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종 때인 1451년에 완성된 고려사에는 9C 말 신라의 승려이자 풍수지리가인 도선의 저서 옥룡기와 관련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라는 내용이 그 책에 나온다는 것인데, 이 내용은 우리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으로 이는 우리나라의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을 맺는다는 관념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 후 백두대간은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신경준이 편찬했다고 알려진 ‘산경표’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우리나라 모든 산과 산줄기의 근간이 되는 백두대간. 우리 국토의 70%가 산지여서 그 산들과 떠나서 살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애환이 녹아 있는 산들의 기준인 백두대간.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지질학자가 붙인 이름인 ‘산맥’ 개념과의 충돌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백두대간.
20C 초 일제에 의해 고초를 겪고 난 후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허리를 잘린 채 오늘도 반쪽만 그 답사를 허락하여 미완으로 마무리하여야만 하는 백두대간.
그 백두대간에 기대어 살았던 예전의 민초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 백두대간으로 인해 그 부근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은 백두대간과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어느 순간은 삼국시대의 백성으로, 어느 곳을 걸을 때에는 고려 시대의 사람으로 또 어느 산을 오르내릴 때에는 조선 사람이 되어 그 백두대간을 걸어보면 어떨까.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되는 날 북쪽의 나머지 백두대간 구간을 이어가기 위해 지리산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선답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한다.
백두대간의 시작은 지리산 천왕봉(1915m)이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리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오르는 가장 빠른 코스는 아무래도 산청군 시천면의 중산리에서 오르는 길이다. 거리상으로야 하동이 가깝지만 그래도 중산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진주이다. 진주에서 하루 12회 정도 운행하는 직행 버스를 타고 시천면으로 들어서면 어느 집에나 감이 누렇게 달려 있는 모습에 신기해하며 중산리 터미널에 도착한다.
세속과 법계의 경계인 법계교를 건너면서부터 이제는 속세를 벗어나 선계로 들어섬을 느끼게 된다. 왼쪽으로 흘러가는 풍부한 수량의 시천천을 보면서 이색적인 현수교를 지나 좌측 장터목으로 오르는 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바위 계단들이 나오면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칼바위를 지나면 물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던 선계에서 갑자기 사람 소리들이 들리면서 우측으로 대피소가 나타나며 여기가 다음날 일찍 천왕봉의 일출을 보기 위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산객들의 베이스캠프 역할 을 하고 있는 로타리 산장이다.
1978. 10. 26. 남명 조식 선생의 13대손인 조재영의 주도로 부산 로타리 클럽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문을 연 로타리 산장은 2000. 7.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 기부채납되어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로타리 산장 정면으로 544년에 창건한 우리나라 사찰로서는 최고지(最高地)인 1400m에 위치한 법계사가 보인다. 법계사 왼쪽으로 등로는 이어지는데 최근 재미있는 광경이 자주 목격되곤 한다. 즉 일몰 후에는 산행을 원칙적으로 금한다는 국립공원관리사무소의 지침에 따라 오후 2시 이후에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등산객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2시 조금 지난 시간에 이곳을 통과하려는 등산객과 진입을 막는 공단 직원 사이에는 가벼운 실랑이가 있기 마련이며 원칙과 예외 사이에서 고민을 하야 하는 공단 직원들의 업무상의 고충도 이해할 만하다. 개선문 바위를 통과하면 계절과 상관없이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며 천왕봉 바로 아래 직벽에는 실제는 남강 발원지가 아님에도 남강 발원지라 표기된 천왕샘이 있는데 석간수인 이 샘의 물맛은 일품이다.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고의 모델인 천왕봉 정상석이 천왕봉에 오르는 이들을 줄서게 만들며 우측으로는 중봉, 하봉을 거쳐 왕등재,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줄기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하봉을 지나 쑥밭재 옆 독(甕) 모양을 한 바위봉 옆이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빨치산루트로서 마천면 추성리에 본부를 둔 빨치산들이 작전을 펼치던 곳 중의 하나이다. 삼대가 덕을 쌓았어야 맑은 날을 볼 수 있다는 천왕봉에서 백두대간 산행이 시작된다. 원래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이곳 천왕봉에서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마치게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통일 된 후에 계속 이어가야 하는 줄기이기에 우선은 북진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천왕봉에는 1970년 초까지만 해도 1000년을 천왕봉에서 정상을 지키고 있던 마고할머니라는 이름의 성모상-태조 왕건의 어머니라는 설도 있음-이 있었는데 몰지각한 종교인이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훼손하였던 것을 천왕사 주지 혜범이 어렵사리 찾아서 현재는 이 성모상을 천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천왕봉 정상석에서 내려서자마자 우측으로는 우리나라 최장의 계곡이며 제한탐방제가 실시되고 있는 칠선계곡으로 이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 통천문을 지나 제석봉의 고사목을 보노라면 예전의 화전민들의 녹록치 않았던 생활상을 떠올리게 되고 대간꾼의 발걸음은 이내 마천사람들과 시천사람들이 매년 봄, 가을 이곳에 모여 장을 열었다는 장터목대피소로 떨어진다.
새롭게 단장한 취사장에서 여유 있게 끼니를 해결한 대간꾼은 연하봉을 지나면서 갑자기 펼쳐지는 영화 세트장 같은 선경에 잠시 넋을 잃다가 바위봉으로 이루어진 촛대봉을 보고 진행한다.
예전에는 철쭉축제로 그 명성을 드높이던 세석평전은 30만평의 너른 평야와 같은 곳으로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으로 장관을 이룬다. 예전의 대피소는 취사장으로 바뀌었고 현대식 대피소의 모습은 대피소라기보다는 산장 같은 인상을 풍긴다. 헬기장을 지나 대간길 우측으로 영신봉이 있지만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여 있어 그냥 지나쳐야 하지만 여기서 눈길을 좌측으로 돌리면 시원스럽게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가 보이는데 이 줄기가 낙동강 하구언으로 향하는 낙남정맥이니 이곳이 곧 그 분기점인 셈이다.
낙남정맥은 우리나라 산줄기의 족보인 산경표에 나오는 우리나라 1대간 1정간 13정맥 중 하나의 정맥으로 말 그대로 낙동강 남쪽을 받쳐주는 정맥이다.
모두冒頭에서 잠깐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 산경표라는 책은 조선 영조 때 국어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이 썼다고 알려지고는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의 지하자원을 침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질을 조사하기 위하여 지질학자인 고토 분지로를 파견하였는데, 고토는 조선의 지질을 조사하면서 나름대로 지질도에 터잡아 지질구조선을 토대로 선을 그어 36개의 산맥을 만들었고 그 산맥에 각기 이름을 부여하였다. 그 후 3년 정도가 지난 1906년 약간의 수정을 거쳐 지금의 14개의 산맥으로 정립이 된 산맥도가 교과서에 수록되어 고또가 붙여준 산맥과 산맥 이름을 그대로 배우고 사용하게 되었으며 산경표에 나온 우리 고유의 산줄기는 우리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진게 된다. 이런 일제의 야욕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육당 최남선은 1910년에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여 우리 고유의 문화를 되살리기에 힘을 썼는데 그 중 하나가 일제의 산맥도에 맞선 바로 이 산경표 영인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잊혀졌고 해방 이후에도 복원되지 못했던 것을 1980년 이우형 선생에 의해서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그 후 노웅희 선생, 조석필 선생 등에 의하여 우리 산줄기를 되찾으려는 연구가 이루어졌고 2004년에는 박성태 선생에 의하여 신산경표가 발표됨으로써 산경표 연구는 급진전을 이루게 된다.
한편 영신봉을 넘어 긴 나무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면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선비샘을 지나 이곳에서 바라보는 달은 파랗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대피소가 있는 벽소령(碧宵嶺)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벽소령을 남북으로 오가던 예전의 비상군사도로는 이제 거의 흔적을 감추었고 다만 산등성이를 따라 그 흔적만 겨우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형제봉을 지나면 부드러운 능선이 계속되고 좀 바닥이 질퍽이다 싶으면 그 이름도 아름다운 연하천 산장이다. 오래 전의 판잣집 같은 모습은 현대식으로 바뀌었고 나무 계단을 따라 이동하면 지리산의 정중앙에 있는 반야봉에서 볼 때 가장 정동쪽 즉 묘방(卯方)에 있는 봉우리라고 하여 이름 붙여진 토끼봉을 지나면 너른 광장같은 곳이 나오는데 여기가 예전에 경남의 해산물과 소금 그리고 전북의 삼배와 산나물이 각 연동골과 뱀사골을 따라 이곳에서 만나 장을 열었다고 하니 이곳이 바로 화개장터의 효시라 할 만한 곳이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뱀사골은 그 이름만큼이나 길고 구불거리는 계곡이어서 이 화개재에서 반선까지는 9.2km라고 안내판은 표기되어 있지만 실상 이 루트를 따라 하산하려면 소요되는 시간 이상의 인내심이 요구되는 지루한 구간이다. 여기서 팁 하나. 금방 이야기하였지만 뱀사골은 뱀의 한자어 蛇를 연상하여 뱀같이 긴 물줄기가 계곡을 한참이나 이뤄 반선까지 가는...뭐 그런게 연상이 되기도 하지만 실은 실상사의 말사 혹은 암자에서 수행을 하시던 스님들이 동안거를 하기 위하여 이 뱀사골(예전에는 다른 이름이었겠지만) 위의 암자로만 가면 내려와야 할 해제 날짜가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고 이런 일이 수년 계속 반복이 되자 어느 고승 한분이 동안거를 떠나는 스님 옷에 그 스님 모르게 독약을 바르게 되었고 이런 사실을 모르는 뱀이라는 녀석이 한창 수행 중이던 스님을 잡아먹었다가 그 독에 의해 죽었다는 전설에서 이 골짜기가 뱀사골 즉 뱀사(死)골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좀 더 서진을 하면 만나는 봉우리가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등 삼개도가 만나는 곳이라 하여 삼도봉인데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봉우리의 이름은 날라리봉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어감이 좋지 않아 날라리봉에서 삼도봉으로 바꾸었는데 실은 이 봉우리가 낫의 날같이 뾰족하다고 하여 낫날봉으로 부르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음운이 변하여 날라리봉으로 되었다가 현재의 삼도봉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 백두대간에는 세 개의 삼도봉이 있는데 그 하나가 이 삼도봉이며 다른 하나는 경상남도 거창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시 등 세 개의 도가 만나는 초점산 역시 삼도봉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하나가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북도 김천시 그리고 충청북도 영동군 등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개 도가 만나는 민주지산 바로 옆의 삼도봉(1178m)인데 아무래도 이 봉우리가 삼도봉의 원조일 것 같다.
어쨌든 이 삼도봉에서 시원스럽게 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불무장등 능선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반야봉이 지척이므로 수고스럽지만 잠시 반야봉에서 지리의 낙조를 바라보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걸음을 빨리하여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노루목을 지나고 잠시 임걸령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면서 피아골의 유래가 ‘피비린내’ 정도의 뜻이 아니라 직전(稷田) 즉 피농사를 짓는 밭고랑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이내 초소가 나오고 좌우측으로 케언이 있는 노고단 고개이다.
우리나라 전통에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 양육 그리고 무병장수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이 있는데 이를 ‘삼신할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삼신(三神)이 마고, 궁희, 소희 등 세 분을 이르는 말인데 이 노고단이 바로 이 할머니 중 마고 할머니를 모시는 제단이 있는 곳이다. 이는 신라 내물마립간 때 박제상이 쓴 ‘징심록 십오지’ 중 유일하게 남아 전해지는 ‘부도지(符都誌)’에 나오는 얘기로 63,000여년 전 파미르 고원에 마고성이 있었고 이 성의 성주가 마고할머니로서 마고할머니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궁희, 소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민족의 기원을 ‘마고 - 궁희 - 황궁 - 유인 - 한인 - 한웅 - 한검(단군)’으로 계승되었다고 쓰고 있다. 신라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 더! 이 곳은 신라시대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 올렸는데 지금은 노고단에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 와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서 제사를 올리던 곳은 노고단이며, 남악사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처럼 국가차원에서 제사를 올린 것은 신라 시조의 어머니를 모시는 남악사를 세워 민중차원의 성모신앙(무속신앙의 큰 흐름)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아진다는 것이다.
어쨌든 노고단에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호텔 같은 대피소가 있는데 아쉽게도 노고단하면 떠오르는 긴수염의 함태식님과 흰둥이 그리고 돌로 얼기설기 지어놓은 옛 대피소와 일제강점기 시절 52동이나 되었던 선교사 별장은 흔적도 없이 살아졌고 다만 뼈대만 앙상히 남은 교회 흔적만이 옛날을 추억하고 있다.
노고단에서 돌바닥을 걷는 무릎의 충격을 느끼며 내려오면 너른 주차장이 있는 성삼재이다. 말 그대로 성삼재(姓三岾)는 삼국시대에 각성바지 즉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이부(異父)형제인 3명의 장군이 지키던 수비 성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뱀사골이 시작되던 반선에서 이곳 성삼재를 거쳐 구례로 내려가는 옛 비상 군사도로가 1988년 경 확·포장되어 개통된 이래 수많은 관광객이나 등산객들을 실어 나르느라 이 부근의 생태계와 함께 몸살을 앓고 있다. 덕분(?)에 예전에는 화대종주 즉 화엄사와 대원사를 잇는 종주 코스가 산꾼들에게서는 로망으로 여겨졌는데 요사이는 성중종주 즉 성삼재~중산리 코스가 무박산행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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