

우측으로 수동저수지가 보이고 그 옆으로는 줄기 하나가 또 가지를 친 모습이 보이고 멀리 명동산 부근은 하늘로 붕 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저 갈라진 줄기가 잠시 뒤에 보는 독경산 줄기입니다.

어쨌든 산줄기와 산줄기 사이로는 길과 물이 보이고...

산자분수령의 기본 원리입니다.

물을 따라 마을이 나있고 곧 그 곳이 인간의 터전이라는...

12:22

652봉에 오릅니다. 

등산 지도를 보면 이 부근에 길 주의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좌측 즉 이 갈라지는 길을 따라 남진하면 이 줄기는 독경산을 지나 성주봉을 거쳐 보림리 하천으로 떨어지는 약 5.4km의 줄기가 됩니다.

이 독경산(563.9m)은 영덕군 창수면 수리 집희암마을의 성왕사()와 보림리 오현사()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산 전체에 울려 퍼져 독경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오늘 걷는 구간에는 독경산이라는 이름이 두 번 등장하게 되는군요.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12:28

볼 거 다 보면서 느긋하게 진행하다보니 임도가 나타나면서 쉼터가 보이는군요.

아랫 삼승령입니다. 

우측으로 진행하면 저시로 가게 됩니다.

12:39

학산봉(689m)에 오릅니다.

아랫삼승령을 떠나 바로 만나는 곳입니다.

지도에도 안 나와 있는 산 이름은 누가 만들었는지 잘도 만들었다는 느낌입니다.

멀리서 보면 학같이 생겼다는 의미인가요.

진행 방향 좌측으로 백청리 허리골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멋지게 생긴 소나무들도 보고...

12:50

581봉을 지나 약간 우틀하니 너른 안부가 나옵니다.

그 안부에는 날이 푹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습지가 생기는군요.

그 왼쪽으로는 허리골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등산로 폐쇄'라는 산림청 표지띠가 붙어 있군요.

멀리 희미하게나마 명동산 일대의 바람개비가 보이기도 하는군요.

해상도가 영 좋지 않습니다.

산에 가다보면 막걸리통, 소줏병 등 갖가지 물건이 나무에 꽂혀 있는 모습을 왕왕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걸 볼 때 "참으로 상식도 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알게 된 심마니 친구에 의하면 그것은 약초꾼들이 자신들만이 알 수 있게끔 표시를 해 놓은 것이라 하더군요. 

13:05

좌측으로 백청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오더니,

사면을 힘들게 오르는데 산불이 난 흔적이 보입니다.

산불조심 합시다.

13:12

그 718봉에 올라 크게 좌틀합니다.

오른쪽에도 길이 선명하게 나 있는데 정맥꾼들이 '진입금지' 표시까지 해두었습니다.

참나무에 흰색 페인트로 화살표를 해 놓았군요.

그 화살표를 따라가보니 하산하는 길 같은 것도 보이기는 합니다.

조망이 조금 트이는 곳을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백청저수지를 가운데로 좌측은 잣나무골, 우측은 큰골이군요.

백청(栢靑)이라는 말이 잣나무를 이르는 말이니 창수면 백청리 그리고 잣나무골이 다 잣나무와 연관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13:24

그러니 바로 쉰섬재가 나옵니다.

옛날에 쉰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하여 부쳐진 갈림길 쉰섬재를 지납니다.

그런데 지명 유래가 좀 유치한 것 같습니다.

다른 어떤 글에서는 '이곳이 하도 넓어 조가 쉰섬이나 나올 정도였다.'라고 한 것을 본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이 길이 잦나무골로 이어집니다.

13:35

704봉을 지나니,

 앞으로 711봉이 나타납니다.

13:40

오솔길 같은 평평한 길을 돌고도니 바로 저시재입니다.

길은 아주 좁고 하지만 완만한 오름이 계속됩니다.

13:47

706고지에 오릅니다.

우측으로도 길이 있는데 아마도 이 루트가 지무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같습니다.

지무실이란 마을은 지난 번 산행을 못하고 차량으로 양구리로 향할 때 지나던 비포장도로로 이어진 마을입니다.

14:05

어영부영 주위 마을과 산세를 구경하며 가다보니 벌써 옷재로군요.

옛날 까마귀가 어린아이를 살렸다 하여 붙여진 오(烏)재(烏峴)라고 해서 그런지 정말로 까마귀 소리가 많이 나는군요.

이 고개는 서리가 오지 않는 곳이라 하여 불리어진 망상골(望霜谷, 忘霜谷, 忘星洞)로 이어집니다.

14:17

참나무 시들음병을 조치해 놓은 흔적인데 북쪽에서는 비닐로 싸서 훈증시키는데 여기는 저런 것으로 싸놓았군요.

날씨가 흐렸다 개다 하니 산의 모습도 각양각색입니다.

 진행방향을 한번 조망하는데 잡목이 앞을 가립니다.

사면을 돌다보니,

수려한 소나무들도 감상할 수 있고,

왼쪽으로는 보림리 뒤로 조피산, 용각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길게 뻗어 있습니다.

보림리 마을 정경입니다.

보림리(寶林)라는 지명은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여 좋은 재목이 나온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전래동명(傳來洞名)은 조그만 씨족 마을의 공동체 속에서 생겨서 불려지기 시작되었음을 볼 때, 향토문화의 원천(源泉)으로 원주민의 숨결을 찾을 수 있는 수단이 되며 나아가 향토사(鄕土史)를 탐구하는데 있어 초석이 됨을 알 수 있다할 것입니다.
인명(人名)을 짓는 데 고심하듯이 동명을 짓는 데도 뜻 깊은 이름을 지어 우리 후손들에게 정신적인 유산이 될 수 있게 해야 할 것을 다시 깨닫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요사이 동명을 없애고 거리명을 도입하는 작태를 볼 때 무슨 생각을 가지고 행정을 운영하는 사람들인지 심히 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군요.

역사를 없애자는 것과 무어가 다른지...

14:37

이곳을 어떤 지도에는 옷재라고 하는데 이 지도에는 여기를 서낭당재로 표기하였군요.

어쨌든 그 안부 하나를 또 지나니,

14:46

631봉에 오르게 됩니다.

14:57

652고지를 지나게 되고,

15:04

지도에는 '지경'이라고 표기된 602고지에 오릅니다.

지경의 뜻은?  글쎄요. 地境이란 말인가요?

 

이곳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로 영덕군과 영양군 군계가 되는 갈림길입니다.

실제 지금까지의 산줄기가 낙동정맥 마루금을 따라 군계를 형성해 왔는데 별다른 이유없이 물줄기를 건너고 고갯마루도 아닌 산등성이로 군계가 형성이 되었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산경표의 마루금을 채용하지 않고 고또 분지로의 '지질학적 산맥' 이론에서 나온 무책임한 탁상행정의 결과물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군요.

1987. 1. 1. 행정구역 변경이 있었을 때 즉 아침에 지나온 기산리나 이따 날머리가 될 석보면 양구리가 영양군으로 편입이 될 때 이 노란 군경계선이 붉은 정맥 마루금선으로 확대시켰어야 하였을 텐데...

영덕군청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말인 것 같군요.

어쨌든 우측으로 진행을 하면 688봉, 644봉을 지나 창수령을 지난 낙동정맥 줄기와는 690봉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방향이 현재 군계를 따라 가는 길입니다.

저 봉우리를 따라 진행하는 길이 현 군계이니 우선 현장에서는 그 길이 경계가 되어도 뭐라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범바위로 내려가는 줄기가 바로 앞으로 다가오는군요.

옆으로 임도가 나 있는 것도 보이고...

15:44

631봉을 지나 별 특징 없는 뚜렸한 등로를 따라 진행합니다.

그러다보니 백청리 망상골과 무창리 밤남골을 잇는 임도를 만나게 됩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지나간 찻바퀴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다시 숲으로 들어가니 왼쪽으로 산줄기 두 개가 뻗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앞에 있는 것은 아까 본 범바위로 가는 줄기고 그 뒤의 줄기가 조피산, 용각산으로 가는 줄기로군요.

조망이 아쉽습니다.

15:51

이 595봉에서 범바위로 분기하게 되는데 조망이 없으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조고문님 내외분을 뵙습니다.

안녕하시지요.

15:58

지도에 표기된 묘지 2기를 지납니다.

잠시 잡목이 어지럽게 벌목되어 있는 안부를 지나는데,

좌측으로는 맹동산 자락이 눈과 함께 높이 서 있고.

그 왼쪽 건너편 멀리 운서산(519.9m) 아래로 비닐 하우스들이 하얗게 보이는군요.

16:09

독경산 약 600m 못미친 지점인 이곳에서 아까 본 운서산이 분기하게 됩니다.

그나마 운이 좋아 운서산이 조망이 되었습니다.

저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이름의 독경산이 나오겠군요.

안부를 하나 지나고,

묘지를 지납니다.

임도에 버금가는 큰 사거리가 나옵니다.

직진하면서 오름길에 맹동산을 바라봅니다.

16:27

그러고는 독경산에 오릅니다.

헬기장 시설이 되어 있는 정상에는,

무인 산불감시시스템이 작동되고 있고,

삼각점 두 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獨慶山은 아까 삼승령 부근에서 분기하는 讀經山(563.9m)과는 한자로는 이름이 좀 다릅니다.

이 줄기는 내일 진행할 저 맹동산으로 이어지는데 맹동산이 마치 하늘에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18:30까지 양구리로 떨어져야 하므로 여유를 갖기 위하여 좀 서두릅니다.

드디어 918번 도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차 몇 대가 지나는 것은 보이지만 한적한 도로입니다.

16:48 

자라의 목과 같은 형상의 고개라 하여 부쳐진 이름의 자래목이인데 조선시대에 창수원(蒼水院)이라는 숙식(宿食)시설이 있어 역원, 창수원 또는 창수라 불리었던 마을 때문에 이제는 창수령이라고 불리우는 고개를 만납니다.

이 918번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영해와 영양 사람들은 대개 울치재를 통하여 왕래를 하였으나 이 도로가 생기면서 그 울치재는 이제 흔적으로만 남게 되었군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가이나 어쨌든 현재 우리 문단에서 지울 수 없는 큰 획을 긋고 있는 레드컴플렉스가 만연한 이문열은 서울 청운동에서 출생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를 따라 영양땅에 뿌리를 내려 어린 시절을 이 부근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대표작 중 '젊은날의 초상'에서 이문열은 창수령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창수령 해발 7백 미터.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연좌제에 걸려 어린 시절을 이런 촌구석에서 보내야 했던 어린 이문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만큼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과연 있었는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이곳의 원래 이름이 읍령 내지는 울치재였다고 실제 울치재와 혼동을 하는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 안동 간고등어의 유래가 된 것도 영해에서 잡은 고등어를 내륙 즉 안동이나 영양으로 가져 가기 위하여 상하지 않도록 소금을 뿌린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면 영해에서 안동이나 영양을 가려면 아무래도 이 자라목이고개 혹은 창수령을 넘는 것보다는 현재의 울치재를 넘는 것이 훨씬 빠르고 가까왔으리라는 것은 지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지난 번 우리 대원들의 산행도 일부는 여기서 마치셨으니 잔여 구간에 대한 완주에 대한 욕심이 크시리라 믿습니다.

여기서 스마트폰으로 사진 하나를 촬영하여 이대장님께 인증샷 하나를 카톡으로 전송합니다.

한 뿌리에서 가지를 친 이상 야릇한 소나무를 볼 때 이대장님으로부터 격려의 전화를 받습니다.

내일 만날 장소도 이야기하고..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랜드 산악회는 다른 산악회와는 다른 그 무엇을 느끼게 해줍니다.

안내산악회와 함께 산행을 별로 하지 못한 저로서는 많지 않은 경험 속에서도 그리 아름다운 기억을 많이 생각할 게 없었고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다른 산악회 이야기에 대해서도 우리 그랜드 산악회의 분위기는 전혀 읽지를 못합니다.

산에 대한 열정으로 뭉쳐진 산악회, 나름대로 잘 짜여진 대원들의 조합, 앞뒤에서 대원들의 만족한 산행을 위하여 뛰는 대장님들 그리고 한 주일을 뒷풀이 음식을 위하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총무님 그리고 안전운행을 하여 주시는 부장님...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러니 이 그랜드와 산행을 하다 졸업을 하고 개인 산행 혹은 다른 산악회에서 산행을 하시는 분들은 이 그랜드에 대한 추억을 잊기가 힘들 것이라고 감히 생각하게 되는군요.

그 918번 도로가 지나는 창수리 정경입니다.

산타래 선배님을 만납니다.

지금은 서울시계 종주를 하고 계시는데 내일은 수색쪽을 거니실지 모르겠습니다. 

17:17

690봉에 오릅니다.

별 특이한 것 같지 않은 봉우리이지만 이 봉우리는 아까 영덕군과 영양군의 경계가 잘못 그어진 즉 창수령에서 약 600m나 영양땅으로 넘어가 그어진 군계가 다시 정맥 마루금과 만나는 곳입니다.

이제부터 등로는 다시 영양군과 영덕군의 군계를 따라 진행하게 됩니다.

괜히 남의 땅에 들어갔다가 다시 내 집 땅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천안의 허허자 형님도 뵙고...

양 옆에 돌을 쌓아 통로를 만들어 주신 분은 도대체 어느 분이신지...

미안해서 길을 걷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부근에서 이런 바위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게 양우리산성 흔적인 것 같습니다.

17:43

봉우리(684m) 하나를 지나 여기서 크게 좌틀합니다.

이제 하산하는 길만 남았습니다.

묘지를 하나 더 지나고...

꺾여진 소나무의 아픈 현장을 지나,

18:07

울치재에 도착합니다.

울치재의 유래: 창수면과 영양군 경계에 있는 독경산(獨慶山)의 줄기로 창수에서 영양으로 넘나드는 산길로써 울티재는 재가 높고 험하며 계곡도 깊었다. 옛날에는 석양(夕陽)에 이 재를 넘으면 반드시 그 나그네는 참상을 입었다 해서 울고 넘는다는 뜻으로 울티재, 울릿재(泣嶺)라 했다 하며 또는  울티재는 영해 고을의 교통의 요충지로 영해 고을을 오고가는 대소의 관리들이 처음 이 고개를 넘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곤 하였다. 그래서 영해 고을의 관리가 되는 것을 모두가 꺼리게 되었다. 그래서 손순효(孫舜孝)가 경상도 감사가 되자 바로 울티재에 내려와 주위를 살핀 다음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베고 글을 쓰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백수시(白樹詩)

汝揖華山呼萬歲 我將淪命慰群氓 個中輕重誰能會 白日昭然照兩情 (너희들이 공손히 화산곡(華山曲)을 만세토록 부른다면 내 장차 임금의 명을 받아 너희들을 위로하리라. 개개일들의 가볍고 무거움을 누가 능히 헤아리랴 밝게 비추는 햇님이 우리 양 충정을 비추어 주지 않은가.) 그러자 바로 괴이한 일들이 없어지고 이후로는 흉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울티재는 괴이한 일들이 없어졌다고 하여 파괴현(破怪峴)이라 하였다고 한다.

양구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착각을 합니다.

이 길로 가다보면 당집이 나온다는....

이렇게 평범한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사방댐의 흔적을 지나고,

바로 양구리에 도착합니다.

양두들ㆍ양구(羊丘)란 이름은 이 지역이 들판이 넓고 풀이 많아서 사람들이 양을 많이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양두들이라고 했다고도 하고, 또 산에 둘러 싸인 평야의 형상이 양이 누워서 풀을 뜯어먹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양두들이라 했다고도 한다.

18:20

지난 번 하산 뒷풀이 장소입니다.

할머니는 오늘도 집에 계시지 않더군요.

정자에서 옷을 간단히 갈아입고 막걸리를 먹으면서 버스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